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하나님을 아는 지식/제임스 패커 지음/정옥배 옮김

미션(cmc) 2010. 6. 19. 10:20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제임스 패커 지음/정옥배 옮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1996년 12월/413쪽/12,000원

▣ 저 자 제임스 패커

금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로 현재 캐나다 리젠트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및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대표적 기독교 잡지 「크리스찬 투데이」의 편집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주권』 『성령을 아는 지식』 등의 저서가 있다.

▣ 역 자 정옥배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IVP 간사를 역임하였다. 역서로 『에이트와 사랑의 미학』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백성들』 등 다수가 있다. 미국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풀러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 Short Summary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많은 연약한 점들의 뿌리에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 하나님의 도(ways) 및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에 대한 무지 - 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불행한 경향이 오늘날의 교회에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 경향은 기독교적 지성이 현대의 풍조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분을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기이한 것은 현대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현대의 풍조에 항복해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한 정말로 자살 행위와 같다.

두 번째 경향은 기독교적 지성이 현대의 회의주의에 의해 혼란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3세기 이상 동안 르네상스식 사고방식 안에 있는 자연주의라는 누룩은 서구의 사상에서 암적 존재가 되어 왔다. 그 이래로 신학과 철학은 과학과 한데 결합하여 과학의 주장을 따라 왔다. 그 결과, 성경은 과학의 관점에서 맹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믿음의 토대가 되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의 특징인 하나님에 대한 불확실함과 혼란은 다른 무엇보다도 심각하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 : 16)." 이 책은 바로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 쓰였다. 그리고 그 주장하는 바는 새로운 길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옛적 길로 되돌아오라는 소환이다. ‘선한 길’은 여전히 늘 있던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다.

▣ 차 례

1부 여호와를 알라

1. 하나님에 대한 연구

2.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3.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4. 오직 참되신 하나님

5. 성육신하신 하나님

6. 그가 증거 하실 것이요

2부 네 하나님을 보라!

7.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8. 하나님의 엄위하심

9. 지혜로우신 하나님

10. 하나님의 지혜와 우리의 지혜

11. 주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2. 하나님의 사랑

13. 하나님의 은혜

14. 심판자 하나님

15. 하나님의 진노

16. 인자와 엄위

17. 질투하시는 하나님

3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18. 복음의 핵심

19. 하나님의 아들들

20.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21. 이 내적 시련들

22. 하나님의 충족성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제임스 패커 지음/정옥배 옮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1996년 12월/413쪽/12,000원

1부 여호와를 알라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직하게 말해서 자신에게 여전히 낯선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명확하고 사실적인 체험을 암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은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우리의 개인적 체험 속에서 일어난 특정한 사건들에 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우리 중에 과거의 실망들과 현재의 고통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으리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우리 대부분에게 그것들의 실제적인 영향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자신의 ‘십자가’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자신의 비통함과 고통 속에 잠겨 침울함에 빠져 들어가고 만다. 이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 1 : 8)'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 : 7~10)." 바울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계속 그것을 마음속에 둔 상태로 살아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잃어버린 것에 대해 향수에 젖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도 있다. 즉 직접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에 대한 관심,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기독교의 주제들에 대해 명료하게 생각하고 잘 말할 수 있는 능력 등이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쩌면 거의 하나님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일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손해나 자신의 ‘십자가’가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증거나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엄청난 정력을 내보인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들의 열심과 정력은 기도 안에서 최초로 표현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우리에게 그러한 기도를 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아직 우리의 하나님을 거의 모른다는 분명한 표시이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되 미리 아시며,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예정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계 역사와 각 인간의 운명에 대해 최후의 결정을 내리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인간들도 천사들도 하나님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러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셋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담대함을 보여 준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위험을 자초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돌적인 무모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간섭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가지고 있던 마음이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다.

