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세례와 충만
존 스토트 지음/김현회 옮김
IVP/2002년 2월/150쪽/5,000원
▣ 저 자 존 스토트
1921년 4월 27일 영국에서 태어나 캠브리지 신학부를 졸업하고, 1945년 목사로 안수받은 후 런던 랭햄 플레이스(Langham Place)에 있는 올 소울스 교회(All Souls Church)의 목사보(1945~50), 교구목사(1950~75), 교구장목사(1975년부터)로 봉사하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방침으로 효과적인 도시목회를 이끌었다. 영국을 비롯하여 전세계적인 복음주의의 지도자로서 로잔언약(1974)의 입안에도 참가하였으며, 지금까지 활발한 강연 및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존 스토트는 탁월한 설교자이자 복음전도자이며 학자인 동시에 우리에게 바른 신앙의 방향을 이끌어주는 저술가이기도 하다.
▣ 역 자 김현회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과 남가주에 있는 탈봇 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가정교회 모델을 좇아 새로 개척한 질그릇교회(미국 LA 소재)를 섬기고 있다. 역서로 『새들백 교회 이야기』『디모데전서․디도서 강해』『히브리서 강해』『성령 세례와 충만』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성령이라는 약속된 선물은 성령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 한 번 성령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어떻게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방언과 예언, 병 고치는 은사만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의 전부인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존 스토트 특유의 논리 정연함과 명쾌함이 돋보이는 본서는 성령의 약속, 충만, 열매, 은사라는 네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성령의 사역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다루고 있다. 성령의 사역과 활동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이 존재하는 이 시대에, 이 책은 성령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또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활용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더 분명히 깨닫게 할 것이다.
▣ 차 례
서문
서론
1.성령의 약속
2.성령의 충만
3.성령의 열매
4.성령의 은사들
결론
성령 세례와 충만
존 스토트 지음/김현회 옮김
IVP/2002년 2월/150쪽/5,000원
서문
어떤 사람들은 ‘신오순절주의(neopentecostal)’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은사주의(charismatic)’로 알려진 한 운동이 계속 퍼져 왔다. 이제 이 운동은 가히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고, 대단히 존경받는 교인들도 이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우리는 이 운동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현대 교회의 모습을 평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이 운동을 사용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신 사실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은사주의 운동은 아직까지 매우 유동적이며, 그 지도자들이나 구성원들이 모두 신학적으로 서로 일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이들은 ‘오순절주의’의 입장을 전부 수용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오순절파 교회들과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 어떤 이들은 자칭 ‘오순절적’ 경험이라고 즐겨 부르는 것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전통적인 의미의 ‘오순절파 신학’의 용어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이해에 있어 유동적인 상태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표현할 방법을 계속해서 찾고 있다. 나는 스스로 ‘은사주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가 쓴 글에서 자신의 입장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느낄 수도 있음을 미리 사과하고 싶다!
나는 대화의 진전을 위해 우리가 동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영역을 제안했다. 첫째, 진리의 객관성이다. 우리의 모든 전통과 모든 의견과 모든 경험은 성경의 진리라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금석에 종속되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중심성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와 교회의 머리시고,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것”이며(1:11~18),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2:9),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는 것을(2:10) 받아들인다. 셋째, 우리는 삶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은, 영적 경험은 매우 다양하며 또 영적 은사에도 상당히 여러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서로 속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기만 한다면 풍성한 다양성을 지니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론
이 연구를 시작하면서 먼저 네 가지 서론적인 요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설명하는 부분은 교훈하는 부분에 근거해서 해석될 때에만 유익하다는 것이다. 사건을 묘사하는 성경의 어떤 이야기들은 그 안에 설명적인 부분을 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해석을 제공하는 반면, 어떤 이야기들은 독립적으로는 해석될 수 없고 다른 곳에 나오는 교리적 혹은 윤리적 가르침의 견지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것은 ‘저희에게 … 거울이 되고 … 우리의 경계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전 10:11: 참고. 롬 15:4) 넷째,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는 학문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개인적이어야 한다.
