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
데이빗 A. 씨맨즈 지음/윤병하 옮김
두란노/1992년 10월/143쪽/3500원
▣ 저 자 데이빗 A. 씨맨즈
데이빗 A. 씨맨즈는 『상한 감정의 치유』 『좌절된 꿈의 치유』 『탓』등을 저술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인도 선교사였던 부모님을 따라 16년 간 선교 사역을 했다. 애즈베리, 드류, 하트포드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켄터키 주 윌모어 소재 애즈베리 신학대학원의 명예 교수로 재직중이며, 아내 헬렌과 플로리다 주 노코미스에서 살고 있다.
▣ Short Summary
어느 한 사람이 성년기에 들어서면 그의 어린아이 같던 성향은 점차 사라지고 성인 성향이 새롭게 자리잡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연령으로는 성인인 사람들 중의 다수가 감정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어린아이임을 알았다. 그들의 생일 횟수는 그들의 나이를 말해주지만 그들의 행동 성향은 아직 그들이 어린아이의 단계에 머물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 속의 어린아이는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 속에 머물러 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우리 안의 어린아이’를 과감히 버리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숙한 크리스천에로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될 것이다.
▣ 차례
머리말
1. 우리 모두 속에 숨은 아이
2. 기억의 치유
3. 어른됨을 가로막는 어린아이의 좌우명
4. 또 다른 어린아이의 잘못된 생각
5. 사랑과 결혼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6.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7. 기도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8. 아동기의 혼란 대 성인의 특징
11. 삶의 궁극적인 고민
12. 재구성하시는 은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
데이빗 A. 씨맨즈 지음/윤병하 옮김
두란노/1992년 10월/143쪽/3500원
1. 우리 모두 속에 숨은 아이
언제였든 어떻게였든 당신은 아이였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어린아이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소년기 때나 10대 때의 우리는 늘 우리 안에 존재해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숨어있는 당신의 과거 아이는 확실히 살아 있으며 좋게든 나쁘게든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 속의 아이는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는 우리를 바로든 비뚤게든 인도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떠들썩하고, 법석 떨며, 매우 버릇없는 역할을 하고, 그가 좋아하는 일이면 시끄럽게 뛰어들기도 한다. 결국 그는 현재 성인의 삶에 적응을 못하고 의미 있는 모든 관계 속에서 상처를 내고 이를 파괴시키게 된다. 그런가 하면 당신의 내적 아이는 너무 수줍고 겁 많고 연약하고 자기 혐오적이다. 당신이 아무리 원해도 동료를 얻지 못하게 하고, 당신이 가진 의견을 말하지 못하게 하며, 중요한 책임조차 맡지 못하게 한다. 내적 아이는 결국 당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을 막는다. 내적 아이가 행사하는 이 능력 때문에 당신 안에 존재하는 내적 아이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당신이 과거를 돌아보아 내적 아이가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행동이 무엇인가 찾아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당신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한 부분, 용서함과 용서됨이 필요한 부분, 치유되어야 할 부분, 매일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되고자 했던 모습 - 성령의 치유하시는 능력으로 자유케 된 하나님의 자녀 - 으로 회복될 수 있다. 당신의 내적 아이가 숨어 있는 부분을 찾아냄으로써 그를 내쫓을 수 있는 것이다.
