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침묵
래리 크랩 외 공저/윤종석 옮김
IVP/2003년 9월/262쪽/9,000원
▣ 저 자 래리 크랩
플로리다 애틀랜틱 대학 심리 상담 센터의 소장을 역임한 뒤 개인상담소를 개업하여 10년간 열정적으로 헌신하였다. 현재는 유명강사이자 베스트셀러 저자이며 모리슨에 위치한 콜로라도 크리스천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특히 지역교회에서의 영적 리더십과 진정한 공동체의 역할에 공헌하고 있다. 저서로는 『결혼건축가』『인간이해와 상담』『영적가면을 벗어라』『격려상담』이 있다.
▣ 역 자 윤종석
서강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상담학, 골든게이트 신학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역서로는 『결혼건축가』『예수가 선택한 십자가』『영적 리더십』『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진정한 남성으로의 부르심은 결코 인기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외로움으로의 부르심,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행위로의 부르심, 지혜를 배우는 필수 수단인 고통으로의 부르심이다. 그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 혼돈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불평이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이다. 전문가가 제공해 주는 인위적인 불을 끄고 하나님의 빛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라는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아버지와 형제가 되려고 힘쓰는 남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선명히 보아야만 지탱할 수 있을 만큼 큰 대가이다. 첫째, 그 대가에는 평생의 싸움을 싸우려는 각오가 포함된다. 정욕에 대한 싸움이 있다. 거기서 승리란, 반드시 충동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충동에 저항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때로 이해할 수 없고 간혹 단절의 상처로 끝나는 대인관계상의 마찰에 대한 싸움도 있다. 모든 좋은 움직임을 정지시킬 듯 위협하는 무거운 낙심에 대한 싸움도 있다. 둘째, 남성상으로의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보여 주는 가시적인 증거가 전혀 없는 긴 시절을 보내면서도 그분이 이미 말씀하신 바를 붙들려는 각오가 필요하다. 셋째, 부르심에 따르는 대가에는 겸손히 낮아지려는 각오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향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차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도록 하는 것밖에 없는 차원까지 낮아져야 한다.
남성성의 길은 험난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가치가 있다. 그것은 다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의미를 가져다준다. 만족의 계절과 기쁨의 순간들도 있어, 타락한 남자들이 감히 오르리라 상상도 못할 높은 자리로 우릴 데려다 준다. 우리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순간들에 하나님의 성령님이 커튼을 걷으시고 우리 눈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 주신다.
▣ 차 례
제1부 뭔가 대단히 잘못됐다 : 상실된 꿈
1. 남자의 비전
2. 남자답지 못한 남자, 남자다운 남자
3. 요리법 신학
4. 어둠 속으로
5. 혼돈에서 혼돈으로
6. 기억하라는 소명
7. 그는 거기 있었으나 침묵했다
결론
2부 뭔가 핵심이 빠져 있다 : 남성의 관계문제
8. 어둠과 싸우는 남자들
9. 남자답지 못한 남자들의 대인 관계
10. 남에게 챙겨 달라고 요구하는 남자 : 의존 욕구
11. 다른 사람이 필요 없는 남자 : 강자 욕구
결론
제3부 뭔가 강력한 길이 있다 : 멘토 세대
12. 아버지 : 우리를 믿어 주는 남자
13. 형제 : 비밀을 나누는 남자
14. 꿈의 회복 : 멘토 세대
아담의 침묵
래리 크랩 외 공저/윤종석 옮김
IVP/2003년 9월/262쪽/9,000원
제1부 뭔가 대단히 잘못됐다 : 상실된 꿈
남자의 비전
결혼한 지 2년이 채 안 됐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길을 잃은 듯 혼란스러웠고 화가 났다. 그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곤 자기 아버지와 대화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이해해주고 곁에 있어 주고 자기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관여해 주고 존중해 주기를 원했다. 강의를 늘어놓거나 모른 척 물러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의 영웅이었고 모든 좋은 것의 모델이었다. 아버지는 정숙한 어머니와 결혼해 34년 간 탈 없이 살아왔다. 어머니는 불평이라고는 모른 채 늘 가정주부로 살아온 분이었다. 그의 기억에 어머니는 인근 아동 병원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었지만 - 어머니는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다 - 아버지는 언제나 미소로 어머니를 묵살했고 가족 부양은 자기 몫이라고 은근히 꾸짖듯 일깨우곤 하셨다.
교회에서도 아버지는 훌륭한 모범이었다. 장로인 아버지는 매달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눠 주었고, 신임 협동 목사가 주중 기도회와 성경 공부를 가정 모임으로 대치하자고 했을 때 그것을 지키려고 싸웠고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만인이 다 알았다), 십일조를 충실하게 냈고, 거의 매일 밤 가정 예배를 드렸고, 세 자녀를 늘 잘 단속했다. “장로님 가정은 정말 선한 증거입니다.”라는 말을 수시로 들을 때마다 아버지는 늘 미소 지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아버지를 집까지 차를 타고 가는 20여 분의 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는 왜 이렇게 숨 막힐 듯 가슴이 답답할까? “아버지?” 그는 말문을 열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 결혼생활이 엉망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미소. 어머니를 34년 동안 집에 묶어둔 그 미소. 남들이 겸손으로 보아 온 그 미소. 처음으로 그는 자기가 그 미소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깨달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두 권의 책 제목, 에베소서 5장을 읽으라고 권고 그리고 모든 것을 주께 맡기라는 말씀이 전부였다. “하지만 아버지!” 그는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 책들은 다 읽어 봤고, 에베소서 5장도 공부해 봤고, 기도도 할 만큼 했습니다. 아버지께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고 왔습니다!”아버지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사람을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전에도 아버지의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지만 자기가 그 대상이 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침묵. 무서운 긴장의 순간이 흐른 후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 한마디 없이 방을 나갔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다. “그 날 처음으로 나는 우리 아버지가 약한 남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진 남자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내 사무실 책상 옆쪽 벽, 날마다 내 눈에 띄는 자리에서 무디의 말이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하나님이 그분께 철두철미 완전히 바쳐진 남자와 함께, 그런 남자를 위해, 그런 남자를 통해, 그런 남자 안에서, 그런 남자 곁에서 어떻게 역사하실 수 있는지 세상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나는 그런 남자가 되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전기 즉 오스왈드 챔버스, 루이스, 존 낙스, 조나단 애드워즈, 어거스틴, 예레미야, 바울 같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즐겨 읽는다. 그들의 생애를 읽다 보면 성숙한 남성상에 대한 현대의 개념이 지난 세대 경건한 남자들이 이해하고 실천했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인상을 받는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약한 면을 내보이며 아픔을 느끼는 용기에 대해 많이 말한다. 그들은 예배와 증거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우리는 정직한 커뮤니케이션과 잠재력 실현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상한 심령으로 무릎을 꿇었고, 일어나서는 타인을 섬겼다. 이들 옛 남자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게 막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것을 상대로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오늘 우리가 개발하려 애쓰는 덕목들이 그 남자들에게는 자연스레 찾아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는 소그룹으로 모여 감정을 나누고 좀더 친밀한 관계나 자존감의 회복의 원리를 논한다. 그들은 입에서 하나님 이야기가 술술 나오고, 예고 없이 언제라도 기도에 들어가는 남자 선배들과 함께 긴 시간 산책을 했다. (수년간 지속된) “영혼의 어두움 밤”을 지나던 어느 날, 오스왈드 챔버스는 스코트랜드 출신의 나이 지긋한 친구 존 카메론과 함께 개 두 마리를 끌고 토끼 사냥을 나갔다. 산행의 목적은 사냥이었지만, 풀이 우거진 강기슭에 이르렀을 때 카메론은 잠시 멈춰 기도하자고 했다.