1. 성령의 약속
성령이라는 이 약속된 ‘선물'은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의 확신이 나뉜다. ‘선물’과 ‘세례’는 다르다고 말하는 자들은, 아무리 최소한 이상적으로는 세례가 선물에 바로 뒤이어 나타난다 하더라도, ‘세례’를 두 번째요 나중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반면에 두 가지가 같다고 보며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생생한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보는 자들은, 이 ‘세례’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것으로 여긴다. 내 입장은 후자인데, 이제 곧 그 입장의 성경적 근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상세히 설명 할 것이다.
공관복음의 세 저자가 단순 미래형으로(“그가 세례를 주시리라") 기록한 요한의 이 말이 제4복음서에서는 현재분사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1:33). 현재분사형을 사용한 것은 그 일이 특정한 시간대에 한정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오순절의 단회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독특한 사역을 나타낸다.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이다." 요한이 ‘세례자’ 또는 ‘세례 주는 자’로 불린 것은 물로 세례 주는 것이 그의 사역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듯이, 예수님이 ‘세례자' 또는 ‘세례 주는 자'로 불린 것도 성령으로 세례 주는 것이 그분의 사역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도 오순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외쳤다(행2:38). 이렇게 말함으로써 베드로는, 회개하고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회개의 신앙을 공적으로 증거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두 가지 선물, 즉 죄의 용서와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었음을 확증했다.
이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처음 두 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이 ‘성령의 선물’은 바로 그 앞에서 언급된 ‘성령의 약속’(행 1 :4: 2: 33, 39), 성령의 세례’(1:5), ‘성령의 부어 주심’(2:17,33)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표현 중에서 두 가지는 성령을 주는 쪽을 더 강조하는 반면 나머지 두 가지는 받는 쪽을 더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에 나오는 회개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이 오순절 전에 약속하셨던 성령의 선물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오순절에 부어 주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동일시에 대한 확신을 계속 유지했다. 후에 고넬료가 회심하고 성령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그것을 똑같이 성령의 ‘세례’와 ‘선물’이라고 지칭했다(행 11:16~17).
논증의 다음 단계는 성령의 부어 주심 또는 세례가 단지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일 뿐만 아니라 (이 축복이 그 이전에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한 보편적 축복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이 축복이 이제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생득권(birthright)이 되었다는 점에서). 첫째는, 요엘의 예언과 그 예언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이다. 하나님이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약속에서 강조점은 성령이라는 선물의 보편성이다. 베드로는 그 예언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행2:17). 여기서 '모든 육체'는 이 선물을 받는 데 성별이나 나이, 지위나 인종 등이 전혀 상관없다는 뜻이다. 구약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역을 위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하셨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38~39절, 그의 설교 결론에서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의 약속의 범위는 그분의 부름심의 범위와 같음을 밝힌다. 이 신성한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이 신성한 약속을 상속받는다.
