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하나님의 신비
마이클 프로스트 지음/홍병룡 옮김
IVP/2002년 2월/200쪽/5,500원
▣ 저 자 마이클 프로스트
호주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널리 인정받는 뛰어난 강사이자 저자로서, 현재 시드니 Morling 신학 대학의 교수이자 부설 연구소 Centre for Evangelism and Global Mission의 소장이다. 저서로는 『Jesus the Fool』『Longing for Love』 그리고 로버트 뱅크스와 함께 쓴 『Lessons from Reel Life』가 있다.
▣ 역 자 홍병룡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IVP 대표 간사로 일했다. 캐나다 Regent College와 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에서 각각 공부하였고, 현재 호주에서 로버트 뱅크스 박사의 지도 하에 영국 옥스퍼드 선교 센타 박사 과정(평신도 신학 전공)을 밟고 있다. 역서로 『여성, 그대의 사명은』『레슬리 뉴비긴의 요한복음 강해』『소명』『서로 서로 세우자』외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헌신을 표현할 때 일상생활의 변두리만 맴도는 경향이 있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그러한 입장에 도전하면서, 우리가 눈을 크게 뜬 영성을 계발하여 아침이나 밤에 성경을 묵상하거나 기도하는 시간, 주말에 교회에서 지내는 시간뿐만 아니라 일과 시간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가정생활, 일, 여가의 세계에서 여러 예들을 들어가며 실제적으로, 때로는 도전적으로 독자들을 돕고 있다.
▣ 차 례
서문
1. 산문체 세상과 빛바랜 진리
2. 이목집중의 훈련
3. 전율을 느끼며 사는 삶
4. 이야기의 위력
5. 시간의 종교
6. 다른 사람 속에 계신 그리스도
7. 경이감을 느끼는 것도 영적 훈련이다.
후기 : 선재의식과 일상을 거룩하게 바치는 삶
일상, 하나님의 신비
마이클 프로스트 지음
IVP/2002년 2월/200쪽/5,500원
서문
그 어떤 것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평범한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극적인 초자연적 권능으로써만 일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물론 하나님을 특별한 사건에서 배제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이 단순하고 평범한 일 가운데 조용한 변화를 이루시는 모습 또한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초자연적 차원과 그 권능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차원만 추구하다 보면 잃는 것이 너무 많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놀란 듯 활짝 열려 있지 않다.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에서 하나님을 전환할 수 없는가? 부서지는 파도 속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가? 갓 태어난 아기의 해맑은 눈동자 속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도처에서 확장되고 있다. 우리의 눈을 열어, 굉장한 사건을 주목하는 만큼 이른바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자. 이제 당신은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1. 산문체 세상과 빛바랜 진리
성경 신학자 월터 브르거만은 교회의 사명은 ‘산문 일색의 무미건조한 세상에서 시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옳게 표현하고자 기술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복음으로부터 모든 활기(Life)를 짜내어 버렸다는 그의 지적인 일리가 있다. 기술위주의 사고방식은 신비로움(mystery)을 문제거리로 축소시키고, 확신(assurance)을 확실성(certitude)으로, 질을 양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에 성경적 신앙을 그저 다루기 쉬운 모양으로 만든 셈이다.
우리는 복음을 깨지기 쉬운 귀중품으로 생각해 왔다. 그것을 너무나 꽉 잡은 나머지 형태가 없는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브루거만이 말한 것처럼, “위험도, 에너지도, 가능성도 없으며, 새로움에 이르는 길도 없다.”