챔버스는 그 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무릎을 꿇었고 그가 기도를 인도했다. 이어 내가 기도를 시작했으나 여태까지 그 할아버지가 기도하는 동안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던 어린 콜리 개가 나를 자기놀이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지 사방으로 날뛰며 내 온몸을 긁어대고 얼굴을 핥으며 신나게 깽깽거렸다. 카메론은 일어나 개의 목을 단단히 잡고는 ‘조용조용. 자네가 기도하는 동안 내가 개를 깔고 앉아 있겠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했다.
오늘날 신앙을 가진 남자들은 편리한 하나님, 당장 유용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하나님과 조용히 교제할 기회보다는 군중에게 우러름 받는 스릴에 더 취한 지도자들이 그런 하나님 상을 부추겼다.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오래 남은 죄는 여로보암 왕이 저지른 죄다(참고. 왕상 12장, 특히 26~33절). 그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지방 신으로 전락시킴으로 백성들의 예배에 편리를 도모했다. 그것도 전적으로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리했다. 작전은 통했다. 그는 큰 추종 세력을 얻어 22년 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역이 대규모 군중 가운데서 시작될 때도 있지만, 우리는 아직 시작에 지나지 않는 그것을 완결된 일로 착각하기 쉽다. 현대의 남자들에게 대규모 군중은 자신이 남자라는 느낌을 준다. 축구팀을 응원할 때건 예수님의 이름을 환호할 때건 우리는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아무 흥분으로나 지신을 채워 내면의 공허를 달래려 한다. 큰 집회에 가 있으면 왠지 진짜 남자가 된 듯한 기분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이전 남자 세대들은 긴 세월 계속되는 치열한 전투를 끝까지 맹렬하게 싸웠다. 단지 대형 집회에서 새로운 열정에 휩싸이는 기분이 들거나 치료를 통해 자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 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온전히 자신을 드릴 때에만 그 싸움은 가라앉았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기쁨은 죄를 아파하는 마음을 통해 찾아왔고, 그 상한 심령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헌신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도를 친밀하게 알아가는 과정은 성령의 깊은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사역은 대규모 군중 속에서 일어날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고독 가운데 고통스럽게 기도하는 긴긴 세월을 거쳐 일어날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얻은 소득이 무엇이든 그 가치는 크게 퇴색되어 버렸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 - 말할 수 없는 고난, 처참히 상한 심령, 깊은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한 - 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옛길로 돌아가자고 호소한다. 현대 기독교 사상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좋은 교훈들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잃음으로써 자신을 찾는다는 더 확실한 구심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고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이제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시도록 무대를 치우고 싶다. 다른 모든 생각이 그분의 향기에 젖어들 만큼 그분의 아름다움과 능력에 완전히 우리 시선을 집중했으면 좋겠다. 그분을 예배하는 것, 그분께 기도하는 것, 성경전체를 통해 그분을 간절히 찾는 것, 우리의 교만과 미지근한 헌신을 아파하며 그분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 성령으로 우리를 채우시도록 그분을 바라는 것, 다른 모든 것을 태우는 열정과 일심의 목표로 그분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옛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단순한 진리를 잊지 말기 바란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는 유일한 길은 먼저 경건해 지는 것이다. 우리 시대 남자들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남성상을 찾는 일에 더 골몰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남성성을 공부하고 그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과오를 범하는 남자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우리 열정은 진실하고 꾸준하기보다 인위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인가? 우리는 남들(특히 자기 가족들)을 그리스도께 이끄는 거룩함에서 자라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남들 하는 대로 열심히 따라잡음으로써 뜨겁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가?
론은 교회에서 매주 한 번 새벽에 모이는 남성 모임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정욕과의 싸움, 가정에서 느끼는 긴장, 직장 생활의 고민거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서로 끌어안고 때로 울기도 하며 서로 붙들어 주었다. 모임을 마칠 때면 론은 언제나 남자로서 세상과 부딪힐 각오와 힘이 넘쳤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내한테서 모임에 그만 나가라는 남을 들었을 때 론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내는 그 모임이 남편에게 미치는 영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모임에 다녀온 남편은 자상하기보다 오히려 흥분되어 있었고 가족과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도의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행하겠다는 의지가 더 단호했다. 우리 심령에 변함 없는 예배의 마음이 자라지 않는 한 남자다워지려는 노력은 결코 진정한 남성상을 만들 수가 없다. 행여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주말 세미나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얄팍해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일은 자존심을 깨뜨리는 긴 싸움이다. 그것은 절망을 거쳐 더 밝은 기쁨으로 이어지다 다시금 더 어두운 절망을 거쳐 더 밝은 기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싸움을 회피하는 남자들은 피상적인 회개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정작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그들의 참 헌신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생명을 주는 사랑으로 타인의 중심을 만질 수 있는 열정을 가꿀 수 없다.
론은 그 모임을 그만뒀다. 대신 교회의 어느 나이 많은 남자와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만남을 갖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보아왔지만 전혀 모르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론은 그가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그의 기도는 달랐다. 깊이 사랑하는 친구와 친하게 대화하는 것 같았다. 4개월 가까이 론은 이 남자를 만났다. 매주 만날 때도 있었다. 론은 그에게 그의 삶, 결혼생활, 하나님과 관계에 대해 들려 달라고 했다. 그 남자는 언제나 성경을 가져왔고 첫 손자의 사진을 보여 주는 할아버지처럼 종종 감격에 젖어 성경을 펼치곤 했다. 론이 그 나이든 남자를 더 이상 꾸준히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론의 아내는 아쉬워했다.
자신보다 그리스도께 더 푹 빠지는 법을 배우는 남자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남자가 될 것이다. 이 세대의 남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계산할 줄 알아야 한다(비용계산은 쉽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 대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친해질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도 아깝지 않을 만큼 자기 영혼의 공허감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보다 자기발견과 자기실현을 더 중시하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을 거부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자아를 찾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내게는 꿈이 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인지는 시간만이 말해 줄 것이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 꿈은 정말 단순하다. 앞으로 30년을 내다보며 나는 기독교계 도처에 흩어진 소수 그룹들을 본다. 그 곳에서는 경건한 성품과 영적인 지혜가 학위와 기술보다 존중되고 성취나 전문 지식보다 귀하게 통한다. 나는 지금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본다. 그들은 본래 우리가 견디도록 되어 있지 않은 세상에서 본래 우리가 느끼도록 되어 있지 않은 성향과 충동에 맞서 싸우면서, 그 삶에서 오는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지금 결혼생활이 비참한 사람들, 자녀들 때문에 행복한 가정에 대한 희망이 무너진 사람들,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 사람들, 어린 시절 학대당했던 말 못할 기억에 짓눌려 공포로 긴 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심장이 터질 듯 거부당한 상처가 깊은 사람들, 내면에 날뛰는 변태적 성욕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 끝없는 외로움의 무게에 눌려 모든 희망을 포기하기 직전인 사람들을 본다.
