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 교회가 온다
어윈 라파엘 맥매너스 지음/홍종락 옮김
두란노/2004년 9월/167쪽/8,000원
▣ 저 자 어윈 라파엘 맥매너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사우스웨스턴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미네소타에 있는 베델신학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복음적 리더십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L. A 모자이크 교회 담임목사다.
▣ 역 자 홍종락
서울대 언어학과 졸업 후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 연합회'에서 간사로 활동했다. 역서로는 『성령을 아는 지식』 『소설 마르틴 루터』『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 외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그는 성경에서 뛰어나온 코뿔소 같은 목회자다. 그가 말하는 코뿔소교회는 믿음의 야성이 살아 있는 교회다. 호랑이의 포효소리가 들리는 교회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표범처럼 질주하는 교회다.
그는 6년 전 젊은이들이 다 빠져나간 60년된 교회를 담임하면서 코뿔소교회를 탄생시켰다. 교회 이름을 ‘모자이크’로 바꾸고 과감하게 “다음 세대를 끌어안는 목회”를 선언했다. ‘모자이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조각조각 부서진 존재지만,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결국은 하나로 모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상징한다.
그는 세상에서 안전지대로 도피해 식물인간처럼 무기력해지는 교회를 향해 피 끊는 외침을 던진다. “하나님, 코뿔소가 방향만 정해지면 전속력을 내달리듯이, 부르심만 바라보며 앞만 보고 달리다가 죽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믿음의 야성이 살아 있는 교회의 표지판이 되게 해주십시오!”
▣ 차 례
1. 야만적 침공 - 코뿔소의 심장이 펄떡인다
믿음의 야성이 당신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혁명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마음으로 우리 안에서 불타는 열정을 자유롭게 추구하며 전진하라.
2. 야만적 부름 - 코뿔소로 부르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야만적이다. 위험이나 치러야 할 대가를 보여 주시면서도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사자의 입이 막히고 죽음의 힘이 꺾이는 야만인의 길로 우리를 부르신다.
3.야만적 무리 - 코뿔소를 길들이지 말라
하나님의 신비하고 기적적인 역사는 어디로 갔는가? 교리와 의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성령께서 하셨던 일들은 교회 프로그램이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길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향해 열정적으로 미치는 것이다.
4.야만적 반란 - 코뿔소 떼처럼 달리라
코뿔소는 9미터 앞까지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오히려 겁먹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치달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교회는 코뿔소 떼가 되어 멈추지 말고 달려야 한다.
코뿔소 교회가 온다
어윈 라파엘 맥매너스 지음/홍종락 옮김
두란노/2004년 9월/167쪽/8,000원
1. 야만적 침공
더글러스는 스코틀랜드를 해방시킨 왕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로버트 드 부르스의 심장을 작은 상자에 담아 목에 걸고, 모든 전투에서 “네 왕의 심장을 위해 싸우라!”며 용맹하게 외쳤다. 이 이야기는 우리 안의 근원적인 갈망을 일깨우는데, 그것은 바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위해 싸우라!”라는 외침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갈망을 말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기독교인은 지난 2천년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야성을 잃고, ‘종교적인 신자들’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다면 야만적 방식을 취하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종교나 지위, 조직이나 관료주의, 전통 등의 율법적 제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왕이신 하나님의 심장을 따르는데 초점을 둔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즉, 성령님의 변화시키는 능력만을 믿는다.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고, 지루할지 몰라도 위험하지 않은 평범함보다는 불합리함과 숨막히는 모험을 즐긴다. 야성적인 코뿔소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심장을 위한 싸움에 온전히 헌신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처음 믿을 때의 야성적 열정과 힘을 잃고 길들여지거나 문명화되는 것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심플하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이며, 인류를 하나님께 이어 붙이는 일은 곧 그들의 사명이다. 야만적 방식에는 사랑과 친밀함, 열정과 희생이 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들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되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당신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면 당신 안에는 분명 풀려나기만 기다리는 거친 야성의 믿음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로 힘을 얻는 새생명을 주시며,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도우실 것이다.
코뿔소의 심장이 펄떡인다!
믿음의 야성이 당신 안에서 살아 숨쉬게 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혁명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마음으로 우리 안에서 불타는 열정을 자유롭게 추구하며 전진하라.