넷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만족을 얻는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자신들을 알며, 이러한 관계가 삶 속에서 죽음을 넘어서 그리고 영원토록 계속해서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 준다는 확신에 마음이 사로잡힌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평화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자신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인식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구세주를 찾아야만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몸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 수 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찾으면,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이다.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우리는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 목표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 : 3)." 삶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주된 일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삶의 문제들 대부분은 저절로 자기 위치를 찾게 된다. 인생을 애쓸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것은 충분히 큰 목표이다. 이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의 충성을 사로잡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숭고하며, 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목표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 특별한 종류의 감정 혹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오싹한 기분을 느끼는가? 꿈결 같고 땅 위에 붕 뜬 듯한 느낌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지적 체험인가? 어떤 목소리를 듣는가? 아니면 환상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그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은 논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영역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속아 실제로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른 어떤 사람을 ‘아는 것’보다 당연히 더 복잡한 일이다. 이는 이웃 사람을 ‘아는 것’이 어떤 집 또는 어떤 책 또는 어떤 언어를 ‘아는 것’보다 더 복잡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상이 복잡할수록 그것을 아는 일은 더 복잡해진다. 개 한 마리에 대해서 남김없이 잘 알기 위해서는 며칠로 충분하지만, 어떤 사람과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함께 일하고 나서도 여전히 “그 사람은 정말로 도무지 알지를 못하겠어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혹은 얼마나 조금 열어 보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을 잘 안다 혹은 잘 알지 못한다고 나누어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아는 것의 특성과 범위는 우리에게 좌우되기보다는 상대방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가 그들을 아는 것은, 보다 직접적으로는 우리가 그들을 알려고 시도한 결과라기보다는 그들이 우리에게 그들을 알도록 허용해 준 결과이다.

만일 신분상으로건, 지적 또는 전문적 분야에서건 개인적으로 우리 ‘위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과의 교제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의 말을 정중하게 경청하고 그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뿐이다. 그가 정중한 격식을 갖춘 관계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공통 관심사에 대해 말하며,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어떤 특별한 사업을 같이 해 보자고 권할 경우,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얻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사고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인생이 하찮고 따분하게 보였지만, 이제는 그 위대한 사람이 자신의 보좌역 가운데 한 명으로 삼아 주었으니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것은 정말로 대단하고 또한 우리의 삶을 바칠 만한 무엇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례이다. 전능하신 창조주, 만군의 주, 그 위대한 하나님이 당신에게 오사, 성경의 말과 진리 등을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은 오랫동안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들에 정통해 있었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 실제로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당신은 자신이 매우 낮아지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죄와 연약함과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말씀하셔서, 당신이 스스로를 절망적이고 무력하다고 판단하며 소리쳐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하나님은 실제로 그 분의 마음을 당신에게 열어 보이시며, 당신과 친구가 되시고, 당신을 동료로(언약의 동반자로) 삼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관계는,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들을 자신의 동료로 삼으사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며 개인적 친구가 되는 그런 관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의 근저에 있는 더 큰 사실, 곧 그분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요 10 : 27~28)." 나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존재이다. 나는 결코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나의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나를 아시는 것에 좌우된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사실이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사랑 가운데 나를 아시고 나의 유익을 위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게 된다.

하나님은 동료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나의 모든 뒤틀린 것을 보시며, 내 안에서 내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부패함을 보신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기 원하시며 나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셔 나를 위해 죽으시도록 하셨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만한 충분한 동기를 지니게 된다. 단지 이것만 언급하더라도 아는 것이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2부 네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의 사랑

사도 요한이 두 번 반복해서 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 : 8, 16)."는 진술은 성경에 나오는 말 가운데 가장 엄청난 말이면서 또한 가장 오해되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잘못된 개념들이 마치 가시 울타리처럼 주위에 자라나 그것의 참된 의미를 시야에서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참된 의미가 우리의 심령에 분명히 이해될 때, 그것을 깨닫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은 충분히 보상을 받고도 남음이 있다.

요한이 두 번째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기에 앞서 말한 문장에서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16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지상의 낙원을 얻은 것과 같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이 같은 지식은 혜택 받은 소수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정상적인 체험으로서,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거나 기형적인 사람들만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의 진술에 대한 두 가지 일반적인 언급은 우리로 하여금 좀더 쉽게 이해하도록 해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성경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홀로 고립되어 있는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말해 주는 바, 성경에 나와 있는 전체 계시를 신자의 입장에서 요약한 것이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으며 아브라함을 부르사 나라를 이루게 하셨고 정복과 사로잡힘과 포로 생활을 통해 자기 백성을 연단하셨으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셨고,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내어버리시고 요한이 이 글을 쓰기 직전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셨으며, 언젠가는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다.

일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요한의 진술을 마치 하나님의 정의의 엄중함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인 양 인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또한 불순종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징벌하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 : 24).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처럼 변덕스럽고 동요가 심한 것이 아니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오히려 자비와 은혜의 태도, 자유롭게 선택되고 확고하게 고정된 태도로, 하나님의 전존재가 자발적으로 내리시는 결정이다.

