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轉禍爲福)
(에 9:25-28)
(에 9:25)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왕이 조서를 내려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던 악한 꾀를 그의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의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하였으므로”(에 9:26)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에 9:27) “뜻을 정하고 자기들과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하고 정해 놓은 때 이 두 날을 이어서 지켜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에 9:28) “각 지방,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기념하게 하였더라”
인간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는 것이나, 할 수 있는 것이 각 사람마다 다 다르며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한계 상황에 이르게 되면 절망하고, 낙심하고, 자포자기하고 심지어 자살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도리어 그 어려움을 통해 기도하고 인내하고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흔히 전화위복이라고 합니다.
그와 같은 전화위복의 축복을 받은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그와 같은 전화위복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살펴보고 있는 에스더서 가운데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유다 백성들이 받은 전화위복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축복을 주셨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 우리 모두 믿음으로 그와 같은 전화위복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이 다 되기 바랍니다.
1. 역사가 뒤바뀐 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일본과의 경기만은 목숨 걸고 이기려는 이유는 일본과의 과거사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와 같은 과거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백여년간의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종식하고 자유와 해방을 얻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을 할 때 유달리 길을 막는 민족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서의 자손인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창 36:12)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득불 아말렉 족속과 일전을 벌릴 수밖에 없었는데 최일선에서는 여호수아가 맞서 싸우고, 후방에서는 모세가 손을 들어 기도할 때 모세의 손이 내려오게 되면 이스라엘이 패하고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출 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아말렉 족속에 대하여 (출 17: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을 때 하나님은 아말렉 족속을 멸하라고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이를 거역하고 아말렉의 왕을 살려두었기 때문에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삼상 28: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 족속은 그 같은 악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말렉 족속인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을 빙자하여 아달월 십삼일이 오면 유다 자손을 다 멸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하만이 내린 조서 때문에 동족이 몰살할 위기에 처했음을 고하고 눈물로 구원을 요청하였을 때 왕은 유다 백성들을 겨우 구원한 것만이 아니라 유다 백성들이 자위권을 발동하여 무장을 하여 대적들을 죽이고, 재산을 탈취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림으로 인생 역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에 8:11)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그 결과 유다 인을 전멸하기로 한 아달월 십삼일은 정반대로 유다 인을 죽이려던 원수들이 죽임을 당하는 날로 역전이 되었습니다.
(에 9:1) “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
여기서 ‘미워하는 자’라는 말은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는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현재 진행형이며, ‘제거하기를’이라는 말은 압제를 뜻하는 말입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만일 원수들이 목숨 걸고 대항하며 폭동이라도 일으킨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요청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형적으로 볼 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약소국이었고 전쟁에 대한 경험도 없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대적들에게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 2:25) ‘오늘부터 내가 온 세상 사람들이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도록 하겠다. 그들이 너희 소식을 듣고 떨며 불안해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지도자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난공불락의 여리고를 정복하고 전쟁 경험이 풍부한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수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을 진격하였을 때 두려워 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이었습니다.
(수 2: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죽이려고 했던 대적들의 마음에 그 같은 두려움을 주셨습니다.
