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시험을 이기는 유일한 길(막 14:38-40)

미션(cmc) 2009. 4. 6. 07:04

시험을 이기는 유일한 길

(막 14:38-40)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막 14: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대륙을 오고가는 제트 여객기는 창공 높이 날기 때문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 보이지만 때로는 급격한 기류 변화로 기체가 요동하게 될 때 어김없이 비상벨트를 매라는 황급한 방송을 듣게 됩니다.
 하물며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정도의 차이일 뿐 인간이 사는 곳은  시험 환난이 없는 곳은 한 곳도 없고 모든 사람이 자기만은 예외이기를 바라지만 수고와 슬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한평생을 사자성어로 짤막하게 표현한다면 인생의 한평생은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은 육신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임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두루 찾고 있으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온갖 시험과 유혹을 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안은 오직 기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것은 우리에게 본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시험과 고난의 연속이었다면 그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고 예외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시험이 없기를 바라기 보다는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기필코 이겨야 하고,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그 비결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말씀이라면 시험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비결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예수님처럼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지막에는 최대의 적인 죽음과 맞싸워야만 할 때가 반드시 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죽음을 원수처럼 맞이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친구처럼 맞기도 합니다. 죽음을 원수처럼 맞이하는 사람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았을 때보다 더 고통으로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친구처럼 맞이하는 사람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통이 끝나고 죽음이후 살았을 때보다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이 삶이 제 각기 다른 것처럼 마지막 죽는 모습이나 장소도 제 각기 다르다면 죽는 모습을 통해서 그 사람을 용감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예화
 소크라테스는 기원전399년 청년들을 부패시키며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부정하고 색다른 신을 섬긴다는 청년 타락 죄와 신에 대한 불경죄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사형 집행일에 지인들이 동굴 감옥으로 면회하러 갔습니다. 사람들은 슬픔과 위로의 말을 하였으나 소크라테스는 “영혼은 존재하며 불멸한다”고 역설을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가져 오라고 하여 차분한 표정으로 독약을 마시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렸을 때 소크라테스는 “여보게,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자네가 대신 갚아주게”라고 말한 뒤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셨을까요? 예수님도 소크라테스처럼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셨을까요?
 당시 십자가는 죄인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무시무시한 사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한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지켜 드리거나 위로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팔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칠 것을 이미 다 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신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 것을  이미 예언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슥 13:7, 개정)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막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마저 버림을 당하고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십자가 고통을 홀로 당하셔야만 했을 때 예수님에게도 소크라테스와 같은 여유나 유모어가 있으셨나요? 아닙니다. 정반대로 놀라시고 슬퍼하시고 마음으로 심히 고민하시는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막 14:33,34)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여기서 ‘놀라시며’ 라는 말은 깜짝 놀라는 것이고, ‘슬퍼하사’ 라는 말은 매우 괴로워하시는 모습이고, ‘심히 고민하여’ 라는 말은 극도로 괴로워하거나 크게 슬퍼하는 모습의 현재형으로 예수님의 고통이 지속적이었음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게 되었을때 그처럼 깜짝 놀라고,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크게 슬퍼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두 손 두발이 쇠사슬에 묶여 지하 감방에 던져졌어도 하나님을 찬미하였으며, 수많은 성도들이 굶주린 맹수 앞에서, 불타오르는 장작더미나 끓는 기름 가마 앞에서 찬송을 부르며 당당하게 순교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들어왔습니다.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러나 정작 십자가를 지셔야 할 예수님에게서는그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처럼 두려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를 실망시킬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고, 예수님은 그 같은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2.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당하거나 아니면 미리 알았을 지라도 그것을 피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득불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경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것을 구약 성경의 예언을 통해 미리 아셨으며,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도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위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평소 자주 찾으시는 겟세마네 동산을  어두운 밤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의 평소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자 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가르치신 말씀과는 반대가 되는 기도처럼 생각됩니다.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마음은 기도하시기 전이나 기도하실 때나 여전히 고민과 슬픔으로 가득차서 하나님 아버지께 십자가 고난의 쓴 잔을 할 수 있으면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막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면 그 제자의 스승은 더 말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은 그것을 벗으려고 기도하시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바리새인이나 우리처럼 나는 못하면서 내 자녀나 제자에게 강요하는 모순을 범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구세주시라면 그러실 수 없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실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러한 모습을 보이신 것을 보고 성급하게 실망하기 전에 다른 어떤 깊은 뜻이 있으셨기 때문이 아닌지를 찾아보야 하지 않을까요?