또한 하나님은 빛이시다. 영이신 하나님은 또한 빛이신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도덕적 실재와의 접촉을 잃어버리고 자신들이 한 일 중 죄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어떠한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한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 : 5)." 빛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측량한 거룩함과 순결함을 뜻하며, 어두움은 도덕적 사악함과 불의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빛이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도덕적 기준 및 관심과는 분리된, 제멋대로 하게 놓아두는 인정 많은 너그러움이라고 감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처음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도덕적 특질에 관심이 없는 분이 아니라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영접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훈련하시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엄격하다. 그것은 사랑하시는 분의 거룩함을 나타내며, 사랑받은 자에게서 거룩함을 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행복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 더욱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어려움을 당할 필요가 있는데도 이들을 어려움에서 막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한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인과 관련해서는 완전한 진리이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 : 20)." 우리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하나가 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촉진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에 관한 한 하나님은 매순간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서 우리에게 사랑이시다. 심지어 하나님이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하셨는지 알지 못할 때라도 우리는 그 안에 그리고 그 배후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며, 따라서 인간적으로 보면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라도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어느 교회에서나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부른다. 은혜란, 어떤 비인격적 세력으로서 마치 충전되는 전지와도 같이 성례라는 것에 ‘플러그를 꽂음’으로써 받는 천상의 전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서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인격적 활동이라고 기독교 학자들은 상투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은혜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분명, 은혜라는 개념은 너무나 엄청나게 놀라운 것이어서 어떻게든 그것을 이해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은혜는 계속해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와 기도의 주제가 되었다. 그들은 은혜에 대해 가장 훌륭한 찬송들을 썼고, 좋은 찬송을 만드는 깊은 감동을 누렸다. 그들은 저항의 대가로 필요하다면 조롱받고 특권을 상실하는 것까지 받아들이면서, 은혜를 위해 싸워 왔다.

하지만 현재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다르다. 그들은 은혜라는 개념을 입술로는 찬동하지만, 그것뿐이다. 은혜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은혜에 대한 생각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그들의 체험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의 난방 문제나 지난해의 보고서에 대해 이야기 보라. 그들은 당신이 하는 말을 금방 알아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은혜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실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 그러면 그들은 멍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들이 그것 없이 삶을 살아온 지가 오래되었으며, 이제 그들의 삶에서는 정말로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은혜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그것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은혜라는 주제는 그것에 대해 상당히 많이 말하는 사람에게조차 그처럼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은혜의 교리가 전제되는 이 영역에는 중요한 진리가 네 가지 있는데,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인정하고 느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그 네 가지 진리는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의 도덕적 악덕

현대인들은 그들이 이룬 가공할 만한 과학적 진보를 의식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어떤 경우든지 물질적 부를 도덕적 성품보다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며, 도덕적 영역에서는 자식 자신에게 아주 친절해서, 약간의 미덕이 커다란 악덕을 보상하는 것으로 취급하며, 도덕적인 면에서 자신이 상당히 잘못되었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는 이교도들이 하듯이 하나님을 자신의 모습을 확대시킨 그러한 분으로 상상하고는, 하나님 역시 그들처럼 자기 모습에 만족하는 분이라고 추정한다.

② 하나님의 응보적 정의

현대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잘못을 보고도 못 본 체하려 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았을 때도 자신이 같은 환경에 있었더라면 동일하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묵인해 준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하나님도 당연히 우리처럼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응보가 하나님의 세계의 도덕법이고 행악자에게 소망이란 없으며, 하나님께 응보적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느끼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 수 없다.

③ 인간의 영적 무력함

최근 들어 사업 관계의 모든 기술에서는 상대방이 점잖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도록 몰아붙이는 원리가 근간을 이루어 왔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할 수 없도록 몰아붙임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증해 왔다. 고대의 이교도들은 선물과 희생 제사를 더함으로써 이렇게 했다고 생각했으며, 현대의 이교도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과 도덕에 의해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이 과거에 무엇을 했든지 이제부터 훌륭한 생활을 하면 나중에 가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들이시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어느 누구의 힘으로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성경적 믿음을 가지고 그 앞에 고개 숙여야만 가능하다.

