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순종/존 비비어 지음/윤종석 옮김

미션(cmc) 2010. 6. 19. 10:37

순종

존 비비어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2년 4월/303쪽/10,000원

▣ 저 자 존 비비어

존 비비어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신실한 믿음을 세워 가도록 도와주는 탁월한 저자다. 그의 저서들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A Heart Ablaze(불타는 심령)』『The Bait of Satan(사탄의 미끼)』『The Fear of the Lord(여호와를 경외함)』 등의 책이 그의 명성과 탁월함을 잘 말해 준다. 아울러 그는 방송 전도자이기도 하다. 1990년에 존 비비어 사역 재단을 설립한 이후 이 사역은 유럽에 매주 TV로 방송되는 <메신저>를 포함해 다각적인 국제 전도를 모색하는 기관으로 성장했다.

▣ 역 자 윤종석

서강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미국 Golden Gate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육학(M.A.)을,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상담학(M.A.)을 공부했다. 역서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살아있는 하나님의 지혜』『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결혼 건축가』『예수가 선택한 십자가』『하나님의 형상 빚기』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이 세상 어디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헨리 나우웬은 단절과 소외 속에서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은 ‘관계의 친밀함’ 속이라고 갈파했다. 존 비비어는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를 소개한다. 반항의 시대, 기분대로 판단하고 마음에 드는 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시대에 내면의 불안은 가실 줄 모르고 더해만 간다.

이 책은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보호의 기회를 제시한다. 하나님 그분의 그늘 아래, 그분의 날개 아래로 오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진정한 자유와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의 은밀한 처소라는 것이다. 왜곡된 권위주의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이들은 ‘권위’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참된 보호의 근원인 ‘하나님의 권위’에서 도망가려 한다. 그러나 그분의 영원한 권위 아래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보호란 없다. 우리에게는 당당히 그분의 권위 아래로 들어가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것이 순종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은 영원한 보호의 길이며, 안식의 길이다.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축복의 길이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거친 반항의식을 내려놓고 현명하고 용기 있게 순종의 결단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 차 례

제1부 그분의 날개 아래 거하기

1.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나의 의뢰하는 여호와

2.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

제2부 순종함으로 자유하기

3. 기쁘게 순종하는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

4. 미혹의 대가 사탄

5. 순종의 씨앗, 불순종의 씨앗

6. 순도 백퍼센트 순종

7. 생명을 향해 열린 문, 순종

제3부 하나님의 질서에 뿌리내리기

8.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9. 하나님 나라의 법, 왕을 공격하라

10. 배나 존경할 자

11. 순종하는 마음, 복종하는 태도

12.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능력

13.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14. 생명을 살리는 메시지

제4부 순종으로 깊어지는 믿음의 우물

15. 모든 영역에서 권위 인정하기

16. 순종으로 자라는 믿음

17. 그분의 보호 아래, 그 풍성하심 아래

순종

존 비비어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2년 4월/303쪽/10,000원

제1부 그분의 날개 아래 거하기

1.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나의 의뢰하는 여호와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시 91:1-2).” 다윗의 이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보호하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거하는 자는’이라고 제한하는 표현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 담겨 있다. 누가 그분의 보호 아래 있는가? 간단히 말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덮으심 아래 자유와 보호를 누렸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순간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여 벗어버린 바로 그것, 즉 “자신을 덮을”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함으로 인류는 한때 알던 귀한 자유와 보호를 잃어버렸다.

권위는 인기 있는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권위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면 권위를 통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보호와 유익을 놓친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권위를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권위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길은 완전하다. 당장은 쓰리고 아파 보이는 일도 실은 보호와 축복이나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순수하고 완전하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

2.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는 왕국이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이 말씀에는 생각할 것이 많다. 첫째, 다스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나님 모르게 권위 있는 자리에 합법적으로 오를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우리는 이 개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둘째, 인간 권위에 반항하는 것은 곧 주님의 명령이나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것이며, 그것은 심판을 자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의 저자가 (권력에 굶주린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워치만 니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복종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권위부터 만나야 한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그 권위를 만났는지의 여부로 규정된다. 그런 권위를 만났다면 우리는 하나님한테 붙들려 있기에 앞으로 어디서든 다른 권위를 만나도 그분이 우리를 쓰실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성경적 기초부터 쌓아야 한다. 그 기초를 다지고 나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대한 복종의 중요성을 다룰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그 위에 쌓아올릴 모든 것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제2부 순종함으로 자유하기

