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담임 목사의 편지 #2

미션(cmc) 2010. 2. 2. 11:16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담임 목사의 편지 #2

 

8. 나를 밀어 주시는 손길

회복실을 나왔을 때 낯익은 가족들과 몇몇 교우들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취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상태로 비몽사몽간이었지만 대기실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수술이 끝나기만을 오래도록 기다리던 가족들과 몇몇 교우들이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수술받기 위해 왔던 길을 따라 다시 병실로 되돌아가는 길은 별관으로 가는 긴 통로를 거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가야만 하였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잠을 자면 안 된다고 해서 억지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애를 쓰던 중 나는 수술을 받으러 올 때처럼 여전히 누워 있었지만 마스크를 한 병원 직원이 묵묵히 나를 밀어 병실까지 밀어 주었음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문득 나의 지난날이 내 힘만으로 걸어 온 길이 아니라, 때로는 내가 힘들고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주님은 나의 등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나를 밀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내 힘으로 세상을 살아온 줄 착각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감사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9. 사랑하는 가족들

병실에 돌아왔을 때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몇 분 장로님과 교우들, 사랑하는 가족들이 나를 맞이하면서 수술을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왜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는지를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당연히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질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버팀목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라고 해서 늘 함께 붙어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군목으로 멀리 삼척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없는 아들네 손녀, 손자들처럼 자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사랑하는 사람인지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알 수 있습니다. 만사를 제쳐 놓고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염려하며 기도해 주고, 먼 길을 달려 찾아와서 위로 해 주는 버팀목 노릇을 해주는 사람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1) 사랑하는 아들과 손녀와 손자들

지난 연말 군목인 큰 아들이 근무지를 경기도 고양에서 강원도 삼척으로 옮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어린 손녀와 손자들이 전학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삼척으로 이사를 끝낸 후 전화를 걸어서 “고양이 더 좋으니? 삼척이 더 좋으니?”라고 물었더니 “삼척이 더 좋다”는 말에 안심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손주들이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술 담배도 안하시고 목사님이신데 왜 암에 걸렸어?”라고 묻더라는 말을 며느리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그럴 때 무엇이라고 답을 해야 어린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난감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손자들만이 아니라 교우들 가운데도 그 같은 의문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습니다.

수술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내가 병실로 오자 손녀와 손자들이 성공적인 수술을 축하하며 재롱을 부렸습니다. 하진이와 하람이는 지난 학교에서 반장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하람이는 전학 간다는 말에 담임선생님이 붙잡고 우시면서 이별을 슬퍼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2) 사랑하는 아내와 딸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는 빵만이 아니라 빵 사이의 두툼한 고기와 각종 야채를 끼운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두 아들 사이에 양념 딸을 주셨습니다.

사내아이들은 자라는 동안 속을 썩인 적이 있으나 딸은 누구를 닮았는지(?) 착할 뿐 아니라 매우 믿음이 좋더니 결국 목사 아내가 되었습니다. 사위는 성남에 있는 모교회의 부목사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사위 생각을 해서라도 우리 교회 부목사님들에게 잘 대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미안할 뿐입니다.

딸은 얼굴이 작아야 미인 취급을 받는 세상에서 날 닮아 둥글넓적한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깜짝 놀랄 일이 생기면 대부분 ‘엄마!’ 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법인데, 이상하게 우리 딸은 나를 많이 닮아서인지 열이면 열 번 영락없이 ‘아브지!’ 라고 소리칩니다.

우리 가족 중에서 기도를 제일 많이 하는 딸이지만 아빠가 암에 걸려서 수술을 받는다고 하는데도 단 한 번도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지 않는 것은 남편이 암에 걸렸다는데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엄마의 속내를 닮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0. 사랑하는 친구

암 수술을 받기로 확정한 후 모든 집회 약속을 다 취소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외부 연락도 중단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피차 안부를 묻는 중에 구구한 소리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직전 총회장인 최병남 목사님은 신학교 동창으로 친구이면서도 나이 차이가 많아서 형님이라고 부르는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매주 문자메일과 안부 전화를 자주 하는 사이입니다. 물론 나보다 항상 형님이 훨씬 더 많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다가 어제 입원을 하였을 때 통화 중에 자초지종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병원과 호실을 물어왔습니다. 그럴 것 같아서 늦게 연락을 취한 것입니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와서 고통스러운 몸으로 누워 있는 중에 최병남 목사님이 대전에서 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사십일 금식 기도를 두 세 번이나 하였고, 한 주간 금식 기도는 식은 죽 먹듯이 하는 기도의 대가로 내가 닮고 배워야 할 멘토이기도 합니다.