내 꿈속에는, 하나님의 사람들 속에서 흩어져 있는 지혜로운 남녀 군대가 보인다. 고난의 불 속에서 빚어지는 성품인 차분한 분별력과 예리한 지혜로만 무장한 군대이다. 이들은 남들이 좀처럼 치르려 하지 않는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다. 그것도 긴 세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대가를 치러 온 사람들이다. 이 남자들은 아버지들이다. 이 여자들은 어머니들이다. 그 조용한 존재가 느껴지고 존중받는 경건한 사람들이다.
유명인사들은 평범해질 것이다. 웃어른의 몇 마디 말씀이 주말 세미나의 명강사가 내놓는 모든 인생 성공 비결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대규모 ‘기독교’ 행사는 전도, 의미 있는 기도, 뜨거운 예배, 성경적인 교훈 등으로 국한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개발 집회에 참석하는 것보다 멘토의 집에서 보내는 하룻저녁을 더 사모할 것이다.
전자보다 후자에 삶을 바꿔놓는 힘이 더 크다는 것을 그들은 알 것이다. 기독교계의 시상식 행사는 이전과 같이 할리우드 행사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공로를 치하할 때, 업적을 이유로 그들을 더 중요한 존재로 부각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의미 있게 낮추는 접근이 사용될 것이다. 최고의 명예를 놓고 그리스도와 다툴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본다. 멘토 세대를 본다. 삶의 도전에 대응하도록 우리를 돕는 일에서, 훈련된 전문가들보다 더 존중받는 지혜로운 웃어른들을 본다. 전문가의 지식과 기술보다 더 깊이 우리 영혼에 와 닿는 능력과 지혜를 갖춘 경건한 사람들을 본다. 내 꿈이 실현되려면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하다. 부흥운동에 불을 붙이는 겉모습만 화려한 유사품 기적이 아니라 개혁을 일으킬 수 있는 깊고 확실한 기적이 필요하다. 거대한 추종세력을 끌어들여 신문 1면 기사를 장식하는 운동과 행사라면 그 동안 많이 있었다. 그러나 개혁은 꽤 오랫동안 없었다. 이제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 꿈은 깊이 있고도 단순한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남자들이 남자가 되면 세상이 달라진다. 여자들이 여자가 되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이 든 여자들은 어머니가 되고 젊은 여자들은 자매 역할을 배우는 이와 유사한 꿈에 대해서도 책을 쓸 수 있고, 써야 한다. 영적 어머니와 자매에 대한 책은 영적 아버지와 형제에 대한 이 책에 어울리는 짝이 될 것이다. 내 꿈속에서 나이 든 남자들은 아버지 역할을 하고 젊은 남자들은 형제 역할을 한다. 세상 도처의 남자들이 제 목소리를 되찾고, 힘을 발휘하고, 진정한 남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는 기쁨을 회복할 때, 기독교 공동체는 그 본질부터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남성성의 모조품에 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진짜 남자가 된다’는 이 개념이 문화적 유행으로 전락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거대한 군중의 열기, 새로운 공식이 주는 희망, 강사들의 자극적 교시, 헌신을 외치는 결단, 현대 구루(guru)의 개념 등 통상적 요소들이 수반된 단순한 운동으로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의와 열정의 일시적인 분출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혁이다. 즉 상한 심령, 회개, 오래 참음, 기쁨의 주기가 반복되는 하나님의 깊은 역사이다. 생명을 낳는 연합의 차원에서 관계의 신비에 들어서려면 하나님의 능력 부여가 필요하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두신 모든 것이 십분 발휘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자신을 모두 드려야 한다.
멘토 세대가 되려면, 차세대를 참된 경건으로 이끌 수 있는 인품과 지혜를 지닌 남자들로 가득한 문화를 이루려 한다면, 내면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 남자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품 대신 모조품을 파는 사단의 수완이 절정에 달한 시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적당히 좁은 길을 본래의 더 좁은 길로 착각하기 쉬운 이 시대에, 우리는 우선 남성성의 기적이 무엇인지 그 개념부터 분명히 밝혀야 한다.
남자답지 못한 남자
당신이 남자답지 못한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면 당신은 필시 그에게서 이런 모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통제적이다(비인격적으로 힘을 행사한다).
․ 파괴적이다(또는 위험하다).
․ 이기적이다(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특정 기분에 집착한다).
남자답지 못한 남자는 대화를 통제한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을 조종한다. 그는 자기가 감당할 자신이 없는 상황이면 무조건 피하는 쪽으로 자기 삶을 수습한다. 그는 아무도 깊이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교묘히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자기가 정상에 서거나 적어도 도전 받지 않는 자리에 서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그는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른다. 그는 의견을 내놓거나 아예 침묵을 지키는 쪽을 선호하며,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거의 없다. 우정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경우를 빼고는 아무에게도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일 때면 마치 자동차 영업사원이 당신의 가족사진을 보여 달라고 할 때와 같은 기분이 든다.
또한 그는 파괴적이다. 한동안은(때로 장시간) 동료들이 그에게서 격려와 도전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 가족들이 가장 빨리 가장 깊이 상처를 느끼지만 그들은 너무 두려워서 자신에게조차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는 빈정거리는 말과 비열한 태도로 노골적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고, 가끔은 폭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의 이기심은 늘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분명히 드러난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고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위급한 순간에 극명히 표면에 떠오른다. 남자답지 못한 남자들은 통제적이고 파괴적이며 이기적이다. 그러나 이런 특성은 남의 눈에 띄는 부분, 그의 면전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 두꺼운) 표면을 벗겨 보면 거기 이러한 잡초들을 떠받치는 뿌리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나름의 생명력을 지닌 뿌리이다. 대개의 경우 파헤쳐지지 않고 남아 있는 심층으로 들어가 보면, 남자답지 못한 남자들의 통제 욕구 밑에는 무력감이 있다. 파괴적 힘은 증오에 찬 분노에서 온다. 또한 그들은 이기심만이 생존의 유일한 희망처럼 보일 정도로 두려움에 차 있다. 남자답지 못한 남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통제와 위협과 이기심으로 삶을 지탱하려 애쓰는 무력감과 분노와 두려움에 찬 남자가 나타난다.
남자다운 남자
진정한 남자는 아주 다르다. 하나님이 남자 안에 두신 에너지가 해방될 때 남자는 이렇게 된다.
① 자신이 무력하지 않고 강하다는 것을 안다. 강한 남자들은 설령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도 주도권을 행사한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권력에 대한 희망이나 무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이 대인관계를 맺는 방식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는 소명이다. 남자다운 남자는 공격적인 남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남자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질적인 관계를 가꾸며, 자신을 위해 권력과 통제 의식을 쌓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힘을 개발하는데 더 헌신한다.