변화될 수 있는 아이
약 20년 전 심리학자 휴즈 미실다인(Hugh Missildine)은 『당신 과거의 내적 아이 Your Inner Child of the Past』라는 베스트 셀러 한 권을 써냈다. 아직까지도 이 분야에서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는 이 책은 우리의 성격 형성에 부모의 행동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내적 아이는 가정이나 편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모습이 나타난다. 성숙한 삶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친한 동료들, 룸메이트, 애인, 직장동료, 가족과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내적 자아가 점령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적인 모습을 띌 때 우리는 매우 공손해지고 훈련된 모습이 된다. 거리가 있는 이들과는 항상 매우 성숙하고 합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러나 가까운 인간관계 안으로 돌아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정, 사랑, 결혼 또는 매우 두터운 동업 관계에서는 얼마나 빨리 내적 아이가 이를 지배해버리는지 모른다. 그는 매우 불합리하고 완고하며, 명령적이거나, 수줍어하고, 겁 많고, 연약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에 우리 자신이 충격 받을 정도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당황해하는 아이
우리가 내적 아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특히 부부의 애정 생활에서다. 단지 두 사람이 결혼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말씀은 옳다. 그러나 문제는 네 사람이 결혼했다는 것이고 집이 뭔가로 와글와글 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성인과 또 두 명의 내적 아이가 함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일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쉬며 우리를 털어놓는 집은 다시 과거의 아이들로 되돌아가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러한 이유로 남편이나 아내의 내적 아이는 재미를 붙이고 집을 뛰어다니게 된다. 이 넷이 부딪치는 부분은 재정, 애정, 성생활, 아이 교육에서다.
조정될 수 있는 아이
과거에 머물고 아이 같은 반응만 하는 사슬에 묶여 있으면 우리는 가정이나 사람과의 관계 속에 사랑을 전달할 자유를 상실한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행동은 하지 않고 반응만 할 뿐이다. 우리는 가끔 응답하지만 창조적인 사랑엔 낯설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중심에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우리를 성숙케 하는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창조적 능력과 새로움을 전달해준다. 그러나 당신 과거의 숨겨진 내적 아이를 처리하기 전에는 이런 사랑이나 성숙을 볼 수 없다. 당신의 교만함을 내려놓고, 자신을 정직하게 직시하며, 모든 일을 성령님께 맡긴다면 성령님은 당신 삶의 중심에서 일 하실 것이다. 이것을 원한다면 성령님께 당신의 실체를 보여주시길, 그리고 타인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시길 시간을 할애하여 간구하라.
2. 기억의 치유
1966년 ‘성령과 우리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제목으로 두려움과 망설임 속에 어느 주일 저녁 설교를 했던 것을 난 기억한다. 그 설교만큼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들어 쓰신 설교는 더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 설교 테이프는 온 세계로 퍼져나가 자신들의 감정에 속박 받던 이들을 풀어주는 도구로 쓰여졌다.
잠재의식
과거의 문제아가 확실히 나타나는 부분은 그 자신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곳인 우리의 기억에서이다. 당장 무의식에 대해 얘기하고픈 충동을 느끼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좀 과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우선 나는 잠재의식, 또는 자각 전 의식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무의식에 대한 과대 강조의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된 행동 책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전가’가 목적이 아닌가 한다. 아직 그 의미에 끌린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무의식은 실체나 어떤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이란 당신 인격의 깊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기술적 묘사 언어이다. 당신 마음의 잠재 의식층을 뭐라 부르든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경험한 어떤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혹 기억해 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의 기억 속에 살아 있게 된다. 그것들은 당신의 기억 창고에 쌓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멋진 사실은 당신이 성령님께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한 잠재의식을 정결케 하며, 기억의 창고를 채우도록 허락한다면 하나님은 이것을 당신 인격의 가장 창조적인 부분으로 만들 실제적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잠재의식은 악과 비극도 만들어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잠재의식은 고통도 될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어릴 때의 고통스런 기억과 연관되어있다. 이런 기억을 우리 마음 밖으로 몰아내려 하면 할수록 실제적으로 기억은 더 깊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데까지 묻혀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경험하고 표현 못한 감정이 상처받았을 땐 표현될 길이 막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가슴에 살아있는 채로 묻혀 엄청난 완고함과 폭발력을 지니게 된다. 그런 기억을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그 엄청난 노력은 우리 에너지의 상당량을 소모하게 만든다.
