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응답하시는 하나님(2) (에 7:7-10)

미션(cmc) 2009. 3. 19. 07:20

응답하시는 하나님(2)

(에 7:7-10)


 

(더 7: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더 7:8)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이르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하니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더 7:9)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더 7: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두 말할 것 없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도 때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세상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말에 의문이 들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약한 사람만 갖는 오해가 아니라 성경에서 믿음이 좋다는 시편 기자도 그러한 혼란에 빠져 장탄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악인들이 일평생 아무런 고통도 없이 건강하게 지내며, 교만을 목걸이로 삼고 폭력을 옷으로 삼고, 그들의 마음은 악을 토하고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그들이 남을 조롱하며 악한 말을 하고 거만을 피우며 은근히 남을 위협하는구나. 그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혀로 사람들에게 악담하나 언제나 편안한 생활을 하고 그들의 재산은 날로 늘어만 가는 것을 보면서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죄를 짓지 않은 것이 허사구나”
 우리가 매주일 차례로 살펴보는 에스더서의 주인공 에스더가 민족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였으나 티끌만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기도하였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최고의 것으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역시 정의가 완벽하게 구현되는 이상세계가 아니라 시편 기자와 같은 불의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에스더처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예수께서 직접 보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교회를 다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때와 방법이 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때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존귀해진 모르드개
 에스더가 위기에 처한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고 일사각오로 기도를 하고 왕에게 나아갔을 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이 에스더를 뜨겁게 사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에 5: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돈과 명예와 권세와 같은 외적인 변화는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내면의 변화는 인간의 의지로 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렘 24: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우리도 나를 높이시고, 채우시고, 살리는 외적인 변화를 구하기 전에 시편 기자처럼 무엇보다 먼저 나의 마음의 변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119:32)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하만이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받으며 제이인자로 군림하면서 사람들이 다 무릎을 꿇고 자기에게 절하였으나, 유독 모르드개 만이 무릎을 꿇어 절하지 않는다고 모르드개를 목매달겠다고 자기 집 마당에 오십 규빗 높이의 장대를 세웠습니다.
 모르드개가 날이 밝으면 죽게 될 위기 상황에서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낙심하지 않고 묵묵히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하만을 낮추시고 반대로 모르드개를 왕이 존귀히 여기는 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에 6:11) 하만이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모르드개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되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니라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한 사람만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이나 심지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까지 덩달아 미워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하만이었습니다.
 하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형제는 물론 원수까지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형제는 물론 원수까지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 사람도 하나님이 공들여 만드신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만일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그 손해는 내가 미워하는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미워하는 내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하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와 같은 역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계속됨을 믿고 어떤 위기를 만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르드개처럼 기도하는 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하고, 강력한 일이 없음을 깨닫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삼하 22:28)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시 18: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사 26:5)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2. 에스더의 두 번째 잔치
하만이 눈에 가시처럼 미워하는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이른 새벽 왕에게 찾아 갔다가 도리어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고 모르드개가 탄 말 고삐를 잡고 수산 성을 돌고난 하만은 마치 패잔병처럼 기가 죽어 집으로 돌아와서 지혜롭다는 부인과 친구들을 불러 모아 묘책을 찾았으나 아무 대안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준비하지 못한 하만은 궁중에서 급히 보낸 내시에게 이끌려 에스더가 베푼 두 번째 잔치에 억지로 끌려갔습니다.
(더 6:14) “그들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황제의 내시들이 와서 하만을 에스더에 잔치에 급히 데리고 갔다.”
 에스더의 두 번 째 잔치에 참석한 왕은 술을 마시면서 맛을 음미하기 보다는 에스더가 무슨 사연으로 잔치를 두 번 씩이나 베풀었으며, 마음에 소원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조바심이 나서 에스더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겠다고 세 번째로 공언을 하였습니다.
(에 7:2)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여기서 ‘물어 가로되’라는 말은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하후에로 왕이 에스더에게 거듭해서 묻는 것은 왕이 얼마나 간절히 알기를 원하는지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한자로 참을 ‘忍’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하고, 사람을 살린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만일 에스더가 왕이 묻지도 않았는데 하만의 목을 요구했다면 왕의 마음을 이처럼 조급하게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참았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1) 은혜를 구하는 에스더
 에스더는 왕에게 불의한 하만에 대해서 왕에게 직접 고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겸손하게 예의를 지키며 왕을 걱정하는 시심정으로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더 7: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가) 여기서 ‘왕의 목전에서 은혜’라는 말은 왕의 눈에 은총과 사랑을 받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에스더는 먼저 하만의 목이 아니라 왕의 마음을 구하였습니다.
 나) 다음 ‘왕이 좋게 여기시면’이라는 말은 자기주장이 아니라 왕이 선하고 바르게 여기는 것이 최우선이고 에스더가 원하는 것은 차선이라는 말로 자기 주장이 아니라 왕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다) 그 다음 ‘내 생명을,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는 말은 아하수에로 왕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에스더가 구한 것은 하만의 목이 아니라 하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위기에 놓여있는 동족의 목을 구했습니다.
 이처럼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구한 자신과 동족의 목숨조차도 결과적으로 왕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더 7: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하니’
 에스더는 만일 동족 유다 백성들이 돈을 받고 노비로 팔린다면 왕에게 손해가 없겠지만 이처럼 씨를 말려 죽이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노동력의 상실로 국익에 손해가 됨을 염려하는 말입니다.
 더구나 에스더는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하만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에스더였다면 무엇을 구하였을까요?