② 분노가 덜하고 쉽게 위협 당하지 않는 상태를 경험한다. 이런 상태를 평안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런 남자에게 '넉넉히 이긴다'는 표현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삶이 힘겨운 시절에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다운 남자에게는 자신의 고통이 다른 사람의 곤경을 느끼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 자신에 비해 덜할 때도 그렇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정직하게 직면할 용기가 있다. 그래서 그는 타락한 세상을 사는 슬픔, 불완전한 공동체 안에 사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슬픔과 외로움은 의분을 자아낼 뿐이다. 그것은 죄에 대한 반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향해서는 긍휼을 품게 하는 분노이다. 에너지가 해방된 남자는 폭력적이지 않고 친절한 남자이다.
③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답은 자유에 있다.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남자다운 남자는 늘 운신의 여지를 찾는다. 설령 할 일이 전혀 없을 때에라도 늘 뭔가가 될 수는 있다. 가정이 깨지거나 사업이 망할 때면 남자다운 남자들도 - 남자답지 못한 남자들처럼 - 덤벼들어 복수하거나 물러나 몸을 사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뭔가 좋은 것을 내보일 기회, 언제나 희망찬 하나님의 움직임을 드러낼 기회에 마음이 끌린다. 그들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시련을 통과한다. 그 임재는 그들 자신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더 눈에 띈다. 남자다운 남자들은 자유의 기쁨, 방해받지 않고 남성성의 소명에 충실할 수 있는 기회에 매료된다. 남자다운 남자는 중독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몸을 엄하게 다뤄, 외부 세력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는 쾌락을 향한 자신의 집요한 욕구에 맞서 힘써 싸운다. 그는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 그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며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목표지향적인 남자이다.
우리 시대의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너무나 많은 남자들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정당한 남성성의 기쁨에 이르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들이 따라온 길은 진정한 남성의 에너지가 아닌 타락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그 길로 갈수록 그들은 오히려 더 무력감과 원한과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들이 이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릴 수 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 : 12)."
혼돈에서 혼돈으로
섹스와 폭력 - 모든 남자를 자극하는 주제다. 영화와 출판 산업은 이 두 주제만으로 수십 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남자들은 분노의 위력을 안다. 남자들은 섹스의 마력을 안다. 삶의 혼돈에 대한 남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은 어떠한가? 유혹의 사건을 생각해 보라. 태초에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혼돈의 존재를 몰랐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혼돈으로 시작되어 창조로 끝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분은 황무지를 낙원으로 바꾸어 아담과 하와에게 집으로 주셨다. 아담이 불순종하기 전, 남자는 하는 일마다 성공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도 없었다. 일은 그에게 좌절이 아니라 궁극적 만족을 주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기 아내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온전한 관계를 누렸다는 것이다. 그러다 혼돈이 이야기 속으로 다시 들어왔다. 창세기가 쓰일 당시의 문화에서 뱀은 혼돈의 상징, 감당하지 못할 어둠의 상징이었다. 뱀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은 지혜를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탁하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를 어둡게 했다. 다시금 어둠이 지면 위를 운행했다. 창세기 3장에는 첫 혼돈에 부딪혔을 때 침묵을 택한 아담의 모습이 나온다.
혼돈에 대한 아담의 반응은 낙원을 황무지로 바꿔놓았다. 그의 침묵은 후손들에게 폭력과 성도착이라는 온통 새로운 혼돈을 불러왔다. 창세기의 나머지는 섹스와 폭력의 세부 기사들이다. 아벨의 피살, 롯과 그 딸들의 근친상간, 디나의 강간 등이 몇 가지 예이다. 아담의 고민과 실패는 모든 남자에게 반복되어 왔다. 우리 삶은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혼돈의 비극은 천의 얼굴로 위장하고 찾아온다.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길이 옳아 보일 때 내려야 하는 결정이다. 그 혼돈은 실직, 감봉, 배우자 상실, 반항하는 사춘기 자녀, 몸의 불길한 조짐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솔직히 혼돈은 날마다 우리를 괴롭힌다. 혼돈은 우리가 아내와 대화하고, 직장에서 일하고, 공과금을 납부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할 때마다 우리 위에 운행하는 어둠이다.
아담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안 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면 삶의 혼돈에 대한 바른 반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을까? 남자다워진다는 것의 의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기준점을 정해야 한다.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남자가 갈 곳은 어디인가? 다른 남자들, 자기 아버지, 교회를 볼 것인가? 영화, 텔레비전, 심리학을 볼 것인가? 대다수의 남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보다는 주변 문화에 의해 더 규정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남자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시된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기준이 될 놀라운 설계를 우리에게 주셨다.
창세기 기사에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는다. 기독교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지닌 존재다. 그분이 우리의 기준점이다. 이 하나님은 누구인가? 이방 신화의 신들과 같은 분인가? 폭력과 성적 타락을 기용해 혼돈에 맞서는 분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창세기 창조 기사는 남자의 폭력과 성적 욕구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이 기사는 완전한 상태일 때 남자의 모습이 어떠했으며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그려주고 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 남자와 여자가 조화롭게 서로를 존중하며 사는 삶이다. 남자는 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를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세워 주며 함께 삶의 터전을 가꾼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어둠의 세계, 섹스와 폭력의 세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창세기의 나머지는 증오, 살인, 인종차별, 강간, 근친상간, 간음 등 첫 남자의 죄의 결과를 보여 준다. 분노와 정욕으로 삶의 신비에 들어설 때 남자는 이방인들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안에 희망이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부재자다. 하나님은 침묵한다. 남자는 삶의 혼란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분노하고 정욕을 탐한다. 분노를 통해서 남자는 자신의 힘을 느낀다. 폭력을 통해 남자는 문제를 제 손 안에 휘어잡아 불의한 하나님을 고쳐주려 한다. 정욕을 통해 남자는 고통을 잊는다. 공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기적인 방식이다. 그것은 과거의 고통과 희망을 부정한다. 분노할 때 남자는 삶의 현장에 존재하나 그는 위험하다. 정욕을 탐할 때 남자는 살아 있음을 느끼나 그것은 자신의 부재를 택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이와 전혀 다르다. 맞다. 이야기의 끝은 좋지 않다. 그러나 시작은 아름답다. 그것이 우리 희망이다. 아름다움은 존재한다. 의미와 질서가 있다. 삶의 신비에 폭력과 성적 타락으로 대응하는 것은 세상을 다시 어둠 속으로 던지는 것이다. 창세기는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창세기는 본래 설계된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힘과 친밀함을 소유한 남자가 되라고, 하나님을 닮으라고 우리의 소명을 존중하라고 요청한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그렇게 될 날이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는 소명
남자는 자기 세계의 혼돈을 향해 말하고 움직일 때 하나님의 형상을 삶으로 살아 낸다. 그러나 남자를 향한 하나님의 설계에는 그 이상이 들어 있다. 창세기 1 : 27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명시되어 있다. 여기 ‘남자’라는 말은 ‘기억하는 자’라는 뜻의 히브리 단어 ‘자카르(Zakar)'를 번역한 것이다. 남자를 묘사하는 말로는 얼마나 신기한가? ‘힘센 자, 이끄는 자, 강한 자’ 따위의 단어를 기대할 법도 한데 말이다. 하지만 남자는 기억하는 자로 묘사되어 있다. 왜 그럴까?