정말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 누구보다 나의 건강에 대해서 가장 많은 당부를 했었는데 암 수술을 받고 누워서 심방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은 마음씨가 다른 사람입니다.

 

10. 기나긴 고난의 밤

수술을 받는 환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정작 수술을 받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수술은 마취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환자는 깊은 잠에 빠져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술하는 동안 5시간 가까이 폐가 쉬고 있었기 때문에 마취에서 깨어나는 즉시 심호흡을 하여 폐를 복원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에서 가래를 뱉어내지 않으면 폐렴에 걸릴 위험이 있다고 해서, 수술 직후 채 아물지 않은 배를 붙잡고 가래를 뱉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동안 얼굴에 핏발이 서고 목이 쉴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 간호사가 찾아왔습니다. 가래 뱉는 고통이 너무 심하다고 호소하였더니 뜻밖에도 이미 가래를 녹여내는 주사를 투입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뱉으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과는 치료 방법이 많이 선진화된 것을 모르고 헛고생을 한 것입니다.

나에게 애써서 가래를 뱉지 않아도 된다는 복음을 들려준 간호사는 오히려 그보다 힘든 율법을 선포하고 갔습니다. 그것은 내 손 끝에 내가 호흡을 할 때마다 몸속에 산소 농도를 체크하는 모니터를 물리고 가면서 ‘만일 잠을 자게 되면 호흡이 약해지고 산소량이 적어지기 때문에 폐가 회복이 되지 못해서 폐렴에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6시간 동안 자지 말고 심호흡을 하라’는 것입니다.

벽시계를 보고 계산을 하니 최소한 새벽 4시까지는 자지 말고 계속 심호흡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밤이 점점 깊어갔습니다.

오전 8시 35분에 수술을 시작하여 회복실에서 나온 시간이 오후 2시 34분 이후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계속 잠이 쏟아지는데 폐렴에 걸리지 않으려면 심호흡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과 기나긴 싸움에 들어갔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졸게 되면 호흡이 약해져서 산소량이 85% 미만으로 내려갈 때마다 알람이 울려 댔으며 그 때마다 자지 않고 간병하는 아내가 나를 흔들어 ‘여보 내려가요!’ 할 때마다 또다시 깨어서 심호흡을 하지 않으면 점차 의식이 혼미해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 심호흡을 여러 번 하면 다시 산소가 93. 95, 97 로 점점 올라가 다시 정신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평소 건강할 때는 호흡을 하는지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코로 호흡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지를 미처 몰랐으나, 이제 보니 사람이 사는 것이 먹고 마시기 때문이 아니라 호흡 때문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 호흡은 본래 하나님이 불어 넣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숨을 쉬는지 의식하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건강만 있다면 충분한 감사의 조건인 것입니다.

(사 42: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시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나의 일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밤을 지새우는 동안 수시로 간호사가 순회를 하면서 혈압과 산소량을 체크하면서 ‘진통제가 조금씩 계속해서 주사와 더불어 들어가고 있지만, 너무 아프면 녹색 버튼을 누르면 진통제가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진정이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주 누르면 그만큼 회복이 늦어지고 가스가 더디 나온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이왕 환자의 고통과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얼마나 큰 가를 조금이라도 맛보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견디고 참았습니다.