2. 야만적 부름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가는 길을 준비케 하시려고 선택하신 자, 세례요한은 진정한 야만인이었다. 그는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면서 예수의 오심을 선포했다. 비단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의 종교지도자 격이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면서 지옥불 메시지를 전하였다. 자기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점잖게 길들여진 종교인들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사명임을 분명히 하고, 정확히 그 일을 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순간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 위에 성령이 빛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또 하늘에서 선포하는 음성을 들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6~17) 그 때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 후로 요한은 그리스도 예수의 목적과 인격에 충성하기로 선포했다.
그랬던 그가 제자들을 시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는 질문을 한다. 그 당시 요한은 형수인 헤로디아와 불륜을 맺은 헤롯왕의 죄를 지적함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죽음 앞에 선 요한은 예수님이 마땅히 자신을 도우러 오시리라 기대했지만 예수님이 오시지 않자 딜레마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내게 의심을 품지 않은 사람은 복이 있다.”(마11:4~6)라고 하셨다. 사실 요한은 이미 옥중에서 이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사역은 요한의 의심을 없애는 차원이 아니라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이런 기적을 본 사람이 신앙을 버리는 일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사건이 누군가를(요한을) 실족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런 뜻이었다. “요한, 난 널 도우러 가지 않겠다. 너를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겠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했지만, 내가 너를 위해 택한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는 다르다. 요한, 이 일로 인해 네가 의심하지 않는다면 복이 있을 것이다.”예수님의 목적은 우리를 고통과 고난이 아닌 ‘무의미함’에서 구해 내는 일이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요한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막1:15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어느 것보다도 야만적이다. 이 세상에서 전혀 다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를 때 생겨나는 위험이나 치러야할 대가를 숨기지도, 거짓말하지도 않으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눅9:23~25)
품위 있는 종교인이 되라는 부르심은 애초부터 없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야만적 부르심 앞에 순종하려 애썼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지금이라도 당장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실패했지만 예수님의 요구를 이해하게 되었다.
야만적 방식이 말하는 것은 희생과 섬김을 통해 표현되는 사랑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와 다시 만났을 때 그 둘은 사랑과 희생에 대한 대화를 다시 나눈다. 예수님은 세 번 물으셨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기에 마음이 아팠다고 성경에 기록한다. 베드로의 대답은 간단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더 깊은 주제의 대화로 옮겨갈 준비가 되었던 베드로는 이제 야만적 방식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지만,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셨다. 이 말씀 후에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요21:18~19) 예수님은 베드로를 단 한길, 야만인의 방식으로 초청하셨다. 예수님은 선택을 유도하여 그에 따라 대가를 줄여주지 않으셨다. 이 말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는 딴 소리를 한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21:20~21) 베드로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가 죽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특히 요한도 죽어야 하는 건지 알고 싶다.’
야만적 부르심이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라면 우리 모두 같은 내용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요21:22) 이것이 야만적 부르심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이해한다면 비로소 그것이 집단 오디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삶으로 당신을 부르지 않으신다. 당신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다.
개화된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와 단체 협상을 하신다고 생각한다. 모두 요한의 꾸러미를 받으며, 베드로의 꾸러미를 받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은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결과와 증거를 안전한 삶으로 생각한다니, 참 얄궂은 상황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 -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 등 - 은 믿음으로 살면서 나라를 정복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데서 강해지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다.(히11:33~34) 그러나 믿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믿음의 선진들의 짧은 목록은 규칙이 아니라 규칙의 예외를 보여 준다. 그들의 삶은 너무도 특별하고 그 결과가 너무도 유별나기에 이렇게 나열된 것이다.
