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빈 신 학

칼빈의 개혁신학

미션(cmc) 2009. 10. 25. 06:41

칼빈의 개혁신학

황재범

“주의 만찬 해석”에 관하여 루터와 쯔빙글리 견해 차이는 지역적으로도 각기 다른 영향력을 보였는데, 루터는 독일 북쪽, 쯔빙글리는 스위스 남부 독일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이 둘 사이에 마틴 부터는 중재자 입장에서 조정을 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1959년 “쮜리히 합의”에 대해 남부 독일과 스위스의 지도자들이 받아드리는데, 요한 칼빈도 이에 속한다. 부처의 영향을 받은 요한 칼빈 신학은 스위스와 독일의 넓은 지역에서 지지를 받았다. 결국 부처는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재에 실패를 하고, 독일에서 개혁은 실패했지만 요한 칼빈이 개혁신학의 올바르게 이룩해야 할 책임을 맡게 되었다.

요한 칼빈은 일찍이 인문주의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한 때는 인문주의자인 알키아티와 보수주의자인 드 레스뜨왈의 분쟁에서 “안타폴로기아”란 서문으로 알키아티를 반대하였다. 그렇다고 인무주의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세네카의 “자비에 관하여”에 관하여 주석을 함으로 인무주의자들에게 관심을 끌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칼빈 사상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칼빈의 회심일자는 정확하게 모르나 1533년과 1534년 사이에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했고, 곧바로 이 경험에 따라서 “교황주의 우상”을 버리게 되었다. 그는 “싸이코파니카아”를 완성했는데, 이 글에서 칼빈은 기독교인들의 영혼이 죽음 이후로 잠자는 상태에서 최후의 부활을 기다린다고 하는 일부 재세례주의자들의 이론을 논박하였다.

칼빈은 바젤에서 1535년도에는 “기독교 강요”의 서문을 써놓았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상당수의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눈길을 즉각적으로 끌어드리는 계기를 가져왔다. 특히 제네바의 종교개혁 지도자인 “구이욤 파렐”이 칼빈에게 종교개혁의 고삐를 당겨 달라고 부탁을 하였으나 칼빈은 거부를 한다. 그러나 강력하게 요구하는 파렐의 요청에 의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1935년부터 시작된 “강요”가 1559년도에 최종판으로 마무리를 한다. “강요”는 각종 논쟁들에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판을 거듭했음을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칼빈의 신학이 발전했음을 알게 된다. 1559년에 이르러서 “강요”는 개혁신학을 조직적으로 해석했는데, 로마 가톨릭뿐만 아니라 루터파, 재세례파, 반삼위일체까지도 반대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개신교 신앙에 대한 조직적인 해석을 이룬 이 책은 개혁전통의 근본문서로 성장했으며 칼빈신학을 연구하는 주된 자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지식

칼빈은 “강요”의 첫머리에서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두 종류, 즉 신지식과 인간 자신에 관한 지식이라고 강조하면서 시작한다. 자아에 대한 참 지식은 우리의 절망과 불합당함을 발견케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시켜 준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논할 때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태도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를 더 강조한다.

요한 칼빈은 “그러므로 내가 알기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인식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적합하며,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며, 요약하면, 하나님을 앎으로써 인간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리고 또 다른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창조자와 피조자 사이의 현격한 거리를 말한다. 하나니은 무한하신 데 반해서 우리는 죄인이며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으로 알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대로, 주로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함을 뜻한다.

하나님이 그 본질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계시한다면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기 때문에 알 수 없기 때문에 계시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인간 수준으로 낮추어 계시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을 통한 계시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증명할 만한 것들이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이것을 충족하기에는 성령의 내적 증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성경으로 이끌어 주지 않으면,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주지 않으면 배격해야 옳다.

성경의 영적 해석이란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는 뜻이다.

성경은 모든 우상숭배와 “교황청의 미신”, 즉 성상숭배 등을 정죄한다.

칼빈은 성경적 근거한 분명한 것만 인정을 하는데, 여기서 예배의 음악, 심지어는 시편의 찬양까지도 배격한다. 그래서 개혁전통은 루터파나 가톨릭교회보다 기독교 예술이나, 그림이나 음악에서 훨씬 빈약한 편이다.