잠자고 있던 그 과거의 아이가 깨어나면 개인의 행동, 반응, 외모, 행위 전반을 지배하면서 감춰졌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 깊은 우울, 분노, 걷잡을 수 없는 정욕, 열등 의식, 고독, 거절당한 느낌으로 표현되는데 그런 고통스런 기억들은 회심의 경험이나 성령 충만으로는 자동적으로 변화되지 않는다. 은혜 안에서의 성숙으로도 꼭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런 기억들은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된다.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에게 있어 실제 성숙이란 없다. 불행히도 그런 기억들은 우리의 평범한 기도로는 미치지 못할 부분인 것 같다. 어떤 때는 기도가 고통을 더 악화시키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특별한 중보 기도와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것은 그의 현재 생활에선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유의 기도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요한 것은 고통스런 기억을 치유하는 기도이다. 즉 그들의 아동기와 십대 때 일어나 그들의 성숙을 막고 있으며 성장의 한 단계를 묶어두고 있는 그런 경험들을 치유하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모든 기억은 치유의 기도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상처받은 우리의 내적 아이를 돌보실 수 있는 영원한 현재이시다. 내 경험으로 치유가 필요한 아이는 다음 네 명의 아이들 중 하나 꼴이다. 상처받은 아이, 미움받은 아이,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아이, 그리고 두려워하는 아이가 그들이다.
믿음의 기도
믿음의 기도가 만병통치의 도구가 아니며, 또한 치유의 기도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도 물론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이들에게는 바로 적용된다. 그 차이는 어쩌면 우리 삶에서의 큰 각도 차이일 수 있다. 나는 성령님께서 이 같은 치유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적용시키실 것을 믿는다. 기억의 치유는 마음 깊숙한 곳의 적극적 개방과 다른 이들과의 나눔을 필요로 하고 당신 행동을 위한 다른 이들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은 성령님께 새로운 통찰을 구해야 하고 또 당신의 방어벽을 허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치유되기 원하는 부분, 즉 당신에게 고통을 주며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는 모든 기억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뢰하고 진정으로 믿음의 기도를 할 줄 아는 이와 함께 기도하라. 그와 함께 주님과 대화하듯 하는 기도가 가장 좋을 것이다. 모든 느낌, 그런 기억들과 관계되어 경험한 모든 감정들을 하나님께 고백하라. 만일 새로운 것이 떠오른다면 바로 중지하고 같이 얘기하라.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기억하라. 그분은 바로 여기 계신다.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아픈 경험으로 되돌아가실 수 있다. 그분에게 고백하며 각각의 경험들, 각각의 감정들, 각각의 행위들을 그분께 드려 당신을 사랑하시고, 위로하시고, 용서하시도록 하라. 그분께서 당신의 증오를 닦아내시고 상처를 싸매며, 음욕을 제어하고, 두려움을 내어쫓으시게 하라. 그리고 특별히 그분이 당신을 용서하시듯이 당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용서하라. 만일 당신이 타인을 위해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성령님께서 당신의 영과 그의 영을 같이 녹여주시도록 기도하고 끝으로 성령님께서 그분의 일을 어떤 식으로 하실지는 요구하지 말라.
3. 어른됨을 가로막는 어린아이의 좌우명
조건 붙은 관계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사랑과 애정을 유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수준에서 그들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좀더 잘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하든, 먹든, 예의가 바르든, 성적이 좋아지든, 또래들보다 신앙생활을 잘하든 간에 우리는 조금만 더 잘하게 되면 인정하고 사랑하리라 약속한다. 그러다가 사랑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희망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현재 이룬 성취 정도는 낮추어지거나 묵살된다. 우리는 “사랑한다. 조금만 더 잘해다오.”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번번이 “좀더 잘하면 사랑해주지.”라거나 “네가 좀더 잘해야만 우린 너를 사랑하고 기뻐해 주마.”라고 들려지게 된다.