물론 힘이 많이 들었지만 어느덧 정해진 새벽 4시가 지나면서 점차 호흡이 수월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심호흡을 하지 않아도 알람이 울리지 않을 정도가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잠에 빠져 들면서 수술과는 비교 되지 않는 고통의 긴 터널을 무사히 빠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못 믿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가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에게 고통을 피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게 하시고 또 고통 중에 참으라고 하시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고통 중에 기도하는 것은 마치 영적인 산소를 호흡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통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작은 고난입니다. 만일 그 같은 작은 고난을 참지 못하고 쉽게 사는 방법을 택하면 반드시 그 후에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더 큰 고난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맞서서 싸우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이길 힘을 주시며, 그것을 이길 때 더 큰 고통을 면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각자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라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피하게 하는 축복의 기회임을 깊이 느끼게 되있습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1.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업료

병상에서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고통이라는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업료는 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대신하여 지불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내가 고통스러울 때 곁을 지키는 아내가 나를 간호하지만 내 고통을 대신 할 수 없었습니다. 밤잠을 자지 않고 병실을 순행하면서 정 견디기 어려우면 참지 말고 언제든지 부르기만 하면 진통제(모르핀)를 주사해 주겠다고 하여 한번 진통제 주사를 맞았으나 혈압이 오르는 것처럼 어지럽고 멀미가 나서 고통을 호소했더니 곧 제거하여 주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수업료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폐활량을 높이기 위해 숨을 깊이 내쉬었다가 최대한 들여 마셔서 공을 두세 개 높이 올라가게 하는 숨쉬기 운동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침을 하거나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면 심하게 느껴지는 수술 부위의 고통과 막상 잠이 들어도 수술하기 위해 꺼내었다가 다시 쓸어 담은 창자가 제자리를 잡기 위해 뱀처럼 꿈틀 거리며 바늘로 찌르듯 하는 고통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하루에 3000cc 정도 투여하는 링거 주사액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나 수시로 소변이 나왔고 그 때마다 플라스틱 병에 담아 소변 양을 재서 매번마다 기록해야만 하는 번거로움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창자가 제자리를 잡게 되면 반드시 가스(방귀)가 배출되기 때문에 그 때 간호사에게 연락을 하면 비로소 물을 마실 수 있고 미음에서 시작하여 점차 식사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 아픈 몸을 이끌고 운동하기 위해 주렁주렁 주사액이 달린 주사걸이를 한 손으로 잡고 간호사실 조차 텅 빈 새벽에 삼각형의 병원 복도를 몇 바퀴씩 도는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벽보에는 간호사들이 오려 붙인 재미있는 격문들이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건강하기를 원하지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운동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게을리 하다가 병에 걸렸을 때 역시 운동을 해야만 그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새롭게 깨달은 사실입니다.

물론 수술한 몸으로 운동을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만일 그 고통이 두려워서 운동을 게을리 하게 되면 가스가 더디 나오게 되고 그만큼 고통이 길어지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이라는 말처럼 운동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운동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영적인 호흡이요 영적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기도 운동입니다. 기도운동을 게을리 하여 자초한 고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고난 중에서 기도라는 운동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평소 기도를 게을리 하던 사람도 고통 중에 빠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가 입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12.. 천한 것과 소중한 것, 하찮은 것과 가치 있는 것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보다 간절히 기다려지는 것은 돈도 권력도 그 무엇도 아닌 가스(방귀)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가스가 나오기 전에는 아무리 목이 마르고 입이 타들어갈지라도 한 모금의 물도 마시면 안 되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가스가 나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마치 동해안에서 유전 가스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렸습니다.

수술 후 이틀이 되었는데도 가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운동하기 위해 복도에서 만나는 환우들의 인사는 가스가 나왔느냐는 말입니다. 주사 걸이에 걸린 주사액 숫자를 보게 되면 가스가 나온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렁주렁 달고 다니다가 점차 그 숫자가 줄어들어가면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만에 가스가 나왔다고 하는데 나는 이틀이 지나도 가스가 나오지 않기에 운동량을 늘려갔습니다. 물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통증이 느껴져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나의 모습에서 정말 내가 암환자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관심은 온통 가스가 빨리 나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 뿐 이었습니다. 평소 천하게 여겼던 방귀(가스)가 이렇게 소중한 줄을 몰랐었습니다. 고통스러운 밤을 맞이하면서 두 세 차례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중에 새벽 기도갈 시간대에 배가 아프면서 꿈틀거리며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 서로 배를 휘 저으면서 항문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급하게 화장실로 아픈 몸을 이끌고 갔습니다. 마침내 기다렸던 가스가 배출이 되었습니다. 그 증거로 며칠을 금식했었는데 약간의 분비물이 동시에 배출되었습니다.