복음을 다루기 쉬운 기술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신비와 영성을 추구하는 시대에 구도자들은 교회를 지나쳐 버리고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적인 언어가 위험스럽고 흥미진진해야 하는 것처럼 시적인 기독교 신앙도 그러해야 한다. 21세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확실성(certitude)과 무의미함을 내어 버리는 탄탄한 시적인 믿음을 다시 발견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과 신약적 복음에 대한 헌신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기계적 등식에 따라 사고하는 데 익숙해질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하면 된다’는 식의 영성인데, 이는 거의 병적일 정도의 과도한 노력을 전제로 하는 신앙을 가리킨다. 이러한 노력은 자연스럽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자연스런 영성이 쉽고 게으른 영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덜 인위적이고 더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취업면접을 앞두고 하나님께 함께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그 분이 오시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교회 모임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그분을 으레 늦게 도착하는 귀빈처럼 여기고 초청한다. 또 장래 계획과 꿈에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 마치 그 분이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시간과 장소를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면서 살던가 어떤 공식에 맞추어 그분의 관심을 얻으려고 결사적으로 애쓰고 있다면, 속수무책으로 소진될 위험이 크다. ‘하면 된다’는 식의 영성은 결코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그런 영성은 결국 항상 바닥을 드러내고 마는데, 인간에게는 그걸 계속 지탱할 만한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경험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하라.”(눅10:8-9) 리처드 니버의 모델 중 ‘문화에 반하는 그리스도(Christ-against-culture)’ 모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경험세계와 동떨어진 신성한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그와 다르다. 그 분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고 말씀하신다. 그 둘을 갈라놓으려고 하면 알곡(그 나라)이 상할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로 다스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나라가 임한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잠실 운동장에서 보내는 반나절이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어느 날 월드컵 최종 예선전이 벌어지는 잠실 운동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게다가 당신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한다고 생각해 보라.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가을날, 기온도 최적이라 당신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하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우정 속에서 마음의 안정과 신뢰 그리고 친밀함을 느낀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 - 이 세상에 현존하는 그분의 나라 - 에 눈을 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완벽한 하루가 하나님의 은혜 곧 그분의 다스림을 체험하는 감격적인 순간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런 의식구조가 하나님 나라의 관심사 - 평화, 사랑, 소망 - 와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잠실 운동장에서 완벽한 하루를 보내면서 느낄 수 있는 만큼이나 고통, 비탄, 실망감 등을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 가운데 즉 얼굴에 따스하게 와 닿은 햇빛, 발가락 사이로 찰랑거리는 파도, 학교에서 돌아와 안아달라고 뛰어오는 자녀와의 포옹, 사랑하는 친구에게서 받은 위로 한 마디 등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음에도, 우리는 반드시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려고 너무나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날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셀 수 없이 많은 눈길, 그것을 알아볼 눈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분의 개입은 결코 제한되지 않으나 우리의 인식이 제한을 받을 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눈길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창조와 성육신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창조 과정에 본질적으로 개입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계속 창조하고 계신다. 그런 창조의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의 동반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빵을 맺는 나무를 창조하시는 대신 빵을 창조하셔서, 우리가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거두어 갈고 까부른 다음 빵을 굽도록 하셨다. 왜 하나님은 요술지팡이로 모든 싸움과 증오와 불평등을 몰아내고 온 세상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지 않으실까?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셔서 우리가 그분의 동반자가 되어 사랑을 창조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동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성육신이란 한 마디로 인간의 모습을 입은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일컫는 기독교 교리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고, 만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면 살게 될 바로 그런 삶을 사신 유일한 모범이신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복음서들을 정기적으로 철저하게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도 정기적으로 재복음화될 필요가 있다. 즉 그들도 복음에 거듭 거듭 침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관점은 우리가 어떤 천박하고 하찮은 활동을 창조적인 행위라고 정당화할 수 없게 한다.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신 사건은 이 창조 세계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 주는 척도가 된다. 그것은 항상 단순하거나 분명하지는 않다. 내가 처하는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바로 시적인 접근의 특징이다. 간단한 정답이란 없다. 그 대신 위험과 흥분과 온갖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2. 이목집중의 훈련
1943년 작고한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시몬느 베이유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탈창조화(decreating)함으로써 이 세계의 창조에 참여하게 된다.” 이 말은 내 생각에, 우리가 스스로를 점점 잃어버리고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갈수록 그 나라를 이루는 창조적 과정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된다는 뜻인 것 같다. 그녀는 또한 “기도란 한 마디로 이목집중의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냉담함과 게으름을 떨쳐 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부유하는 인생을 거부한 채 깨어 있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영적 안테나를 높이 세워서, 주변에서 하나님의 성육신적 창조성을 가리키는 신호를 감지하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만 자기를 계시하신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는 초자연적 능력이 펼쳐지는 굉장한 장면이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특별한 현상을 목격하기를 바라고, 그로써 하나님이야말로 놀라운 분이요, 우리에게 자기를 과시하는 분이라고 믿게 원한다. 그러나 만약 기도가 진정 이목집중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면, 최상의 기도는 우리의 냉소적이고 지친 눈을 열어서 하나님이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역사를 극적이고 굉장한 사건으로 한정시켰다. 소위 교회의 신성한 영역과 치유, 기적과 경이로운 사건에 그 분을 가두어 놓은 셈이다.
물론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시(詩)에 대해 배우고, 새로운 가능성 곧 우리가 속도를 늦추고 유심히 관찰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곁에 현존하고 있음을 재발견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마하트마 간디는 한때 “인생은 점점 더 바쁘게 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마치 오기 렌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던 것과 같다.