3. 기쁘게 순종하는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고백할 뿐 아니라 행하는 이들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일반 개념과 정의는 이 말씀 앞에 무너진다. 우리는 ‘죄인의 기도’를 고백하기만 하면 천국이라는 안전지대가 보장된다고 가르치고 믿었다.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부분은 소홀히 하거나 전혀 강조하지 않았다. 이 사이비 은혜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곁길로 나가 순종을 경시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고백할 뿐 아니라 행하는,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만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 12-13).”

말세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불법과 미혹이다. 불법이란 자기 일정과 즐거움과 계획을 주님 명령보다 더 앞세우는 습관에 젖어 그것을 정상적이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행동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복종하겠다던 고백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계획과 맞는 부분만 순종하면서도 자기들이 불법을 행한다는 걸 모른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것이 오늘날 믿는다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다. 성경은 불법을 ‘가장 큰 죄’라고 말한다. 죄의 핵심 정의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미혹’이 팽배하다.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에는 미혹에 대한 경고가 거듭 나온다.

1980년대 말 나는 기도하는 중에 무서운 환상을 보았다. 그 환상은 내 삶과 사역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다. 나는 큰 무리를 보았다.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무리였다. 그들은 천국 문 앞에서 입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나 정작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넋이 나간 듯한 충격과 고통과 공포가 어렸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기독교를 믿었기에 당연히 천국에 갈 줄로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진정 무엇이 죄인지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삶을 진정 열망하는 자녀들을 찾으신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기쁨으로 그분의 뜻을 행해야 한다. 솔로몬은 순종에 따른 성공과 불순종에 따른 고생이 가득한 생을 마감하면서 모든 시대에 적용할 지혜의 말을 남겼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4. 미혹의 대가 사탄

미혹을 막는 가장 확실한 대비책은 전달받은 지식이 아니라 계시된 지식이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 3:1).”라고 밝히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고통하는 때’는 정부나 무신론자, 이교도들이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때가 아니라 교회 안에 미혹이 만연한 때다. 미혹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다! 미혹된 사람은 사실 자기가 틀렸는데도 옳다고 굳게 믿는다. 예수님은 미혹에 대해 거듭 경고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 그분의 경고에서 쉽게 긴박감을 느낄 수 있다. 진지하고 엄숙한 어조다. 그분은 제자들이 이 말씀을 영혼에 새기고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미혹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불순종(불법)이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미혹하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하나님의 말씀과 그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면 작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미혹의 문이 열린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미혹당하는 이유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했기(살후 2:10).” 때문이라고 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안락이나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권리와 특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요, 우리의 창조주와 구속자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이 완전한 분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 사실이 우리를 미혹에서 지켜 준다.

하와가 처음 한 번 불순종한 것이 불법이라는 은밀한 세력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서막이 되었다. 아담과는 달리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듣지 못하고 아담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것이다. 하와에게 그것은 계시된 지식이 아니라 전달된 지식이었다. 그래서 뱀은 아담 대신 하와를 표적으로 삼았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계시해 주셔야 말씀이 우리의 한 부분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일종의 율법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겸손히 행할 때 계시를 받을 수 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하나님은 우리가 책을 읽을 때나, 타인의 말을 들을 때나, 혼자 성경을 읽을 때나 성령과 교제할 때 말씀을 계시해 주신다.

사탄은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하심을 무시한 채 조항만 끄집어내어 하나님을 불공평한 존재로 보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권을 공략한다. 사탄은 바보가 아니다. 주님 권위의 기초를 건드린 존재다.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하는 고백처럼 하나님의 보좌는 그분의 권위를 상징한다. 사탄이 미혹하고 곡해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왜곡한다면, 그때부터 그 권위의 기초는 그분의 피조물에게 의문의 대상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게 된다. 사탄은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처럼 되려 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노예 삼아 스스로 권좌에 올랐다(사 14:12-14).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탄을 물리치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히 5:7-8).”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으셨다. 그 누구보다 더 큰 유혹과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순종을 선택하셨다. 말씀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첫째 아담의 타락에서 배우라. 그리고 마지막 아담의 순종을 힘써 따르라.