성경에 근거한 믿음을 이해하려면 히11:35 후반부터 등장하는 ‘어떤 이들’을 놓치지 말라. 이 ‘어떤 이들’은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믿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증언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히 11:35~40)
‘어떤 이들’이 체험한 삶은 성경의 유명인들과 비교할 때 정말 비참하다. 그러나 그들의 삶 역시 영웅들 못지않게 하나님의 임재와 뜻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졌다. ‘어떤 이’의 이름은 유명인들 보다 그 수가 훨씬 많기에 남아있지 않지만,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았기에 모두 복을 받았다. 그들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가장 충만한 생명을 누렸다. 어떤 야만인은 사자굴에서 밤을 보내고도 살아남지만, 어떤 야만인들은 가장 어두운 밤과 죽음의 고통을 겪고 영원 가운데 깨어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위로가 아니라 할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삶의 의미를 희생하면서 우리의 안전을 택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편안한 삶이 아니라 중요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다. 가장 안전한 장소가 하나님의 뜻 한 가운데라면, 왜 증인(witness)을 가리키는 성경의 단어가 바로 순교자(martyr)를 의미하는가? 모험과 위험투성이였던 사도 바울의 경험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거 바울은 종교인이었다. 종교인으로서 바울은 거만한 독선 뒤에 숨은 채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기술을 익혔다. 죄책감과 수치를 통해 타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종교를 사용했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언제나 우리를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 자유를 얻게 한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죽음에서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죽음의 공포를 벗어 던지게 하였다. 우리가 당당하게 죽은 후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장소로 우리를 데려가기 원하신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는 고작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수준이지만, 사실 예수께서 허락한 미지의 삶이 고통과 고난과 실망의 삶이라 해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 없이 세상 모든 것을 누리는 것보다는 그분을 따르는 것이 훨씬 강력하고 보람된 삶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혜택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분보다 더 소중한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동행할수록 믿음의 요구는 더 커진다. 더 많은 것을 감수하게 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희생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희생의 삶 역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역사를 쓰시고, 미래를 창조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펼치신다. 개척자 예수님과 보조를 맞출 계획이라면, 변화는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위험한 순간들을 각오해야 한다.
코뿔소로 부르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야만적이다. 위험이나 치러야 할 대가를 보여 주시면서도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사자의 입이 막히고 죽음의 힘이 꺾이는 야만인의 길로 우리를 부르신다.
3. 야만적 무리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갈 때 예수님은 군중을 향해 요한에 관한 말씀을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이르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길을 닦을 것이다.’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마11:7~11)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 분명히 아셨으며, 다른 사람들이 요한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아셨다. 당시 요한은 영적 지도자로 기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거칠고 야성적이었으며, 전혀 세련된 지도자가 아니었다. 갈대, 즉 문명인들의 기대에 맞춰 쉽게 흔들리는 사람도, 정권에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 애쓰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도 아니었지만 요한은 선지자였다.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아직 커다란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뒤를 이어 야만의 무리가 따라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셨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당대의 조직화되고 개화된 유대교에 대해 예수님은 끝까지 이방인으로, 외부인으로, 야만인으로 살다가 죽으셨다. 당시 유대인들의 길들여진 행태를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니까 ‘그는 귀신에 들렸다.’고 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한다.”(마11:16~19) 예수님을 따르는 이가 무슨 일을 해도 그 일을 멸시할 이유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예수님과 요한은 모두 야만인으로서 하나님의 음성에 인도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플하게 행하는 것을 생활 패턴으로 삼았고, 같은 삶을 제자들에게도 명하셨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기독교는 비신비적인 합리적 믿음의 종교가 되었다.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지의 여부는 사소하게 되고, 정통 교리를 믿어야 정통 신앙인의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의 믿음은 신비한 믿음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영계에서 행하는 삶이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들림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방랑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사무엘은 밤에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이나 들었으며, 이세벨을 피해 동굴로 숨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같은 야만인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난다. 그들은 창조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부름 받은 신비한 전사들이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하며, 신비의 전사라는 소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야만적 방식과 더불어 일정한 광기가 찾아온다. 제자도의 요점은 하나님을 향해 열정적, 영적으로 미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 목적, 그분의 열정이 닿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의 열심과 갈망은 우리를 순응시키지 않고 변화시킨다.
현대에 있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이 온통 죄를 없애는데 맞춰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독특하고, 근원적이고, 특별하고, 놀랍도록 야성적인 믿음이 풀려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창조주께서 당신의 영혼에 임하여 거하신다면 최소한의 분열은 예상해야 한다. 어찌 그분을 만나고 알면서도 변화 없는 삶에 머물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내주하신다면 당신은 보통의 주류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 길들여진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 동물원이지만, 당신은 성령께서 자유롭게 배회하시는 정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살아나도록 깨우신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정체성의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좌우되고 제한받는 폭이 줄어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된다. 하나님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라고, 명백히 그들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을 하라고 명하시고,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미칠 노릇이겠지만 야만적 부르심 앞에 그들은 그 일들을 실제로 이루어낸다.