사도행전 2장에 의하면 오순절에 120명과 3,000명의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 또는 '선물'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3,000명은 처음 그룹의 사람들과 같은 기적적인 현상을 경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베드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확증에 의하면, 그들은 같은 약속을 받았고 같은 선물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12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표준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인 3,000명의 경험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120명의 경험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은 단지 역사적인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순절 전에는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상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 오순절 사건은 기독교 교회역사에서 때때로 이어져 왔던 최초의 '부흥'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현상을 표준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이미 생명으로 충만해진 것이다"(골 2:9~10).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충만함 가운데 주셨다면,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가 그분의 성령으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더 보태실 수 있겠는가? 뭔가 다른 선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야말로 예수님의 충만하심과 만족케 하심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 성령의 충만
성령의 세례를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와 '충만'의 차이점을 보자. 행2:4절에 보면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였다. 세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고(하늘로부터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었다. 세례는 독특한 입문적인 경험이었고, 충만은 계속되는 영구적인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입문의 경험으로서 세례는 반복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든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5:18절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충만하라는, 즉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잘 알려진 명령을 담고 있다. 사실 이런 구절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며 또 애석하게도 그것이 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을 신령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즉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고 책망한다. 그는 성령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들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익어 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은사를 넘치게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성령충만을 누릴 수 있는가? 신약성경의 두 가지 중요한 본문을 살펴보자.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님께로 와야 한다고 첫 번째 본문은 강조한다. 요한복음 7:37~39에 기록된 주님의 고무적인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계속해서 요한은,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한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그분이 아직은 오순절의 충만한 모습으로, ‘생수의 강으로’부은 바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친 나그네의 갈증을 해소해 주고 메말라 갈라진 세상을 적셔 줄 생수는 성령의 충만을 뜻한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들(목마르다, 오다, 마시다, 믿다)은 모두현재형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와야 하고 계속해서 마셔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목마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시는 물은 이제 흐르는 물이 된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우리 안에만 담아둘 수는 없다. 만일 흘러나가지 않는다면, 그분이 거기에 계시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전도의 열망과 활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령충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주장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표지는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 가장 주된 증거는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 사도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성령충만의 결과들을 묘사한 유일한 본문은 에베소서5:18~21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도덕적인 자질들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헬라어 원문에는 이 본문이 명령형으로 된 두 개의 동사(“술 취하지 말라. …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와 그것들을 수식하는 현재분사로 된 네 개의 동사 (문자적으로는 ‘말하는 것’,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 ‘감사를 드리는 것’, ‘복종하는 것’)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단 하나의 명령 다음에는 성령충만의 결과들을 보여 주는 네 가지 묘사가 이어지고 있다.
최초로 성령 충만했던 신자들이 일종의 만취 상태의 황홀경에 빠졌었다거나 또는 그러한 상태가 미래에 있을 모든 성령충만의 경험의 패턴으로 제시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옳은 해석이다. 에베소서 5:18에는 술 취함과 성령충만이 그러한 점에서 비교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는 분명한 암시가 있다. 왜냐하면 술 취함은 ‘지나침’(AY) 또는 ‘방탕한 것’(RSY)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헬라어 ‘아소티야 (asõtia)는 신약성경의 다른 두 곳에도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방탕’(딛 1:6: 벧전 4:4)을 의미하며,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자신을 ‘구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술 취하면 절제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바울은 그러한 상태를 피하라고 쓰고 있다. 따라서 술 취함과 대조되는 상태인 성령충만은 절제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갈라디아서 5:23에서 성령의 열매는 절제(enkrateia)라는 것을 분명히 배운다! 우리는 또 사도가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는 성령충만의 결과들을 우리가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과 맺는 이성적이고 절제되어 있는 건강한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성령충만의 네 가지 건전한 결과이자 확실한 객관적 증거들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첫째는 “화답하며”이다. 성령충만의 첫 번째 증거가 서로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충만의 첫 번째 표지는 교제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영적 교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속적인 잡담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성령 충만의 두 번째 결과로 이어진다. 이 문구를 "너희의 전심으로(with all your heart)라고 번역한 RSV가 아마도 적절할 것이다. 마음은 노래가 비롯되는 장소라기보다는 우리의 자세를 가리킨다. 사도는 우리에게 소리 없는 예배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를 드리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때때로 감사드린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언제나 감사드린다. 불평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중 하나였는데, 그것은 불신의 표시이기 때문에 심각한 죄다. 우리가 투덜대고 불평할 때마다 그러한 모습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는 좋은 증거다. 네 번째로 우리는 피차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노래하고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성령충만의 두 번째와 세 번째 표지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첫 번째와 네 번째 표지는 우리가 서로와 맺는 관계와 관련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네 가지 현재분사가 수식하는 본 명령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그 명령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 동사와 관련된 다음 네 가지 사항에 주목하라. 첫째, 이 동사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이 의무를 회피할 자유가 없다. 성령의 충만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다. 둘째, 이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셋째, 이 동사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곧 “성령이 너를 채우시게 하라”(NEB)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술을 마시기 때문에 취하게 된다. 우리가 이미 요한복음 7:37의 주님의 가르침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충만도 마시기 때문에 주어진다. 넷째,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헬라어에서 부정과거형으로 된 명령은 단회적인 행동을 가리키고, 현재형의 명령은 계속적인 행동을 가리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형의 명령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는 어떤 극적이거나 결정적인 경험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충당해야함을 가리킨다.
