설 교/이규왕목사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창 22:11-13)

미션(cmc) 2009. 3. 1. 07:26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

(창 22:11-13)


 

      (창 22:11-13)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컴퓨터의 발달로 인해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세상이 달라진 것 중에 하나는 옛날에는 관계 중심의 사회가 신용중심의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권력이나 돈이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만 맺으면 쉽게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에게 신용을 잃으면 가지고 있던 돈과 권력도 다 내어 놓아야만 하는 투명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음을 최근 국세청장의 사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신용을 잃어도 그처럼 피해가 크다면 하물며 하나님께 신용을 잃는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두 말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잘 믿는 줄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오늘 성경 말씀의 주인공 아브라함을 본받아 2009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다
1) 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 전도의 길이 열려지고
2)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무한한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아브라함이 받은 복
 아브라함은 본래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조상 대대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수 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여기서 ‘다른 신들’이라는 말은 갈대아 우르 지방의 사람들이 섬기던 태양신, 달신, 모래 폭풍의 신과 같은 갖가지 우상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생각 없이 조상들의 전통을 따라 75년을 살면서 우상을 숭배하였지만 아무런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에 받아 본적이 없는 특별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이었으며, 그 증거로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나이가 많아진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창 21: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아브람이 나이 백세에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열매가 한 번도 달린 적이 없는 과일 나무의 첫 열매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첫 열매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그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한 일이 무엇입니까? 고향 친척을 떠난 일입니까? 만일 그것이 공로가 된다면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다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았어야만 합니다.
 설령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무엇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이삭을 바꿀 정도로 가치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이 기다렸을 때 하나님께서 때가 되니 아들을 주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전혀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백세에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특별한 은혜와 축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물건만이 아니라 종교까지 외국에서 수입을 해왔습니다. 기독교는 물론 조상 대대로 믿어온 불교나 유교도 인도와 중국에서 수입한 외래 종교입니다.
 그러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 온 지는 불과 124여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 조상들도 아브라함의 가문처럼 하늘과 산과 바다를 가리지 않고 갖가지 우상을 숭배해 왔습니다.
 우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우상은 알고 보면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가상적인 신입니다.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을 나무나 돌이나 쇠붙이로 만들어 그 앞에 복을 달라고 제사를 드리고 비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복을 받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화를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도 살아있을 동안만 다른 사람에게 유익도 주고, 해도 줄 수 있지 죽어 시체가 되면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무슨 행복과 저주를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짓이며,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우상숭배가 얼마나 허무한 짓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발달된 현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불안하고 취직도 사업도 잘 되지 않게 되자 심지어 젊은 대학생들까지 점집에 줄을 서있는 모습은 장난삼아 하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가슴 아픈 모습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몰랐다면 오늘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와 같은 복을 주신 것은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샘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롬 4:23-24)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복의 근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오늘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복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와 같은 복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도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며 두려움 속에서 불안하게 살고 있을 것이며, 온갖 죄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고, 결국은 죽어 지옥에 가야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목사, 장로, 집사, 성도가 된 것도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인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
  군인 중에 가장 강한 특공대원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힘든 훈련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크게 쓰시기 위해 여러 가지 힘든 시험을 통해서 강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시험의 절정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장과 사업, 가족과 자녀, 이웃과의 관계에서 기쁨과 슬픔, 좋은 일과 가슴 아픈 일이 교차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복을 받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하신 땅에서 흉년을 만나 이리 저리 방황을 하고,
 2) 생명의 위협을 느껴 아내 사라를 누이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가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으며,
 3) 적자(嫡子) 이삭과 서자(庶子) 이스마엘의 문제로 사라와 하갈 간에 대립을 할 때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해 갈등을 하기도 하였고,
 4)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는 마음 아픈 일도 있었고
 5) 광야에서 양을 치는 유목민들에게 생명샘인 우물을 힘들여 팠으나 블레셋 사람들에게 탈취를 당하는 큰 손해를 보기도 하였습니다.