베드로는 우리를 세상 속의 이방인과 외국인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같은 무리의 일원이며,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지만 각자의 길은 서로 다르다. 문명인들은 숙소를 건설하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도록 초청하지만, 야만인들은 출애굽 당시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가시는 곳을 따라 그분과 함께 움직인다. 개화된 그리스도인은 판에 박힌 일을 하지만, 야만인 제자에게는 사명이 있다. 개화된 신자는 율법의 뜻을 알지만, 야만인 제자는 율법의 정신으로 살아간다. 종교적인 문명인은 전통을 사랑하지만, 야만인은 도전을 사랑한다. 문명인들은 의식에 만족하지만, 야만인들은 신비 가운데 살고 힘을 얻는다. 종교는 개화된 제자에게 안정과 확실성을 주지만, 야만인에게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 모험이요 신비다. 그리고 약간의 광기까지 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산 위에 방주를 만들었고, 엘리야는 하늘을 향해 불을 내려달라고 했다. 다윗이 거인을 향해 달려간 것과 호세아가 창녀와 결혼한 것, 모세가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뻗은 것 등등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만 빼놓고 본다면 매우 우스꽝스럽고 미친 짓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생명력 때문에 그들은 평범함을 훨씬 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당신이 길들여지고 말았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힘과 잠재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당신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당신 안에는 야만인이, 품위와 예절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미개인이라 손가락질 하는 존재가 잠들어 있다. 당신은 원시의 장소로 찾아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임재를 맞아야 한다. 그곳에서 그분의 임재로 변화될 것이다. 당신 안의 야성적 믿음을 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
오순절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자신의 소망으로 선언한 모든 이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고, 그 순간 성령의 무리가 탄생했다. 주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믿는 모든 자에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선포하신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증거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정상적인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는 본질적인 증거이다. 성경공부는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께 속한 자가 갖는 주된 증거는 아니다. 누구나 성경을 공부할 수 있지만, 그분을 아는 자들만 그분의 음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을 체험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가르치는데 초점을 둔 신자들이 많으나 우리의 목표는 기독교인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되어야 한다.
개화된 믿음은 선과 악을 도덕적 의무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야만적 믿음은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한다. 그들의 동기는 내적인 것이며, 그들은 내면에서부터 변한다. 예수님은 따르기 위해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 우리의 발걸음은 세상과 보조가 맞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생에 뿌리 내리는 건 거부하면서도 이생을 가장 즐기는 듯 보이는 방랑자며, 이방인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영원한 세계에 적을 두고 있고, 이 땅은 우리의 임시 거주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떠돌이가 된 요한을 가리키신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가리키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떠돌이에게는 온 지구가 거룩한 땅이다. 그들은 성과 속, 현실과 영적 생활을 나누지 않는다. 삶의 모든 면면이 거룩하고, 모든 행동이 영적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모든 일과 모든 장소에 항상 계신다.
우리 모두는 물 속 무덤을 통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침례를 통해 당신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였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야만인은 죽음을 맛보았고, 죽음에 직면했고, 죽음을 정복했다. 그러므로 모든 두려움은 없어졌으며, 이제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속에 있는 야성적 믿음을 풀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실 때, 우리는 감동을 받아 비범한 삶을 살게 된다. 강력한 꿈과 비전을 추구하고 시도하면서 그 꿈대로 살아갈 용기를 발견한다. 야만적 부르심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직면하게 만든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고 사랑을 거부하고, 실패할까 두려워 꿈을 억누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꿈은 사랑으로 힘을 얻는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안에 새로운 열정을 불붙이며, 그 때 우리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능력과 힘을 발견한다. 다른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그간 우리를 괴롭히던 모든 두려움은 다 무력해진다. 그에 더해 온전한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두려움의 통제에서 자유한 야만인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자신보다 더 큰 꿈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유,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을 증명하는 가장 비범한 표시일 것이다.
교회가 운동이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과 열정을 분출한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거하시면. 이상하게도 자신의 부족함과 비범함과 잠재력을 동시에 깨닫게 된다. 야만적 방식에는 점진적이 아닌 혁명적인 결과가 뒤따른다. 야만인들은 영혼의 해방을 통해 거친 야성적 믿음을 분출하며 살아간다.
코뿔소를 길들이지 말라!
하나님의 신비하고 기적적인 역사는 어디로 갔는가? 교리와 의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성령께서 하셨던 일들을 교회 프로그램이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길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향해 열정적으로 미치는 것이다.
