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이것이 참된 목회자 상이다 - 죤 맥아더 지음

미션(cmc) 2010. 6. 19. 11:08

이것이 참된 목회자 상이다 - 죤 맥아더 지음

 

추천의 말1

영혼의 생수(生水)를 흠뻑 마십시다1

1. 교회에 대한 사랑(1)2

서론2

수고3

마음의 수고3

그의 애정(1 상반절)5

정의(定義)6

사용된 예(例)6

그의 구제(1 하반절-2하반절)8

그의 가르침(2하반절)11

확인 질문12

정리13

2. 교회에 대한 사랑(2)15

서론15

복습16

그의 애정(1상반절)17

육적(肉的)인 애정의 표현17

그의 구제(1하반절-2상반절)18

그의 가르침(2하반절)19

그의 인내(3-6절)22

그의 관후성(7-13절)23

확인 질문24

정리25

3. 교회에 대한 사랑(3)27

서론27

복습28

그의 애정(1상반절)28

그의 구제(1하반절-2상반절)28

그의 가르침(2하반절)29

그의 인내(3-6절)29

그의 관후성(7-13절)29

안식일에 대한 진부한 논쟁30

유대주의의 사멸31

규례의 부재(不在)32

애찬과 성찬의 쇠퇴33

주(主)의 만찬의 때33

그의 관심(14-17절)36

바울의 본을 따름37

확인 질문37

정리38

4. 사역에 대한 바울의 입장(1)40

서론40

장로들과 감독들42

하나님께 대하여 - 섬김(19절)43

교회에 대하여 - 가르침(20절)47

확인 질문50

정리51

5. 사역에 대한 바울의 입장(2)53

서론53

복습54

하나님께 대하여 - 섬김(19절)54

겸손에 대한 예(例)55

교회에 대하여 - 가르침(20절)55

불신자들에 대하여 - 전도(21절)58

회개는 후회가 아니다60

자신에 대하여 - 희생(22-24절)62

확인 질문64

정리65

6. 신약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권면(1)66

서론66

지도력의 양면(兩面)67

장로들, 감독들, 목사들70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함(28상반절)71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문제72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해야 함(28절)73

확인 질문76

정리76

7. 신약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권면(2)78

서론78

복습79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함(28상반절)79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해야 함(28절)81

회중 정치(Congregational Rule)에 대한 문제81

양 무리를 지키고 경고해야 함(29-31절)81

기도하고 연구해야 함(32절)84

사리사욕이 없어야 한다(33-35절)86

확인 질문88

정리89

8. 지도력의 원리들90

서론90

지도자는 신뢰를 받는다93

지도자는 선도권(先導權)을 잡는다95

지도자는 심사숙고하여 좋은 판단을 내린다96

지도자는 권위있게 말한다98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을 강건케 한다100

지도자는 낙관적이며 열정적이다100

열심을 내라 !100

지도자는 그의 절대적인 것은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101

지도자는 목표를 바라보지 장애물을 바라보지 않는다102

지도자는 본을 보임으로 인도한다102

지도자는 사람들을 활동하게 한다103

지도자는 그의 권위를 위임할 줄 안다103

지도자는 성공한다104

확인 질문104

정리105

 

추천의 말

 

 

성도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기를...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교회인 Grace Community Church의 담임 목사로, 순회 설교자로, 라디오 성경 교사로, 저술가로 주님을 섬기는 John MacArthur목사님의 성경 연구 안내서(Study Notes)는 주석서로, 개인 성경 연구서로, 그룹 성경 공부용으로, 그리고 설교 자료로 크게 사용되고 있는 귀한 책입니다. 그리고 1969년, 한 성도가 맥아더 목사님의 주일 설교를 듣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조그맣게 시작한 설교 테이프 보급이,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하여 1986년에는 600만 개의 설교테이프를 보급할 정도로, 그의 성경 강해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자 하는 분들, 교회학교 교사, 성경 연구 지도자,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2월(1980년) 그의 초청으로 그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와, 그가 관계하고 있는 학교(Master College)에서 며칠 동안 특별 집회의 강사로 말씀을 전파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성도와 학생들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제게 큰 감동을 주었는데, 그것은 평소 그들이 받아온 성경 교육의 우수성을 입증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같이 우리에게도 이 한 권의 책이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합니다.

 

5대째 목회자 집안인 맥아더 목사님과는 고등학교(Bob Johnes Academy)동창입니다. 그의 성경 연구 안내서 한국어 발간이 제 가까이에서 사역의 짐을 나눠 지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주님을 바르게 섬기려는 성도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김장환

Billy Kim (극동방송사 . 아세아방송사 사장)

 

 

영혼의 생수(生水)를 흠뻑 마십시다

 

 

죤 맥아더(John Machrrhur)목사님은 독특한 강해 설교와 구절 강해식 성경 연구로 목회하고 있는 분으로서 현대 목회의 기수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담임하고 있는 Grace Community Church의 성도들에게 매주 말씀을 가르치며, 세계 200여 방송국에서 라디오 성경 강해 프로그램인 「Grace to you」와 오디오 및 비데오 테이프, 그리고 활발한 신앙 서적집필 활동을 통해 세계의 영어사용자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무장이 가장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의 일각에서 강해 설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외치며 실천하는 목회 전선의 전우들이 있음을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력이지만 그 분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책이 없을까 하고 발행인인 김 용호 목사님과 함께 찾던 중, 저희 생각에 우리나라의 강단설교 성향과 비슷하면서도, 독특한 방법으로 성경에 접근, 말씀을 말씀으로 강해하는 죤 맥아더 목사님의 성경 연구 안내서를 발행했으면 하고 바랬는데, 마침 그 무렵 평소 가까이 지내는 Grace Community Church의 부목사이며, 그 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는 Master College의 부학장인 Bob Provost박사님과, 그 교회 문서 선교 책임자 Monrore Brewer목사님을 만나게 되어 서로 의논 끝에 발행하게 됐습니다.

이 책은 개인적 성경 연구 안내서와 자료서, 그리고 설교 자료로서의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충분히 자습할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으며, 목회자에게는 설교자료의 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이 책을 잘 사용하기 위해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할 것입니다.

 

감수 / 송용필 (John Song)

 

 

● 사도행전 20:1-2 ●

 

1. 교회에 대한 사랑(1)

 

 

서론

 

사도행전 20장 1-17절을 읽으면서 나는 ”주님, 이 말씀에서 제가 무엇을 전해야 되겠습니까?”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에는 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인 진술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실생활에 적용할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마침내 나는 이 구절들에서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에 대하여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이 본문을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제목을 붙였다. 이 본문, 이 적은 분량의 역사적인 단순한 설명에서 바울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는 동안 사도 바울의 교회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 내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1.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열정

 

먼저,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7)라고 하였다. 달리 말하자면,그는 ”내가 너희의 유익을 위해 내 생명을 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게 큰 기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주(主)께서 택하신 자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며,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그들이 성숙해 가는 것을 보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이와같은 열정은 모든 교회들에 대하여 충만하였다.

 

1) 로마 교회

그는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로마서)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 1:11)라고 말했다.

 

2)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는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肉)과 영(靈)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고 말하였다. 고린도전서에 쓴 것을 보면,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죄악된 것들로 인하여 심히 염려하며 이렇게 간청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

 

3) 갈라디아 교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3)라고 말했다. 그들 중에서 얼마가 잘못된 길에 빠진 것으로 인하여 그는 심히 근심하였다.

 

4) 에베소 교회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성부(聖父)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며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너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기를 원하노라”(엡 3:14-21).

 

5) 골로새교회

골로새 교회에서 그는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主)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 라고 말하였다. 그의 일생의 소원은 성도들이 성숙해 가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6)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는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밭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너희도 이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살전 2:9-12).

 

바울은 그리스도를 사랑했기에 교회를 사랑했다. 이것이 발전되어 요한일서 5장 1절에서 표명하는 바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원리가 세워졌다. 만일 내가 진정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는 데 문제가 있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데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현재 모든 신자(信者)들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으며, 교회를 위한 봉사에 그 자신을 기꺼이 드리고자 하였다.