5. 순종의 씨앗, 불순종의 씨앗

순종이란 참된 믿음의 증거인 까닭에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의 관계다.

불순종의 결과는 다양하다. 즉시 눈에 띄거나 분명하지는 않아도 씨를 뿌리면 거둘 게 있듯이 확실하게 여파가 있다. 영혼의 대적인 사탄은 이 지식을 우리가 모르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순종을 경시하고 미혹하는 전략에 쉽게 넘어가길 바라면서 말이다. 순종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즉시 생기는 이득에 비하면 불순종의 결과는 대단치 않다는 논리를 무의식중에 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미혹적이고 치명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것이 불법의 신비 내지 은밀한 세력이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신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그 말을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적용해 보라.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다가 죽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회개할 때 받아 주신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나아가 그분은 가인을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아무 조건 없이 받아 주신다는 현대 신학은 틀렸다. 실제로 그런 주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위험한 주장이다. 우리를 지키고 죄에서 떠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다(행 5:11).” 불순종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6. 순도 백퍼센트 순종

99.9% 순종이 사람에게는 순종으로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결코 순종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삶은 한 인간이 불순종이라는 유희에 빠질 때 일어나는 일을 생생히 보여 준다.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사울에게 전한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 모든 것을 멸절시키되 왕은 살려두었고 가장 좋은 소와 양을 전리품으로 가져와 백성에게 주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했다. 아마도 당시 문화에 따르면 한 나라를 정복해 그 지도자를 생포하고 살아 있는 전리품을 왕궁으로 가져오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15:11).” 사울은 명령의 99.9%는 순종했으니 그것을 순종이라고 보겠지만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보시며 그것을 ‘거역’이라고 표현하신다.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여 참된 회개에서 등을 돌릴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그렇게 불순종하는 행동을 반복하기 쉬워진다. 둘째, 미혹의 휘장이 마음을 덮어 죄를 깨닫는 감각이 둔해지며 결국 그 감각 대신 논리적인 판단을 넣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죄를 지을 때는 비수가 이전만큼 예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중간에 휘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끝내는 휘장이 두터울 대로 두터워져서 전혀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정당화만 있을 뿐이다. 미혹이 진리를 숨기며 양심이 마비된다.

이쯤 되면 경건의 모양은 남아 있지만 선악의 지식이라는 저주 아래 그냥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이제는 성령께서 마음에 넣어 주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닌 곳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미혹된 자기 마음의 명령을 따라 살아간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의문(儀文)일 수도 있고(고후 3:6) 사회에서 통용되는 옳고 그름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다. 이제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그에게 선지자적 메신저를 보내시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사람을 점진적으로 붙잡으신다. 언제나 우선 그분은 직접 죄를 자각하게 함으로 다가오려 하신다. 미혹의 휘장이 두터워져 하나님의 마음이나 말씀과 단절된 상태라면 그분은 선지자적 메신저를 보낸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 보내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수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 5:19-20).” 여기서 ‘허다한 죄’란 반복하여 불순종한 결과 진리를 떠난 것이다. 그러나 이 선지자적 경고까지 무시하거나 거부하면 대개 하나님은 고생이나 질병이나 그밖에 고난으로 심판하신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67, 75).” 우리는 심판을 받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순종이다.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의 계획과 욕심이 죽지 않는 한 결국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욕망은 대립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사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선지자답게 단호히 선포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마법)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사술은 사람을 귀신의 세계에 활짝 열어 놓는다. 사술은 자기의 환경과 상황과 사람을 다스려보려는 것이 목표지만 귀신의 세계에 개입되다 보면 오히려 귀신에게 다스림을 받게 되어 있다.