이러한 우리의 해석에 대한 주된 반론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이며,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그 반론은 첫째,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회심이 바로 성령의 세례이거나 또는 성령의 세례를 포함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입장은, 성령의 세례가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선험적인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들은 항상 마음 한구석에 오순절의 극적인 사건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바람과 불 그리고 방언 등을 추구한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함께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표지들이 모든 성령 세례의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잊어버리고 있다. 조용하면서도 전혀 극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성령의 ‘선물’ 또는‘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가정할만한 성경적 근거라도 있단 말인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둘째, ‘보통 수준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그의 회심을 둘러싼 정황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나타나는 그의 수준 낮은 신앙생활에 관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와 보잘것없는 성과는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다. 교만하고 사랑이 없으며 다투기 잘하고 죄에 관대했던 고린도 교인들조차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죄나 불신으로 인해 잃어버림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처럼 '비영적인’ 또는 ‘육에 속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고전 3:1이하) 성령의 충만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다.
‘성령으로 받는 세례’라고 부르는 ‘오순절적인’ 경험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특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과 그들의 경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첫째, 그런 경험의 일부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귀적이며, 진정한 영적 경험인 양 위장한 사단의 끔찍한 계략이다. 둘째, 그러한 경험 중 좀 더 많은 부분은 심리적인 것들이다. 소위 ‘방언’이라고 불리는 현상 중 일부는 여기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떤 종류의 ‘방언’(glossolalia), 즉 의식적인 생각의 지배를 벗어난 무의식적인 언어는, 일부 의학적 이상 증상뿐 아니라, 힌두교, 이슬람교, 몰몬교에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것과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심리적인’ 것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의를 증진시키는지를 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셋째, 어떤 또 다른 현대의 경험들은 실제로는 회심의 경험인 듯하다. 이러한 그 이상의 경험들에 대해 쓰면서 나는 첫째로 그것들의 다양성에 대해, 둘째로 그것들의 부차적인 중요성에 대해 그리고 셋째로 그것들의 지속적인 불완전성에 대해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그 경험들의 다양성이다. 우리는 이미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한 번의 세례, 여러 번의 충만’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새로운 충만은 새로운 책임에 앞서 주어지며, 새롭고 힘든 일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 주어질 수 있다. 또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타고난 기질에 따라 어느 정도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둘째 부차적인 중요성에 대해 그 경험들은 매우 감동적이고 또 흥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깊은 체험들을 묘사할 때, 중생을 훼손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이 하신 최초의 결정적이고 창조적인 사역에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후속적인 경험에 대해 세 번째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들은 모두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바울이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비판했던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자기만족적인 모습이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고전 4:8). 우리는 세상에서 더 굶주리고 목말라야 하며, 오로지 다음 세상에서만 더 이상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될 것을 알아야 한다.
3. 성령의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상).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이러한 은혜들에 대해서는 듣기만 해도 식욕이 돋고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肖像)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람도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처럼 이러한 자질들을 그토록 균형 있게 또한 그토록 완벽하게 보여 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바로 이 모습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되기를 열망하는 그런 사람의 모습이다.