 

2. 교회를 위한 바울의 수고

 

교회를 위하여 바울은 무던히도 참고 견디었다.

 

1)사랑 안에서의 수고

 

(1) 성도들을 성숙케 하기 위하여

고린도후서 11장 23-28절을 보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교회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인하여 당한 고난들을 우리의 무관심과 비교하게 된다.

 

수고

 

23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23-27절).

 

 

이 말씀에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바울이 이 모든 역경들을 믿는 자로서 완전히 의무가 아닌 은혜 가운데서 걸어나갔다는 점이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마치 자기 노력으로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받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있는 사람에게서 흘러 나온 것이다. 정말 그는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감당하였다.

 

마음의 수고

 

진실로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사실은 28절에 나와 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여 염려하였다. 이것은 누군가 그에게 부과한 의무가 아니었다. 단지 그의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바울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슬퍼했던 것은 매를 맞거나 배의 파선이나 돌로 맞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가장 슬퍼한 것은 교회가 죄로 인하여 부패되는 것이었다.

 

- 고린도 교회 : 고린도 교회의 형편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는 교회의 형편으로 인하여 너무 괴로와서 에베소를 떠난 이후 디도가 올 때까지 드로아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말씀 전파하는 것을 중단하고 마게도냐에까지 가서 디도가 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디도에게서 고린도 교화의 모든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듣고서야 겨우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교회가 죄 가운데 있을 때 가장 큰 아픔을 느낄 정도로 그렇게 그의 교회를 염려했다.

 

- 갈라디아 교회 : 바울은 대단히 격한 마음으로 갈라디아 교회에편지를 썼다. 갈라디아서의 헬라어 문법 구조를 보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감정적으로 말하고 있고, 그의 사상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 때문이다.

 

- 데마 : 바울은 또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고 말했다(딤후 4:10).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바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 마가 요한 : 바울은 그의 첫 전도 여행에서 마가가 그를 버리고 떠남으로써 받은 충격으로부터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바나바가 그를 다시 데리고 가자고 했을 때 이를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마음에 고통이 되어 있었다(행 15:37-41). 마가의 결점은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가 받은 고난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으면서도 교회는 특별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는 그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이 자라가고 성숙해 가는 모습 보기를 기뻐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를 사랑하는 것으로 평생을 보냈다.

 

(2) 성도들로 하여금 따르게 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4장 11절에서부터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치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즉 내가 무릎을 꿇고 간청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1-16).

바울은 이 사람들을 제자삼으려는 의무로 자신을 완전히 불태웠다. 그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고난들을 당했는지 알고 있느냐? 너희에게 선생은 많지만 아비는 오직 하나뿐이다. 부탁하노니, 나를 저버리지 말아다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다오”라고 말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4장 17절에서 바울은 ”이를 인하여 내가 주(主)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내가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하여금 계속해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대로 행하도록 확고히 하려 함이라”는 뜻이다. 당신은 ”그럼, 그는 필경 모범적인 사람이겠군요?”라고 말할 것이다. 바울은 또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도 말했다(고전 11:1). 내가 사도 바울의 고난당하는 내용들을 읽어 볼 때마다 그의 감정적인 반응은 항상 믿음과 기쁨이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는 찬송하였으며(행 16:25), 어려움에 처해 있던 또다른 경우에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2) 눈물로 가르침

”사도 바울도 운 적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그는 항상 울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는 항상 울었는가?”를 묻고 싶을 것이다.

 

(1) 사도행전 20장 19-31절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主)를 섬긴 것과...”(19절).

여기에서 그가 ”... 많은 눈물이며...”라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가 알기로, 유대인들로 인하여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러나 진실로 그 눈물은 어디서 기인한 것이었겠는가? 31절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나는 여기에서 절대로 어떤 배타적인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흘렸던 그 많은 눈물은 그의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하여 흘린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가르치는 데 대한 열망으로 인하여 흘린 것이었다. 그는 눈물로 가르쳤다.

 

(2) 골로새서 1장 28-29절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교회를 완전하고 성숙된 교회로 세우기를 원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가르칠 수가 없었다.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를 떠난 다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거짓 선생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29-30).

그리고 나서 ”내가 삼 년이나 눈물로 가르친 너희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덧붙이고 있다(행 20:31-32). 나는 주님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은 그 사람이 주님께 속한 이들에 대해서 얼마나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20장은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의 사랑에 대해서 간파할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훌륭한 교회, 훌륭한 교사,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건전한 교훈과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건전한 교훈과 대단한 사랑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감화를 받기 때문에 그 사람의 교훈에서도 감화를 받는다.

사도행전 20장 1-2절의 ”소요가 그치매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라는 이 간단한 말씀이 사도바울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교회를 위하여 살다가 교회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있다. 이는 그가 이 교회를 자기 피로 사신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그의 애착에서 그 사랑을 볼 수 있다.

 

그의 애정(1 상반절)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1. 소요가 그침

 

에베소에서의 소요는 하나의 폭동이었다(행 19:23-41).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마도 그때쯤 소아시아의 다른 여섯 교회가 세워졌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계 2:1-3:19). 그의 사역은 우상 숭배가 아주 쇠퇴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작은 아데미(다이아나) 여신상을 만들어 팔았던 은장색들의 돈벌이가 점점 줄어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굉장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심각한 경제적 불황으로 인하여 우상을 만들어 팔았던 은장색들은 한 군데 모여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사람의 하는 일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논의했다. 소요에 뒤이어 사람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연극장에 모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쳐 댔다(행 19:34). 소요는 그 도시의 서기장에 의해 조용해졌지만(행19:35) 여전히 그곳에는 바울과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감이 조장되고 있었다.

”소요”란 참 흥미로운 단어이다. 바로 이 동일한 헬라어가 마태복음 27장 24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주(主)께서 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의 상황을 묘사한 ”민란”이 바로 그 단어이다. 이것은 광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군중을 말하는 뜻이었다.

 

2. 제자들을 포옹함

소요가 그치자 바울은 제자들을 그에게로 불러서 그들을 포옹하였다(개역 한글성경에서는 ”권하다”로 번역됨-역자 주). ”포옹하다”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자신에게 접근시키다, 잡고 자신에게로 접근시키다”이다. 이 말은 그와 같은 면에서 생각할 때 절친한 뜻을 담고 있다.

 

1) 풍습이

”포옹”이란 말은 동방 사람들의 관습적인 인사법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창세기 48장 10절과 사무엘하 19장 39절을 보면 그들이 서로 껴안고 입맞추며 인사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오랜 관습이었다. 어떤 사람이 계속 여행을 하기 위해 한 장소를 떠날 때면 그곳 주인은 관습적으로 하루나 그 이상 자기의 손님과 여행에 동반해 준다. 그런 다음에 그들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은 대단히 시위적(示威的)인 것이었다.

 

 

2) 대조

 

(1) 우정어린 입맞춤

이런 종류의 포옹은 보통 서로 껴안고 뺨에 간단히 입맞추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의 헬라어 「필레마」(philema)는 ”우정어린 입맞춤”을 뜻하며, 친구간의 사랑을 말하는 「필레오」(phileo)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친척이나 매우 친한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종류의 포옹이었다. 우리에게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라고 말한 곳이 신약성경에 다섯 군데가 있다(롬 16:16/ 고전16:20/ 고후13:12/ 살전 5:26/ 벧전 5:14).

 

(2) 열렬한 입맞춤

”포옹”이라는 말로 사도 바울의 그 애정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포옹이라는 말에는 바울이 의미한 다른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의(定義)

 

입맞춤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 또 다른 헬라어가 있다. 「카타필레오」(kataphileo)라는 단어로서, 이 말은 ”열렬한 그리고 애정깊은 입맞춤”을 의미한다. 따라서 「필레마」(philema) 보다는 더 강렬한 말이다.