(에 9:2) “유다인들이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 각 읍에 모여 자기들을 해하고자 한 자를 죽이려 하니 모든 민족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능히 막을 자가 없고”
여기서 ‘두려워하여’라는 말은 겁을 먹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의 강력한 두려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페르시아 전 지역에 유다 백성들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을 색출하기 위해서는 각 지방에 관리들의 도움이 절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관리들의 마음에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심으로 유다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에 9:3) “각 지방 모든 지방관과 대신들과 총독들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이 모르드개를 두려워하므로 다 유다인을 도우니”
여기서 ‘유다인을 도우니’라는 말의 어원은 ‘들어올리다’는 뜻으로 이전에는 내려다 보며 멸시를 하였던 페르시아 지방과 왕궁의 관리들이 이제는 총리가 된 모르드개와 더불어 유다 백성들을 높이 올려다보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일을 총지휘하는 모르드개의 위상을 높여 주심으로 유다인들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심으로 유다 백성들이 모든 대적들을 손쉽게 멸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에 9:4) “모르드개가 왕궁에서 존귀하여 점점 창대하매 이 사람 모르드개의 명성이 각 지방에 퍼지더라”
그러므로 하만의 생전에는 아달월 십삼일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초상 치루는 날이었으나 전화위복케 하시는 하나님이 배후에서 도우심으로 원수들이 죽음을 당하는 날로 역사가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2. 원수들의 죽음
하나님께서 아달월 십삼일에 역사가 뒤바뀌게 하심으로 많은 대적들이 죽임을 당하는 가운데 왕궁이 있는 수산 도성에서 오백 명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수산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그동안 하만과 더불어 유다 백성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던 한 패거리들로 불의한 자와 동조한 자들이 대궐에 있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 9:5) “유다인이 칼로 그 모든 대적들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하고”(에 9:6) “유다인이 또 도성 수산에서 오백 명을 죽이고 진멸하고”
수산 도성만이 아니라 전국 각 지방에 조서를 내려 유다 백성들을 멸하려고 하였던 원수들을 멸하라는 조서대로 차질이 없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하루를 더 연장해달라고 청하여 수산 도성에 있는 원수들의 잔당 삼백명과 하만의 아들 열 명의 목을 하만처럼 나무에 매달았으며 도합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였습니다.
(에 9:16)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이는 과거 하만이 유다 백성들을 멸하려고 했던 그대로 대적들이 보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아달월 십삼일 유다 백성들이 죽이기로 작정했던 날에 도리어 유다 백성들을 죽이려 했던 대적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한 것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더 3:13)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하만은 유다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라고 하였으나 모르드개는 원수들의 재산은 탈취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로써 자신의 권세와 재산과 아들들을 자랑하던 하만의 소유는 다 잃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백성들을 죽이려고 했던 하만이나 하만과 그 아들들과 원수들을 죽인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유다 백성들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어느 한쪽이 죽느냐? 죽이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결국 유다 백성들의 승리로 돌아간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몇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에 9:16)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1) 하만과 모르드개의 차이는 먼저 그 동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만은 아무런 죄가 없는 유다 백성들을 일방적으로 몰살 하려는 목적이었지만 모르드개는 자기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방어 차원에서 한 것으로 분명히 동기가 다릅니다.
2) 하만은 바벨론에 잔류하고 있는 약 70여만 명이나 되는 전 유다 백성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대학살을 계획하였으나 유다 백성들은 그에 비하면 십 분에 일에 불과한 대적들을 선별하여 죽인 것처럼 내용이 다릅니다.
3) 하만은 유다 백성들의 목숨만이 아니라 재물과 목숨을 동시에 빼앗기 위한 무자비한 살인이었으나 모르드개는 원수들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재물을 목적으로 한 치사한 살인이 아니라 원수에 대한 정당방위로 목적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이 하만과 그 일당을 이처럼 심판하신 것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시며, 불의가 잡초처럼 일시적으로 득세를 하는 것 같지만 늦가을에 불태워지는 억새처럼 반드시 심판을 당한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상 8:32, 개정)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
아울러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나라에 포로가 되기도 하고, 장기간 동안 노예 생활을 할 때도 있으나, 그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 소리를 들으시고 악인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우심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소 어려움이 있고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인생의 후반전까지 인내할 때 악인의 성공은 지는 해와 같지만 의인의 승리는 아침에 돋는 해와 같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잠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보이는 현실이나 어떤 결과물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잘 이해가 되지 않으나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자비로움을 무조건 신뢰하기 때문에 잘 납득이 가지 않는 현실에서도 인내하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히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3. 새로운 명절 부림절
사람마다 태어난 생일이 있고 가정마다 결혼이나 회갑 같은 잔치 날이 있고 나라마다 온 국민이 함께 기뻐하는 경축일이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해마다 전 국민이 함께 모여 성대하게 치루는 전통적인 명절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 명절이 바로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농사하여 첫 소득을 얻은 것을 감사하는 초실절과 일년의 농사를 마치고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수장절입니다.
구태어 명절을 정하는 이유는 자손 대대로 그것을 잊지 않고 기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손 대대로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새로운 명절인 부림절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유다 백성들을 까닭없이 죽이려던 하만의 일당을 철저하게 심판한 후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그 날을 기념하여 부림일이라고 하고 자손 대대로 기념하게 하였습니다.