브래드라는 목사가 열성이 있고 신앙의 기복이 심한 기독교인이었을 때의 경험을 우리에게 얘기했다. 겉으로 보면 그는 굉장한 성과를 거둔 성공적인 목사였다. 그러나 그는 내면적으로 요요(yoyo)와 같이 영성의 높낮이가 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당구공 같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신감의 한 면에서 정죄감과 죄책, 그리고 우울의 면으로 튕겨 다녔다. “한 2년 전 성령님으로부터 갑작스런 통찰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나는 내 삶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지배되고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대신 49년 동안 부모님이 내게 심어준 어린 시절의 ‘모토(Motto, 좌우명)’가 나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어릴 때 심어진 모토였음을 알기 전까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대단한 어린 시절의 모토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좀더 잘해봐!”였다. 브래드는 말했다. “부모님이 내게 심어 주려고 하신 건 그것이 아닌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마치 그 말이 ‘좋다. 우린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네가 좀 더 잘 할 수 있다면 더 사랑할 수 있을 거야!’ 라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성령님께선 그의 참 모습을 보게 하셨고 그의 삶의 참 동기를 보여주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고 온 이 말이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를 포함한 모든 관계에 영향을 끼쳤음을 깨달았다. 49년 간 그는 더 이상 잘할 수 있으리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드디어 이 모토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지금은 성령님 안에서의 참 자유를 배우고 있습니다.”
콤플렉스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과 ‘자라감’의 총체적인 과정을 성격 콤플렉스 측면에서 살펴보자. 콤플렉스의 의미는 ‘인격 전반에 지배력을 발휘하는 억눌려진 욕구와 기억의 묶음’이다. 유해한 아동기의 모토와 연관시켜볼 때, 콤플렉스란 우리의 과거로부터의 건전하지 못한 감정의 공격이라 하겠다. 우선적으로 “좀 더 잘해.”라는 모토에서의 병든 내적 공격으로 파생된 콤플렉스는 두 가지이다. 먼저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며 자기 비하로 채우는 ‘열등 콤플렉스’가 있다. 또 우리가 이룬 것보다 더 잘해내야 하고 해낼 수 있다라고 느끼게 하며 자기 무시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완벽 콤플렉스’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훈련과 연습이 영적 어린아이됨에서 떠나 성인으로 자라감에 기본이다. 이것은 혼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이 신뢰하는 친구나 목사 또는 기독교 상담자가 필요하다. 성령님과 협력하여 “좀 더 잘해.” 콤플렉스에 따라다니는 양 극단의 감정 진폭을 좁히도록 노력하라.
다음은 자신들의 불안한 결혼생활에 도움을 얻기 위해 찾아왔던 로저와 바브 부부의 이야기다. 정기적인 가정 예배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은 파경에 이르게 되었다. 신실한 신자로서 주님을 수년간의 결혼생활 가운데 모시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더 낙심하고 낙담했다. 개인적으로 만나보니 둘은 “좀 더 잘해.”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는 완고한 기독교 가정 출신이었고 그녀는 비신자 가정 출신이었지만 기본적 환경은 거의 같았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수한 업적을 나타내면 그들은 인정이라는 대가를 받았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거나 아주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게되면 그들 부모는 그들을 걱정과 실망으로 대했다. “남들이 뭐라고 말하겠니? 부모인 우리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겠니?” 그들 부모의 안정감과 자존감은 로저와 바브의 성공적인 업적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므로 “좀 더 잘해.”의 의미는 “네가 실패하면 우리 얼굴에 먹칠하는 거다.”라는 것으로 그들 성격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들이 결혼 첫 해 그 어렵고 많은 적응을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그 후 마침내 그들은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의 고통과 요구에 대해 깊이 나눌 수 있었다. 특별한 의미에서의 기도는 로저와 바브가 어린아이 같은 행위를 버리도록 해 주었고 하나님 외엔 기대할 수 없는 완전함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4. 또 다른 어린아이의 잘못된 생각