고등부 목사를 하면서 비교(秘敎)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인근 고등학교들에는 장난삼아 강신술을 해 보는 고등학생들이 꽤 있었다. 마법이나 사탄교에 빠진 친구 얘기들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흥미로운 사탄교의 원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임에 사람을 새로 받아들일 때 그에게 마약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불법 성관계를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하는, 하나님의 법과 국가법을 어기는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거역은 사술’이라는 진리를 배운 후에야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거역이 클수록 더 많은 힘을 얻는다고 배운다. 사실이다. 거역은 사술이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의 소위 사탄교 경전에도 그 개념이 있다. 몇 년 전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사탄교와 마법 전문 채널을 보았다. 사탄교 경전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기자는 제1계명을 이렇게 보도했다. “네 뜻대로 할지니라.” 그 말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 순간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1:7-8)”.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 한다(요 5:30).”

무지한 사람들은 불법을 자유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거역에는 자유가 없다. 거역하면 타락의 노예가 될 뿐이다. 바울은 이 점을 강조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예수님도 이 원리를 강조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7. 생명을 향해 열린 문, 순종

불순종이 하나님 앞에 심각한 문제라는 진리를 기억하고 삶의 정상 궤도로 돌아간다.

이스라엘을 보자. 광야를 지나는 동안 그들은 모압 평지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은 자기 땅을 지나가지 못하게 한 바산 족속을 쳐서 함락시키고 아모리 족속을 멸한 상태였다. 발락과 그가 다스리던 모압 족속과 미디안 족속은 근심에 휩싸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겠다(출 23:27).”고 약속하셨다. 발락 왕은 사자를 보내 예언자 발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발람은 영적인 통찰력이 정확하기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고, 그간 발람의 예언은 한 번도 성취되지 않은 적이 없던 터였다. 이튿날 그들은 바알의 산당에 올랐다. 그러나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자 엉뚱하게도 그의 입에서 축복의 말이 나왔다. 당연히 왕은 노했다. 그러자 발람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다시 저주를 되풀이했지만 그때마다 축복의 말만 나올 뿐이었다. 이때 발람에게서 의미심장한 표현이 나온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민 23:23).”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할 수 있는 사술이나 복술이 없다고 선포했다.

중고등부 목사 시절, 마법사 역할을 하던 한 여학생이 예수님께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 학생의 어머니는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딸을 사탄에게 바쳤다. 회심 후 그 여학생이 했던 말에 우리는 전율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저주를 할 수가 없어요.” 왜냐고 묻자 그 아이는 “저주를 하면 그 저주가 우리한테 돌아오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발람의 말과 일치한다. 설사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발했다 해도 그 저주는 발람의 머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거역과 사술의 영적 관계를 아는 발람은 왕에게 이스라엘 진 안에 모압 여자들을 몰래 들여보내라고 했다. 발람은 여자들에게 우상을 들고 들어가게 하고,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성적인 죄를 짓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했다. 거역이 이스라엘에 사술의 저주를 불러오리라는 것을 안 것이다. 그 결과 불순종은 아무도 저주를 할 수 없던 이 민족을 염병이라는 저주 아래 몰아넣었다. 그들의 거역은 극악하여 모세와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 앞에 울며 회개하고 있는 앞에서도 뻔뻔하게 자랑삼아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온 파렴치한 이스라엘 남자도 있었다. 그러면 염병은 어떻게 그쳤는가?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자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였더니 염병이 그쳤다(민 25:7-8). 거역은 귀신이 다스릴 통로를 내주는 일이다. 하나님이 밝히 계시하신 내용에 불순종할 때마다 사술의 저주의 영향력 아래 제 발로 들어간다. 거역은 사술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즐거이 복종함으로 마귀를 대적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일단 불순종하여 고난을 겪기 시작하면 사람들 대부분이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한 실수에서 배우기는커녕 오히려 남을 비난하면서 불순종이라는 광야에서 계속 방황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미혹을 드러내고,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의도를 가려낸다. 마귀를 대적하여 싸울 때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승리도 없다.

제3부 하나님의 질서에 뿌리내리기

8.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권위를 존중하며,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남겨 놓는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여기서 ‘위에 있는 권세’란 누구일까? 위 구절에서 바울은 정부 당국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정부 지도자뿐 아니라 다른 영역들에 있는, 하나님이 권위를 위임하신 사람들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권위를 위임하신 분야는 정부, 교회, 가정, 사회(고용주, 교사, 상사 등)다.

