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가는 설교
데이비드 버트릭 지음/김운용 옮김
요단/2002년 12월/282쪽/8,500원
▣ 저 자 데이비드 버트릭
금세기 설교신학의 최고 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미국 밴더빌드 대학교 신학부에서 오래 동안 예배와 설교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저서로는 ECPA가 1988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바 있는 『설교학』 외에도, 『현대설교론』 『생생한 비유설교』 등이 있다.
▣ 역 자 김운용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신학대학원과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과 예배학을 연구하였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역서로는 『증언의 설교학』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우리는 지금 급격한 문화, 사회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다. 서구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하던 모더니즘이 그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사조가 형성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 변화로 인해 영향 받고 있는 설교의 현장을 바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설교사역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되고, 급격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변화는 기존의 가치체계와 의식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오늘날 지식체계와 인식구조를 바꾸어 놓았고, 설교환경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지가 오늘을 사는 설교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시대가 바뀌고 삶의 방식과 환경이 달라진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도 당연히 변모해야 하고, 새롭게 부응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각 시대마다 설교자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언제나 설교를 새롭게 하며, 바르게 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이러한 노력이 오늘 우리에게 더욱 강력하게 요청된다.
이 책은 새로운 시대로 옮겨가고 있는 과도기의 설교자가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민감성과 함께 어떻게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지난 몇 세기 동안 교회와 설교자들이 사로잡혀 있던 틀에서부터 해방되어야만 이 시대 속에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선포를 기대할 수 있으며, 그리 될 때 설교가 제 기능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차 례
제1장 설교와 성경
제2장 설교와 교회
제3장 설교와 문화
제4장 설교와 방법론
시대를 앞서가는 설교
데이비드 버트릭 지음/김운용 옮김
요단/2002년 12월/282쪽/8,500원
제1장 설교와 성경
미국 교회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 한 손에 성경을 펴들고 설교하는 것을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강단에는 언제나 커다란 강단용 성경이, 성경의 중간 정도가 되는 시편 부분에서 펼쳐져 있다. 가끔 부흥사들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음률에 따라 설교를 하기도 한다. 분명히 미국 개신교 설교자들은 성경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설교는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하는가? 정확하게 성경과 설교는 어떤 관계인가?
우리 모두는 20세기 '성서신학운동'이 낳은 후예들이다. 성서신학운동은 20세기 초에 나타난 것으로, 이 운동의 결실로 많은 주석들이 발간되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각 출판사들은 성서연구자료 출판으로 무척 분주했다. 신학교 학생들은 활짝 웃으면서 경쾌하게 노래를 불렀다. “오 성경, 그것은 나를 위한 책이로다!”
설교학에도 이 운동은 유사한 영향을 미쳤다. 1907년 포사이스는 예일 대학교의 설교학 강의에서 성서적 신앙과 성서적 설교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1928년 칼 바르트는 성경을 의인화하면서 성경은 인류에 대한 구원의 관심을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열정적인 목소리라고 주장했다.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은 큰 영향력을 미쳤다.
바르트는 설교자는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성경만을 설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경본문의 반복적인 낭독이 된다. 즉 설교가 세상에 대한 적절한 언급 없이 마치 성경을 낭독하는 자의 무의식적인 입술운동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성경적 설교와 관련하여 분명히 해야 할 사항이 있다.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복음전파를 위한 설교들이 언제나 성경본문을 중심으로 한 성경적인 설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복음전도는 모든 곳에서 행할 수 있는 경기와 비슷하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칵테일 라운지에서도 행해질 수 있는 것이 전도이다.
교회 밖에서의 설교는 일반적으로 성경을 근거로 해서 시작되지 않는다. 대신 복음전도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빛줄기 안에서 사람들은 삶의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성경구절을 설교하는 데 있어서의 이론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인간들은 태어나서 죽는 존재이며, 기억과 희망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사건들을 펼쳐 보이고자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삶의 의미들이 이야기와 같이 조직되어야 한다. 요약하면, 인간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구조를 통해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제공하는가? 성경은 신비로운 이야기 등을 펼쳐 보여주며 교회의 비전을 새롭게 해준다. 성경이 제공하는 것은 창조와 타락, 카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 바벨탑의 이야기들과 같은 정교하게 제시되는 신비적인 시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나 에스겔서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인류 역사의 완성으로써의 종말과 함께 주어질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 사이사이에서 하나님께서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한 일련의 거대한 이야기들을 대하게 된다.