우리는 매순간의 격분에 싸여 눈이 가리워지고 모든 시적인 정서가 메말라 버린다. 또한 우리는 으레 상투적인 대답을 내놓고 무언가를 탐구하고 발견할 수 있는 역량을 차단해 버린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미적 감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형태든 상투적인 것이 가장 주된 적이라고 본다.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것을 그리 두려워할까? 즉 탐구과정을 없애고,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답을 주어 더 이상 알 필요가 없게 만든다(더 나쁜 것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기관이든 사람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동기를 부여하려면, 그들이 스스로 발견하게끔 능동적인 참여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흔히들 교사가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탐구심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가공된 정답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다. 눈을 떠서 보라고 요구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호기심이 발동한 적도, 흥미가 난 적도 없다. 설교시간에는 그저 멍하니 듣는 중 마는 둥 하면서 온갖 잡념에 빠지기 일쑤다. 설교가 끝나는 순간 우리는 성경을 덮는다. 최근 설교를 듣고 난 다음 집으로 가서 더 많은 것을 알아보기 위해 성경을 펼친 적이 있는가?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가졌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그들의 다시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염려된다(마 13:14-15, 표준새번역)
이로 보건대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목적이 반드시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난해한 개념을 명료하게 하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기존의 가르침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탐구심을 활성화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다 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을 헷갈리게 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유도하는 것이 더 낫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런 사람들, 곧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힌 이들이다. 비유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일종의 ‘솎아내기’ 기술로서, 눈을 열고 진리를 탐구할 준비가 된 이들을 찾는 방법이었다. 요즈음 교회 지도자들은 은유와 직유를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데, 주된 이유는 교인들이 잘못 해석할까봐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복음 전도사역은 별로 융통성이 없으며 종종 고정된 틀을 강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계심을 눈여겨 보라. 어떤 율법 선생이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자, 그분은,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5-26)고 되물으셨다. 즉 상대방에게 거꾸로 질문을 던짐으로써 적극적인 반응으로 동참하도록 촉구하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던지는 질문에 그저 대답만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게끔 만드는 분이다. 만일 누가 당신에게 과일은 통째로 주지 않고 입으로 다 씹고 난 것을 준다면 어떻겠는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하는 말이다. 그것은 무미건조한 산문체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의 반응을 요구하는 지혜의 시와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의문이나 회의 혹은 탐구를 피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환영하고 격려하신다. 우리의 의심이나 의문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이나 허위에 빠지지 않고 진실한 모습을 견지할 수 있게 하는 역량이다.
유대-기독교 신앙은 이 비종교적인 속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피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법, 평범한 것을 취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올림픽 육상 선수인 에릭 리델은 영화 <불의 전차>에서 주일에 열리는 경기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불멸의 영웅으로 그려지는 인물인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바람처럼 달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달리기를 신성한 활동으로 여기지 않지만, 리델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성별함으로써 신성한 것으로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수많은 방법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 - 그분의 말씀과 창조 세계, 예술과 인간 관계, 그 밖의 여러 경로를 통해서 - 을 재발견하려면 어느 정도 도움이 필요하다. 이제 당신의 눈을 크게 뜨고 뚜렷이 응시하지 않겠는가?
3. 전율을 느끼며 사는 삶
구약성경은 흔히 하나님의 은총을 강에 비유한다. 태양열과 가뭄에 익숙했던 히브리인들은 물이 지닌 양면성 곧 생명을 회복하는 힘과 파괴적인 힘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성경에서는 물이 하나님의 은총과 그분의 징벌을 모두 상징한다. 예수님도 친히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소생케 하는 생수의 강으로 비유하셨다. 왜 우리는 도시 한복판을 다닐 때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곶 마루에 있을 때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무럼비지 강과 같은 장엄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석양이 지는 광경이나 산 정상에 앉아 있는 것에 끌리는 이유는, 자연의 장엄한 경관이 저 우주에 우리보다 더 위대한 어떤 세력이 있음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다. 우리의 영혼은 종종 어떤 경외감을 느끼기를 갈망한다. 그렇게 장엄한 만남을 통해 이 우주에서 우리의 진정한 위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코페르니쿠스처럼, 그의 마음에
그 생각이 떠오른 바로 그 순간,
우린 지금까지 잘못 생각했어-이제야 그걸 알게 되었지,
우리가 모든 것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의 중심이 아니다. 마치 우리가 그런 존재인 양 행세하고 있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심리적․영적 차원에서 깨달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오순절 교회에 끌리는 것은 어떤 초월적 경험, 곧 자신은 작아지고 하나님을 광대하게 느끼는 체험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인 저자 게리슨 케일러가 한 말에 공감한다. “교회에서 적어도 한 순간만이라도 초월성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교회에 가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저 한 순간이라도 초월성을 경험한다면 당신은 교회에서 나올 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1917년에 오토는 “현대인은 제대로 전율하는 법조차 모른다.”고 지적했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그러한 전율을 너무나 간절히 원해서, 자연을 통해 혹은 영화나 롤러코스터, 콘서트 등을 통해 그 ‘거룩’을 체험하려고 한다. 모든 콘서트는 지난 번보다 더 경이로워야하고, 모든 공포 영화는 지난 번보다 더 스릴이 넘쳐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동경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만 해도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안위를 주는 동시에 우리를 두렵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임재다. 하나님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시고, 제자리로 돌려놓으시며, 우리 눈을 열어 이목을 집중하게 하시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시29:3-4)
히브리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자연 자체를 경배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매우 조심해 왔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창조 질서 가운데서 창조주의 손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연을 신성시하는 것 - 창조 세계 자체를 신적인 것으로 보는 것 - 은 늘 이단으로 여겨져 왔다. 성경은 창조주 대신 피조물 자체를 경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와 다름 없는 것으로 보고 용납하지 않는다. 사실 우상 숭배는 결국 우리를 싫증나게 한다. 한 마디로 그것은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을 예배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경외감도 없고 거룩한 존재를 만날 때 느끼는 전율도 없다.