남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열쇠를 둔 곳을 더 잘 기억해야 하는가?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같은 중요한 날들을 잊지 않으려 더 노력해야 하는가? 남자가 기억하라는 말이 그런 뜻이라면 남달리 꼼꼼한 남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남자들은 문제에 빠진다. 기억이라는 개념에는 그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그것은 우리에게 뭔가 중요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둘째, 그것은 우리에게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말해준다. 기억이란 성경을 관통하여 되풀이되는 주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하러 모여 죄를 자백하고 기도하면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일어나 하나님의 행사를 열거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주께서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저희가 우리의 열조에게 교만히 행함을 아셨음이라. 오늘날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주께서 또 우리 열조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고 저희로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오는 자를 돌을 큰물에 던짐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셨사오며(느 9 : 9~10).
사람들은 기억된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말하고 또 말했다. 성경에 하나님의 행사를 이야기한 횟수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왜 그렇게 많을까? 구약에서 하나님은 혼돈 중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시기를 몹시 원하셨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지속적인 믿음에 꼭 필요한 닻임을 웃어른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말해 준 옛 이야기들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신실하신 분이다. 그분은 수없이 우리를 위해 개입하셨다.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 주셨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다. 그러니 담대하라. 믿음을 잃지 말라.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잊지 말라.”
우리는 기억하는 자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행사를 기억하도록 지음 받은 자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충실히 말함으로 그분을 기억하는 것이 남자들의 소명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기억의 목적은 무엇인가? 몇 년 전에 나는 유난히 어려운 시기를 지났다. 수개월 동안 내 삶은 온통 전쟁 같았다. 상담실을 찾아오는 내담자들은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유별나게 심각한 문제들만 내놓았다. 내 친구들은 극히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었다. 이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는 두려움이 피부로 느껴졌다.
나는 기분이 약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울거나 싸우고 싶은 강한 충동이 시도 없이 밀려왔다. 라디오에서 약간 애수 띤 노래만 흘러나와도 눈물이 나왔다. 다른 차가 내 차선으로 끼어들면 그 차를 박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장 보는 엄마의 쇼핑 카트에 앉은 아이가 나를 보고 웃어 주면 내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그러다가도 계산대 앞의 줄이 빨리 줄어들지 않으면 나는 당장 문제를 해결하려고 눈을 부라리며 매니저를 찾곤 했다. 슬픔과 분노가 왔다 갔다 했다. 결국 나는 좋은 친구이자 동료에게 찾아가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는 열심히 듣더니 이런 엄숙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싸움터에 들어가 있다가 그 곳에 출구가 없음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나는 그의 대답에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그 말이 맞는 말임을 알았다. 몇 해 전부터 나는 좀더 큰 싸움을 싸우려는 선택을 시작해 온 터였다. 나는 타락한 세상의 처참한 현실에 점점 더 눈을 뜨기로 마음먹었었다. 20대까지만 해도 나라는 남자는 큰 싸움일랑 남들에게 맡기고 나는 옆에 비켜서서 음식과 물을 주는 정도로 만족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달라지고 있었고, 나도 그것을 알았다. 이제 미래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 현실이 눈물과 분노로 터졌다. 눈물은 내가 안식처(거기가 어디든)로 가고 싶었기 때문이고, 분노는 두려운 미래와 또 내게 닥쳐올지 모를 요구들 때문이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눈 후, 나는 아버지께 들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를 몇 가지 떠올렸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 전쟁터에서 싸우셨다. 어느 날 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전쟁에 참여했던 경험에 대한 몇 가지를 소회를 글로 적어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주에 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했다. 오마하 해변 침공을 선도했던 날들이 생생하게 적혀 있었다. 남자들의 심정, 사령관들의 말, 해변상륙, 쓰러진 전우들의 시체를 타고 넘던 포복, 피로, 고생, 아버지에게 용기를 주었던 대의, 후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건 두려움. 전쟁터를 묘사하는 아버지의 말 여기저기에 기도와 두려움이 있었다. 무섭고 힘든 시간 중에도 하나님을 아는 자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편지를 탐독했다. 전에는 몰랐던 아버지의 일면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하게, 편지는 내게 희망을 주었다. 아버지의 어떤 것, 아버지가 기억했던 어떤 것이 내게 전달되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길의 일면을 좀더 깊이 알게 되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내 친구의 말과 우리 아버지의 편지에 들어 있다.
남자들은 뭔가 중요한 것을 다음 세대에 전해 주도록 부름 받았다. 단지 역사의 승계가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체험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전수해야 한다. 이것은 내 현재의 삶을 더 큰 시야 안에 두는 행위이다. 실제로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역사가 자신에게 준 희망과 용기를 이렇게 증거 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시 44 : 1~3).
나의 아버지는 내 고민에 대한 답을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기억은 고민 중에도 계속 전진해 갈 용기를 내게 주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내게 희망을 주었다. 하여간 남자들의 침묵은 알아줘야 한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과거 - 아버지의 경험, 신앙의 실패, 신앙의 고뇌 - 를 기회가 거의 없다. 남자는 자녀에게 뭔가를 전수하기보다는 침묵을 고수한다. 그는 기억이 없는 자처럼 행동한다. 왜 그럴까?
남자가 ‘기억하는 자’라는 개념은 성적인 죄 -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죄 - 에 대한 고민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생각해 보라. 포르노 서점에 들어간 남자는 자신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생각 밖으로 밀어내야 했다. 처자식이나 사역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런 죄악된 쾌락을 ‘즐길’ 수 없었다. 아무리 짧은 순간일지라도 그 시간만큼은 자신의 죄악된 선택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하나님까지도 마음에서 밀어내야 했다. 당신이 뻔히 나쁜 줄 알면서도 고의로 그쪽으로 움직였던 -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 때를 떠올려 보라. 그 순간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가까웠는가? 그분과의 친밀함을 누리고 있었는가 물론 아니다. 그분이 그 상황 가운데 계셨더라면 당신은 계속해서 죄악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죄의 선택은 하나님에 대한 망각을 요한다. 이런 의미에서 망각은 단순히 열쇠를 어디 두었는지 잊어버리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기억을 거부하는 능동적이고 고의적인 선택이다.
타락 이전에, 아담은 기억할 것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 작업을 보았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분의 성품을 많이 알았다. 아담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과 하나님의 공급과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아담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에 근거해 행동하지 않았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아담은 말하지 않았다. 기억이 그를 져버렸다. 더 정확히 말해, 그는 기억하기를 거부했다. 남자들은 고집스레 망각을 즐기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보다 더 강한 욕망들에 집착한다. 그 사실에 정직하게 부딪히지 않는 한 지속적인 변화는 절대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보내신 시간이 3년이 지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예수님은 그들을 한데 모아 유월절 식사를 나누셨다. 이 남자들은 그분과 함께 살았고, 그분의 기적들을 눈으로 보았고, 곧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할 사람들이었다. 이 남자들에게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해줄 상징물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연히 모든 인간들 중 그들이었다. 모든 것을 보고 들은 그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듯 이 남자들을 아셨다. 그들의 망각성향도 아셨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직후에 벌어졌던 그들의 옹졸한 입씨름을 생각해 보라. 그것이 누가복음 22 : 4에 기록되어 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나는지라.” 아직 예수님이 그들 앞을 떠나시기도 전에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잊었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부름 받은 삶에서 떠나고 있었다.