이 점에서 흔히 사람들은 마음에 담을 쌓는다. “인정사정 없고, 철두철미하게 악한 지도자들이 있다. 어떻게 감히 그 사람들도 하나님이 정하신 권위라고 할 수 있는가?”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지도자는 20세기에서 가장 악한 지도자일 것이다. 애굽 왕 바로도 당연히 같은 범주에 드는 자다. 그 권위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어쩌다 그 밑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우연이었는가?

그러나 바로를 그 권위에 앉힌 것은 하나님이지 마귀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무참히 학대하고 무수히 죽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우리의 편안함이나 세상의 안락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우선순위는 큰 구원, 곧 구속이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들려주신 지혜로운 말씀을 들어 보라.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하나님은 바로의 학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심으로 온 천하가 여호와를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알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알리신 것은 당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속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9:18, 11:33-34).” 그분은 우리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다. 아직 그 뜻을 밝히실 때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통찰과 이해는 물론이고, 말씀을 통해 일종의 패턴을 주신다. 그러나 어느 지도자를 왜 세우셨는지를 늘 보여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지혜와 선하심을 믿기를 바라신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절대 목적 없는 고난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고난을 바꾸어 당신의 구속을 이루는 데 쓰신다.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 않을 때도 그 뜻은 영원의 관점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은 물리적 세계를 넘어 영적인 세계를 판단하신다.

우리는 겸손과 순종과 기도로 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다. 하나님 백성이 자신을 낮추고 기도하며 악한 길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땅을 고쳐 주신다. 하나님이 친히 권위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심판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하시도록 남겨 놓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에 늘 마음을 열어 두자. 그분은 우리를 대적하는 분이 아니라 지지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9. 하나님 나라의 법, 왕을 공경하라

권위에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공손히 복종으로 대하며 의무를 다해야 한다.

“종들(직원들, 교인들, 시민들 등)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고용주, 교회 지도자, 정부 권위 등)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 6:5-8).” 바울이 전한 말이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벧전 2:13-14).” 성령은 베드로를 통해서도 다스리는 모든 권위에 복종하라고 명하신다. 인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인간에게 부여하신 권위를 인정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권위를 모른다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복종하기 어렵다. 진정한 권위를 보지 못한다면 순종하려 애쓸수록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다.

어느 대도시의 인기 있는 기독교 방송의 라디오 대담 프로에 나간 적이 있다. 10분쯤 진행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 되어 작게 흘러나오는 광고를 듣고 있었다. 전국의 날씨를 전하는 대목이었다. 그는 날씨가 너무 추워져 주지사의 입술까지 얼어붙었다고 했다. 주지사의 이름까지 대면서 이제 그 입술이 얼어붙었으니 평소에 곧잘 내뱉던 실없는 소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경악했다. 물론 그 주지사가 늘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그는 주지사였다.

핍박받던 초대 교회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권위를 공경했다. 계속 지금처럼 행동하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미 활동하고 있는 불법의 세력에 힘을 더해 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살후 2:7).” 그런 행동은 성령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의 원리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라는 권위 인물의 행동을 지적했지만 사뭇 다르게 접근했다. 첫째, 요한은 헤롯에게 “당신이 그 여자(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마 14:4).“고 말했다. 그는 헤롯에게 경멸조로 말하지 않고 죄 자체를 지적했다. 둘째, 요한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자신의 권위로 헤롯을 대면했다. 셋째, 요한은 불손하게 왕을 비웃지 않았다.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행 23:5).”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 2:1-3).”

물론 이단을 이끄는 사람들은 복종이나 순종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유다서를 보면 이런 사람들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비방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유 1:9-10).” 어떤 지도자에 대해서든 경박하게 조롱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이 말씀은 다른 분야에 위임하신 권위에도 확대하여 적용해야 한다. 공경하라는 말씀이 나타난 구절들을 잘 보라. 가정과 관련해 하나님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하신다. 아울러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 하신다. 사회의 지위와 관련하여 성경은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 6:1).”고 말한다. 교회의 권위에 관해서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고 명한다.