루이스는 이처럼 창조 세계에 펼쳐져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체험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 생각에는, 짐승은 그것을 감상할 능력이 없고 천사들은 순전히 지성만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이 가장 위대한 인간 과학자들보다 색감과 미감은 더 발달되어 있겠지만 그들에게 망막 혹은 심미안이 있을까?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만 공유하시는 하나의 비밀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아마 우리가 창조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4. 이야기의 위력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차르 정권이 우크라이나 민족을 러시아 제국에 합병시키려 했을 때, 무력을 사용하기에 앞서 전국 방방곡곡의 이야기꾼을 잡아다가 모조리 전멸시켰다고 한다. 한 민족의 이야기를 말살할 수 있다면 그들을 정복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이 그 일의 배후에 깔린 신념이었다. 내러티브(narrative)가 우리 존재의 필수 요건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이야기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지라 어디서든 이야기를 찾게 마련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 독특한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엮여서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믿는지를 규정짓는다.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지성으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기에, 평상시에는 그것들이 내재되어 있거나 잠복해 있다. 상호 연계된 이야기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을 때는 우리는 그것을 신화라고 부른다. 일단의 사람들이 그것을 공유하고 있을 때 하나의 문화가 형성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이야기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인간의 상태와 경험을 조망하는 틀로 기능한다. 그러나 교회는 은유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뿐 아니라 덜 명료하지만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체보다 단순한 공식을 더 선호하는 형편이다. 우리는 은유에 담긴 풍성한 의미를 모두 제거한 채 자꾸 그것을 구체화하려 하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확실하고 간명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위험해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야기는 매우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
우리 문화가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을 내포하고’있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전통적인 신화와 통속적인 이야기를 통해 얼마든지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고 믿지만, 그럴 때 우리는 손에 성경을 꼭 쥐고 조심스럽게 그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존 몽고메리는 톨킨, 루이스, 체스터톤, 찰스 윌리엄스 등의 작품을 해석한 도전적인 저서 『신화, 풍유, 복음』에서 이 점을 강력하게 논증하고 있다.
위대한 문학작품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호소력이 있다는 이 보편적인 사실을 볼 때, 불신자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는 가상의 다리를 놓을 수 있음을 더욱 강하게 주장할 수 있다. 일반 독자가 당대의 위대한 문학 작품에 투영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 그 신앙의 가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몽고메리는 여러 본보기를 열거한다. 첫째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언급하는데, 이 작품은 인간의 상태를 마치 페스트에 전염된 도시처럼 치명적인 병에 걸려 도무지 치유될 수 없는 상태로 묘사한다. 조지오웰의 『1984년』은 인간이 타인에게 얼마나 비인간적이 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은 구체적인 죄목도 없이 심판대 앞에 끌려나온 한 남자를 통해 모든 인간의 운명이 마찬가지라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원죄 개념에 대한 하나의 고백이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 시리즈,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세속적 구원의 길의 부적합성을 보여준다. 몽고메리는 또한 많은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발견하는데, 그 예로 콘라드의 『로드 짐』,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등이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문학 작품을 믿음과 사상을 전달하는 정당한 의사 소통의 한 방식으로, 즉 고상한 대의 명분을 지닌 매체로 여겨 왔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교회가 대중적인 문화 양식을 버린 것은 유감스런 현상이다. 문학도 이야기의 한 형태이긴 하지만, 오늘날 그보다 훨씬 인기를 끌고 있는 매체는 영화다. 영화감독 조지 밀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가 이제 ‘새롭게 위장한 예배당’이 되었다고 시사한 적이 있다.