칼빈은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적이란 입장은 전통적, 정통적 신학과 같은 맥락을 하고 있다. 칼빈 역시 삼위일체 용어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을 하지만, 성경의 이론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꼭 지켜야할 사항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 세상, 인간

참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자신을 계시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모든 우상을 구별할 수 있게 하셨다. 창조사에서 최종적이고 절정은 아담이지만 최상위급 피조물은 아니다. 그 위에 천사가 있는데 모세가 천사에 대하여 깊게 다루지 않는 것은 인간보다 차원 높은 존재지만 숭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사가 우리들과 교제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 가능하므로 우리는 천사의 지식에 전념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식에 더욱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칼빈은 천사보다 마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마귀에 대한 지식과 마귀의 행동양식을 아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중요하고, 둘째는 악마와 그 군대에 관한 질문,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님의 의지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예정이라는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귀는 본성상 악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의 죄악 된 타락에 의해서 악하게 된다. 단지 사람들은 마귀들의 계락에 빠지지 않도록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인간 창조는 몸과 영으로 이루어졌다. 칼빈은 영을 “최선의 부분”이라고 부르고, 창조되었으나 불멸하다고 본다. 이것은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반대해서 강조한 부분인데, 세르베투스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숨을 불어 넣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담에게 들어 간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영혼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몸에 있다기 보다는 영혼에 있다. 칼빈은 “형상”(image)과 모습(likeness)의 구별을 배격하면서 이것은 동일한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고 했다.

아담은 타락 이후에 신적인 형상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심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남아 있다고 해도 소름끼칠 정도로 왜곡되어 있다. 인간의 이러한 부패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함을 보여준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물은 하나님의 통치와 행동 아래서 발생하는데, 모든 개별적인 사건에도 일일이 간섭하심이 포함된다. 하나님의 간섭은 섭리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미리 아심이 아니고 현실적인 모든 사건을 실제적으로 생산하심을 뜻한다. 칼빈은 사물의 내적 필요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믿기 때문에 운명론이 아니라고 한다.

섭리의 유용성은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인내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악도 하나님의 영광과 정의를 위해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섭리와 예정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논하면서 다룬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구원해 주셨음을 깨달은 사람이 감사하는 신앙의 견지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상태

칼빈은 인간의 모든 지혜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아는데 있다고 했다. 인간은 타락한 자신을 아는데, 이렇게 타락한 인간의 절망과 부족함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된다고 했다.

인간 타락의 원조인 아담은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뱀에게 귀를 기울였던 의심의 죄였다. 그 결과 아담의 본래 모습이 상실되고 후손에 까지 유전되었다. 원죄의 전달은 감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아담의 자손이라는 그 사실에 있다. 더욱이 아담의 죄책감과 더불어 우리 안에 죄를 더 많이 불러일으키는 죄까지도 전달된다. 이것이 칼빈이 강조하는 자연인의 타락이론이다. 이것은 타락으로 인해서 초자연적인 은사(신앙과 본래적인 완결한 모습)는 상실되었고, 자연적인 은사(지성과 의지)는 부패해 버렸다.

인간 지성의 부패는 파괴된 상태는 아니지만 진리에 대한 추구마저도 교만과 환상으로 이끌고 있다. 이와 같이 타락 이후까지도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을 축복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오며, 그 가운데서 성령의 선물이 최우선적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만이 주실 수 있는 귀와 마음을 통해서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이, 흔히 말하는 “자연법”이 어느 정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할지라도 우리의 현재적 상태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지 못하다. 하나님의 계시된 법이 없으면 자연법으로는 하나님을 알기에 불충분하다.

의지도 또한 부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에 여전히 젖어 있지만, 그것은 모든 동물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자연적인 취향”(natural appedte)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죄에 묶여 있으므로 하나님을 진실로 찾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의 속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의지도 또한 죄에 매여 있어서 선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선에 따라서 살 수도 없다. 이렇게 선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로의 회심의 시작인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리고 있다.

율법의 기능

칼빈은 “율법”에 대한 견해는 이러하다.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책”과 구약성경 전반을 통해서 나타내 주신 계시를 뜻한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항상 지속적인 것이다. 그 내용은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이다. 제사법도 예수 그리스도가 내용이며 목적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든 제사도 무효일 뿐이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연속성이 있는데 구약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인데 신약성경은 이 약속의 실현에 대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점이 있는데 아래의 표와 같다.

칼빈은 이와 같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복음이 연속성이 있다고 인정하는데 그것은 약속과 성취라는 것으로 묶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칼빈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의 견해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단일한 한 위격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되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는데 본질의 혼합에 의하지 않고 위격의 통합에 의해서였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정통 신학을 따른다.

칼빈의 기독론에서 중요하게 인정되는 3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이단으로부터 전통교리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정확하게 제시하고, 비전통적인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3중직(왕 ? 선지자 ? 제사장) 개념을 개혁신학에서 일반화 시켰다.