(창 21: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그러나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브엘세바에서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는 더 이상의 어려움이 없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보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어려움이 물러가고 이제는 편안하다고 할 그 때에 사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어려운 시험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려운 문제가 다 해결되고 이제는 편안하다고 마음을 놓아도 좋은 때에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창 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은 어떤 물건이나 사람의 질을 알아보기 위해 어려움에 처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하나님이 주신 외아들 이삭은 세상의 금은보화나 부귀권세보다 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내용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둘 중에 하나가 아니라, 또 다시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잃으면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창 1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기서 ‘사랑하는’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뜻할 때 사용된 말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을 나타낼 때 사용된 말이기도 합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또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제사 방법은 짐승을 태워 그 연기가 하늘에 올라가게 하는 제사로 완전히 태우는 동물제사처럼 이삭을 하나님께 송두리째 드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항상 만사형통한 은혜만을 주실 것이지 왜 크고 작은 시험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이 형통한 날은 물론 곤고한 날에도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아브라함이 이겨낸 시험
 아브라함의 믿음이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독특한 믿음이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시험도 아무나 이길 수 있는 평범한 시험이 아니라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시험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불합리한 요구였습니다. 그렇게 하시려면 차라리 이삭에게 정을 드리지 않게 주시지나 말 것이지 주시고 난 다음 사랑하는 줄 아시면서 아브라함의 손으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는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같은 하나님의 명령의 합리성을 논하기 전에 무조건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하고 이삭을 살려 둘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아브라함은 과연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이삭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이삭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신 근본 목적이 이삭의 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삭의 몸을 요구하셨을까요? 사람이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에 따라서 아브라함의 행동이 표현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사랑의 특성은 상대방을 의심하지 않으며, 비난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도 그와 같은 사랑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반문하거나 반항하거나 불순종하지 않고 묵묵히 순종한 것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를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2)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장소가 바뀐다고 해도 변하지 않았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고, 시작과 마침이 변함이 없었습니다.

(창 22:4-5)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지나간 삼일과 기다리는 삼일은 시간은 똑같지만 느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에 도착하는데는 삼일이나 걸렸습니다. 삼일 동안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3)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는 척하는 형식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창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만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칼로 내려 쳤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이삭의 몸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이삭 중에서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 마음을 읽으신 순간 아브라함을 불러 이삭을 해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우리의 믿음은 쇼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삭보다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님을 이미 하나님이 증거해 주셨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하시는 사랑은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독점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일 먼저 사랑하라는 최우선의 사랑인 것입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 이유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자만이 부모 형제와 이웃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에 겨우 턱걸이를 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세상에 누구보다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아온 사람입니다.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믿음의 순종, 백세가 되어도 아들을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고 인내하는 믿음의 모습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비로소 ‘이제야’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치 사과가 무르익어 그것을 따 먹을 수 있게 된 것처럼 성숙한 신앙은 순종할 수 없는 것까지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단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와 같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기뻐하시면서 넘치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22:16-17)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왜 이 말씀이 넘치는 축복이요 최상의 축복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그와 같은 복을 받음으로 인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 축복의 통로가 되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바로 그와 같이 넘치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자로 만드는 최종시험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후로 아브라함은 두 번 다시 시험을 받지 않고 일생을 마쳤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얼마나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방법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내가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통해서 검증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처럼 사람이 마음으로 믿으면 입으로 시인하고 몸으로 순종하고 헌신하고 희생이 동반되어지지만 마음으로 믿지 않게 되면 입으로 시인한다고 해도 행동이 따르지 않고 행동이 따른다고 해도 지속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계명과 규례와 법도를 명령하신 이유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사 순종의 여부를 보시기 위함이고, 더 나아가서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아시면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몰인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 하나님이 때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무엇을  요구하실 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까워하지 말고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생명을 드리는 것이 결과적으로 내게 축복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다면 아무리 어려운 시험일지라도 아브라함처럼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우리를 시험하여 넘어지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만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며 방법을 예비하여 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2009년 한해가 우리에게 긍정적이 될지 부정적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의 사람은 처한 상황만을 보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2009년이 과거 어느 때보다 어려운 해가 될 것이라고 예측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요구하실지라도 기쁨으로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이가 없음을 인정받는 이 시대의 아브라함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