나는 이제 영화가 가장 강력한 세속 종교가 되었으며 현대인들은 과거에 교회에서 경험했던 것을 집단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영화관으로 몰려든다고 믿는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새로운 사제가 되었다. 그들을 종교기관이 하던 일을 상당 부분 맡아서 하고 있다. 종교 기관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은유를 너무나 구체화해 버렸고 종교적 믿음에서 시와 신비와 신비주의적 요서를 너무나 많이 빼 내어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데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종교적/영적 체험을 얻으려고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바로 그것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오랜 세월 동안 이야기꾼의 역할을 해 왔다. 과거에 교회가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취했을 때에는 영화를 악한 것으로 여겨 피했었는데, 그로 인해 화를 자초한 것 같다. 지금은 영화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리스도인 영화 제작자가 너무 드물어서 이 매체가 모조리 다른 이들에게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가지 염두에 둘 것은 모든 것을 갖춘 영화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주장을 완벽하게 제시할 수 있는 영화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희망에 불과하다. 사실 영화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혼재되어 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기 때문에 그들을 갈라놓으려고 하는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으므로 심판 날까지 그냥 두는 편이 낫다.
또한 어떤 이야기에 저속한 언어, 나체나 성적인 표현, 폭력, 신성 모독 등의 요소가 없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좋고 건전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한 <아프리카의 여왕>이나 줄리 앤드류스의 <사운드 오브 뮤직>, <어느 수녀의 이야기>, <증언> 같은 영화의 공통된 주제는 종교적인 삶은 바보 같은 것이므로 헐리우드에서 최고로 여기는 낭만적인 사랑에 의해 구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세계관을 형성하는 벽돌과 같은 것이며 불확실하고 혼란스런 삶을 극복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그것은 공동체를 창조하기도 한다. 미국인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와서는 『성품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에서 교회가 이야기 중심의 공동체로 그 정체성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나는 오늘날 교회가 그 애초의 비전과 특유한 성격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야기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정기적으로 복음서에 깊이 침잠하는 사람이 너무나 드문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상실해 가고 있으며 그 결과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독특성도 상실하고 있다. 또는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의 취향에 적당히 끼워 맞추고 있지 않은지 주의해야 한다. 그분은 그런 식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인 인물이고 그분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는 그분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이야기가 많이 있으며, 우리는 초대교회가 들려 준 그 옛날 이야기 곧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는 이야기에 끊임없이 침잠해야 한다. 복음서는 분명, 기독교의 비밀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보고다.
5. 시간의 종교
랍비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의 신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은 아예 의미론적으로 ’진리와 정의와 미국적 방식의 하나님‘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어떤 사상이나 원리 혹은 추상적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 스스로를 계시하신 대상이자 계시의 통로로 삼았던 역사적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현재는 과거와 단절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은 영원히 존재하며, 유대인들은 아직도 스스로를 현대의 아브라함으로 생각한다.
사건 가운데 즉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줄 곧 유대교 사상의 핵심을 차지해 왔다. 헤셸의 말을 들어보라. “우리가 공간 속에서 사물을 감상하고 서로 다른 점을 구별하듯 이 시간 속에서 이 순간과 저 순간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즉 각각의 사건이 지닌 독특함에 대해 민감해지지 않는다면, 계시의 의미는 그저 모호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헤셸이 지적하듯이(내가 즐겨 인용하는 대목인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많은 사건이 발생하지만 당사자(인간)조차 그것에 주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사건에 경각심을 갖고 주목해야 한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에서 뜻밖의 발견을 하지 못한 채 그냥 놓쳐 버릴 수는 없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날이 없었다면” 이 말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시공간 속에서 자신을 계시한다면, 우리는 공간에서뿐만 아니라 시간 속에서도 그분을 발견할 채비를 갖추어야 한다. 공간에는 어떤 건물이나 그림처럼 똑같은 두 개의 물체가 놓일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시간대에 일어난 두 사건은 결코 같은 사건일 수 없다. 한 사람의 생애 가운데 어느 두 시간도 똑같을 수 없으며 인류 역사 가운데 어느 두 시대도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발생한 사건은 다시 반복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눈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하는 사물에 열려 있어야 하는 만큼, 그와 같은 순간에 대해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다음 예를 생각해 보자. 만약 결혼이 그저 하나의 개념 곧 두 사람 간에 친밀함과 헌신이 점차 깊어지는 과정이라면, 굳이 날을 정해서 결혼식을 할 필요가 있을까? 만일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개인이 특정한 교리를 철학적으로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안수는 어떤가? 졸업식의 경우는? 그것은 우리가 어떤 특정정한 순간에 더 큰 진리가 표현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크로노스’(chronos)는 길건 짧건 측량이 가능한 시간 간격을 지칭한다. 시계 바늘과 같이 끝없이 흐르는 시간,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줄곧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키는 이 개념은 종종 ‘카이로스’(kairos)라는 헬라어와 대비된다. ‘카이로스’는 어떤 특정한 때 혹은 기회를 지칭하는 단어다. 때로 이 단어는 정해진 때 혹은 시기 적절함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과정과 사건의 차이는 무엇인가? 과정은 비교적 영구적인 패턴에 따라 정규적으로 발생하지만, 사건은 비정규적이며 특별한 것이다. 과정은 꾸준하고 연속적이며 획일적이지만, 사건은 갑작스럽게 간헐적으로 발생한다. 하나의 사건은 어떤 과정의 일부로 축소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측할 수도, 완전히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어떤 사건들을 의식한다는 것, 구체적으로 말해 계시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이 세상 속으로 들어와서 인간에게 그분의 뜻을 행할 것을 호소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붙든다는 것은 자기 신앙의 대상물을 붙잡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신자들은 십자가를 하나의 상징물 곧 공간에 제한된 어떤 물체로 여길지 모르지만,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상징하는 사건에 있다.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속한 것이다. 나는 십자가에 대단히 매료된 사람이다. 하지만 몸에 십자가를 지니고 다니지는 않는다. 내가 매료된 것은 사건 곧 하나님이 우리의 세상에 오셔서 나를 대신해 죽으심으로써 그분의 뜻을 행하라고 호소하셨던 순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단순한 교리를 초월하는 그 신성한 사건에 매료된다. 그러한 사건에 매료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는 다른 모든 사건을 우리가 자각하고 있음을 대변해 준다.