그것을 휴지에 소중하게 담아 휴지통에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스가 나온 증거로 말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어느 것도 하찮은 것이 없었습니다. 가래 한번 뱉는 것, 방귀 한 번 뀌는 것, 대 소변을 시원스럽게 보는 것 평소 천하게 여기고 하찮게 생각하고 전혀 감사하지 않았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다 감사한 것 뿐입니다..

 

 

 

(시 44:8)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13. 가속도가 붙어가는 회복

가스가 나오자 그 기쁜 소식을 곤히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 전하고 간호사실로 가서 당직 간호사에게 전하자 기뻐하면서 먼저 물을 마셔도 되고 아침에 미음이 나올 것이고 점심에는 죽이 나오고 저녁에는 식사가 나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영적 자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이 가스 배출이라면 아무리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이실지라도 가스를 배출해야만 축복의 생수를 주시고 배불리 양식을 먹게 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시고 먹는 자체가 결국 고통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 건강할 때에도 물 마시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나이기에 가스가 나온 후 제일 먼저 하나님 감사합니다. 소리 내어 기도하면서 물을 마셨습니다.

 

 

 

물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나의 마음은 감사로 넘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 한 모금을 감사할 수 있다면 세상에 감사하지 않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이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소망에 그동안 운동을 하면서 환우들이 입맛을 잃고 창가에 내어 놓은 꽁치 찜을 이제 나도 먹을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니 기대가 되었습니다.

 

 

 

수술 후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주사액들이 하나 둘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록 수술부위가 땅겼지만 힘 있게 걸으면서 가슴을 펴고 몸을 돌리고 손을 들어 휘저으면서 열심히 운동을 하였습니다.

매끼니 마다 식단이 달랐습니다. 전문 영양사가 신장암 환자에게 적합한 메뉴를 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회복 속도는 더욱 가속도가 붙어서 끼니마다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음식도 맛이 있었습니다. 소화도 잘 되었습니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감사하였습니다.

 

14.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새벽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면서 병실에 있는 TV 채널을 기독교 방송에 고정해 놓고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모니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나도 방송 설교를 하였지만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시청자의 입장에서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골고루 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1월 23일 새벽 평소 습관대로 일찍 잠에서 깨어나서 방송설교를 시청하는 중에 할렐루야 교회 김상복 목사님이 가정의 회복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은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가치는 누구나 동일하고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시고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대한 평범한 복음 설교였습니다. 물론 목사인 나도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요 또한 설교를 하기도 했었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는 말씀처럼 그 시간 그 말씀이 내 심령에 잘 박힌 못처럼 박혔습니다. 마치 폭포에서 물을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 대한 가치를 창조하실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이 한결같이 나를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비록 범죄하여 때가 묻었어도, 내가 충성스럽게 주를 위해서 살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밀물처럼 내 마음에 몰려들었습니다. 마치 값비싼 금가락지는 땅 속에 묻혔을 때나 설령 똥이 묻었을 때나 불속에 던져졌을 때나 주변 환경과 상관이 없이 금가락지라는 고귀한 가치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금가락지와 같은 나에게 죄라는 똥이 묻었어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똥 때문에 나의 가치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씻어 버리기만 하면 나는 여전히 금가락지처럼 고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가치가 나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확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치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진열장에 금붙이처럼 더욱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책임감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감격과 감사와 그에 미치지 못했던 부끄러운 자신을 회개하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이 체험한 브니엘의 아침이었습니다.

정말 오랜 만에 하나님의 면전에서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축복의 새벽시간이었습니다. 콩팥 하나와 바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에 대한 귀중한 보화를 얻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목사로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감격을 잃어버린 지 얼마나 오래며, 아내와 함께 살면서도 무관심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나의 가치가 무엇이었는가를 까맣게 잊은 채 살아오다가 막상 암에 걸려 수술을 받으면서 영적인 암도 치료를 받게 된 것을 깨닫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은 잃어버린 콩팥보다 더 값진 보화였습니다.

시간을 보니 김상복 목사님 설교 방송이 있던 2010년 1월 23일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받은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만이 아니라 방송 설교의 위력도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한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셀프 카메라로 눈물이 마르지 않은 나의 얼굴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