 

사용된 예(例)

 

- 유다 : 마태와 마가 둘 다 유다가 예수께 입맞추던 것을 묘사하는데에 이 말을 사용하였다(마26:49/ 막 14:45). 두 가지 이유에서 생각할 때 이것은 흥미로운 데가 있다. 하나는 그의 외식의 정도를 나타내 주고 있고 또 하나는 아마도 이것이 그가 평소에 주님을 대하던 방식이었을 것임을 보여 준다. 주님은 기꺼이, 그리고 관대히 유다의 그와 같은 자세를 용납하셨는데, 이는 그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어떠했는가를 보여 준다.

 

 

- 탕자 : 이 말은 돌아오는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를 묘사하는 데 또한 사용되었다. 여기에 보면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말하고 있다(눅 15:20). 그는 열렬하고도 애정깊게 그에게 입맞추었다. 그것은 진정한 육신적인 애정으로 축소되어 나타난 하나의 놀라운 사랑의 실연(實演)이었다.

- 창기 : 누가복음 7장 36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식사하시기 위하여 한 바리새인의 집에 계셨다. 그 다음 37절부터는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라고 말하고 있다(37-38절).

위에 언급된 모든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가? 아마 바리새인은 이 여자가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39하반절에서 그는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가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녀는 아마도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수 있으며 그녀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지닌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을 가지고 예수께로 와서 그것을 드려 부으며 그녀의 사랑과 애정을 열렬하게 나타내었던 것이다. 누가복음 7장 40절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0-45절).

당신은 예수께서 이 여인의 이 같은 일을 칭찬하셨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물론이다.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초연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아마 당신은 ”그러면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요 20:17)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헬라어 상으로 살펴볼 때, 그분은 ”마리아야, 내게 매달리지 말아라, 나는 승천해야 한다. 난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다시 오기 위해서 나는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주님께 매달려서, 가시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녀에게 자신을 전혀 만지지도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어떻든 주님은 창기의 사랑을 받아들이셨다. 사실 주님은 입맞추지 아니함을 인하여 시몬을 점잖게 꾸짖으셨다. 영적 지도층에 속한 이들은 마치 어떤 위대한 신(神)이 벽이라도 둘러쳐서 자신들을 따로 분리해 놓은 것처럼 사람들에 대하여 거칠고 거만하게 처신하기가 쉽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본보기로 그녀를 사용하셨다. 그리고 나서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48절).

바울 : 「카타필레오」(kataphileo)라는 단어가 사도행전 20장 37절에서 사도 바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20장 1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37절에서 다시 그가 그 지역(밀레도)에 돌아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포옹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볼 수가 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36-37절).

당신은 어쩌면 ”이 말씀에서 당신이 좋다고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에서 좋아하는 것은, 그들은 사도 바울이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그 결과, 그들의 사랑을 사도 바울에게 나타낼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당신은 아마 어떤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에는 그들에게 당신의 애정을 표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자기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믿기로는, 포옹에 나타난 사도 바울에 대한 이 육신적인 애정의 표현이 이들 가운데서 전에도 가끔 있었으리라고 본다. 나는 사도 바울이 하나의 플라스틱으로 만든 로보트나 제품화된 성경주석, 상품화된 설교 테이프가 아닌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 나는 그가 울 수 있고 포옹할 수 있고 입맞출 수도 있는, 살아서 숨쉬는 사람이라는 것이 기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사랑을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은 그의 애정에서 보여 주듯이 교회를 사랑하였다. 그의 사랑은 구제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구제(1 하반절-2하반절)

 

 

”...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구제는 사랑을 측량할 수 있는 좋은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말하였다.

 

1. 바울의 구제에 대한 실행

 

바울은 로마를 향해 북쪽으로 여행한 다음 그곳에서 에게 해를 건너 마게도냐로 가서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당신은 아마 ”위의 말씀들은 구제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여행을 해야 했던 목적 때문에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1) 여행의 목적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연보를 모으러 마게도냐에 가고자 하였다. 그가 아직 에베소에 있을 때 사도행전 19장 21절은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소요로 말미암아 바울은 이제 자신이 그곳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바울이 떠나는 목적은 구제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에베소를 떠나기 전에 그는 고린도전서를 썼는데, 그 서신서에서 그는 그가 마게도냐에 가는 이유를 밝혔다. 고린도전서 16장 1절에서 그는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바울은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에까지 가야 했다. 그래서 그는 미리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연보를 모아 두라고 한 것같이 너희도 모아 두게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쓴다”고 말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5상반절에서 그는 ”...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라고 말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모은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바울이 연보를 거두기를 원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 보기에 자신이 한 말의 성실성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2) 필요를 인식함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은 가난했다. 사도행전 11장 28-3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글라디우스 때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 만일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아디아베네의 헬레나(Helena)여왕이 말린 무화과와 포도를 들여와 그 가난한 자들을 도와 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거의 모두 죽었을 것이다. 야고보서 2장 5절은 그들이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들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곳에는 많은 도움이 필요했고, 또한 이러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특징적인 면이다. 그는 이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가 지중해 동편 연안 지역을 돌아다니며 연보를 모았던 이유가 바로 그의 사랑이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실 굉장히 위험한 지역을 여행하고 다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로 그는 가는 곳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이는 그의 목적이 오직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기 목숨이라도 내놓을 각오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그는 가는 곳마다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위험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위험이 기다린다 해도 나는 예루살렘에 가겠다”(행 20:24)라고 말했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움이 필요한 것을 알았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자기 목숨이라도 내놓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인 자질이며, 또한 사랑에 대한 정의이다. 내가 어떤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내 자신을 완전히 희생할 때 나는 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3) 그는 교회의 연합을 견고히 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만날 때는 항상 문제가 있었다(롬 10-11장).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 성도들로부터 연보를 거두어 예루살렘에 사는 가난한 유대인들을 도움으로써 유대인들이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을 보고 그로 인하여 교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기를 바랬다. 덧붙여 말하자면, 바울은 각 이방인 지역의 대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려 하였다.

 

바울은 각자의 필요를 채워 주고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할 정도로 교회를 사랑했다.

”...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바울은 자신이 얼마만한 대가를 치르느냐 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표현인가 !

 

2) 여행에 대한 계획

 

(1) 연보를 미리 준비토록 함(고전 16:2)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 그들에게 어떻게 돈을 모을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이것은 주님 앞에서 그들의 마음에 작정한 대로 바치라는 뜻이었다. 바울이 ”나는 내가 그곳에 갈 때에 너희들이 연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희가 미리 계획을 세워서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퍽 흥미롭다.

 

(2) 선물을 전달함(고전 16:3-4)

바울은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선물)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3절)라고 말했다. 달리 말해서, 그는 ”누구든지 너희가 나와 함께 갔기를 원하는자와 함께 너희의 동의하에 선물(즉, 연보)을 가지고 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에서 보내는 천거서를 가지고 갔다. 그리고 나서 4절에서 바울은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고 말했다. 달리 말해서, 그는 거기서 모금한 돈이(자기도 그 운반을 도와야 될 정도로) 많지 않으면 구태여 자신이 가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3) 에베소에 거함(고전 16:5-9)

바울은 계속해서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5-7절)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나는 너희를 지나는 길에 잠시 만나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거하려고 한다”고 말한 것이다(8절). 원래 그는 유월절까지 그곳에 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바꾸어 오순절까지 50일 더 그곳에 거하기로 작정했다. 당신은 ”그가 왜 생각을 바꾸었을까?”라고 물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9절에서 바울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거하면서 이 편지를 써서 연보에 대하여 그들에게 지시했다. 사도행전 20장 2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바울은 그의 여행 일정을 서둘러 마게도냐로 갔다.

 

 

3) 여행의 전도(前途)

바울은 에베소를 떠난 다음 북쪽 드로아로 갔으며, 거기에서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로 갔으며, 그곳에서 고린도후서를 썼다. 이 서신에서 그는 그의 마음 문을 열고 있다. 그들에게 쓴 그의 첫 서신에서 그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책망했었다.