결론
하나님을 찾으며 인생을 사는 남자들은 단순한 남자에서 웃어른으로 조용히 변화된다. 즉 따라갈 계획이 없을 때도 한 인격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경건한 남자들, 자녀들이 회피해서 달아나는 어두운 동굴로 들어서는 영적 아버지들이 된다. 통제 대신 장점으로, 파괴력 대신 친절로, 혼돈을 가르고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는 지혜로, 어둠 속에 말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멘토들이 된다.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자 하는 한결같은 열정,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진정한 남성성에 이르는 길이 열린다. 문 저편의 그 길은 잘 기억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반향하여 어둠 속에 말하는 자유다.
제2부 뭔가 핵심이 빠져 있다 : 남성의 관계문제
어둠과 싸우는 남자들
남자들은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정답 없는 영역으로 용감히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다. 그렇게 설계된 남자이기에 안전주의로 나갈 때면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너무 무서워 부딪히지 못하고 뒷걸음질칠 때마다 남자는 뭔가 잘못된 것을 느낀다. 다만 너무 무서워 그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파헤치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어떻게든 무마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적당히 둔해진 양심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안전주의 욕구에 굴복해 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다른 영역들에서 남자들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때로 그것은 억누를 수 없이 강한 다른 충동을 유발한다. 그칠 줄 모르는 공상, 떨칠 수 없는 변태적인 욕구, 하나님을 잊는 남자들은 아내에게 적의를 품게 될 때가 많다. 아내가 둔하거나 뚱뚱하거나 고마움을 모른다는 이유다.
우리의 좀더 가시적인 문제들 이면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관계의 깊이나 질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편, 아버지, 아들, 형제, 친구로서 분명하게 남성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자신을 극도로 당황하게 만드는 영역을 피해 다닌다. 정답 없이 움직여야 할 상황을 만날 때마다, 용감히 움직여야 할 상황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무서운 질문에 부딪힌다. “나는 하나님이 진짜 남자에게 명하시는 일을 해 낼 힘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표현된 두려움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다음 사항을 특별히 주시해야 한다.
․ 우리가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제8장)
․ 남자답지 못한 남자들의 두 가지 전형적인 관계(제9장)
․ 남에게 챙겨 달라고 요구하는 남자들(제10장)
․ 다른 사람이 필요 없는 남자들(제11장)
그렇다면 첫째로, 남자들은 감당할 길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는 두려움을 느낄 때 어떻게 하는가? 이 세상에서 어둠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대개 그런 상황에는 전혀 예기치 못한 관계 문제가 개입된다. 교회 협동 목사의 딸은 열여섯 살에 임신을 했다. 그게 잘 된 일인가? 그리고 그들이 1년 전 함께 기도했던 선교사 부부는 외아들이 자살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단 말인가? 그래서 비극이 벌어진 것인가? 기독교 집안들, 그의 가정보다 더 좋은 가정들에도 나쁜 일이 벌어진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무엇을 약속하셨던가?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측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이 남자들이 묻는 첫 번째 질문이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정답이 있어야만 한다. 모든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바를 알고 있는 전문가가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아신다. 정녕 그분만은 알려 주실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야 그 음성이 그분의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분은 과연 우리에게 할 바를 일러 주고 계신다. 단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남자가 되라고, 그분을 사랑하라고, 그리고 무엇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의 길로 가라고 일러 주신다. 아담은 전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어냈다. 하나님은 귀띔을 해주시거나 바로잡아 주시지 않았다. 다만 그분의 지시는 우리가 아는 바 그분의 모습에 부합되는 방향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첫 번째 질문을 접는다.
바로 그 때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두 번째 질문이 생겨난다. 이전 어느 때보다도 혼자가 된 것 같은 극도의 두려움이 수반된다. “나는 하나님이 남자 - 남자다운 남자 - 에게 명하시는 일을 할 힘이 있는가? 내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될까?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 이외에 다른 보장이 전혀 없는 일, 그 일을 행할 용기가 내게 있는가? 나는 결과를 통제하려는 모든 노력을 버린 채 대인관계의 신비로 들어설 마음이 있는가?” 평생에 걸쳐 생명과 자유를 주는 말로 다른 사람 - 단 한 명이라도 - 과 관계를 맺는 남자는 극히 드물다. 아내나 아들이나 딸이나 친구가 내 통제권 밖으로 벗어나 예측할 수 없는 자기만의 개성을 추구할 경우에 벌어질 사태를 우리는 너무 무서워 직시하지 못한다.
“하나님, 저도 남자가 되고 싶습니다만 그럴 힘이 제게 있습니까?” 이런 절규가 절로 나올 정도로 혼란스럽고 중요한 대인 관계 상황에 하나님이 당신을 몰아넣으실 때, 그 때 기뻐하라. 당신은 지금 참된 남성적인 경건함의 좁은 길로 들어서는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지금껏 그 문을 연 남자는 극히 적다. 그럴 만도 하다. 아무리 힘이 세도 그 문을 열 수 없다. 성취에 익숙한 자의 자신감으로 다가가는 남자에게 그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관리 영역을 떠난 남자 - 신비에 무릎 꿇고 간절히 그 안에 들어가려 하는 사람 - 만이 그 연약함을 힘입어 문을 열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자기 자신의 등불을 들고 가는 남자가 절대 남성성의 길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이사야의 말을 들어보라.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사 50 : 10~11).
자기의 불을 피운다는 것은 남자들이 어두운 곳에 처할 때 취하는 행동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뭔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으로 서둘러 후퇴해 버린다. 혼돈을 좀더 이해할 수 있고 통제가 가능한 꾸러미로 재규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 하나만 가지고는 어둠 속에 들어서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의 최대 관건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잘 드러내는 데 있을 때에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의 선택은 당연히 성경에 명백히 밝혀진 경계선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결정들은 어둠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빛 아래서만 내려질 때가 많다. 우리는 종종 어찌할 바를 정확히 말씀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성령의 속삭임은 지시(“이제 그녀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라.”)보다는 격려(“너는 할 수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일 때가 많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을 감지해 그분처럼 행할 수 있을 만큼 그분을 잘 알아야 한다. 그분과 그런 관계를 가꾸어 가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향해 어둠 속으로 들어가시는 그분의 습성을 본받을 우리의 사명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길을 밝힐 전등을 찾아서는 안 된다. 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정답을 알아야 한다고 고집할 때 우리는 자기의 불을 피우는 자가 된다. 자기의 불을 피우는 것은 모든 타락한 남자의 타고난 성향이다. 그 성향은 삶의 대인관계 위기에서만 아니라 매일의 관계 맺는 방식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는 으레 자기의 불을 피우는 남자들은 자신이 남자답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가장 현저하게 드러낸다.
남자답지 못한 남자들의 대인관계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 원하시지만, 절대 참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우리 기준이 아니라 그분의 기준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새 자동차의 사용자 매뉴얼처럼 그분의 기준도 우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설계도를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남자다워지라는 소명대로 살지 않고는 어떤 남자도 행복할 수 없다. 짜릿하지만 얄팍한 쾌락 즉 남성성의 깊은 소명에 대해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는 쾌락이 참 행복으로 가장할 수 있다.