10. 배나 존경할 자

사역으로 섬기는 사람들, 특히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들을 더욱 존경해야 한다.

한나와 제사장 엘리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이 권위를 두신 영적 지도자라면 그 사람이 사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든 그 사람에게서도 받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겉모습 너머에 있는 것을 보며, 그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공경한다면 말이다. 예수님은 한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사역자들에게서도 받을 것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한나는 엘리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경했다. 엘리는 한나를 판단하고 모욕했으나 한나는 엘리를 공경했다. 만일 한나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살았다면 엘리의 행동을 문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본능적인 논리로 살지 않고 여호와의 영적 권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의롭게 판단하실 하나님을 믿었다.

성경은 타락한 권위와 경건한 권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위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을 높여 지도자의 심판자가 되겠다는 것은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이 자기 위에 두신 권위 위에 올라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보다 더 위에 있겠다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하나님이 제대로 심판을 안 하시니 제가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요 13:20).” 절대 잊지 말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도 기적을 행하고 귀신 쫓는 권세를 주어 내보내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결국 악한 자임이 드러나리라는 것도 아셨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매사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의 과오를 드러내셔야 하거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사람도 분명 그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때가 그에게서 떠날 때다. 교회에서 권위 있는 사람이 노골적인 타락이나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그 사람의 더러운 샘에서 더는 물을 길어 마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그런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고 무척 단호하게 가르친다. 지도자가 간음이나 동성애나 착취나 절도나 이단이나 그 외 죄에 빠진 것을 당신이 알고 있는데도(혹은 사람들에게 폭로되었는데도) 그 지도자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했다(고전 5:9-11).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 그 다음은 선지자, 의인, 그리고 소자(어린아이)로 이어지는 모든 권위의 순서를 두시고 이를 복종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궁극적으로 ‘보내신 이를 영접하면 그에 상응하는 상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 갈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좇는 이들만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으며, 그분을 통해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가 원치 않는 꾸러미에 담아 보내실 때가 많다. 바로 그 방법을 통해 우리 마음의 실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11. 순종하는 마음, 복종하는 태도

순종이 권위에 대한 행동의 문제라면 복종은 권위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순종과 복종, 이 둘은 서로 다른 명령이지만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순종은 하면서도 복종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있고 복종은 하면서도 순종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있다. 순종(obey)이 권위에 반응하는 행동의 문제라면 복종(submit)은 권위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점을 놓친다. 하나님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마음에 숨은 태도를 함께 보신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권좌를 물려줄 때 이렇게 당부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의중)을 아시나니(대상 28:9).”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바울의 말에도 순종과 기쁜 태도의 복종이 함께 들어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위의 영역이든 정부든,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하나님은 복종과 공경의 태도를 지니라고 명령하신다. 권위가 성경에서 ‘명백히’ 죄라고 하는 일을 시키지 않는 한, 행동으로 순종해야 한다. ‘명백히’라는 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부인하라든지 사람을 죽이라든지 다른 신을 섬기라든지 하는, 예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라는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았다. 회색 지대나 판단의 재량 문제가 아니었다.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날 때만 권위에 불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12.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능력

지도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지도자에게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 이들은 지도자의 비효율적 방법, 현명치 않은 결정, 지도자가 자기 삶에 미친 부정적 영향에 대해 하소연한다. 지도자가 뭔가를 약속만 해놓고 감감 무소식이라고 불평한다. 사실 상황은 점점 나빠지는 것 같다. 목사가 뭔가를 못 보고 있다고 확신하며 이제 목사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런 논리는 불평을 불러들이며, 불평은 결국 불복종으로 이어진다. 이제 미혹에 맞장구치다 결국 속아넘어가 권위를 등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하나님이 그들을 성장시키고 보호하시려고 그 권위를 그들 위에 두신 것인데도 말이다.

지도자인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갈라진 땅과 사막의 뱀과 전갈뿐이었다. 모세가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애굽에서 바로 아래서 살 때는 음식이라도 있었다. 모세는 괴로움과 굶주림만 주는 사람 같았다. 애굽에서 살 때가 더 좋았다!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오갈 정도로 불평이 심해졌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 질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무슨 말을 하는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출 16:8).”