모든 구절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은 창조부터 시작하여 종말까지의 이야기들에 의미를 부여해주며, 사이사이에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간들을 어떻게 조정하시는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해주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몇몇 구절들에는 기독교와 관련성이 없거나 부차적인 내용들도 있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시초부터 종말까지의 신비한 비전은 성경의 서사성 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이야기가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어떤 틀로써 창조와 종말의 상징들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야기에 의해서 형성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출생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하며, 실로 인간의 의식이 형성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창조와 타락, 카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와 무지개, 그리고 종교성을 띠었던 바벨탑 이야기의 상징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충분한 사회적 의미를 제공하며, 그 의미들은 우리 삶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을 채우고 있는 복합적인 이미지들은 결론과 같이 제시되는데, 의미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본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교회 없는 야영지로, 이제 더 이상 애국주의나 전쟁, 편견, 상함이 없는 곳을 묘사하면서 성경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의 세계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다시 한 번 질문을 반복해 보자, 성경구절들을 설교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데 있었다.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설교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된 문서로써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금세기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근본사상들은 뒤집어진 것처럼 보인다. 오직 성경만이 온전한 권위를 가지며, 설교는 부가적인 행동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즉 설교는 성경에 대한 부속물처럼 여겨진다. 오늘날 사람들은 소위 유대교 전통에 의해서 적법하게 요리된 음식물처럼, 모든 설교는 반드시 성경을 언급하면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단적인 성향이 강한 것으로, 혹은 아주 심한 자유주의 경향이 강한 것으로 단정해 버린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좋은 선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씀으로 매일 기쁨을 누릴 수 있고, 또 그러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깊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선물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분명하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달콤한 지식이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정해진 일정한 성경이 없이도, 복음을 설교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설교이다. 예언적이고, 열정적이고, 신학적으로 깊이 고려된 복음의 소식들에 대한 설교, 우리를 하나님의 새로운 속성 가운데로 불러 세우시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그 설교를 원하신다.
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설교가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는 복음의 복된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 가운데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방시킨다. 설교가 교회의 보호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또 성경구절들을 나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렇다. 성경은 수 천 년 동안 계속된 믿음의 행진 속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거룩한 목소리들을 함께 모은 고상하고 거룩한 책이다. 그러나 성경이 여성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데 사용되거나 인종과 특정그룹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든지, 동성애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인격을 계속적으로 비하하는 데 사용될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가?
성경과 설교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와 진위가 결정된다. 설교나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온전히 증거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단지 성별된 문학적인 대용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 그 자체이다.
우리에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해방하시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자체가 성경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계속 하나님은 사람과 같이 동등됨을 취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설교의 목소리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
우리는 단지 교회만을 위하여 설교하지 않는다. 성경이 널리 알려지고 널리 인정을 받게 하기 위해 설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려는 구속 목적에 우리 목소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이다. 이 목적 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
제2장 설교와 교회
성전의 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그림이 높이 걸린 성당이 있다. 그 그림은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주님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거대한 검이 나오는 것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 검은 아래로 향하고 있는데, 우리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일마다 예배당에 모이는 우리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날카롭고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는 자들이다.
훌륭한 유대인이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말씀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신비로운 본성을 드러낸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셨는지를 기억하였다. 에스겔의 눈을 감동으로 열어 환상을 보여주시고, 이사야의 입술에 숯을 대며 말씀하셨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구약성경에는 “주의 말씀이 임하시니….”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곳만 500곳에 이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말씀하셨으며, 예레미야와 에스겔, 호세아와 미가, 그리고 스바냐와 말라기 등 많은 다른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택하신 설교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해 예언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의도는 위대하고 찬란한 시온에 대한 비전이었다. 이스라엘은 사회적 윤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성경의 기록은 두 종류의 설교를 포함한다. 세상을 향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교회 밖에서의 설교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돕는 교회 안에서의 설교가 그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세상을 향해 새로운 질서의 표지가 되어야 하며, 동시에 빛과 소금이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행하는 양육을 위한 설교든, 교회 밖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는 설교든, 모든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능을 부여받는다. 궁극적으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인간의 말이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힘과 지혜로 가득 차 있으며, 세상적으로는 약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감추어진 구속의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요즘 들어 교회의 위상이 높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설교의 위치가 갈수록 내려앉는 분위기이다. 교회들은 마케팅 기술에 따라 그 위치가 상승되기도 하고 하강하기도 한다. ‘교회성장을 위한 경영원리’라는 표어에서 볼 수 있듯이, 목회자들은 교회사업가로 전락하고 있다.