 

(1) 하나님께 의탁함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죽음을 이길 만한 힘이 없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그분의 부활의 능력)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이것을 달리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목숨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의지해야 했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선물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가 만일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을 강하게 믿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돕고자 하는 이 사람의 헌신의 마음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2) 심령의 부르짖음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그의 삶에 대하여 낙심 가운데 빠졌다. 고린도후서 2장 12-13절에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主)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라고 말하고 있다. 디도는 고린도를 다녀와서 분명히 드로아에서 바울을 만나야 했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바울의 첫 서신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반응이 긍정적이며 모든 문제들이 잘 해결되었기를 바랬다. 바울은 그 뒤에 계속해서 ”...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 말했다.

 

(3) 디도로 인하여 위로를 받음

당신은 아마 ”그가 마게도냐로 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물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디도를 만났다. 또한 당신은 디도가 바울에게 무엇을 말해 주었는지도 궁금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7장 5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마게도냐에서도 고린도 교회 문제로 인하여 두려움과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희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6-7절)고 말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것을 믿었으며 회개했고 힘을 얻었다.

 

(4)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권고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고후 7:8)이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나도 그 편지가 좀 심한 편지였다는 것을 안다. 내가 그와 같이 조금 심하게 편지를 하긴 했지만 그것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고 말했다(8-9절). 바울은 그들의 삶에 이루어진 일로 인하여 마음이 고조되었다. 이 일 후에 그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보에 대하여 언급했다(고후 8:1-9:15).

 

 

2. 구제에 대한 바울의 원칙

 

[이 점은 다음 과(科)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었음]

 

바울은 지치고 피곤하며 그의 교회들의 영적인 삶에 대해 근심으로 가득 차 있고, 억압과 위협을 받으며, 자신에게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몰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 있으면서도 자신에 대한 것은 하나도 구하지 않았다. 오직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돈을 모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도움으로 교회가 하나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사랑의 수준이었다. 그에게 있어 교회는 그의 직업의 방편이 아니라 자기가 몸 바쳐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공동체였다.

 

세번째로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그의 가르침에서이다.

 

그의 가르침(2하반절)

 

 

”...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아가야)에 이르러.”

 

나는 당신이 ”(그가)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라는 이 짧은 말씀을 잘 살펴보기를 바란다. 바울은 자기에 대한 적개심이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에 자기의 이 지중해 동쪽 연안에 대한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했다. 그는 이제 교회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장로들이 세워졌고, 복음이 이제 자리가 잡힌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로마와 스페인에 가보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여러 말로 격려했다.

 

 

1. 풍성한 가르침

 

1) 바울의 줄기찬 인내

이 때는 바울이 그 억압들에 굴복해 일하지 않고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때였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성도들을 권했다(가르치고, 영향을 끼치고, 교제하고, 나누고, 말하고). 바울은 또한 글도 많이 썼다(이때 그는 고린도후서를 썼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여행은 고별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르침에 몰두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의 표시를 보게 된다. 그는 교회를 가르치는 데에 자신을 바쳤다. 바울은 바로 각 사람을 올바로 세우는 일을 위하여 산 사람이었다(골 1:28). 바울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엡 4:11-12)라고 말했다.

 

2) 교만에 대한 문제

슬픈 사실이지만 오늘날 많은 일꾼들이 교회를 자기 성취와 입신(立身)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모든 사람이 교만과 더불어 싸우고 있다. 만일 일꾼이 주(主)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노력은 곧 자기 중심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당신의 백성들을 더 사랑하게 하시며, 내가 죽을 때까지 성도들을 세우는 일을 할 수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바울에 대한 이 말씀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나의 사랑의 결핍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수없이 내가 가르치기 위하여 말씀을 준비할 때에 이 말씀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었다. 마음 속에서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좋아할까? 그들은 어쩌면 내가 설교를 참 잘한다고 생각할 거야”라고 말한다. 나는 내 자신에게 ”그것은 거룩한 생각이 아니다”라고 다짐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바란다.

 

3) 다른 성도들을 돌아볼 책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 양심의 가책없이 교회를 오랫동안 참석하지 않는 경우를 볼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교회를 사랑한다면 나는 교회를 섬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치는 은사를 주셨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교회에서 가르치겠다. 나에게 은퇴란 끔찍스러운 것이다. 바울은 핍박자들이 그의 목을 자를 때까지 계속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행 28:31).

당신은 교회를 사랑해야만 한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의 큰 소원은, 당신의 은사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피와 생명을 바쳐 교회를 사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성도들 하나 하나를 귀한 보화처럼 돌보아 그들로 또 다른 모든 성도들을 돌보도록 부탁하셨다. 당신은 교회를 사랑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교회를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곳이나 환대받는 곳으로 생각지 않고, 전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곳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바울은 교회를 사랑했다. 그리고 많은 교훈으로 그들을 가르쳤다. 그는 중단하거나 쉬지 않고 계속 가르쳤다. 사도행전 20장 6-12절에서, 바울이 드로아에 두번째 왔을 때 그는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밤을 새워가며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헌신의 수준이다. 당신은 ”바울은 아마 헬라에 도착했을 때 쉬었을 것이다”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는 고린도의 가이오 집에 있을 때에 로마서를 기록했다(롬16:23/ 행 18:7). 바울은 일하는 데 절대로 지치지 않았다.

 

어떤 목사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고,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여러분이 얼마나 원하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만일 내가내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크게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나는 할 수 있는 한 당신이 영적으로 크게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런 욕구에 있어 문제가 있다면 당신의 주님에 대한 사랑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확인 질문

 

 

1. 바울의 삶에 있어 큰 열정은 무엇인가?

 

2. 바울에게 있어 교회에 대한 사랑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무엇인가?

 

3.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데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의 근원은 무엇인가?

 

4. 바울이 그의 삶에서 경험한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인가? 바울에게 그와 같은 슬픔을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5.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감정적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6. 사도행전 20장 19절은 바울이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이 사도 바울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는가?

 

7. 사람이 주(主)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그 한 길은 무엇인가?

 

8. 교회와 교사와 그리스도인들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 두 가지는 무엇인가?

 

9. 무엇이 에베소에서의 소요를 일으키게 했는가?

 

 

10. ”포옹”이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11. 어떤 한 사람이 여행을 떠날 때 그를 배웅나간 사람들의 관습은 어떠했는가?

 

12. 바울 당시에 성행했던 통상적 포옹에 대하여 설명해 보라.

 

13. 예수님에 대한 유다의 입맞춤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14. 무엇이 창기로 하여금 예수님의 발을 씻도록 했는가?

 

15. 에베소의 장로들이 바울과 열렬한 입맞춤을 한 것이 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가?

 

16. 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여행했는가?

 

17. 바울로 하여금 구제금을 모금하도록 고무한 세 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그 세 가지가 각각 사도 바울에 대하여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18. 바울은 필요한 것은 돕기 위해 얼마나 먼 거리를 가야 했는가?

 

19.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이 교회를 연합시키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가?

 

20. 바울은 만일 그가 헌금을 예루살렘에 전하기 전에 죽임을 당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는가?

 

 

21. 바울은 왜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속이 편치 않았는가? 디도가 돌아왔을 때 그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22. 바울은 왜 에베소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권고를 했는가?

 

23.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동기로 봉사를 하는가?

 

2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대하여 어떠한 부탁을 하셨는가? 다른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25. 당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정도는 당신의 어떤 면으로써 알 수가 있는가?