4. 야만적 반란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시지 않으실 거라고. 그러나 앞서 살펴본 요한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전진하는 곳마다 흑암의 왕국에 맞서 치열한 교전을 벌인다. 하나님 나라를 천국과 혼동하지 말라. 구원은 실낙원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받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나라들 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이 개화를 향한 일체의 유혹을 거부하고 야만적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물질로만 정의되는 세계에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야를 혈과 육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로 사람들의 삶이 영원히 달라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무기를 쓰지 않으며 어두움을 부술 빛의 전사로 부름 받았다.
자칭 문명국인 로마인들은 문명의 위대한 미덕을 들먹이며 자신들보다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폭력과 타락을 합리화 했다. 초대교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했던 로마가 교회를 받아들이면서 초기 교회를 유혹하고 개화시켜 버렸다. 예복을 입고, 성당을 지었고, 부와 권력을 축적하면서 교회는 변질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천박한 사업으로 만들어 버렸다. 용서를 돈으로 살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자신들의 이윤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도둑과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분노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보다는 성전을 더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더 이상 거하시지 않는 성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개화된 종교인들은 존귀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이라는 야만스런 용기에 들어 있다고는 단 한순간도 상상할 수 없었다. 문명인과 야만인의 구분이 이보다 더 분명히 드러나는 곳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도 일단 개화되면 앞장서서 그분을 십자가게 못 박을 수 있다는 뼈아픈 현실을 본다. 우리가 개화된 믿음을 선택하면,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훼방꾼이자 원수가 되신다.
이천 년 전,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내건 유대교를 친히 뒤집어 엎으셨다. 그러므로 현대의 기독교 기관들이 그 하나님의 반란에서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자기놀음에 빠져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하는 현대 교회에 이력이 난 예수의 추종자들이 곳곳에 있으며,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나는 믿는다.
예수님은 전통과 현상유지의 지지자가 결코 아니다. 그분은 제자들, 소규모 공동체 구성원들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셨다. 예수님은 전 인류를 제자로 삼는 사명을 겨우 손에 꼽을 정도의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반란은 문화, 민족, 인종, 종교, 지위 등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일체의 구분을 뛰어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허탄한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것이다.
야만인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았다. 복음은 심판과 정죄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시는 좋은 소식이며 사랑이다. 그런데 세상은 사랑이 증명되길 요구한다. 그렇다면 사랑을 외치는 자들은 증오라는 가장 잔혹한 시험대를 견뎌 내야만 한다. 사랑과 희생은 나뉠 수 없기에 사랑을 아는 이들은 사랑을 두려워한다. 사랑은 오히려 고통을 약속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깊이 사랑하셨기에 우리 대신 고통당하시기로 선택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랑을 높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는데도 그리스도에게 무관심할 뿐 아니라 교회를 심히 경멸하는 아이들을 많이 봤다. 그것은 노골적인 위선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지 단조로움과 지루함 때문인 경우도 있다. 1세대 그리스도인들은 본인이 야만인이면서 자녀들을 개화된 신자로 기르는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딤후1:5~9)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하나 될 것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위축되지 말라고 권한다. 주의 깊게 보면 문명의 길에 빠져 가는 믿음의 아들에 대한 야만인의 호소를 느낄 수 있다. 디모데에게 진실한 믿음은 있지만 그가 성령 안에서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바울은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불을 다시 지필 것을 주문한다. 디모데의 문제는 노골적인 죄가 아니라 숨어버린 믿음이었다.
개화된 그리스도인으로 자란 아이들은 외적인 힘인 ‘두려움’ 때문에 옳은 일을 하지만, 야만인으로 자란 아이들은 내적인 힘인 ‘사랑’ 때문에 옳은 일을 한다. 나중에 자녀들이 그리스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은 믿음과 위험과 모험의 삶을 떠나 지루하고 단조롭고 평범한 삶을 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문명화될수록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더욱 무관심해지는 것 같다. 문명사회의 비극 중 하나는 아무도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세상에 대한 연민이 없는 공동체에 합류하면 우리도 곧 냉담해지고 만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사람은 군중 속에 있을 때 혼자 있을 때보다 악한 행동을 저지르거나 악에 순응할 확률이 높다. 문명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냉담을 합리화하고 자신이 인간적인 책임에서 벗어나 있다고 둘러댈 수 있다. 그러나 야만적 반란은 그런 책임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시민은 선과 악의 투쟁 한복판으로 끌려간다.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한 모든 이는 인류에 대한 책임을 진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남에 대해 이야기 하셨던 그 ‘거듭남’은 육신의 출생과는 엄연히 다른 새로운 출생이다. 인간이 혈과 육으로 태어날 때는 지극히 무력하고 의존적인 신생아지만 성령으로 태어날 때는 상황이 다르다. 성령으로 거듭난 새신자는 영적 신생아가 아니라 능력 있게 움직이는 영적 군사이다. 신병 교육대나 대기실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영적 전쟁터에 투입된다.