첫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hearts)에 부어 주시고,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 영혼(souls)에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를 우리 생각(minds)에 부어 주신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넘쳐난다. 둘째,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여기서 오래 참음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이는 무례함과 불친절을 참고 보복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또 자비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소극적인 관용을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선을 기원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말한다. 그리고 양선은 그러한 기원을 행동으로 옮기고, 구체적이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이다. 셋째,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우리가 자신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이것은 신뢰가 아니라 ‘신뢰할 만함’(trustworthiness)이며, 언제나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확고한 믿음직함이다. 온유는 부드럽고 약한 사람들의 특징이 아니라, 힘과 에너지를 자제할 줄 아는 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의 특징을 가리킨다. 그리고 절제는 혀와 생각, 식욕과 정욕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들 중 어느 것은 계발하면서 다른 것은 무시한다면 한 쪽으로 치우친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성령은 서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열매를 맺도록 일하신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진리는 성령의 열매는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일’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원에만 의지해서 자연적으로 행하는 일들을 가리키고,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성령께 반응할 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왜냐하면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에) 만들어 내시는 특질들로 이루어진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힘만 의지한다면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술취함과 방탕함’ 따위들이다(19,21절). 반면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열매는 그와 정반대의 것들로서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이다. 우리 자신의 힘만 의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숭배와 술수에 빠지고 말 것이다(20절).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육체의 일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인 반면, 그에 반대되는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의 초자연적인 기원(성령의 열매)과 자연적인 성장(성령의 열매)을 둘 다 가르치고 있다. 이 두 진리를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것은 언제나 조건이 따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과정은 적당한 조건이 주어질 때만 가능하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확고한 원리이며 그분의 일관성을 보여 주는 법칙으로서 물질적인 영역과 도덕적인 영역. 자연과 인간의 품성에 모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4. 성령의 은사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쓸 때,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의 사역의 결과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 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따라서 은사의 수를 제한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고린도전서 12장의 초두에 나오는 목록에는 아홉 가지 은사가 열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장의 말미에 나오는 두 번째 목록에는, 거기에도 아홉 가지 은사가 열거되어 있지만, 그 중 다섯 가지 은사만 앞의 목록과 일치할 뿐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만 보더라도 열세 개의 은사가 나타난다. 그 신약성경에는 모두 합쳐서 스무 개 이상의 은사가 나온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우리의 하나님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하나님이시다. 한 매혹적인 피조물들을 만드셨고, 인간 내에서도 인종적으로나 기질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패턴을 만드셨다.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새 창조, 즉 교회의 하나님은 그 분의 구속 받은 자녀들에게만 ‘영적 은사들’을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사실로부터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을 쉽게 내려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창조의 하나님과 새 창조의 하나님은 같은 분으로서, 그 분은 그 둘 모두를 통해 그분의 온전한 뜻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셨다(엡 1:4~5).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았는데,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시작하실 때부터 마지막을 계획하셨다는 근본적인 진리는 우리가 자연과 은혜 사이에, 우리의 회심 이전과 이후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고 쉽게 결론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경고한다.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몇 가지 ‘카리스마타’(은사)는 기적적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물질적인 속성을 지닌 영적 은사들이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롬 12:8). 이 모든 성경의 증거들은 타고난 재능과 영적인 은사 사이에 너무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한다.