힘, 영향력, 돈, 지위, 연줄, 성취, 성공, 소유, 음식, 섹스, 여가 등 그 자체로 선한 많은 것들이 행복의 출처로 규정된다. 그것들이 다소간 약속을 지킨다는 데 -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는 데 - 함정이 있다. 그 상태가 장기간 이어질 때도 있다. 그런 것들은 우리 기분을 좋게 해주며 우리에게 뭔가 득을 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은 자격 미달이다. 그것은 상실을 견뎌 내는 자족, 아픔 중에 깊어지는 기쁨, 실패와 침체를 이겨내는 겸손한 자신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런 쾌락의 출처를 좇을 때 우리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로 전락하며, 줄이 끊어지는 순간 바닥에 널브러지고 만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소명대로 살지 않고는 어떤 남자도 행복할 수 없다. 남자의 행복이란, 하나님이 늘 움직이고 계시고, 절대 어둠에 저지당하지 않으시며 아무리 나쁜 일들이 생길지라도 끝까지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자기 삶으로 보여 줄 때 찾아온다. 남자들은 어둠 위를 맴돌며, 하나님을 의지할 만큼 낮아지기까지 관계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 그리하여 행동으로 그분의 뜻을 진척시키는 차원까지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 행동은 그 안에 하나님이 없는 한, 요란스럽기 만한 완벽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예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소명을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는다. 최고의 남자도 온전한 남성성을 살아 내지 못한다.
남자다워지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철저히 받들지 않고는 어떤 남자도 온전히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구상에 행복한 남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의 불행, 어느 정도의 내적 공허와 초조한 불만족을 경험하며 고민한다.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견디도록 의도하신 일이 결코 없는 불행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단순한 원리가 있다. 모든 남자는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남자의 실존을 규정한다. 그러나 모든 움직임이 좋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움직이지 않을 때 남자는 가서는 안 될 길로 움직이게 된다. 좋은 움직임이 멈출 때 나쁜 움직임이 시작된다. 좋은 움직임이란 자신의 불행을 지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나쁜 움직임이란 자신의 불행을 줄이는 것 이상의 더 높은 목표가 없는 움직임이다.
남자다운 남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통제에서 풀어 주며 자신의 영향력으로 그들을 격려한다. 그들은 아내와 자녀와 친구들을 민감하게 어루만져주며, 따라서 상대는 자유로이 자신의 괴로움, 이기심, 고통으로 고민할 수 있다. 남자다운 남자들은, 믿음이냐 불신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 남자로서 자기가 부딪혔던 그 동일한 갈림길로 가족들과 친구들을 이끌어 준다. 남자답지 못한 남자들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자기 욕구를 채워 달라고 요구한다. 통제와 분노와 두려움으로 움직이는 남자들은 남들을 짓밟아 동조자로 만들거나 자기 방어를 위한 반항을 유발한다.
좋은 움직임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다. 자연히 생기지도 않는다. 언제나 반대방향으로 가려는 강한 충동과의 싸움이 있다. 좋은 움직임은 언제나 나쁜 움직임에 대한 회개로 시작된다. 회개란 ① 잘못을 시인하고 상한 심령을 품는 것 ② 겸손에서만 나올 수 있는 깊은 고백이다.
남에게 챙겨달라고 요구하는 남자 : 의존욕구
사울 왕은 성경에 나오는 의존적인 남자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의존 욕구가 우리 삶을 다스릴 때 언제나 그렇듯, 그도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버렸다. 사무엘상 15장을 읽어 보라. 전체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이렇다.
어느 날 사울은 매우 중대한 죄를 범해 왕으로서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다. 밤죄 직후 사무엘과 대화에서 사울은 잘못을 일체 부인했다. 이 점을 눈여겨보라. 그는 여전히 자신의 죄가 발각되지 않은 줄 알고는 자기가 불순종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그는 보란 듯이 사무엘에게 떠벌렸다. 그 하나님의 명령에는 아말렉에 속한 모든 생명을 죽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진멸하라고 명하셨다. 하지만 사실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 두었고, 가축도 진멸하지 않고 가장 기름진 소와 양을 남겨 두었다(나중에 그는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그랬다고 진술했다).
우스운 장면이 벌어진다. 온전히 순종했다고 큰소리친 사울에게 사무엘은 이렇게 되묻는다.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이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사울의 실상은 간파되었다. 그는 자신의 불순종을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진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부인을 하다가 얼른 보기에는 고백처럼 보이는 듯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것은….”
그러나 나머지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사울이 범죄를 인정하는 것이 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해진다. 사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최소한 왕위의 지킬 길을 찾아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는 죄를 아파하는 마음 없이는 진실한 고백도 참된 회개도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분명히 예시해 준다. 그러나 사무엘은 단호했다.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여기서 사울이 다음에 취한 행동을 잘 보기 바란다. 그는 자신의 절박한 의존 욕구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다.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 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의존욕구가 거룩함을 향한 열정보다 강하고 시급해질 때 그것은 지배적 욕구가 된다. 사울의 삶이 밝혀 준 원리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필요에 대한 강한 인식에 죄에 대한 더 강한 인식이 뒤따르지 않을 때, 그것은 이기심을 정당화하고 강화한다. 자기 죄보다 필요를 더 인식하는 사람들은 조종하고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자기 죄를 더 인식하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거룩함을 향한 열정에 지배당한다. 이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휴식하며 그분의 은총을 누리는 법을 배운다.
의존욕구에 지배당하며 내 최고의 기쁨은 남들이 나를 챙겨주는 데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생명을 파괴하고 아름다움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 모습으로 있는 한, 우리는 남자다운 남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필요 없는 남자 : 강자욕구
앞에 선 사람은 물론 비판을 각오해야 한다. 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내 생각을 사람들 앞에 펼쳐 놓으면 내 생각은 연구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지도자를 향한 지나친 비판은 분노한 교만의 영이 표출된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력을 업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비판하는 지도자보다 더 ‘강한’ 남자일 때가 많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자신의 영향이 둔감하며, 누구든 이의를 제기하면 무조건 넘어뜨린다. 그들의 그런 자신감은 강해지기 원하는 의존적인 남자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그들은 지도자의 어려운 삶을 더 어렵게 만든다.
강한 남자들은 강한 모습 이면에 세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첫째, 불안정이다. 강한 남자들은 자신을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남성성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지 확신하지도 못하는 것을 내보이려 권력을 과시한다. 반면 힘 있는 남자들은 자기 힘을 과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힘을 통제하고 있다가 선한 취지를 도모할 때만 사용한다. 둘째, 얄팍함이다. 연속선상의 강 쪽에 해당되는 남자들은 일단 그 능력과 매력만 넘어서면 별로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나 타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깊이 느끼는 것이라고는 권력 욕구뿐이다. 그러나 힘 있는 남자들은, 극도의 절망을 야기할 수 있는 자신이나 타인의 흉한 모습도 포함해서 현실의 모든 면을 두려움 없이 직시한다. 힘 있는 남자들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가장 어두운 밤 속에 희망의 힘으로 말한다. 셋째, 오해다. 강한 남자들은 참된 남성성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민감함을 나약함으로 착각한다. 그들의 생각 속에서는 권력과 힘이 동일하다. 반면 힘 있는 남자들은 용감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신비의 벽장으로 가는 문을 여는 것이 민감함과 인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힘을 권력의 과시가 아니라 권력의 통제로 정의한다.