종교 ‘시장’에서 영혼을 위해 경쟁한다면 설교는 청중이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지배받을 것이다. 청중들이 치유를 원한다면, 설교자들은 치유에 관해 설교해야 할 것이며, 청중이 자부심을 갖도록 해주는 위로의 설교를 갈망한다면 설교는 늘 낙관적인 관점으로 행해져야 할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설교자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필요에 따라 총명한 신학자가 되고, 주석가가 되고, 교사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설교자들이 청중들을 단순히 ‘돕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목회자는 회중들을 위하여 돕는 자가 되는 것이 그 본연의 목적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물론 설교의 역할에 있어서 변화는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주요 교단들은 오늘날 잔뜩 위축되어 있다. 그러한 교단의 교인수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몇 년 전 ‘둔즈베리’ 만화는 교회당이 거의 텅 빈 교회에서 적은 무리의 노인들에게 설교하는 턱수염 난 둔즈베리의 목회자가 "우리의 전성기는 다시 올 것입니다."라고 설교하는 것을 만평으로 실은 적이 있다.
교회가 자신을 보존하려고 할 때 그들은 전도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은 크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우리의 전도의 사명을 강조한다. “가서 전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명령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전도분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교파적인 자기이익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종교시장에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을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되고 있다.
요즘 미국에서는 주요 교단의 교회에서 교인들이 줄고 있기 때문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심한 공포심에 붙들려 있다. ‘개혁교회 전통’이라고 부르짖는 것도 마치 나이 든 배우가 “그 공연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것과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외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전통은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소식에 의해 다시 점검되어야 한다.
“가서 전하라.”는 명령은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러나 전도는 최근 교회성장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하는 심리학적 개인주의 사이의 덫에 걸려 있다. 둘 중 그 어느 것도 크게 마음을 끄는 것은 없다.
복음의 소식은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며, 때로는 기존의 사회적 안정을 깨뜨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을 약속해 준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여, 오라. 와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형성해 다오.’ 그것이 기독교 전도의 핵심이다.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비전은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성경의 페이지마다 가득 채워져 있다. 하나님의 세계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계급주의와 같은 흠이 없는 화해를 위해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전쟁의 공포는 사라졌으며 완전한 샬롬의 세계가 임한다. 그러한 비전은 성경의 페이지마다에 가득 채워져 있지만, 이 땅에서 이루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에 묘사된 거룩한 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꿈은 근거 없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설교강단은 ‘우리는 죄인입니다!’라는 엄격한 사실성과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비전 사이에서 말씀을 전하도록 다시 한번 부름을 받고 있다. 설교자들은 우리의 죄악으로 흉한 상처자국뿐인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임하고 있음을 선포하도록 세움 받았다는 것을 명심하자!
제3장 설교와 문화
몇 달 전 한 젊은 학생이 나의 연구실로 찾아와 자신은 자그마치 네 부류의 회중 가운데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첫 번째 부류는 1950년대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인데, 그들은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불평하는 사람들이며, 더 많은 교인 수와 보다 큰 교회 건물을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또 1960년대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두 번째 부류는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었다. 그 뒤를 이어 1970년대부터 신앙생활을 한 세 번째 부류는 믿음생활에 있어서 관망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젊은 목회자는 주로 1980년대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네 번째 부류와 가까이 지내왔는데, 그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로 가득 찬 사람들로, 그 옛날의 신앙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떤 문화 안에서 형성되기 시작할 때는 사상과 하위문화 공동체라는 서로 다른 토양에서 파종되며, 그 안에서 자라간다. 그리하여 그 토양의 문화와 함께 자리 잡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 신앙은 자리를 잡게 된다. 물론 문화변혁의 시기에는 기독교 신앙이 하나의 자취로만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어느 시기에는 기독교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을 수도 있다.