모든 영적 은사는 기적적인 은사인가? 요즘 어떤 사람들은 ‘카리스마적’이라는 말을 ‘기적적인’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다음과 같이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묻고자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요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영적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주어지는가?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카리스마타’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다 주어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사람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사도'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대략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보내심을 받은 사람’(헬라어 apostolos) 둘째, 교회로부터 다른 교회로 특별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메신저를 묘사하는 데 쓰인다. 이들은 역사적 예수님,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자들(행1:21~22; 고전 9:1; 15:8~9)이라는 점과,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적으로 임명되고 권위가 주어졌다는 점(막 3:14) 그리고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서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았다는 점(예를 들면, 요14:25~26: 16:12~15)에서 독특하다. 그러므로 이 목록에 나타난 그러한 일차적인 의미에서는 그 은사의 성격상 그들의 계승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에도 ‘선교사'라는 이차적인 의미의 ‘사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은 어떤가? 선지자는 신성한 계시가 주어지는 통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자들이며 따라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던 자들이었다(예를 들면, 출 4:12: 7:1~2: 렘 1:4~9: 23:16, 18, 22, 28). 이 용어에 대한 핵심적인 성경적 의미에서 보면, 더 이상 선지자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성경의 정경은 완성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은사의 범위) 첫째, 은사란 널리 퍼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것이야말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롬 12:3~6, 고전 12:11, 엡 4:7, 벧전 4:10). 둘째, 몸의 은유가 나오는데, 이것은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즐겨 소개하는 표현이다. 인간의 몸에서처럼 그리스도의 몸에서도 각 장기나 지체는 어떤 기능을 갖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각 지체가 서로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롬 12:4~6). 이러한 의미에서 전체 교회는 ‘은사적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이상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은사는 어디에서 오는가? (영적 은사의 원천) 첫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카리스)대로 받은 은사(카리스마타)가 각각 다르니….”(롬 12:6). 카리스마타’는 ‘카리스’(charis)를 부여하는 것인데, 이 ‘카리스’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호의다. 봉사를 위해 주어지는 ‘카리스마타’ 역시 영생의 ‘카리스마'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도 시기심이나 자랑의 여지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둘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다. 로마서 12장과 베드로전서 4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영적 은사들의 창시자로 나오는 반면, 에베소서 4장에서는 교회의 머리이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는 예언을 성취하시면서 은사들을 주신 것들로 되어 있다(4~7절). 비록 성령이 삼위 중 실행자이시며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성령으로 행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영적 체험들과 마찬가지로 영적 은사들에서도 우리는 그것들을 전적으로 성령께만 돌려서는 안되고, 삼위의 세 위격이 모두 참여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은혜와 뜻을 좇아 은사를 주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이 가진 은사를 깔보고 다른 사람들이 가진 은사를 시기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경멸하기를 그만둘 때에만 “몸 가운데 분쟁이 없게 된다"(25절). 하나님은 불화를 싫어하신다.
은사는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가?(영적 은사의 목적) 성경은 은사의 주된 목적이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봉사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둘 다 하나님의 은사를 다른 사람들, 즉 교회를 섬기기 위해 비이타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각각 은사(카리스마)를 받은 대로 …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아마도 이 시점에서 일부 사람들에 의해 많이 강조되고 있는 은사인 '방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바울이 통역 없이 회중 앞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을 전적으로 금한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는 또한 말하는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개인적으로 방언 말하는 것도 강하게 저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비생산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울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떤 독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맨 앞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사도가 예언과 방언을 대조하면서 예언하는 자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했으며, 따라서 사도는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고 지적하고 싶어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결론이 바른 추론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고 싶다.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나는 그러한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첫째, 신약성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말한다.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 단 한 번의 유일한 예외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겠는가?
바울이 쓴 것은 분명 어느 정도 아이러니를 담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그 말 자체로 거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세우는 것은 결코 신약에서 말하는 덕을 세우는 것이 될 수 없다. 둘째, 우리는 이미 살펴본 대로 모든 영적 은사들은 봉사의 은사이며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에 비추어 이 표현을 읽어야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내게는, 바울이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기를 세우는 것에 대해 쓸 때, 그의 목소리에는 조소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종의 풍자적 느낌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카리스마타’가 봉사, 즉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주어지지만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은사들이 사랑으로써 발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는 모든 은사가, 제아무리 굉장하다 하더라도 아무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13: 1~3). 그러나 우리는 은사와 사랑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다. 참 사랑은 언제나 봉사를 통해 나타나며, 특히 봉사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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