야만적 반란은 어둠의 권세와 문명이 맺는 협약에 반대하는 봉기다. 야만인들은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고 더럽히는 어둠이 있다는 사실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곧 어둠과 공모하는 일임을 안다. 우리가 태어난 곳은 전쟁 한복판이다. 우리는 전사다.(고후 10:3~5)
당신이 길들여진다면 원수는 당신을 내버려둘 것이다. 원수는 길들여진 종교 활동을 오히려 조장하려 애쓴다. 종교는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떼어놓는 가장 확실한 무기 중 하나다. 우리의 믿음이 세련되게 다듬어질 때 그것은 더 이상 어둠의 나라를 위협하지 못한다. 그러나 야만인들은 정사와 권세가 세운 경계를 무시한다. 그들에게 왕도, 주도, 사명도 하나다. 그들은 지옥문을 부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위험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우리는 회심한 그 순간, 시간너머 영원 속으로 들어올려진다. 그리스도와 함께 가장 높은 곳에 이른다. 그러나 곧 우리의 사명을 위해 역사 속으로 낙하해 하나님의 지상 부대가 된다. 한때 우리 집이었던 세상에서 우리는 이방인과 외국인으로 살아간다. 한때 우리가 하나님의 적군으로 있던 곳이 이제 우리의 적진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걸맞은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는 노력은 그만두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일도 그치라. 문명인들은 옷과 반지로 상대를 판단하지만 야만인들은 마음과 행동으로만 상대를 판단한다. 야만인들은 숨길게 없기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산다. 가식과 거짓이 없으며 벌거벗은 채로 수치심도 잊고 싸우는 사람이다.
또한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한 한 사람의 힘도 좋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움직일 때 나타나는 힘은 대단하다. 어둠의 나라가 흔들리고, 포로 된 자가 갇힌 감옥 문이 열리고, 족쇄가 풀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는다. 그들은 폭력에는 평화로, 증오에는 사랑으로, 억압에는 섬김으로 싸운다. 그들의 위대함은 공동체 안에서 온전히 풀려난다. 그들이 함께 움직일 때 그들 안에서 하나님이 가장 완벽하게 드러나신다.
코뿔소는 시속 48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다. 다람쥐보다도, 중고 자동차보다도 더 빠른 속도이다. 그런데 코뿔소는 9미터 앞까지 밖에는 보지 못한다. 이렇게 덩치 큰 짐승들이 전방 9미터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모른채 무리를 지어 시속 48킬로미터로 달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크러쉬(코뿔소떼의 명칭, 충돌 또는 ‘쾅’하는 소리라는 뜻)는 일단 뿔로 방향을 정하고 나면 염려 없이 전속력으로 달린다.
우리는 그 이름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아는 척 가장할 필요가 없다. 9미터 앞까지밖에는 못 본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코뿔소의 경우처럼, 걱정해야 할 쪽은 9미터 너머에 있는 것들이다. 9미터 너머에 있는 것들은 알아서 코뿔소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볼 수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아는 것을 가지고 전진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곳은 암흑의 나라 중심부, 너무도 사악한 세상의 한복판이다. 그분은 우리를 불러 인류가 머물기로 선택한 곳, 흑암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이 빛을 갈망하는 곳으로 이끄신다. 우리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무기를 들고 그들의 구출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야만적 방식을 따라 끔찍한 십자가를 지신 분을 따라가기로 결심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인다면, 이미 일은 시작된 것이다. 당신의 원시성이 갇힌 빗장을 하나님께 맡겨드린다면 그분은 당신 속의 거친 야성적 믿음을 풀어주실 것이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자신이 문명에서 벗어나 야만적 방식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코뿔소 떼처럼 달려라!
코뿔소는 9미터 앞까지 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오히려 겁먹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치달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교회는 코뿔소 떼가 되어 멈추지 말고 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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