 

정리

 

 

1. 다음의 성구들을 다시 읽어 보고, 교회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바울의 사랑을 비교해 보라(롬 1:11/ 고전 4:11-17/ 6:19-20/ 고후 7:1/ 11:23-28/ 갈 3:1,3/ 엡 3:14-21/ 빌 2:17/ 골 1:9-10, 28/ 살전2:9-12). 당신의 사랑이 바울의 사랑에 못미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이 취해야 할 과제들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시행하겠는가? 당신이 사도 바울처럼 성도들을 사랑하는 데 취해야 할 단계들을 잘 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2. 바울의 가장 큰 슬픔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로 인한 것이었다. 당신은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를 보면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마태복음 18장 15-35절과 갈라디아서 6장 1-5절을 읽어보라. 죄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있는 죄를 바로 잡으려면 먼저 당신의 삶에 무엇이 선행(先行)되어야 하는가? 만일 그 선행(先行) 과제가 없다면 어떠한 위험이 따르는가? 타인의 죄에 대한 애통하는 마음은 당신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3.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곤고함을 보게 될 때 당신의 반응은 어떠한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당신의 반응은 사도 바울의 반응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한가? 요한일서 3장 16-18절을 읽어 보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모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의 여행들을 다 마치게 되었는지 설명해 보라. 다른 형제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하여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떻게 하면 그 필요를 가장 잘 채워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요일 3:16 참조)

 

 

 

● 사도행전20:1-7 ●

 

2. 교회에 대한 사랑(2)

 

 

서론

 

사도행전 20장 1-17절 말씀을 ”교회에 대한 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교회에 대한 놀라운 사랑을 담고 있다. 「교회」라 함은 어떤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말한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바울은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또한 사도 바울의 간증이 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구속(救贖)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바치셨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을 바쳤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구속(救贖)하는 일로 죽으셨고, 바울은 교회를 섬기는 일로 죽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헌신의 정도가 예수님의 헌신과 병행하며, 목적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을 희생하는 데 있어서는 주님과 병행한다.

 

1. 사역에 대한 안내

 

바울은 교회가 장성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의 이러한 자세에 대한 기본적인 이유는 그에게 있어 주님의 뜻이 곧 자기의 뜻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간절히 소망하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에게서 난 자이면 그리스도에게서 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였다(요일 5:1). 달리 말해서,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주님께서 낳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삶의 목표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뜻을 성취하는 데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뜻 안에서 그 자신의 뜻을 포기하였다. 나 자신의 뜻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 영적 성숙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뜻을 같이하는 것이 참다운 영적 성숙이다. 우리 중에 거의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뜻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을 배우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는 영적 성숙도에까지는 자라지 못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고, 또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쳤다. 그는 교회를 위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았다.

 

1) 능력이 함께하는 목적

에베소서 3장 20절에서 바울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너희가 능력있게, 극적으로, 정력적으로 움직여 너희의 가능성(잠재력)을 이루라”고 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에게) 교회 안에서 ... 영광이 대대로”(엡 3:21)있게 하기 위함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교회가 그 잠재력이 강화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열망이었다. 바울은 교회에 대한 사랑을 인하여 살고,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을 신뢰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아실 것이다.

 

2) 지불해야 하는 대가

그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데에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바울은 그가 자원해서 그 대가를 지불했다.

 

(1) 골로새서 1장 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24하반절). 만일 교회가 성숙하고 연합하는 데 그 대가가 필요하고, 교회가 충만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데 어떤 아픔이 있다면 그는 자원해서 그 값을 치렀다. 바울은 계속해서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하반절)고 말했다. 달리 말해서 ”나는 그리스도대신 고난을 당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세상의 핍박을 달게 받겠다”고 말한 것이다.

 

(2) 빌립보서 1장 12-14절

바울은 ”복음의 진보로 인하여 나는 죄수가 되었다. 나는 내가 죄수됨을 인하여 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더욱 담대하게 되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 값을 치렀다. 바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그 자신의 희생으로 정의(定義)할 수 있다.

 

2. 사역의 목표

 

1) 추구됨

바울은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 목표를 좇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성도들을 성숙케 하는 것, 그들을 완전히 성숙케 해서 그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광을 돌리게 함으로써 주님과 자신이 만족함을 얻는 것이었다. 그의 사역의 모든 기초적인 동기가 교회에 대한 사랑이었다.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2) 그릇됨

만일 사역의 목표가 교회에 대한 사랑과 성도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삶이 되도록 성숙케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목표는 잘못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어진 사역을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만 보고서, 즉 자신의 뜻을 이루고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그 일을 추구한다면 그의 사역은 그릇된 것이다. 사역에 대한 합당한 이유는 오직 교회에 대한 사랑밖에 없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회에 대한 사랑, 즉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러 오신 것이다.

 

3. 사역의 은사들

 

사역의 핵심은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당신은 아마 ”나도 거기에 포함되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당신에게도 감당해야 할 사역이 있다. 당신은 ”나는 설교하는 것으로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당신이 말씀 전하는 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그와는 다른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받은 은사의 사역에 대한 효과나 강도에 대한 척도는 성도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성도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숙하도록 돕고 싶어할 것이다. 사역의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내 은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교인(敎人)들을 위한 것이다. 나의 가르침과 설교의 은사는 바로 교인들을 위한 것이다. 내 은사는 오직 그것이 교인들에게 베풀어졌을 때 효과가 있는 것이다. 나의 사역에 있어 큰 동기 중의 하나는 교인들을 자라도록 돌보는 것이며, 성숙해져서 자신들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높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도 이와 같은 사역의 목적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당신은 ”내 은사는 돕는 은사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자신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심히 사랑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성도들을 성숙케 하는 데 자신의 모든 힘을 바쳐 죽기까지 충성 봉사하고자 했다.

 

복습

 

 

사도행전 20장 1-17절은 사도 바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는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그의 세번째 전도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수리아, 길리기아, 갈라디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아시아, 마게도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까지 그의 여행을 마치고 있었다. 그는 위의 모든 지역에 교회들의 기초를 놓았다. 복음은 널리 퍼졌다. 그의 이 3차 여행 중에 그는 에베소에 3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다. 이제 그가 그곳을 떠날 때가 거의 가까왔을 때에 그곳 에베소에 소요가 일어났다. 사도행전 20장 1절은”소요가 그치매...”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지중해 동쪽 연안 지역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기 위하여 에베소를 떠났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로마와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했다(롬 15:28). 그래서 바울은 그 지역이 이제 자신이 다시는 올 수없는 마지막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믿음을 같이하는 어떤 사랑하는 아들들을 뒤에 두고 떠나가는 것과 같은 그의 최후적인 작별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딤후 4:20)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다시 밀레도에 왔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본문에 나와 있는 여행에서는 드로비모가 병들어 밀레도에 남겨두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이 일은 그 후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로마에서 두 번 투옥되었으며, 첫번째 감금과 두번째 감금 사이에 그는 아시아 지역을 다시 방문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어떻든 이 본문에서 당신은 마지막 여행임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이별의 인사, 그것도 마지막 고별의 인사를 할 때에는 다른 모든 문제는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그곳에 있으며, 진실로 그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아마 이 경우도 그러한 경우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바울에게 몇 번의 이와 같은 작별의 인사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20장 1-17절은 서로 다른 여섯 가지 면에서의 사도 바울의 사랑을 담고 있다. 그의 애정, 구제, 가르침, 인내, 관훈성(寬厚性) 그리고 그의 관심, 모든 것들이 이 본문에 함축되어 있다.

 

그의 애정(1상반절)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전한 후에 작별하고...”

 

1. 소요가 그침

 

2. 제자들을 포옹함

 

간단히 말해 바울을 그들을 껴안았다. 문자적으로는 ”그들을 자신에게로 끌어 당겼다”이다. 당시의 관습은 껴안고 상대의 뺨에다 입맞추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사람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접촉에 대해 그 어떤 것을 보기 시작했다. 지난 번 우리는 여기까지 공부했었는데, 여기에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행 20:37)라는 말씀을 덧붙여 생각했었다. 여기에 열렬함, 애정 깊은, 격렬함 그리고 여러 차례의 되풀이된 입맞춤을 의미하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다.