또 다른 해악이 되는 어린아이의 모토는 잘못 지도된 문화에서 온다. “용감한 아이는 울지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남성들과 수백만 결혼을 무너뜨렸는지 모른다. 이 빡빡한 어린아이의 모토가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쳐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어린아이의 모토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또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표현해선 안 된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파괴적인 모토를 살펴봄이 더 좋을 듯하다. 예수님의 감정 생활을 살펴보고 그분의 삶에서 과연 어떤 감정이 표현되었고 또 그것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우리들 중 하나이셨음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보다 그의 감정에 대해서 더 인간적이셨다. 진정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조용하고, 고요하며, 냉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슬퍼하거나, 화내거나, 애곡하거나, 노여워하거나 무엇에 의해서도 요동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됨의 뚜렷한 증거로서 ‘큰 바위 얼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면 이것은 매우 혐오스러운 거짓 인상이 되는 것이다. 아직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 다다르려고 노력하고 필요없는 죄책감에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께선 그분의 감정을 표출하시는 데 전혀 두려움이 없으셨고 그분의 감정에 대해 타인들의 이목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슬픔과 비탄
예수님께서 비탄과 슬픔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우리에게 실마리를 줄 수 있는 두 사건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깊이 존경하던 세례 요한이 목베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마 14:13) 바로 이것이 우리가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취하는 행동이 아닌가? 두 번째 사건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슬픔을 다루시는 두 번째 통찰을 얻게된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예수님께선 그분의 슬픔을 울음으로 표현하는데 대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공개적으로 우셨음을 알 수 있다.
분노
더욱더 우리가 다루기 어려운 것은 그리스도인 사이에 가장 터부시되고 있는 분노의 감정이다. 예수님께선 화를 내신 적이 있는가? 안식일에 손 마른 한 사람을 고치시려 할 때였다.“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 3:5) 나는 그리스도의 분노가 그의 완전함의 일부분임을 믿으며 그분의 이 같은 분노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된 분노는 결코 없다고 믿는다. 분노란 죄가 되는 감정이 아니다. 사실 죄가 되는 감정이란 없다. 단지 감정의 죄된 사용이 있을 뿐이다. 분노는 우리 감정의 바닥에서 진흙을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분노는 진정한 거룩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작열하여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분노와 동정
분노와 동정은 동전의 양면이다. 분노는 꼭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어떤 때는 사랑의 결과이기도하며 가장 명확한 표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절대 분노를 당신에게서 지우도록, 또는 떨어져나가도록 기도하지 말라. 성질을 없애 달라기보다는 성령님의 지배 아래 놓여지도록 기도하라.
문제 안은 마음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때의 감정을 뭐라 칭할 수 있을까? 그건 그분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찾고 행하고자 했던 고초라는 의미에서 ‘문제 안은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고초는 많은 감정의 혼합이어서 뭐라 표현할 수 없다. 거기엔 고독이 있었다. 거기엔 시험이 있었다.
온전함과 거룩
성숙함이란 온전함과 거룩을 이야기한다. 성숙된 거룩은 우리의 참 인간성 회복을 뜻한다. 거룩함과 온전함의 중심은 타인과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앎과 사랑에 있다.
5. 사랑과 결혼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미국의 결혼한 사람의 거의 200만이 감정적으로나 영적으로 이혼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같이 구혼을 하고 어린아이 같은 생각, 이해심, 교통함으로 결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이 환상은 침대에 들기 전 어머니나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듣던 것처럼 멋진 왕자가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한다는 동화에서 시작한다.
사랑과 결혼 분야에서 심리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어린아이의 일’이라 부른 그것을 ‘로맨틱한 발육 부진’이라 부른다. 환상으로 가득 찬 자기 중심적인 사랑으로서의 로맨틱한 발육 부진과 성경에서 얘기하는 사랑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숙한 결혼은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가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결혼은 이 셋의 매우 값지고 불안정한 균형이다.
결혼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의견 교환이다. 결혼이 불행하게 되는 최대의 이유는 배우자가 상대방과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사랑스럽게 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이 어린아이의 수준에 남아 있는 것이다. 당신이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게 되는 것 같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 감정이 넘쳐나다 보면 깊은 긍정적 감정도 표현하게 된다.