문화가 새롭게 형성되는 기간의 설교는 대중적인 언어로 자유롭게 행해진다. 그 언어는 일상의 대화에서 사용되는 언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설교는 상상력과 정확성을 통해 그 자체를 늘 새롭게 설명하는 기독교의 신앙표현이다. 즉 “그것은 이것이고 그것은 저것이다.”를 정확하게 전달하되 효과적으로 전달하여야 한다.
문화적 전성기의 설교는 상당히 판에 박혀 있다. 그것은 단일의 방법론만을 가진다. 대개 수사학이나 설교학은 보다 일찍이 연구되었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의 『기독교의 교양』은 중세 수사학 과정을 밟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이었던 책이다. 무엇보다도 전성기에는 안정된 어휘들과 공통적인 언어관습들을 가졌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에라스무스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수사학이 새롭게 다듬어진다.
문화적 붕괴의 시기에는 일반적으로 연극무대에서 희극과 같은 익살극과 멜로드라마가 증가하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설교는 문화적 붕괴의 시기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언어가 메마르기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인 수사학적 관습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언어는 실제로 줄어들고, 우리의 사회적 어휘는 적어지고 언어는 대체적으로 추상적이 된다.
현대 설교는 최소한의 공통된 언어만을 사용하는 것 같다. 즉 바쁜 일상의 중심에서 널리 사용되는 언어를 말하는 것 같다. 우리의 설교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일으킬 만한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언어는 예리하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인의 세심함도 거의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되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행하는 설교는 청중들의 구미에 맞게 더 단축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토대로 한 짧은 설교를 준비하느라고 오늘도 분주하다. 문화 붕괴의 시기에는 전통적인 수사학적 지혜가 더더욱 유효하지 않다. 즉 수사학은 더 이상 사람들이 실제로 듣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는 연관성이 없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문화적 붕괴’라는 말은 우리 시대를 잘 설명해 주는 단어이다. 서구 강국들이 분명하게 쇠퇴하고 있는 반면, 제3세계의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목소리를 발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시대 속에서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 설교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기독교를 지금 혼란 속에 있는 문화적 형식화로부터 분리하여 구별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강단은 문화적으로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미래에 힘이 될 현대문화의 전면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아야 한다. 또한 새로운 시대에 일치하는 여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많은 진통 가운데 변화하고 있는 문화의 토양에 믿음의 씨를 뿌려야 한다.
지난 50년 동안 설교학은 성서신학운동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제 설교는 보다 자연스러운 결연관계를 갖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철학적 신학과의 대화를 시작하여야 한다. 철학과 수사학이 서로 손을 잡듯이 철학적 신학과 설교학이 적절하게 손을 잡아야 한다.
문화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 우리는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명령받았다. 그 복음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복된 소식이다. 동시에 우리는 옛 질서 가운데 서 있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성만찬적인 표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새로운 창조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문화 속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의 징표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 문화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의 경향은 세상과 깊이 관련되는 것인 반면, 다른 하나는 세상을 거부하는 경향이 될 수 있다.
신앙은 문화적 개념과의 혼합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시대정신으로부터 돌아서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맡겨야 한다. 그것이 그 시대를 위하여 설교자들이 행해온 것들이다. 그리고 신앙은 언제나 전달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신앙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의 복음은 의심할 것 없이 오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계속되어야 한다.
제4장 설교와 방법론
정기적으로 설교하는 설교자는 새로운 설교방법을 원한다. 보통 설교자의 경우 일 년이면 설교집 한 권이 넘는 분량의 설교를 준비한다. 매주, 매월, 매년 반복해서 이 위압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 중에는 타성에 젖어 설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더 좋은 설교를 위해 방법론적인 훈련을 계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하루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 모든 설교자들은 쉽고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빨리 준비하는 설교가 아니라 좋은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삶을 파고들어가는 유용한 설교를 하고 싶어한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면, 회중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황급히 준비한 엉성한 설교를 견딜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안일하게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설교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초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으로써 적합한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서서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빠르고 쉽게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을 선호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설교가 인정할 만하고 가치 있는 설교인가 하는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청중들에게 유용한 설교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많은 요구들로 뒤덮여 있는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할까? 우리에게 적합하면서도 신뢰할 만한 설교 방법론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성경의 단 한 구절을 본문으로 택하여 설교하는 훈련을 받았다. “형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이라.”와 같이 우리가 단 한 줄의 본문을 택했다면, 우리는 단일 주제를 성경본문의 덩어리로부터 추출해 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본문의 전체 스토리를 상실한다.