나는 종종 학생들에게 빔 벤더스(Wim Wenders)의 기념비적 작품 <베를린 천사의 시(Wings of Desire)>와 그 속편 <멀리, 더 가까이(Far Away, So Close)>를 추천한다. 이 영화들은 ‘인간의 몸을 입는 모험’을 달고 있는데, 다미엘과 카시엘이라는 두 천사가 무언가를 동경하여 인간이 되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좀 더 영적인 체험을 동경하듯이 이들은 좀더 인간적인 체험을 갈망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인간성을 거꾸로 비쳐 주는 거울이다. 이 영화들은 ‘인간의 몸을 입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들이 시사하는 바는 영원의 세계(‘크로노스’가 영원히 이어진 것)에도 ‘카이로스’의 순간, 곧 역사를 뚫고 들어오는 초월적인 순간에 대한 갈망이 항상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다미엘은 인간으로 변하기 직전, 자기의 열망을 카시엘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지금이란 말을 하고 싶어. ‘지금’,‘지금, 더 이상 ’영원‘이란 말은 싫어.” “전능하지 않아도 좋으니 예감이란 것도 느끼고 항상 ’예’, ‘아멘’이라고 말하는 대신 ‘아아’, ‘오오’하고 외치고 싶어.”
빔 벤더스의 영화 두 편은 천사보다는 우리 인간에 대해 말해 주는 바가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한 가지를 꼽자면,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영화에 나오는 두 천사는 철저히 곤두박질하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들은 타락과 회심의 과정을 통과해야 했던 것이다. 회심이 없는 영성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중에 이 문제를 더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회심이란 큰 희생이 따르는 값비싼 것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은 참 좋은 생각이지만, 우리가 눈을 열고 그 의미를 깨달으려면 상당한 값을 지불해야 한다.
눈을 열어 주변에서 신성한 것을 발견하기를 열망하는 이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전통적인 종교적인 영역을 넘어 확장되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 이들은, 뉴에이지 사상가들만큼이나 소위 뜻밖의 기이한 순간을 분별하는 능력을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꿈과 천사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통찰력을 얻는 이야기가 많다. 지금은 우리가 이목을 집중해야 할 때다.
예를 들어 꿈에 대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꿈을 물질적・물리적 차원을 초월하는 영역과 만나는 접촉점으로 여겼다. 이런 관념을 배제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직관과 치유, 예언의 영감, 방언, 꿈과 환상 등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초물리적/영적 세계가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의 순간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거나 꿈도 무시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되면 삶이 생명력을 잃고 마치 해부된 표본처럼 메말라 버린다. 어떤 것은 확실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 영향을 가늠해 볼 수는 있다.
세렌디피티의 사건, 천사의 활동, 꿈이나 환상을 간파하고 해독할 때, 나는 이야기와 소설, 영화를 해석하는 기술을 그대로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조와 성육신 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경험이 삶과 믿음을 고양시킬 때, 우리의 자각과 깨달음이 증진될 때, 우리의 삶에 창조적인 힘이 공급될 때, 그것이 천사의 활동이든 꿈이든 기적이든 상관없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다. 다만 그것이 성경의 명령이나 그리스도의 모범과 상치되지 않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평생에 걸쳐 이런 변증법적 관계를 붙들고 날마다 씨름한다. 어떤 사건과 순간, 경험에 직면할 때 끊임없이 해석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특정 과업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혹은 손에 쟁기를 들라고 요구하실 때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그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창조적이면서 성육신적인 것을 분별하는 훈련이다.
물론 이것은 위험하고도 어려운 과업이다. 답이 항상 간단명료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단순한 공식을 원한다면 다른 종교를 찾는 편이 낫다. 진정한 삶에는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를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위험하고 용기가 필요한 과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전이나 희생을 피하지 않고 충만하고 진실하게 사는 값진 삶이다.