④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고대 이교도들은 각각의 신이 사리사욕이라는 족쇄로 자신의 숭배자들에게 얽매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신은 그들의 봉사와 선물에 의지해 복지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기독교인들 역시 내심 하나님은 어떻게든 우리를 사랑하고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인간 피조물에 의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야만 하는 의무를 갖고 계신 분이 아니다. 각 개인의 운명은 하나님이 그를 그의 죄에서 구하시기로 결심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의 행위와는 반대로, 실로 그들의 죄과를 무시하고 그들에게 값없이 보이시는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가혹한 대접을 받기에 합당하고 가혹함 외에는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선하심을 보이는 것이다. 은혜와 구원은 원인과 결과로서 한데 결합되어 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 : 5, 8)."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딛 2 : 11)."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세 가지 특정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죄 사함의 근원으로서의 은혜이다. 복음은 죄의 용서와 그에 따르는 우리 인격의 용납 곧 칭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칭의는 유죄 판결을 받고 무시무시한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죄수의 상태에서, 엄청난 유업을 기다리고 있는 상속자의 상태로 극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칭의는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결정적으로 신뢰하는 그 순간에 일어난다. 칭의는 우리에게는 값없이 주어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큰 대가를 치르셨다. 그 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적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둘째, 구원 계획의 동기로서의 은혜이다. 죄 사함은 복음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것이 은혜의 교리 전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죄 사함의 선물을, 창세전의 택하심으로 시작된 교회가 영광 가운데 온전해질 때에야 완성될 구원 계획이라는 맥락 안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자신의 회심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시는 값없이 주는 선물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한, 영원한 계획 속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성도의 견인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서의 은혜이다. 구원계획이 틀림없이 완성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다.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으며(벧전 1 : 5)." 또 입을 것이다. 내 믿음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스스로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은혜가 먼저 나를 믿음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은혜는 끝까지 내 믿음을 지켜 줄 것이다. 믿음은 은혜에 의해 시작되고 은혜에 의해 지속되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심판자 하나님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요, 친구요, 돕는 자시며,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면 그들의 얼굴은 밝아진다. 하지만 하나님을 심판자라고 말해 보라. 그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든다. 그들의 마음은 그 같은 생각을 하면 움찔해진다. 그들은 그런 개념을 불쾌하고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심판자로 활동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강조되고 있다. 심판자라는 말은 자주 하나님에게 적용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죄로 가득 찬 소돔 성을 멸하시려 할 때 그 성을 위해 중재하면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 : 25)"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심판의 실재성은 사실이며 성경 역사의 곳곳에 진술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이 지상에서 살아갈 삶을 저주하심으로써 그들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멸하시기 위해 홍수를 보내심으로 노아 시대의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화산 작용에 의한 대 이변으로 삼켜 버리심으로 그들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애굽인 술사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그들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의 심판 기사는 구약 성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인들에게(마 21 : 43~44), 하나님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행 5 : 1~10), 교만한 헤롯에게, 복음을 반대한 엘루마에게 그리고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 그들은 성만찬과 관련된 불경으로 인해 질병을 앓았다 - 에게 심판이 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심판자라는 개념에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가? 거기에는 적어도 네 가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심판자 하나님은 권위를 가진 분이다. 성경에서 왕은 최고의 통치권을 가졌기 때문에 언제나 최고 심판자였다. 성경에 따르면 바로 이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율법을 만드시고,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보상을 해주실 권리를 갖고 계신다.

둘째, 심판자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것과 일치하는 분이시다. 성경에 나오는 재판관은 정의와 공명정대한 행동을 사랑하고,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학대하는 모든 행위를 당연히 혐오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의를 사랑하시고 불의를 미워하신다는 것과, 선하고 의로운 것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재판관의 이상이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셋째, 심판자 하나님은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를 지닌 분이다. 성경에서 재판관의 첫째 임무는 자기 앞에 있는 소송 사건과 관련된 사실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배심원도 없이 혼자서 질문을 하고 반대 심문을 하고, 거짓말을 탐지해 내고, 얼버무리는 것을 간파해 사건의 진상이 정말로 어떻게 되는지를 확증하는 것은 오직 재판관의 책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지혜를 강조한다. 인간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아시며, 우리를 있는 그대로 심판하신다.