당신도 다른 성도들로부터 이러한 반응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사랑을 받을 만한 그 어떤 것이 있었다. 그들은 자애롭게 그를 만지고, 포옹하고, 껴안고, 입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 세상 역사에 끼친 바울의 영향을 생각하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이 위대한 사람,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던 인물, 능력의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중대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바울을 육적(肉的)인 면에서도 사랑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계급 제도나 영적인 성직 계급 제도로부터 구원해 주시길 바란다 !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하여는 이와 같은 애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육적(肉的)인 애정의 표현

 

 

만일 사랑이 정당한 것이라면 육적(肉的)으로 그 사랑을 집약해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이것이 아주 평범한 일이다. 오늘날의 심리학은 사로의 접촉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학은 서로 접촉하고 느끼고자 하는 무리들을 급증시켰다. 그리고 그 감수성을 훈련시켰다. 나는 그저 모두가 풀장(pool)에 앉은 채 서로 접촉하는 모임에 초청받은 적도 있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사람들은 육적(肉的)으로 그들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는 많은 시도를 한다. 당신의 가정에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 사랑을 보여야 할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아내가 입맞추는 것을 당신의 자녀들이 보는 것은 건전한 것이다. 당신은 애정을 가지고 당신의 자녀들을 안고 입맞추어야 할 것이다.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들이 없거나 애정이 메마른 가정에서 육적(肉的)인 애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라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인격이 비뚤어진 가운데서 자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육적(肉的)인 사랑의 접촉이 필요하다. 이것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한 부분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사랑을 이렇게 육적(內的)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육적(肉的)인 면에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실례(實例)를 들어 보겠다.

 

1) 로마서 16장 16상반절 -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서로 문안하라”(입맞춤 : 「필레로마」 - 우정의 입맞춤).

2) 고린도전서 16장 20하반절 -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3) 고린도후서 13장 11절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4) 데살로니가전서 5장 26절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5) 베드로전서 5장 14상반절 -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신약성경에서 보면 다섯 번이나 육적(肉的)으로 애정을 표현하라고 교회에 명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냉담하거나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친절하며 애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우리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사랑이 허다한 장벽들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랑은 「육적(肉的)인 애정」에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구제」에도 나타나 있다.

 

 

그의 구제(1하반절-2상반절)

 

 

”...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1. 바울의 구제에 대한 실행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거두러 마게도냐에 갔다(고전 16:1-9). 그가 이 구제의 일을 마치는 데는 거의 1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우리는 사람이 하는 희생을 볼 때 그 사람의 사랑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바울은 그의 대부분의 사역을 가죽으로 장막을 만드는 일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조달하면서 감당했다. 그는 가끔 ”내가 너희들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려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후 11:9/살전 2:9/살후 3:8). 사람들이 그에게 사랑의 교제를 할 때에 그는 그것에 대해 감사했다(고후 8:1-6/ 빌 4:15-19).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일에는 바빴다. 그는 이기심이 없고 주기를 기뻐하는 후한 사람이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고 말했다. 에스겔서 33장 31절은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利慾)을 좇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하지만 탐욕을 품는 자들은 주는 것이 아니라 취하고자 한다.

 

2. 구제에 대한 바울의 원칙

 

1) 사랑의 본질

요한일서 3장 16절은 사랑과 연관된 말로서 구재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을 말해 주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사랑은 최고의 희생(제사)이란 말로 정의(定義)되었다. 이 말을 생각할 때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쓴 한 청년에 대하여 나의 아버지께서 해 주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청년은 그의 여자 친구에게 ”나는 당신 곁에 가기 위해서라면 가장 높은 산이라도 오르며, 불타는 사막이라도 건너며, 대양(大洋)이라도 헤엄쳐 건널 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비가 오지만 않는다면 오늘 밤에라도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라고 썼다. 이와 같이 말만 번드레하게 하는 사람은 별로 사람을 사로잡지 못하며, 진실된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희생으로 측정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표준을 세워 두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표준에 의하여 우리의 사랑을 가늠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사랑의 발휘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한 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의 의무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하반절). 우리들의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가장 좋은 척도는 우리들의 삶을 자원해서 성도들을 위하여 버리려고 하는 태도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시간이나 돈을 바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라.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들의 영적 은사를 발휘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당신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으려고 한다.

 

(1) 인류를 사랑함

우리 모두가 목숨을 내어놓도록 부름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대단히 일반적인(포괄적인) 말이다. 이것은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세상에는 인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사람들 개개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루이스(C. S. Lewi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자나 여자로서의 개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류」라고 하는 이 거창한 타이틀을 열렬히 사랑하기가 쉽다. 일반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특별히 어떠한 사람도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다.”

 

(2) 인간 개인을 사랑함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17절에서 사랑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보고 자원해서 그 형제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그 어려운 형제를 도울 책임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만 가지고는 충분하지가 않다. 하나님은 동정심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원하신다. 18절은 계속해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하고 있다. 구제(주는 것)는 사랑과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당신은 자원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17절에 있는 말씀을 다시 한번 주의해서 생각해 보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이것은 분명히 물질적인 필요를 의미한다. 당신은 자원해서 당신의 물질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진실로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3) 사랑에 대한 요약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사랑에 대한 표준을 세우고 있다.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하려 하심이니라.” 앞의 8하반절에서 바울은 ”...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고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처럼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단돈 몇백 원 주는 것도 굉장히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다. 사랑을 한 마디로 축약해서 말한다면, 다른 사람을 부하게 하기 위하여 내 자신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를 바란다.

 

세번째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랑을 「그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그의 가르침(2하반절)

 

 

”...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1. 풍부한 가르침

 

교회를 가르치면서 보낸 바울의 그 많은 노력이 그가 교회를 사랑했다는 것을 확연히 증명해 주고 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교회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애정을 보여 준 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가난한 자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돌아보았다는 것이며, 이것들보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그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가르쳤다고 하는 사실이다.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자랄 수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원리이다. 만일 당신이당신의 자녀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들을 가르칠 것이다. 나는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훈련되지 않은 반항적인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 부모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 셈이다. 만일 사랑한다면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원칙들로 그들을 가르쳐야 했을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가르칠 것이다. 양들을 사랑하는 사역자의 표시가 여기에 있다. 양들을 사랑하는 사역자는 자신의 욕망이나, 생각 또는 주장에 따라 가르치지 않고 양들의 영적인 양식의 필요에 따라 꾸준히 또한 이타적(利他的)으로 가르친다.

 

2. 빈약한 가르침

 

이 주제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나는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 성경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들을 일으켜 주시도록 기도한다. 나는 많은 신학교들과 교파들에서 설교가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는 것을 본다.

 

1) 가르침의 중심성

설교는 초대 교회의 중심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의 선포는 여전히 최우선 순위에 있다. 디모데전서 4장 13절에서 젊은 설교자 디모데에게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편지했다. 해야 될 일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적용하고, 그리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다. 이것은 강해 설교이다.

나중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등한시하지 말고 계속 가르치라. 내가 네가 말한 것을 묵상하며 네 사역에 전념하라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라. 그리고 그것에 착념하라”고 말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디모데에게 다시 써 보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그리고 그는 또한 사람들이 다른 교훈을 받지 아니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딤후 4:3). 나는 우리가 이미 그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2) 거짓된 가르침

나는 오늘날의 교회는 사도 시대에 전파되었던 십자가에 대한 전파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전파에 비해 약화되었으며,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더 이상 밖에 나가 전도하기 위하여 교육하고 먹여 주는 장소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설교가 빈약한 데는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미국에 있는 신학교들 중에서 오직 서너 곳의 신학교에서만이 설교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능력있는 강단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교파들이 많다. 그들에게 있어 능력있는 설교는 이제는 진부한 주제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1)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의 상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권위를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외칠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어떤 의견이나 관점에 대한 토론이나 강의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무오성(無誤性)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설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무런 신념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직업적인 강단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나는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이 설교의 사양(斜陽)길에 일조(一助)를 했다고 생각한다. 근본주의의 지난 50-100년을 살펴보면, 강단에서 군림하며 교인(敎人)들의 머리를 난타하는 단(壇)으로 악용한 설교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강단은 그들이 앉아서 호령하는 하나의 보좌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학문적으로 흐른 자들과 예민하고 논리적이고 분별있는 사람들은 설교 전반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설교자들이 하는 일은 천편일율적이다. 그러니 설교는 없어도 좋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설교자상은 사람들의 감정에 야합하는 직업적인 쇼맨(Showmen)이다. 그들은 내용이 없는 말들을 난발하며 의미없는 소리들을 외쳐 댄다. 나는 이와 같은 가르침이 설교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파괴시켰으며 말씀의 권위에 소멸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3) 대중 매체, 시청각 자료, 음악, 간증의 범람