6.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하나님의 뜻’을 여러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혼돈이 오는데, 여기엔 최소한 세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서의 완전한 뜻, 하나님의 상황 변화에 맡겨놓은 허락 가능한 뜻,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목적․계획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은 당신과 이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다.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이 허락 가능한 하나님의 뜻은 이 타락한 우주에 작용되는 것이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좌절되지 않는다. 사고나 비극, 그리고 도덕적 악은 무서운 고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그분의 목표를 이루어 가는 우리에게는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시키거나 우리 삶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꺾지 못한다.
7. 기도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하나님의 뜻에 관해 계속 살펴보면서 특히 우리의 기도, 즉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끼치는 부분에 적용시켜보자. 거짓되고 미성숙한 기도의 개념은 성숙하고자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 가장 파괴적인 요소가 된다.
하나님의 불가능성
우리가 늘 듣던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구절의 다른 면, 즉 어떤 것은 하나님께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회교도의 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이슬람에선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분의 능력은 절대적이고 임의적이기에 무제한적이란 얘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쪽에 서서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 자신의 도덕적 성품과 그분이 창조하신 도덕적 존재를 포함한 그분의 세계에 심어 놓으신 어떤 자기제한의 한계로 인해 제한된다라고 얘기한다.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과 하지 않으시는 것들을 보자.
-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역하지 못하신다.
- 하나님은 자신의 법을 침해하실 수 없다.
-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실 수 없다.
성숙한 기도
죠지 뮬러는 “성경에서 빗나간 기도는 90퍼센트가 환상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어린아이 때는 상상의 환상에서 산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들이 성장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반 진실은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
인디아에서 있었던 젊은 선교사의 죽음(맹장염인데 치유 기도하다 사망)도 ‘하나님이 기도로 치유하시느냐.’가 아니라 ‘이 치유를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어 내시느냐.’인 것이다.
신앙과 기도 그리고 자만
기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진정한 성숙이 없이는 ‘자만(presumption)'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우리는 우리 걸음을 과하게 떼어놓고는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도록 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자만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모든 면에서 자만은 하나님께 대항하고 그분과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죄로 규정되어 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문제
성경 안에서조차도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많은데(모세, 하박국, 시편기자, 바울....) 응답되지 않은 우리 기도의 이유를 살펴보자.
- 우리가 바른 것을 구하지 않는 이유에서다.
- 우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유에서다.
수용됨과 인정됨의 차이
우리는 많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수용됨(acceptance)과 인정됨(approval) 사이의 혼동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아이들이 한 일에 대한 부모의 불만족이 그들의 하나의 인격체됨까지 거절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지 않은 가정 안에서 흔히 나타난다. 인정은 수용이고 불만족은 수용, 거절, 아니면 추방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시험과 죄의 차이
어떤 이들은 시험과 죄에 대한 근본적이고 극심한 혼동으로 고통을 받는다. 우린 성경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정죄 아래 있게 하는 사단의 간교한 먹이인 시험(temptation)에 대한 실제적 개념을 가질 수 있다. 우선 모든 사람이 시험을 받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자.
아픔과 손상의 차이
고통(hurt)당하는 것과 손상(harm)받는 것 사이의 혼동은 우리 아동기와 십대에서의 또 하나의 부작용이다. 그러나 아픔과 손상의 차이를 모르는 가정, 즉 훈계와 처벌의 차이, 알코올과 분노의 차이, 야단침과 포기해버림이 마구 뒤섞여 있는 가정에서는 아픔을 당하면 손상받게 된다.
어린아이같이 감정에 의지함
사도 바울이 사용한 ‘어린아이같이’라는 말은 성경에 흔히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성인이 어린아이의 무책임한 행동을 나타내고 있거나 성장이 중단된 어른을 얘기할 때 쓰여졌다.