백성들은 자기들이 모세에게만 불복종하는 줄 알았지, 그 불복종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과 관계 있는 줄은 몰랐다. 순종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논리를 따라 살았다. 시각과 환경에서 나오는 제한적인 논리대로 사는 사람들은 이미 미련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룰 수 없다. 반면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여호수와와 갈렙처럼 결국 약속을 누리게 된다.

내가 8개월 간 애써 준비한 가정 셀 그룹 사역을 담임 목사가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나는 목사가 틀렸다고 믿었다. 나는 내 ‘분별’이 맞다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기도 중에 그 프로그램을 밀고 나가라는 말씀을 들었었다. 나는 회의석상에서 20분 동안이나 가차없이 담임 목사에게 따졌다. 그러나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성령의 책망을 들어야 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인간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대하고 있음을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 후 주님은 내 마음에 성경 구절을 하나 새겨 주셨다.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내게 밝은 빛을 비추며 어려울 때 방향을 제시하는 말씀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나는 그것이 시험인 줄 몰랐다. 하나님의 시험은 모든 상황이 끝날 때까지 모르기 마련이다. 시험은 언제나 우리의 숨은 심령을 드러낸다.

그 프로그램을 실행했다면 많은 영혼을 구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방법으로 당신의 일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우리 심령에 새겨지는 데 더 관심이 많으시다. 그분은 하나님이다. 길 잃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길이라면 그분한테는 다른 참신한 구상이 많다. 그러나 한 인간의 심령에 필요한 복종의 원리만은 절대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다. 복종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복종하지 않는 마음에는 아무 대안이 없다. 나는 담임 목사에게 순복하고서야 비로소 그 프로그램을 밀고 나가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행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권위 있는 사람이 내린 결정을 불평하며 끼리끼리 쑥덕인다면 불화와 반역을 심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심판이 임한다. 나는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합의한 것이 하나 있다. 혹 결정에 도움이 될 사실이 있으면 내게 일차로 재고를 건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의할 때 중요한 것은, 사안을 신중히 검토한 후에 자신이 전달하려는 것을 내가 알 수 있도록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정보를 접한 뒤 결정을 바꾼 일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건의했는데도 내가 본래 내린 결정을 고수하면 우리는 힘을 합쳐 일을 진행한다. 연합하여 일을 진행했는데 내 결정이 틀린 경우에도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지켜 주신다.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은 내 밑에 있는 사람들과 나를 모두 지키신다.

13.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 아래 그분의 보호 아래 남기 위해 예수님은 자기변호를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삶에서 이루시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즐겁고 누구나 좋아하며 아픔이 없는 그런 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깨뜨리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주님과 친해지려면 우선 상한 심령이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이 즐겁지 않더라도 그분의 친밀한 임재하심은 그 고생에 비할 수 없다. 다윗은 이것을 어려서부터 배웠다. 상한 심령은 희생적 삶이나 제사가 아니라 순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벧전 2:19).”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친히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심판하실 분을 한번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가 있는 사람 앞에 서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자기 변호를 거두심으로 예수님은 전 과정에서 하나님의 변호 아래 남으셨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변호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을 고소하는 사람을 심판자라고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를 잃고 만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처럼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권위를 약속하신다. 고난이 클수록 큰 권위를 맡기신다. 부당한 권위를 만나면 하나님이 당신을 복 받을 자리에 두셨음을 알라. 바르게 반응해 복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분노와 원한을 품을 것인지 선택은 당신 몫이다. 승자의 길을 택하라. 그것이 생명이다!

14. 생명을 살리는 메시지

권위를 공경하는 자들은 큰 권위를 얻게 되며 존경을 받고, 하나님의 복이 뒤따른다.

우리는 자기 위에 있는 사람들의 결점을 보면서 기뻐하고, 그런 결점이 있으니 그 권위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낄 때가 정말 많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히 지도자들의 죄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영적 성숙도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지표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는 권위의 잘못과 실수를 사용하셔서 우리 심령의 참 모습을 드러내실 때가 많다.