당신은 아마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물을 것이다. 전에는 보통 교회가 함께 모일 때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단히 창의적이어서, 말씀을 듣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지겨워서 그것을 대체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고안해 내었다. 여기에는 영화, 뮤지칼, 비데오, 새로운 시청각 자료, 대중 행사들이 있다. 이중에 어떤 것들은 아주 우수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이 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지역 교회에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와 우리 교회 장로들을 이 교회(Grace Community Church)에 두신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교회를 가르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다른 어떤 것들에게도 그와 같은 나의 책임을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일날 저녁에는 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항상 주일날 저녁을 영화나 또는 음악회나 또는 잘 알려진 사람들로 간증하게 했다. 그는 그의 교회를 온통 이와 같은 외부적인 수단들에 맡겼다. 간증자들은 아주 놀라운 사람들이며, 그영화들이나 음악들도 아주 놀라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또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무엇을 하시는지는 전혀 감지(感知)하지 못한다.

지역 교회에서의 설교의 순수성의 문제는 사람들의 태도에 달려있다. 불행하게도 설교는 한쪽 구석으로 제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설교가 노력과 연구와 끈기를 요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이렇게 많은 수고를 요하지 않는 훨씬 쉬운 것, 그리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이 좋게 보일지는 모르나 최선의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보통 설교와 가르침을 듣기 위해 함께 모이지만 ”예배”(service)를 드린다고 한다. 무엇이 예배인가? 무엇이 예배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주일 낮 집회를 ”경배의 교제”(fellowship of worship)라 부르고, 주일 밤 집회를 ”가족 성경 시간”(family Bible hour)이라 부른다(이것은 미국 교회의 실정임-역자 주). ”설교가 쇠퇴해 가는 곳에는 예배의 형식적인 요소들이 증가하며, 교인들의 헌금을 받아내는 방법도 정교해지고, 목사와 성가대가 가끔 교회당 회중석 중앙으로 행렬을 지어 입장을 하기도 한다. 아직도 영화 필름을 사용하거나 음악을 더 사용하는 것과 같은 여흥의 요소들이 공예배에서 더 증가되고 있다. 그리고 간증에 호소하는 일도 급증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인 어떤 제독이나 장군이나 어떤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프로야구 스타나 영화 배우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교회에서 간증을 하도록 한다. 이것이 설교보다는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절대로 진정한 문제점은 파악하지 못한다. 진정한 문제점은 그곳에 참석한 어리석은 청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영양 실조에 있다.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의 영적인 종기에 대하여 「영적인 환각제」를 복용시키고 있다. 그들은 파열된 맹장염에 대하여 진통제 주사를 맞고 있다.

 

 

(4) 목사가 상담자나 사회사업가로 더 강조됨

사람들은 ”설교를 통하여는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원리들을 배우고자 한다면 전파되는 말씀을 잘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원리들을 배울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원리들이 당신의 영적 . 정신적 건강에 관건이 되지 못한다면 무엇이 당신의 영혼과 정신의 건강에 있어 관건이 될는지 나는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사회적인 일에 관여해야 한다. 목사는 사회사업을 앞장 서서 하는 표본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 헬라파 과부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히브리파 과부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았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공평치 못한 처리를 함으로써 이것이 바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켰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 문제를 사도들에게 고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많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말했다.

 

(5) 교회가 가르침의 중심지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직된 단체가 됨

교회가 오늘날엔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오직 교회 건물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만 국한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목사님, 목사님은 담임하고 있는 교회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우리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기에 너무 크다면 너무 큰 교회임이 분명하다. 당신은 아마 우리 교회 교인 숫자가 많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가 더 작아져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떤 교회들은 대교회로, 어떤 교회들은 중간 크기, 또 어떤 교회들은 작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 내가 말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정당하게 가르치고 있다면, 교회의 크기가 어떠하든지간에 올바르게 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이 다섯 가지 것들이 교회에서의 설교를 빈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위대한 사람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최근에 나는 사람들의 강단에 대한 관심이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네번째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인내」에서 그의 사랑을 본다.

 

그의 인내(3-6절)

 

 

바울은 오래 참는 사람이었다. 사랑 또한 오래 참는 특성이 있다. 사랑은 중단하지 않고 어떤 대상을 향해 매진한다. 나는 사도 바울의 이 같은 점을 좋아한다.

 

1. 음모의 심각성(3절)

 

”거기 석달을 있다가... 그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함으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2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헬라의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3개월을 거하면서 로마서를 썼다. 그곳에서 3개월을 거한 후에 그는 매 유월절 시기마다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을 수송하는 여객선을 타고자 하였다. 이 배들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을 태우기 위하여 여러 곳을 들렀다. 그는 고린도 옆에 있는 조그만 항구 겐그레아에서 배를 타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를 해하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자신이 여행할 때마다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도행전 20장 23절에서 그는 ”오직 성령이 각 성(城)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모든 경고들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오래 참고 담대하게 나아갔다.

 

2. 계획의 변경(3-6절)

 

바울이 그 음모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그의 여행 행로만 바꾸었다.

 

1) 마게도냐를 통해 우회함(3하반절)

”...마게도냐를 다녀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바울은 ”만일 그들이 나를 그곳에서 없애려고 한다면 나는 마게도냐로 가서 다른 배를 타겠다”고 말하였다. 마게도냐로 가면서 그는 그를 쫓아보낸 모든 도시들을 다시 지나야 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기필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고자 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이러한 글을 썼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롬 15:30-31절).

달리 말하자면, ”나는 내 앞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에 대한 적대심이 있을 것인데 특별히 유대에서 더할 것이다. 부디 나를 위해 기도해다오”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하는 모든 일에 낙망, 직접적인 핍박과 같은 모든 종류의 공격들을 받게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사랑한다면 어떠한 공격도 당신을 단념시키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줄기차게 밀고 나간 사람이었다. 그는 다시 모든 길을 돌아서 마게도냐를 지나가기로 긴 여행을 작정했다. 그는 피곤했고, 기진맥진했으며, 지쳐버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믿을 때 결코 그의 목적을 바꾸지 않았다.

 

2) 교회 연합을 나타냄(4-5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누가(사도행전 기자)가 바울과 함께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이전에 빌립보에서 누가와 헤어졌었다. 바울이 다시 빌립보를 지나오면서 누가를 데리고 왔다. 여기(6절)에서부터 이야기가 누가의 직접적인 목격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더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바울은 4절에서 모든 이방인 교회들을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 하나 언급하였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들이 교회의 연합을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방인들과 그들의 헌금을 예루살렘에 가져옴으로 교회가 하나로 연합될 수 있었다. 소바더와 아리스다고와 세군도는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가이오와 디모데는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며, 두기고와 드로비모는 아시아 지역 교회들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고린도후서 8장 16-19절은 디도와 또 다른 형제 하나가 아가야 지역 교회를 대표해 바울과 함께 갔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각 지역 교회들이 대표자들을 파송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사랑의 표로 그들의 헌금을전달했다.

 

3) 빌립보를 떠남(6상반절)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바울은 처음엔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유월절 전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음모가 알려지고 나서 그는 그의 계획을 바꾸어 유월절이 지난 오십 일 후에 있는 오순절에나 참석할수 있기를 원했다. ”무교절”은 유월절 후에 일 주일 동안 지켜지는 절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빌립보에서 유월절을 보냈다.

 

4) 드로아에서의 지연(6하반절)

”...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처음에 여행했을 때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행 16:11)이 닷새나 걸린 것을 보아 그 여행은 힘든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드로아에 도착해서 그들이 원한 배를 타기 위해서 칠일 동안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바울은 교회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전진했다.