감정과 인격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 경험으로 그들의 인격, 성향, 기질을 모두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에 깨진 환상으로 고통을 겪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근본적인 인격 구조는 바꾸시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 그대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 감정은 우리 성격 중에 가장 다양하고 신뢰하지 못할 부분이다. 우리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
감정과 확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 확신의 근거를 감정에 전적으로 매달린다. 감정이란 지극히 가변적이고 신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의지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감정과 인도하심
많은 사람들이 인도하심의 기본을 감정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가장 위대한 약속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는 것이다. 인도하심은 이렇게 전해진다.
- 하나님의 말씀
- 외적인 환경(열리고 닫힌 창문)
- 당신 자신의 가장 이상적인 사고
- 다른 그리스도인의 충고
- 당신 감정의 내적 음성
감정과 선행
어떤 사람들은 선을 행하는 동기를 감정에 의지한다. 죤 웨슬레는 ‘선을 행하기 전 좋은 느낌을 기다리는 죄’를 공격하는 설교를 했다. 선행을 하기에 앞서 좋은 느낌을 기다린다는 것은 죄다. 당신은 지금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선행과 봉사의 어떤 것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10. 자아와 자기 포기의 어린아이 같은 개념
자아(self)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가? 자기 포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음, 자아의 죽음, 십자가 위에 버린 자아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리가 자아와 자기 포기의 잘못된 마음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신앙생활은 실망과 비탄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자기소멸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살아있으며, 없어지거나, 흡수되거나, 녹아진 것이 아니다.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구원의 최고의 절정에 이르게 되더라도 당신과 나의 자아됨은 소멸되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 그분에게서 당신에게 주어진 당신의 에고(ego)는 영원히 당신 마음에 심겨져 있고 자아됨은 소멸되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자기멸시
자기 부인을 자기 멸시로 착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자기 사랑의 알맞은 부분을 찾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 사랑을 바로 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자존과 존경, 그리고 고결과 주체성 안에 자신의 자아됨을 붙드는 자기 수용과 자기 사랑이 필요하다.
자기실현
낙관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요즘에 나타난 또 하나의 부적당한 자아의 반응은 바로 자기 실현이다.
자기포기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포기하고 내 삶의 중심을 그분께 드려 그분의 권위 밑에 나 자신을 바칠 때만이 나는 내 모든 자아와 더불어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1. 삶의 궁극적인 고민
궁극적인 영적 전투
자기 포기는 그것이 궁극적인 영적 전투를 대표하고 있음으로 해서 삶의 궁극적 고민이다. 예수님의 성육신(kenosis), 자기 비움(self-emptying)과 자기 포기의 첫 단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빌 2:6)로 자신을 비우셨다. 그것이 첫 단계였다.
모든 것을 포함한 고민
자기 포기는 삶의 다른 고민과 비교해볼 때 모든 것을 포함한 고민이다. 내가 갈등을 느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나의 감정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이다.
삶의 본질
자기 포기는 이것이 삶의 본질적인 비밀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고민이다. 이것은 나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존재가 되는 것이고, 나의 유일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 포기는 부활이 따르는 죽음이다. 생명을 잃으면 얻게 되고, 얻으려 노력하면 잃게 된다는 역설이다.
12. 재구성하시는 은혜
책임
예수님께서는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하는 모든 시도나 핑계들을 물리치는 놀라운 방법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항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책임을 통감하게 만드셨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모든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음에 동의할 것이다.
용서된 자아
그리스도인이 성인기에 들어서는 첫걸음은 용서되고 잊혀진 죄에 대한 자기 정죄와 어떤 왜곡된 형태의 내적인 속죄라도 그것을 끝마치는 것이다. 죄책감에 물든 자아는 용서된 자아가 되어야 한다.
치유된 자아
- 분노의 빨간 깃발
- 두려움의 노란 깃발
- 폭행의 검은 깃발
포기를 뜻하는 백기
어린아이 같은 것들이 없어지는 과정엔 크든지 작든지 마찰이 있다. 그리고는 최후로 무조건 포기의 백기를 들기까지 자신을 쳐 복종케 하는 결정적인 전투를 치른다. 그 후에 그리스도의 깃발이 게양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주권을 선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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