 2) 분노하는 아하수에로 왕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에게 들은 충격적인 소리는 지금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가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왕후 에스더와 그 동족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에스더와 동족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누군인가를 다그쳐 물었습니다.
(더 7:5)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말하여 이르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이는 하만의 음모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음을 뜻하며 또한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유다 민족을 몰살하겠다고 조소를 내린 사실에 대해서 왕은 잊어버리거나 무관심한 상태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더 이상 침묵하지 못하고 그가 바로 왕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하란임을 고발 하였습니다.
(더 7:6) ‘에스더가 이르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여기서 ‘대적’이란 고통을 가하는 자를 뜻하고 ‘원수’는 그와 같은 고통을 가하는 자를 뜻하며, ‘악한 하만’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왕이 신뢰하고 은총을 베푼 하만의 실체를 밝히 드러내는 말입니다.
 하만의 실체를 뒤늦게 알게 된 왕은 하만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며, 분노에 차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것은 왕이 하만의 불의에 대해서 벌을 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기도 하였습니다.
  (더 7: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왕은 뒤늦게 에스더를 통해서 지금까지 믿어왔던 하만의 거짓된 실체가 드러남으로  하만을 버리고 에스더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심한 것은 결코 우연(偶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3. 결정적인 하나님의 응답
 하만은 비로소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처럼 사태의 위급함을 깨닫고 비로소 에스더에게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만이 에스더에게 사정을 하려면 걸상 위에 기대어 있는 에스더에게 엎드려야만 하였습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말처럼 분노를 식히기 위해 후원에 나갔던 왕이 그 때 들어오다가 하만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하만이 왕후를 강간하려는 줄 오해하면서 하만의 운명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더 7:8)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이르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하니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만일 아하수에로 왕이 화가 나서 후원으로 나가 잠시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안고 일어섬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 순간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세밀한 하나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죽으면 죽으리라고 일사각오로 기도한 에스더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응답인 것입니다.
 그 때 왕을 보좌하던 내시 중에 한 사람이 왕에게 하만의 음모를 고발함으로 하만은 자기가 판 무덤에 자기가 묻히는 격으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운 오십 규빗 막대기에 하만이 달리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응답인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평소에 하만을 얼마나 총애하였습니까? 그러한 하만을 나무에 매달게 한 것은 무슨 감정이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만이 욕심을 품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미움과 시기와 탐욕을 씨 뿌렸기 때문에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처럼 자기가 뿌린 죄악의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목숨 건 에스더의 기도에 대한 결정적인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더 7: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아하수에로 왕은 분노는 하만을 목매단 후에 비로소 꺼진 것처럼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분노를 잠재우는 것은 오직 회개하는 것이며, 회개치 않는 자는 하만처럼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 역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원칙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불공평하신 분처럼 오해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불신자들의 눈에는 무능한 신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역사의 주권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게는 반드시 원칙이 있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하만과 정반대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바로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하만이 아말렉 사람으로 페르시아 제국에서 왕의 총애를 받아 이인자가 되었던 것처럼 요셉고 히브리 사람으로 애굽의 보디발의 가정에 팔려가서 여주인을 강간하려고 했다는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감으로 오히려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만은 이인자가 되어 교만하다가 약자를 짓밟으려다가 자기가 죽임을 당했으나 요셉은 총리가 되어 흉년을 만나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고, 자기를 미워하던 형제들을 살림으로 비록 장자가 아니었으나 장자와 같이 배가의 복을 받아 두 아들이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창 49: 22, 25)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은 왕이 되지 못하면 이인자라도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의 심판자는 사람이 아니라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그 분은 조금도 불의함이 없으신 심판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이 나라와 민족과 개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공과 실패는 높고 낮고, 많고 적음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내가 그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며, 더 좋고 많은 결실을 내 자식과 후손을 위해 준비하시는 기간인 것입니다.
 라면을 먹으려면 3 분이면 가능하지만 고급 불란서 요리를 먹으려면 무려 3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요리를 원하십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에스더처럼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가 급하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한대로 즉각 다 응답하신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주권자나 심판자가 아니라 우리의 하인이 아닙니까?
 아무리 억울하고 힘이 들어도 아무리 고민을 하고 머리를 굴려보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내가 원하는 답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다고 낙심하지 말고 인내함으로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고 심판이신 하나님께 대들지 말고, 묵묵히 순종하여야 합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시고 공정한 심판이신 일시적으로 악인이 형통하는 것 같아도 웃자란 갈대나 억새풀은 쥐불놀이 때 다 태워져 버리는 것처럼 때가 되면 심판을 하시고야 맙니다. 정반대로 일시적으로 의인이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악인의 편이 아니심을 믿고 기도하고 순종하고 최선을 다하고 선행을 실천하기만 하면 역사의 심판이신 하나님은 반드시 모르드개처럼 요셉처럼 가장 좋은 것으로, 내가 심은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더 많이 거두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 주신답니다.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