6. 다른 사람 속에 계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좇는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 셈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항상 경감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수년 전 호주의 복음 전도자 존 스미스가 멜버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종교 세미나를 인도했을 때의 일이다. 1부 강의가 끝난 다음, 학생들이 낸 질문지에 답해주는 시간이었다. 대다수는 기독교 신앙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있었다. “제가 강간당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요?” 그것은 신학적 질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이기도 하다. 그 질문이 낭독되자, 존 스미스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전도자가 종이에 쓰인 절박한 질문에 담긴 고통으로 인해 강단에서 울고 있는 동안 모든 학생이 죽은 듯이 잠잠했다고 한다. 그 후에는 그 질문에 대해 신학적인 답변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강간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요?” 답은 이미 그 커다란 눈물 방울 속에 있었던 것이다.
스미스는 그리스도를 변호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그분의 크고 작은 은혜에 주목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볼 필요가 있다. 그 출발점은 우리 자신이 좀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좀더 열심히 주위를 관찰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의외의 인물을 통해 빛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간디는 분명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힌두교도라고 했다. 그래서 스탠리 존스 같은 사람이 예수님이 마하트마 간디를 통해 인도에 오셨다고 발언한 것은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존스는 인도에서 예수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이 간디 덕분이었다고 주장한다. 존스는 인도에서는 고난의 개념이 업보(karma), 곧 상벌의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모든 고통은 일종의 벌이며 과거에 지은 죄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면서 대속적 고난을 외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업보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예수님이 그처럼 끔찍한 고통을 바든 것은 그가 대단한 악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혼자 힘으로, 간디는 타인을 위한 고통이 가장 숭고하고 고상한 자기 희생적 선택이라는 사상을 인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심어 주었다. 선교사들이 50년이 지나도록 해낼 수 없었던 일을 간디가 시련과 투옥과 삶의 모범을 통해 이루었고, 이것이 바로 인도 사람들의 눈을 십자가로 향하게 했다. 존스의 표현대로 예수님은 변칙적인 통로를 통해 오신다. 하나님은 진정 신비로운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다!
위대한 신학자인 마르틴 부버는 우리 마음속에 사람을 각각 주체와 객체로 취급하도록 나눈 선이 있다고 말했다. 객체라는 말의 의미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에게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의 정도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반대로 타인을 주체로 본다는 것은 그들도 적어도 우리 자신만큼이나 복합적인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젊은이들을 싸잡아 게으름뱅이로 치부하든가 불신자를 모두 타락한 이교도로 취급할 때 우리는 객체로 보는 셈이다. 장애인이나 외국인을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런 모습으로 계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배제시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오직 나의 필요에 의해서만 인간관계를 맺고 타인을 독특한 존재 즉 주체로 보지 않는다면, 그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혹은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남을 객체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열려 있을 수 있는가? 질문을 좀 더 확대하면, 우리는 어떻게 눈을 열어 자연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혹은 이야기, 영화, 책, 기타 여러 매체를 통해서도 어떻게 하면 내가 눈을 떠 꿈과 천사, 기적과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을까? 대답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제대로 회심해야 한다. 이 때 회심이란 안일함과 구태의연한 공식을 완전히 박차고 나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관점은 새롭게 태어날 필요가 있다. 이 산문 일색의 세상에서 시적인 믿음을 동경하는 것 말이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더 현실적이고 참된 ‘두 번 태어난’ 믿음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상실이라는 중요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상실감, 문제제기, 회의와 같은 것은 참된 믿음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과정인데, 그런 신앙은 남에게서 그냥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나름대로 터득한 믿음이다. 한 번 태어난 믿음은 무언가 부족하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해답을 추구하는 믿음이다. 한 번 태어난 영혼은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해 모든 면 - 인간관계, 사업, 건강 등 - 에서 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타인을 이용해서 스스로 성공했다는 확신을 가지려 한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난 영혼은 자기의 존엄성이 그처럼 하찮은 데 있지 않음을 알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한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거듭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 의문을 해결하고 고통을 완화시키려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불확실성과 실망에도 흔들리지 않는 회색지대에서 적합하게 대처하는 믿음을 개발하게 된다. 이런 믿음은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쉬운 대답을 거절한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치 못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정말 용납하신다는 것을 믿게 해줄 다른 방도를 찾으려고 야단법석을 떤다. 우리가 그분의 끈질긴 사랑에 마음이 녹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분의 순전한 은혜로 거듭날 때, 우리의 눈은 비로소 열리게 될 것이다. 이목집중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7. 경이감을 느끼는 것도 영적 훈련이다.