셋째로,그의 본체적 연합 이해는 그리스도가 주의 만찬에 임재 했다는 입장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칼빈은 성육신의 목적이 인간 구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에 있다고 한 당시의 왜곡된 성육신의 해석에 대하여 반격하며, 그리스도는 인간 구속을 위해서 성육신했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기독론은 주로 논쟁 상대에 대한 대항으로 강화되었는데, 메노 시몬스와 재세례주의자들, 세르베투스, 오시안더 등이 그들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하였으며 위격의 통일성과 속성의 교류보다는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의 구별을 더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는 오로지 인간성에 의해서만 중재라고 주장했던 프란체스코 스탄카와 반대의 입장을 가진 오시안더의 견해를 반대하면서 구속의 사역이 본체적 연합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위격의 연합에 기인하며, 한 본성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본성에 기인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선지자, 왕, 제사장의 세 가지의 직능의 개념을 세웠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름부음 받음”이 있는데, 위의 3가지 직능을 가진 사람이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다.

칼빈의 기독론의 주된 특징은 신성과 인성의 혼돈을 피하려는 끊임없는 관심이다. 그는 쯔빙글리처럼 루터가 속성의 교류를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의 편재로 이해해서 제단 위에도 임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엇다. 신성의 편재는 그리스도의 몸에까지 연결될 수 없으므로 동시에 하늘과 여러 제단에 임재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삼위일체의 제2위의 신성이 예수 안에 완저하게 임재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인성에 의해서 둘러싸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하강은 예수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하늘에도 있을 수 있는 그런 것이므로 동정녀의 자궁으로부터 탄생하시면서도 우주 전체에 가득 차 있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후기 신학자들이 칼빈주의적 초월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개혁파 기독론의 특징적인 강조사항이 되었다.

칼빈의 기독론을 요약하면, 엄격한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보다는 안디옥 학파에 좀더 기울였으며,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면보다는 구원론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속과 의인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동시에 만족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을 공로로 안겨다 주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효과적으로 임하는 것은 아닌데 이것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이며 작용이 있어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며 성령의 주된 사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갖게 하는 그 이상 다른 것이 아니다. 칼빈이 규정하는 신앙의 본성은 “신앙이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자애에 대한 확고한 어떤 지식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약속의 진리를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되며 또한 인치신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앙에 대한 올바른 정의이다”

신앙은 명확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신앙이 “확고한 어떤 지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과 육의 싸움, 신앙에 위배되는 의심과의 싸움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시낭을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전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 신앙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 즉 그리스도 그 자신에 대한 것이며 또한 성령이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 새겨 놓은 것에 근거해 있다.

칼빈은 개신교의 신앙에 의한 의인론(義認論)를 고수하였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죄인을 객관적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의인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

의인은 행위에 의인이 아니라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음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고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가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혜택을 베풀어서 받아들여 주심을 뜻한다고 간단하게 설명 할 수 있다. 그리고 의인은 죄의 사면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고 덧붙여서 말한다.

이것이 신앙의 참되며 유일한 기능이다. 신앙의 역할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서 그리스도의의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가되는 것을 말한다. 신앙에 의한 의인론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없으면 참된 종교가 이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을 분리시키는 거리감, 인간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필요성 등에 대한 주장이 칼빈신학의 전반에 흐르는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에 의한 의인은 또 다시 죄의 구덩이에서 헤매고 다녀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의롭게 된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여전히 죄인이며,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적으로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의롭게 된 기독교인은 그의 의인의 열매를 보여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강요”의 “기독교인의 삶에 관한 논문”의 핵심이며, 강요에 대한 별쇄본으로 확대해서 거듭 출판되었던 것이다.

의롭게 된 죄인이라고 해서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의인의 행위는 또한 중생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창조하신다. 중생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신자들 안에 죄로 인해서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점진적으로 새롭게 창되는데, 이러한 일이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들은 의인의 표상이며 결과일 뿐이다.

기독교인의 삶의 근본적인 규범은,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주인이 아니고 주님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부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 복종해서 자신의 듯에 따라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하며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함을 뜻한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사물을 사용하는데 있어 근본적인 4개이 규범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첫째로 자신이 사용하는 사물 안에서 창조자를 보면서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이 세상 재화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가난을 극복하고 견미며 풍성할 때에 절제할 준비를 하면서 사용해야 한다. 셋째로,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서 언젠가는 계산할 때가 잇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르심을 고려하면서, 즉 하나님이 자신의 삶 속에 맡겨 놓은 기능을 찾으며 사물의 올바른 이용은 그 기능에 맞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글은 http://lloydjones.org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