마지막으로 심판자 하나님은 판결을 시행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다. 현대의 재판관은 판결을 내리는 일만 하고 사법부의 다른 부서에서 그 판결을 수행한다. 고대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분 자신이 집행자이시다. 하나님은 법을 만들고 판결을 내리실 뿐만 아니라 처벌도 하신다. 모든 사법적 기능이 하나님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

바울은 우리가 모두 ‘주의 두려우심(고후 5 : 11)'이신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나서야만 한다고 말하며,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거룩하며 순결하시다. 우리는 거룩하지도 순결하지도 않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시는 앞에서 살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은밀한 것을 아신다. 심판 날에 우리의 과거 삶 전체가 말하자면 예수님 앞에서 상연되어 조사받을 것이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대면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신약 성경은 심판 날에 너의 현재의 구세주를 부르라고 답한다.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율법이시다. 하지만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복음이시다. 지금 예수님에게서 도망하면, 당신은 그 때에 가서 그 분을 심판자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희망이 없다. 지금 예수님을 찾으면 당신은 그 분을 발견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 : 1)."는 것을 알고, 장차 예수님과 만나는 것을 기쁨으로 고대하게 될 것이다.

3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복음의 핵심

파리스 왕자는 헬렌 공주를 트로이로 빼앗아 갔다. 헬라 원정군은 그녀를 되찾아오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났지만, 도중에 집요한 역풍을 만났다. 헬라 장군인 아가멤논은 사람을 집으로 보내 자기 딸을 데려왔고 분노한 신들을 달래기 위해 그녀를 죽여서 바친다. 그러한 조처 결과 다시 서풍이 불어 함대는 별 어려움 없이 트로이에 도착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트로이 전쟁 전설 중 이 부분은 화목의 개념을 잘 반영한다. 모든 곳, 모든 시대의 이방 종교는 이러한 화목 개념에 의거해 만들어졌다. 그 개념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는 여러 신들이 있다. 그리고 신들의 기질은 변덕스러워서 아주 작은 일에도 곧잘 기분이 상한다. 그들은 당신이 다른 신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데 비해 자신에게는 충분히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느껴서 질투를 한다. 그러고는 당신을 해치도록 환경을 조작함으로써 그것을 당신에게 표현한다. 그 순간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제물을 바침으로써 그 신들의 비위를 맞추고 달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이방 종교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다. 성경은 인간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신들, 헐리우드의 영화배우들처럼 행동하는 신들 대신에, 너무나도 명백하게 전능하신 창조주, 오직 한 분의 진정한 하나님, 모든 선과 진리의 원천이 되시는 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게는 나쁜 성질도 변덕스러움도 허영도 악의도 전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종교에는 화목의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고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이다. 화목의 개념, 즉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한다는 개념은 성경 전체 속에 흐르고 있다.

구약에서 화목 개념은 속죄제, 속건제에 관한 규정된 의식들에 나타나 있다. 또한 화목은 민수기 16 : 41~50과 같은 본문에서도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거기서 하나님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비방했기 때문에 백성들을 멸하겠다고 위협하신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아론이….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염병이 그치니라(46~48절)."

신약에서도 화목에 관련된 네 개의 본문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근본적 이유에 대한 바울의 진술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 : 21~26)."

두 번째는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히브리서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 : 17)." 세 번째는 우리 주님의 천상 사역에 대한 요한의 증거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 : 1~2)." 그리고 네 번째는 요한이 내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정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 : 8~10)."

당신이 믿는 기독교에서는 화목이라는 단어가 과연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신약의 신앙에서 화목은 중심을 차지한다. 하나님의 사랑, 성자께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신 것, 십자가의 의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행하시는 중보 사역, 구원의 길 등 모든 것이 위에서 인용한 본문들이 보여 주듯이 화목이라는 견지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변덕스럽고 얼토당토않은 진노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함과 모순 되는 것에 대해 느끼시는 거룩한 혐오감’이다. 즉 피조물 안에 나타나는 도덕적 사악함에 대해 창조주의 도덕적 완전함이 나타내는 올바른 반응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를 징벌하시면서 진노하시는 것이 도덕적으로 의심쩍기는커녕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진노를 보여 주시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덕적으로 의심쩍을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창조주가 또한 구속주가 되셨다고 말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공표한다. 성경은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기본적으로 화목, 즉 우리의 죄를 하나님 목전에서 없애 버림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소멸시킨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대표적 대속이 되심으로, 그리고 우리 대신 우리 죄의 삯을 받으심으로 장차 닥칠 응보적 정의의 공포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이로 해서 정의가 시행되었다. 용서받아야 할 모든 죄가 성자 하나님 안에서 심판받고 처벌되었으며, 바로 이것을 기초로 우리 범죄자들이 지금 용서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이제 복음의 핵심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는 인간의 죄이며,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마련해 주신 것이 진노에서 평화를 가져오는 화목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가장 심오한 복음의 메시지이다.