이성적인 설교학은 성경의 구절들을 마치 그것들이 정지되어 있는 정물화처럼 취급한다. 성경본문을 연구한다면 그림 안에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 보충 설명하고, 설교에서 언급하게 될 어떤 것을 취하게 된다. 그렇게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박식한 역사비평학을 따르는 주석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구절들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정적인 정물화가 아니다. 그것들은 이야기처럼 움직임을 가지며, 에피소드와 에피소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생생한 대화들을 주고받으면서 진행해 간다.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것은 한 편의 시와 같이 이미지들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방법을 따라서 설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미는 사상이나 사건의 움직임 속에서 생성되며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결코 정적인 진리가 아니며, 하나의 이해로부터 다른 것으로의 움직임을 포함한다.
종종 전통적인 설교는 본문에서 대지들을 추출해 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사랑’에 대해 설교하려고 한다면, 주제에 관한 사항들을 분류하여 나타내게 괸다. 즉,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설교의 주제를 분류할 수 있다. ① 가족들 간의 사랑 ② 교회 안에서의 사랑 ③ 세상 가운데서의 사랑. 이러한 대지로 분류한 것에 결론을 맺기 위해 예화를 한편 곁들이게 되면 설교준비가 완성된다.
이렇게 분류하는 식의 대지 만들기 설교에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한 설교형태는 본질적으로 지루함을 야기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첫째, 둘째, 셋째 하면서 설교자는 쉽게 분류된 대지를 펼쳐 보이지만 회중석에 있는 청중들에게는 참으로 듣기 어려운 설교가 된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러한 대지설교에 있어서 서론은 마지막 문장과 같은 암시가 포함된다. 즉 “그래서 사랑은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 가운데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와 같은 결론적인 이야기를 암시하고서 시작된다. 그러한 암시문장이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아주 쓸 만한 형태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회중들은 설교의 핵심을 미리 밝혀주는 문장을 대하면서 세 개의 대지로 언급될 사항들을 미리 알아차리게 된다. 무엇이 언급될 것인지 미리 알고서 시작되는 설교에서는 특별히 놀라운 사실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첫 번째 대지, “가족간의 사랑”에 대한 말씀이 9분 걸린다면 우리는 설교자가 다음 단계로 전환하기 위한 연결구를 통하여 다음 두 번째 대지 “교회 안에서의 사랑”으로 전환하기까지 언제 두 번째가 나올 것인가 하는 기다림 속에서 계속되는 신경과민을 경험하게 된다. 설교자는 청중들이 지루해할 것을 염려하면서 두 번째 대지는 7분으로 줄이고 더 많은 예화를 첨가한다. 그리고 설교자가 마지막 대지, “세상 속에서의 사랑”으로 전환할 때, 청중들로부터 거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올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대지설교가 수월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들에게만 그렇게 느껴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설교방법론은 정적이다. 또한 움직임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흥분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설교들이 청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들릴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의미 있고 소중한 순간을 말할 때 어떤 범주 혹은 단계를 나누어서 묘사하는가? 그렇지 않다.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로 말하거나 묘사하려고 하는 것을 규명하기 위해 서로 관계된 사항을 들어가면서 어떤 의미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서는 목록을 만든다. 식료품 목록이나 혹은 여러 세탁물들, 즉 많은 여자 속옷과 셔츠, 많은 양말들을 분류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위해서 대화목록을 작성하는가? 즉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저는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와 같이 말이다. 아마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겨가면서 서로에게서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제공받기도 하면서 깊은 사랑의 대화를 나눌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목록을 분류하여, '첫째, 둘째, 셋째….' 하면서 대화하지는 않는다. 학교 교실에서도 학습을 위한 교훈적인 방법을 지혜롭게 재정의 하고 있다.
오직 설교 강단만이 ‘아직도 대지를 만드는 것’에 매달려 있다. 복음을 설교함에 있어서 우리는 고정되어 버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우리 앞에 걸려 있는 포스터와 같은 말씀이나 대지를 나누어 논의하는 식으로 전해지는 말씀이 아니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서 우리의 청중들과 함께 여행한다. 그러한 여행은 아주 다른 설교방법론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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