심리적・영적으로 속도를 늦추고(신체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은 많은 이에게 아직 생소한 훈련이다. 평범한 것을 진정으로 자각하고 경이감을 느낄 수 있는 자질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고귀한 목표다. 체스터톤은 우리의 영원한 영적, 심리적 과업은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질 때까지 응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셨던 분이다. 종종 그분은 일상적인 것들을 언급하면서 그것들이 더 넓은 진리를 보여 준다고 지적하셨다. 그분은 들의 백합화를 집중해서 바라보시고 그 꽃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보살핌을 깨달으셨다. 그분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동자에서 참된 겸손과 깨달음(우리 모두가 애써 추구해야 할)을 보셨다. 그분은 또한 겨자씨, 밭 경작, 포도원, 집안일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그분에게는 분명 경이감을 느낄 역량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눈을 뜨는 것이 왜 그토록 힘든 것일까? 첫째, 오늘날 우리는 실용적인 학문에만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목표지향적이며, 결과중심적이며, 성취에 사로잡혀 있다. 교회도 이런 문화적 질병에 걸린 것 같다. 교회 역시 사회의 여타 부문과 다름없이 점점 더 기업화하고 있으며 사명 선언문, 목표설정, 연간 달성도를 따지고 있는 형편이다. 교회도 ‘생산성’을 높이려다가 부지 중에 종교적 신앙을 하나의 상품으로 변질시켰다.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라. 수많은 출퇴근 인파를 헤치고 나갈 때 오로지 그 친구의 얼굴을 찾아내는 일에만 관심을 쏟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이미지 등 주위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을 지나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대체로 어디서나 적용되는 현상이다. 우리가 목표 달성에만 집중한다면 그렇다. 목표와 목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목표 달성에 대한 강박 관념을 갖고 있어서 경이로운 것을 보고도 놀라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장애물은 자기몰입이다. 우리가 타인을 볼 때 단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지 혹은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지의 여부로만 그들을 판단한다면, 상대방을 진정한 의미에서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볼 수도 없다. 즉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하고 우리의 필요가 모두 채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세 번째 이유는 왼쪽 두뇌로 정보를 경직적으로 입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엄격한 지적 판단 기준에 따라 사물을 평가한다. 우리는 기술이 이성에 속박되어 구체적인 면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한편 경이감은 우리를 불확실한 장소, 신비에 싸인 곳, 생소한 경험으로 초대한다. 롤해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면서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너를 잘 이해하고 있지, 네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성격 테스트 결과나 너의 애니어그램(Enneragram) 유형도 알고, 네가 자란 배경은 역기능 가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 그 밖에도, 네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이나 프랑스인의 기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 그리고 너는 어머니를 쏙 빼 닮았어. 정말이야, 나는 너를 정말 잘 안다구!” 그러면 당신은 상대방이 당신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겠는가? 복잡한 자신의 존재를 그처럼 단순한 잣대로 정의하려는 시도에 대해 기분이 상할 것이다. 그래서 롤헤저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을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과 비교해 보라. “나는 너를 별로 이해하지 못해! 너는 정말 신비에 싸인 존재야! 내가 너를 안 지 20년이나 되었지만 너는 지금도 계속 나를 놀라게 한단 말이야!” 마르틴 부버의 명언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를 수 있는(be addressed) 대상이지 제대로 표현되는(be expressed) 대상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경이감을 더 자주 느낄 수 있을까?
․ 용기와 더불어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머리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 모든 것을 논리와 이성의 눈으로 평가하는 사람, 신앙의 영적 차원보다는 인지적 차원에 더 치중하는 사람은 용기를 발휘해서 무엇이든 통제하고픈 욕구를 과감히 버리는 용기를 발휘하여 두 눈을 활짝 열어야 할 것이다.
․ 둘째(특별한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감사의 마음이 경이로움에 눈뜨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는 그분의 사랑에 언제나 눈이 열려 있다. 그것은 때로 반가운 모습으로 때로는 달갑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랑이란 항상 고통 없이 기분 좋은 방식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슬픔이나 실패, 고통이나 불행과 같은 것을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는데, 감사의 마음을 가진 자는 그 안에 담긴 진실을 볼 수 있다. 즉 그런 경험을 통해 결국 우리가 성숙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 경이감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중요한 자질은 겸손이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허물 많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 인간 본연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감사와 겸손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 넷째, 순수함을 되찾는 것이 눈을 뜨는 지름길이다. 카톨릭에서는 이것을 처녀성의 회복(revirginisa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더 순진하고 순수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세상의 타락상과 악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모두 망각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냉소주의와 독선을 갖다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이전에 쓴 책 『바보 예수』에서 나는 예수님이야말로 지극히 소박한 인물이었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호흡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공기의 존재를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듯이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공기를 제대로 마시도록 폐를 잘 돌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운동과 심호흡이 필요하다.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아주 간단한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당신도 이 기도를 한번 드려 보라. 아직 그런 적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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