신약에서 말하는 죄란 우리가 사회적으로 저지르는 오류나 실패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 하나님에 대한 도전, 하나님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그에 따른 죄책이다.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죄로 인한 것이며, 자신이나 동료들과 잘못된 관계에 있는 우리의 현재 상태는 우리가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는 한 치유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평화’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평화는, 마치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삶의 가장 힘겨운 재난에서 보호해 주실 것을 아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하고 걱정 없는 내적 평온으로 생각하는 수가 많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하나님의 평화는 우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대적인 존재가 되는 대신에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 되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평화에 대한 설명 중 여기서 출발하지 않는 설명은 판단을 그르치게 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용서와 용납이라는 새로운 관계이다. 그리고 그 평화의 원천은 화목이다.

우리의 인도자 하나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인도는 고질적인 문제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인도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잘못으로 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바를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도가 실재한다는 믿음은 두 가지 기초적인 사실에 의거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재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와 의사소통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개개인에 대해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가? 확실히 그렇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 곧 그분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것에 따라 때가 찬 경륜을 세우셨다(엡 1 : 9~11)." 하나님은 고레스를 보좌에 앉히시고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스 1 : 1)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전을 짓도록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하셨을 때, 지기 백성들을 바벨론 유수에서 귀환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또한 그분은 예수님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녀들 각자에 대한 계획도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계획을 우리에게 전달하실 수 있는가? 확실히 그렇다. 인간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동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만드신 조물주 역시 의사소통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셨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님과 바울을 인도하셨다. 바울과 실라는 유럽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는다(행 16 : 6~10). 바울은 또한 그의 고린도 사역을 계속해 나가라는 가르침을 받는다(행 18 : 9~10).

그런데 진지하게 인도를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잘못되는 수가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인도의 본질과 방법에 대해 왜곡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을 홀리는 도깨비불 같은 것을 찾는다.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인도는 간과하고, 온갖 종류의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들의 기본적인 잘못은, 인도를 본질적으로 기록된 말씀과는 별개로 성령님이 주시는 내적 충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는 것 같다. 그들은 인도라는 말을 듣고는 즉시 특별한 종류의 ‘인도 문제들’을 생각한다. 아마도 그들이 읽은 책과 들은 간증은 계속해서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소명적 선택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 그 자체로 모두 적법하고 선한 것처럼 보이는 여러 선택 사항 중 하나를 택하는 것 - 과 관련되어 있다.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가? 아이를 하나 더 가져야 하는가? 이 교회에 다녀야 하는가, 저 교회에 다녀야 하는가? 내게 주어진 여러 직업의 기회 중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하는가? 내가 현재 일하는 영역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내가 자발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시간에는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가? 이러한 모든 것들은 소명적 선택들이다.

소명적 선택들의 경우, 이러한 문제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직접 적용해서 해결할 수 없다. 성경으로부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선택이 어떠한 적법한 가능성들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경계를 정하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성경 본문도 지금 그 여성에게 청혼하라고 하거나, 목사 안수를 받으라고 하거나, 영국에서 사역을 시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성경이 어떤 사람의 선택을 직접 결정해 줄 수 없다는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충동과 기호와 성향이라는 요소 - 어떤 사람이 어떤 종류의 책임보다는 다른 종류의 책임에 더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것을 묵상할 때 마음이 평안해 진다는 것 등 - 를 하나님의 인도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님의 내적 음성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시하는 삶이라는 개념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것은 성령님의 사역을 높이고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친밀함을 약속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상 이러한 초영성에 대한 추구는 엄청난 혼란이나 광기로 이끌 뿐이다.

성령님을 우리의 인도자로 존중하는 참된 방법은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수단인 성경을 존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형성하기 위해 주시는 기본적인 인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별개인 어떤 내적 충동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의 기본적 형태는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한 지침으로서 긍정적인 이상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 그리고 이러한 미덕을 구하라. 그리고 그 미덕을 힘닿는 데까지 실천하라.” “너의 책임, 곧 남편들은 아내들에 대한, 아내들은 남편들에 대한, 부모들은 자식들에 대한 책임을 알라. 모든 동료 그리스도인과 인간에 대한 책임을 알라. 그리고 그것들을 이행하기 위한 힘을 끊임없이 구하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바로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신다.

성경은 우리를 이러한 도로를 따라 이끌고 가기를 원하며, 성경에 나오는 모든 훈계는 우리가 그 길에 머물도록 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로마서 8 : 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내적 ‘음성’이나 그러한 체험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려진 죄를 억제하고 육신을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