다윗은 철저히 권위에 순종했다. 그리고 그 모본은 그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 결과 다윗은 그 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권위를 공경하는 사람은 큰 권위를 얻으며 존경을 받는다. 늘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그러나 권위를 욕하거나 경시하는 이들은 결국 자신도 멸시를 받으며 그 결과 심판의 씨앗을 뿌리는 셈이다. 거역은 전염되며 죽음을 몰고 오기 때문에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라고 말한다.

제4부 순종으로 깊어지는 믿음의 우물

15. 모든 영역에서 권위 인정하기

진정 구원받은 자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바른 권위를 식별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이라는 말에 열쇠가 들어 있다.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그분은 성령으로 분별력을 주신다. 요한도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고 이 사실을 확증한다. 워치만 니는 말했다. “진정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면 하나님의 권위가 머무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식별할 수 있다(Spiritual Authority).”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권위를 아는 것이다. 그분과 그분의 권위는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를 제정하신 것은 하나님한테는 얼마나 큰 모험인가! 하나님이 제정하고 위임하신 권위가 하나님을 잘못 대변한다면 하나님한테는 얼마나 큰 손해인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그런 권위를 정하셨다. 하나님이 권위를 제정하시는 것보다는, 인간이 그 권위에 두려움 없이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권위를 맡기는 것을 겁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두려움 없이 권위에 순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담대히 권위를 제정하셨으니 우리도 용감히 권위에 순종하자. 잘못된 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라 권위에 있는 이들의 잘못이다. 주님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롬 13:1).”고 명하시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자들은 순종만 하면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잘못된 순종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반대로 그분은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위임된 권위에게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은 반역이다.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은 그 점에서 하나님에게 책임져야 한다.

- 워치만 니의 『Spiritual Authority』 중에서

이 글은 권위에게 부당하게 대우받은 사람이 쓴 글이다. 워치만 니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중국에서 외국 선교 단체의 도움 없이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돕다가 당국의 분노를 사 1952년에 체포되어 수많은 거짓 고소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1972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감옥에서 지냈다. 그러나 주를 경외하는 삶이 그대로 많은 죄수들에게 복음의 증거가 되어 그의 간증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많았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읽는다.

16. 순종으로 자라는 믿음

복종의 차원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믿음도 커진다.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고 승자가 되는 것이 우리 소명이다. 그분 길로 행해야 진정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으며 우리의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논리로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하지 않으셨는가.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다(고전 1:25).” 우리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고후 10:5”) 사람이다.

시간은 짧다. 따라서 우리는 효율적이어야 한다. 순종은 효율을 가져다 준다. 처음 거듭났을 때 나는 열심히 일했으나 순종은 부족했다. 내 일에는 효율이 없었고 오히려 방해가 될 때도 있었다. 믿음이 자랄수록 나는 부지런한 순종이 당장은 효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결국은 효율이 높다는 것을 깨닫는다.

17. 그분의 보호 아래, 그 풍성하심 아래

그분의 보호 아래 거하면 우리는 그분의 풍성함에 참예하게 된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이들에게 약속된 보상을 언급함으로 결론을 내리자.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아 2:3-4).” 그분의 아래 생명 나무가 있다. 이 실과는 언제나 달다. 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는 이성의 눈에는 좋아 보였지만 결국 죽음을 불러왔다. 이성의 나무에서 따먹은 실과는 모두 마찬가지다. 그분의 보호 아래 거하며 먹는 실과는 우리를 그분의 잔치로 초청한다. 거기서 그분의 풍성함에 참여하게 한다.

기도와 묵상으로 마음을 열고 지금껏 삶에서 불순종한 영역들을 지적해 달라고 성령께 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살피게 하라. 하나님 말씀의 빛은 불순종하는 영역들을 드러낸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관련된 영역일 수도 있고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와 관련 있는 영역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보여 주시는 영역들을 직접 적어 보고, 용서와 회복을 받기 위해 기도한다. 권위에게 직접 찾아가거나 편지로 용서를 구하라. 힘들겠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순종에는 큰 보상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