원죄 이후, 남자의 삶에 남자 연장자들과 동료들이 미치는 영향력보다 더 강한 영향력은 없다. 여기서 남자 연장자들이란 특히 우리의 성장기에 함께했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지켜보았다. 남자 동료들이란 우리가 어울리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말하는 친구들과 동료들이다. 뭔가 정말 강력한 것이 우리 앞에 있다. 아버지와 형제로서의 관계는 남성성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결론
성숙한 남성성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남자는 많지 않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남자들 중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둘 뿐이었다. 나머지는 광야에서 정처 없이 헤매다 죽었다. 성숙으로 가는 길은 자신의 대인 관계 방식에 대한 정직한 성찰에서 시작된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내 아내와 자녀들과 친구들이 용기가 있다면 나와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까? 남들에게 챙겨달라고 요구하는 의존적인 존재로 비칠까?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잘 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까? 아니면 사람들은 나를 강한 존재로 경험할까? 남의 도움이 별로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하고, 친밀감을 주지도 요구하지도 않을 만큼 거리감이 있는 존재로 말이다. 우리는 신비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기에 의존 욕구나 강자 욕구에 지배당한다. 의존적인 남자도 강한 남자도 남자다운 남자는 아니다.
제3부 뭔가 강력한 길이 있다 : 멘토 세대
아버지 : 우리를 믿어 주는 남자
아버지에 관해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었다. 병원에서 몇 번 위기를 넘긴 일, 자녀들의 통상적인 기복과 정신없던 스케줄, 장장 5년 동안이나 학교에 불려 다니던 일, 경찰이 문을 두드리던 일, 몇 차례의 법정 출두, 교회 장로를 사임하며 아파하고 당황하던 일, 그의 형은 셀 수 없이 부모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다. 그는 아버지의 눈물과 기도를 기억했다.
식사 때 아버지가 기도하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 가끔씩 떨리는 나직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아버지, 저희로 아버지의 선하심을 믿게 하소서.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의 신실함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아버지는 견뎌냈다. 그래도 아버지는 계속 일했다. 자신의 책임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탕자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거두지 않았다.
경건한 아버지는 늘 성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자 예수님을 닮고 성령님께 복종한다는 최고의 소명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차세대에 전수한다는 이 사명 또한 강하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사명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어둠 속에 말하여 기억을 전수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이 남자는 경건한 아버지의 표지가 되는 세 가지 일을 한다. ① 그는 아들 앞에서 선한 길을 걸으며 아들도 “할 수 있다.”고 일러준다. ② 그는 가끔씩 아들을 돌아보며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일러준다. ③ 그는 하나님이 아들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계속 그분을 향해 자기 길을 감으로써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한다.
형제 : 비밀을 나누는 남자
비밀의 종류는 다양하다. 구체적인 사건과 관련된 비밀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했던 일이나 내가 했던 일이나 내가 했던 일에 대한 기억이다. 충동, 고민, 동기, 생각, 신념, 감정 등 내면의 실체에 대한 비밀도 있다. 비밀은 세 가지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 ① 비밀은 용기를 약화시켜, 남자들이 신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② 비밀은 분리를 조장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어렵게 하며 그리하여 남자들은 기억할 것이 줄어든다. ③ 비밀은 자신감을 헤쳐, 남자들이 주변 공동체 안에 힘있게 들어가 질서를 회복하고 아름다움을 드러내려는 즐거운 기대를 앗아간다.
우리는 내 형제가 되어 줄 남자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부터 다른 남자의 형제가 되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힘써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아직 사용되지 않는 능력의 저수지가 있다. 그 능력의 일부를 남자들이 형제가 될 때에만 발산될 것이다.
꿈의 회복 : 멘토 세대
기독교계의 낙관론은 대개 다음 개념을 기초로 한다. 하나님의 핵심 목표는, 우리가 원하는 삶으로 복 주시거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우호적 환경으로 문화를 변화시킨 것이라는 개념이다. 상담자들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을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우리 기도와 활동과 단합된 영향력이 나라를 변화시키고 경건한 사회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두 그룹 모두 우리를 하나님의 참된 소명과 갈라놓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변화되어야 할 것은 우리 개인의 삶과 기독교 공동체들이다. 우리는, 문제가 찾아올 때도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법과 고통이 완화되지 않을 때에도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회 운동은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훨씬 쉽다. 기독교적인 기준을 위한 투쟁에는 겸손을 해치는 호전성, 용기로 가장한 공격성이 개입될 때가 있다. 또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진짜 문제는 우리 자신 안에 있건만, 사회 운동과 개인 문제의 해결은 우리에게 그런 자기 인식을 일깨워주지 못한다. 경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경건을 단지 명백한 죄를 피하는 것(그리고 남들도 똑같이 하게 하는 것) 내지 문제를 해결해 승리라 부를 만한 즐거운 기분을 되살리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는 한 그렇다.
우리 시대의 절실한 필요는 더 많은 상담자를 훈련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사회의 도덕적 부패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우리를 부르는 지도자들을 통해 채워지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세계의 가장 절실한 필요는 단순히 이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된 삶의 질을 소유하고 드러내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알고 싶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경건한 남녀들이다. 우리가 영적 성수의 길을 깨우치고 성령님이 우리 내면에 심어 두신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을 식별하여 거기 반응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30년 후 멘토 세대에 대한 내 꿈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 대한 환멸, 삶에 대한 낙심, 다른 사람에 대한 실망은 모두 서구 문화의 고질병, 형통한 삶의 만족을 요구하는 병의 산물이다.
고난을 덜고 문제를 해결하고 원치 않는 감정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안다고 우리를 설득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지도자요 주목받는 전문가가 된다. 그들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우리의 꿈이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단호하고 미친 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전체가 한꺼번에 움직이면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배에 탔을 때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이 타락을 향해 움직이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 멈추어 정점이 생기면 남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인다.
진정한 남성성으로의 부르심은 결코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외로움으로의 부르심,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행위로의 부르심, 지혜를 배우는 필수 수단인 고통으로의 부르심이다. 그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 혼돈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불평이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이다. 전문가들이 제공해 주는 인위적인 불을 끄고 하나님의 빛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라는 부르심이다. 계속 잘해 나가자는 권고가 잔인해 보일 정도로 너무나 심원해서 힘겨운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아버지와 형제가 되려고 힘쓰는 남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선명히 보아야만 지탱할 수 있을 만큼 큰 대가다.
남성성의 길은 험난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가치가 있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의미를 가져다준다. 만족의 계절과 기쁨의 순간들도 있어, 타락한 남성들이 감히 오르리라 상상도 못할 높은 자리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우리가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순간들에 하나님의 성령님이 커튼을 걷으시고 우리 눈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 주신다. 이 책에 제시된 개념들은 추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남성성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기를 갈망하는 많은 남자들이 그 갈망을 실현시켜 가는 데 이 개념들이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당신의 열망이 다른 모든 열망을 능가할 정도로 깊어지기 바란다. 그리고 당신도 이 여정을 지속해 멘토 세대를 형성하는 아버지와 형제, 영적 남자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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