(에 9:28) “각 지방,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기념하게 하였더라”
여기서 ‘폐하지 않게’라는 말은 지나가다 사라지다 소멸하다는 뜻으로 일회성이 되지 않고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이 되면 자손들이 부림절을 기념하여 지키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에 9:21)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금식하며 부르짖었을 때 그것을 들어 주셨음을 자손 들이 기억 할 때 만일 위기에 처하게 되면 에스더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 9:31) “정한 기간에 이 부림일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가 명령한 바와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가 있음이더라”
그렇다면 해마다 부림절이 오면 어떻게 지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래 지킨 삼대 명절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위주였다면 부림절은 백성들이 모여 흥겹게 잔치를 베풀고 구원 받은 것을 감격하여 서로 선물을 나누고 특별히 구원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구제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에 9:22)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그 결과 하나님은 페르시아 제국을 크게 축복하심을 더욱 강성하여 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에 10:1) “아하수에로 왕이 그의 본토와 바다 섬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였더라”
이일을 주도한 모르드개는 더욱 자리를 높여 존귀한 자가 되게 만들어 주셨고 페르시아 제국의 이인자가 되게 하셨고 유다 백성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포로가 된 바벨론 땅에서 평안한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에 10:3)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여기서 ‘안위하였더라’는 말은 샬롬이라는 말로 평화와 복지와 번영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샬롬의 축복은 인간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결과이며, 성경에 나오는 3분의 2가 거의다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샬롬의 평화는 그 근원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샬롬을 약속하셨습니다.
(시 85:8)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이제 유다 백성들은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전화위복의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비결은 단 하나 위기를 만났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손대대로 부림절을 잊지 않고 해다다 성대히 지키고 있습니다. 부림절은 하나님의 통치와 기도의 힘과 찬양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절기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고, 하나님께서 원수의 손에서 이들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다.
이스라엘은 2천년간의 방랑생활을 끝내고 옛 유대땅에 유대국가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건국 직후부터 부림절을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부림 전날에는 에스더의 금식일이다. 바로 에스더가 유대인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 왕 앞으로 나가기 전 금식한 것을 기념한다. 금식이 끝나면 부림절 전야에 각 회당에서 마길라라는 두루마리로 된 에스더서를 읽는다. 에스더서에서 하만이란 이름이 나오면 온갖 도구와 몸짓을 이용해 요란한 소리를 낸다. 발을 구르기도 하고, 책상을 치기도 한다. 또한 요란한 소리를 내도록 고안된 도구를 이용해 요란스럽게 하기도 하고, 딱총을 이용해 폭음을 내기도 한다. 부림절이 되면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자를 구제하라"는 관습을 지켜 이웃에게 음식과 선물을 보내고 구제를 한다. 부림절에 여자 어린이는 왕비 에스더복장을, 남자 어린이는 모르드게나 하만의 복장을 한다. 유대 랍비들은 부림절 이날 만큼은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저주 받은 하만과 축복받은 모르드개를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술에 취하는 행동이 선으로 간주되는 날 이기도하다. 오늘날도 부림절이 되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틴간의 유혈분쟁 발발로 테러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어도, 하늘에선 헬기가 떠있고 거리엔 이중 삼중으로 중무장 경계를 펴면서라도 대형 퍼레이드가 있고 축제가 강행될 정도이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사노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어려움이 화를 만들면 설상가상이라 하고, 복이 되면 전화위복이라고 합니다.
때로 악인의 번성함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불신하거나 의인의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의심하고 원망 불평하고 두려워하는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롬 8:35, 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전화위복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한 유다 백성들을 전화위복케 하신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다 백성들을 살리셔서 2차 3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수 있는 터를 예비하는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부림절이 있다면 어느 날일까요? 그날은 바로 예수님이 원수들의 손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불의가 득세하고 성공하는 것 같이 보였으나,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단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이 아니겠습니까?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들에게 전화위복의 복을 받게 한 영적인 부림절입니다.
(고전 15:55-5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전화위복케 하신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각자 돌이켜 보면 그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고, 만일 그것을 깨달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역경을 만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림절을 기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큰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항상 기쁘게 사는 살아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좋은 날이 오게 하시고 전화위복의 복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확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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