 1) 예수님의 그 같은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더 많은 연민을 느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수없이 많은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몸은 우리의 육체와 달리 고통을 느끼지 못하거나 어떤 고통이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우특별한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도 우리들처럼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매를 맞으면 아픔을 느끼는 똑같은 육체와 마음을 가지신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2) 예수님이 두려워하고 고민하신 것은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었음을 뜻하는 몇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고통을 덜 느끼게 하는 쓸개 탄 포도주를 주었을 때 예수님은 그것조차 거절하신채 생생하게 모든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만일 고난을 피하시려고 했다면 당신의 무죄를 빌라도에게 한 마디만 시인하였어도 얼마든지 십자가를 지시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침묵으로 일관하신 것은 그래야만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고민하시고 슬퍼하신 것은 육신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는 것이 너무나 큰 고통이었지만 그것을 피하시지 않으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가장 고통스러워 하셨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한 몸에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실 수 없으시며,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고 외면을 당하시게 되는 영적인 소외감과 고독감이 예수님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요 슬픔이요 근심이요 두려움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한번도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거나 멀리하신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를 용납하시지 않고 반드시 죄를 벌해야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를 이어 받은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으며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야만 하였는데 예수님이 그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예수님의 고통을 면하게 하시거나 살리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육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큰 불행이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부모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 아버지를 그렇게 애타게 찾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마치 외면하시는 것처럼 하늘에 해를 어둡게 하여 세상을 캄캄하게 하신 일입니다.
(눅 23: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그러므로 예수님이 고민하며 슬퍼하며 피하시기 원하셨던 쓴잔이 바로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너무나 고민이 되어 어두운 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들의 기도처럼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큰 두려움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요 죄 없으신 예수님이 마치 구약 시대의 제물처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시는 것만이 인류의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을 수 있는 길만이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이라면 그 뜻을 따르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아울러 하신 것입니다.
(막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이것을 가리켜 시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두려움과 고민과 슬픈 마음을 갖게 하여 할 수 있으면 그것을 피하도록 유혹을 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를 원하시고 그 중간 사이에서 고민하고 슬퍼하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상태가 바로 시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시험을 당하실 때 그 심정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정직하게 사실대로 마음에 숨김이 없이 기도로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간절히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 예수님의 그 같은 모습을 보시고 너무나 안타까워 십자가를 피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실 수 있도록 천사를 보내어 기도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도로 승리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눅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그 같은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셨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 방울이 피방울이 되기까지 세 번씩이나 거듭하여 기도하신 모습입니다.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3. 시험에서 패배한 제자들
  예수님에게 가장 큰 시험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십자가를지지 말아야 할 것이냐 아니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냐 하는 갈림길이라면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본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으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그물과 부모형제를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정권을 뒤엎고 새로운 지도자가 되면 자기들도 출세하고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유일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막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 일을 위해서라면 예수님과 생사를 같이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설령 다른 사람은 고난이 두려워 주님을 버리고 떠날지라도 나만은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사각오를 다짐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쓴잔을 마시는 제자가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세상의 높은 자리와 비교가 되지 않는 영원한 영광에 자리에 이를 수 있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20: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러나 제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오해하여 결국은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을 주님이 아시고 미리 경고하여 주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것을 원치 않았으나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단이 제자들을 내버려 둘리가 없었습니다.
 이미 구약 성경에서 사단이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음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이를 위해 제자들을 겟세마네로 함께 데리고 가셔서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마 26: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도 닥쳐 올 시험을 대비하여 기도하셨다면 연약하기 그지없는 제자들이야말로 기도하는 것 외에는 시험을 이길 힘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로 시험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허세를 부리며 큰 소리만 쳤지 정작 기도하는 일은 소홀히 하였습니다.
(막 14: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이 그들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함께 데리고 가셔서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으나 제자들은 육신의 피곤함에 젖어 깊이 잠이 든 채 기도하지 않음으로 예수님을 더욱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막 14: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이 시험이 임박해 오는데도 기도하지 않고 잠에 취한 베드로를 깨우시면서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안타까워하신 주님의 모습을 상상해 볼 때 그 주님이 지금도 나를 그렇게 깨우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막 14: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이는 마치 평소에 놀기만 좋아하는 아이가 학기말 고사가 내일이기 때문에 하루 밤만이라도 밤을 새워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책상 앞에 계속 졸거나 5분만 10분만 핑계하면서 날이 밝도록 깊이 잠에 빠진 아이를 흔들어 깨워 본 적이 있는 부모라면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십분 이해 될 것입니다.
 큰 시험을 앞두고도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은 시험을 당했을 때 예수님이 경고하신 대로 세 번씩이나 부인을 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서 결국 예수님을 만나기전 옛 생활로 되돌아가는 패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사단이 얼마나 신이 나서 좋아했을까요? 그 때 주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큰 시험을 앞둔 예수님은 제자들과 달리 기도에 승리하심으로 원수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오는 것을 아시면서 피하지 않으시고 담대하게 맞서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사단을 까부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를 다 완성하시는 승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막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요 19:30)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와 같은 예수님의 승리의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에덴동산에서부터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기까지 시내산, 갈보리산 여러 동산이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부족함이 없는 지상 낙원 에덴동산에서 감사하지 않고 자족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은 뱀의 시험과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반역함으로 그와 후손인 모든 인류를 불행하게 만든 죄의 원조요, 불행의 통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은 올리브 열매를 찧어 기름을 짜는 기름틀이라는 별명을 가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갖 시험을 당하셨으나 땀이 피 방울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시고 복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의 반역이 인간에게 사망의 지배를 가져다 준 것을(창 3:1-19)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둘째 아담의 순종으로 인류의 불행을 행복으로 죽음을 영생으로 범죄를 사죄로 불행을 행복으로 역전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주일(Palm Sunday)은 예수에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셨을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잎사귀를 사용한 데서 유래되었습니다(요 12 :13).
 '고난주간'으로 알려진 십자가의 주간은 종려주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 주일인 부활주일에 끝났는데, 이 기간이 구세주에게는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린 너무나 슬프고 괴로운 한 주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 에워싸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으나, 그는 지나치게 의기양양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날의 "호산나" 소리가 머지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로 바뀌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고난이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금요일이 고난의 절정으로 온 교회가 고난절로 지키되 금식을 하며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주간이 끝나는 주일이 바로 기독교의 대명절인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와 같은 시험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는지 그 비결을 묻는다면 그 답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가장 큰 축복은  죄를 다 사함 받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성령께서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시험하던 사단은 오늘 우리를 부단히 시험하기 때문에 그 시험을 이겨야만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직 깨어 기도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오늘의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감람나무 열매처럼 짓이겨져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신 값으로 사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영혼을 시험에서 이기게 하는 도피성만이 아니라, 사단의 시험과 맞싸워 예수님처럼 능히 이기는 산성이요, 요새임을 잊지 말고 우리 모두 함께 모여 깨어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사 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