 

그의 관후성(7-13절)

 

 

1. 바울의 관후성(寬厚性)의 배경(7절)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바울은 다음 날 그 길고 긴 여행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밤중까지 가르쳤다. 그리고 잠시 쉬고 나서 11절은 그가 계속해서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다.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그는 단순히 그들에게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질문들에 대해 답했으며, 복음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관후성(寬厚性)에 대한 적은 암시에 불과하다. 13절은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배를 타고 48 km를 항해하는 동안 바울은 걸어서 앗소로 갔다.

 

1) 교회가 모이는 때(7상반절)

”안식 후 첫날에” 라는 말이 교회의 모이는 때에 대한 최초의 직접적인 진술이다. 안식 후 첫날은 태양신(太陽神)으로부터 온 일요일이나, 우리는 이 날을 주(主)의 날(주일)이라고 불러야 한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요한은 ”주(主)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라고 말하였다. 요한이 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만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일요일을 주(主)의 날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 바울은 ”매 주일(主日) 첫날에 너희 각사람이 이(利)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라고 말했다. 매 주일 첫날에 모이는 것이 초대 교회에 하나의 규례적인 방식이 되어 있었다. 주님의 부활 이후에 교회가 맨 처음 모인 날이 안식 후 첫날 즉, 주일 첫날이었으며, 제자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닫힌 문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 20:19). 주일 첫날의 모임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모임이었다.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를 창시하는 데 한몫을 담당한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는 ”안식일은 참 이스라엘인인 우리들에게 영구(永久)한 약속으로 주신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겐 이 안식일을 하나님이 그들을 그분의 선택된 백성들로 아신다고 하는 하나의 표다”라고 썼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선택받지 못했지만 안식일에 모이는 사람들은 모두 선택받은 백성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표적이나 인침이 제 7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다... 짐승의 표는 주일의 준수이다”라고 썼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주(主)의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너희가 아직도 유대인들의 안식일들에 매여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1)고 말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받았다면 그들은 그 옛 언약인 안식일 규례를 벗어나야 했다. 골로새서 2장 16-17절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차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림자이다. 이러한 것들로 아무도 당신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실체가 올 때에는 그림자는 필요없다. 안식일날 모여야 한다고 하는 데는 아무런 합당한 증거가 없다. 초대교회들은 주(主)의 날에 모였다. 우리가 매일 모일지라도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주(主)의 날에 모이고 있다.

 

바울은 교회를 사랑했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그의 애정과 그의 구제, 그의 가르침, 그의 인내, 그리고 그가 완전히 기진맥진했을 때에도 가르치는 그의 관후성(寬厚性)에서 볼 수 있다. 성도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이 우리 자신들을 희생하는 것을 통하여 측량되기를 바란다.

 

 

확인 질문

 

 

1. 예수님과 바울은 무슨 목적을 위하여 자신들을 교회에 바쳤는가?

 

2. 무엇이 바울로 그렇게 교회의 장성을 바라도록 동기를 불어 넣었는가?

 

3. 우리의 의지(뜻)를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성숙인가?

 

4.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치렀던 대가는 무엇인가?

 

5. 목사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무엇이 그 목표를 그릇되게 하는가?

 

6. 왜 당신의 영적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가? 당신은 어떻게 사용하겠는가?

 

7. 사람들이 바울에게 육적(肉的)으로 그들의 사랑을 나타내었는데 무엇이 바울로 그같이 사랑받는 자가 되게 했는가?

 

8. 육적(肉的)인 애정의 표현이 왜 중요한가?

 

9. 요한일서 3장 16절에 의하면 사랑이 어떻게 측량되었는가?

 

 

10. 사랑과 연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의무를 지고 있는가? 이 의무는 누구에게 이행되어져야 하는가? 이 의무는 어떻게 이행되어져야 하는가?

 

11.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12. 교회에 대한 사랑은 어떠해야 하는가? 자녀들에 대한 그 부모들의 사랑같아야 하는가?

 

13. 가르침에 대한 바울의 자세는 어떠했는가?

 

14. 오늘날 교회에 설교를 빈약하게 만드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보자.

 

15. 하나님 말씀에 대한 권위를 믿는 것이 왜 중요한가?

 

16. 교회 안에서 설교 대신 대중매체, 영화, 음악, 그리고 간증들이 차지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17. 무엇이 바울의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금 모금 여행행로를 바꾸게 만들었는가? 유대인들의 음모를 들었을 때 그는 왜 포기하지 않았는가?

 

18. 바울은 왜 사도행전 20장 4절에 언급된 그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갔는가?

 

 

19. 사도행전 20장 7절은 왜 교회의 모임을 특별한 말로 언급하고 있는가?

 

20. 왜 안식일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아야 하는가?

 

정리

 

 

1.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기꺼이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바울이 자원해서 치르려고 하는 대가였다. 다음의 성구(聖句)들을 찾아 보라(롬 8:17-26/고전 4:12/고후1:7/빌 1:29/3:10/살후1:4-5/약5:10/벧전 4:13-14/5:10).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위의 말씀들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우리의 고난으로 인하며 우리가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 하나 유익한 고난은 무엇인가?(벧전 4:14) 참된 고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맺는 열매는 무엇인가? 여기에 근거해서, 당신의 고난들은 정당한 이유에서 받았는가 아니면 정욕으로 인하여 받았는가? 지금 바로 당신을 위해 자인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4장 1절을 묵상하라.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당신은 어떻게 성도들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가?

 

2. 요한일서 3장 16-18절이 구제에 대한 원리를 예증하고 있다. 17절을 주의해서 읽어 보라. 당신은 도와 주어야 할 경우를 목격했으면서도 어떤 이유 때문에 돕지 못한 때가 있는가? 당신 자신에게 솔직한 태도를 견지한 다음에 당신이 돕지 못한 진정한 이유를 말해 보라. 누가복음 10장 30-37절을 읽어 보라. 무엇이 사마리아인으로 하여금 강도 만난 자의 필요를 채워 주도록 했는가? 무엇이 당신의 동기가 되어야 하겠는가? 그가 받은 보상은 무엇인가? 당신도 그와 같은 사람(강도 만난 자)을 만나기를 바라는가? 다음의 주님의 말씀을 꼭 순종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3. 바울은 인내의 사람이었다. 당신도 그러한가? 당신은 큰 환란중에서도 당신의 목표를 붙잡는가 아니면 포기하는가? 아니면 ”이것은 아마 주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하는가? 다음의 성구들을 찾아 보라(고전 15:58/갈 6:9/엡 6:18/빌 1:27/딤후 2:1, 3). 어떤 면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인내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인내해야 하는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그분을 사랑하는 자의 행함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시간에 당신을 힘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을 가지라(딤후2:1). 그 힘을 사용할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분께 감사하라(약1:5/ 요일 5:15).

 

 

 

● 사도행전 20:1-17 ●

 

3. 교회에 대한 사랑(3)

 

 

서론

 

 

1.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자

 

무엇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자로 만드는가? 위대한 사역자라함은 능력있는 일꾼을 말한다. 무엇이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게 만드는가? 교회사를 통하여 볼 때 어떤 이름들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으며, 어떤 사람 등의 이름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의 기독교 사회에 그들 나름대로의 영향을 미쳤는데, 무엇이 그들로 그 같은 영향들을 끼칠 수 있도록 만들었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위대한 지성이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사람의 지식이나 위대한 지도력, 또는 용기, 또는 언변, 또는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이 그같이 큰 영향들을 끼쳤다고 말한다. 어쩌면 위의 모든 것들이나 또는 위의 것들과의 복합적인 요소들이 교회사에 크게 영향을 끼친 모든 사람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교회사에 크게 영향을 끼친 주요 이유는, 그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지난 과거의 위대한 설교자들에 대한 전기나 자서전을 공부해보는 것은 아주 흥미있는 공부이다. 이 위대한 설교자들의 공통적인 점은 대부분 성도들에 대한 엄청난 연민과 깊고 깊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솟아나온,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이 가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2. 교회에 대한 그의 위대한 멧세지

 

바울은 그가 교회에 대하여 가졌던 사랑을 아름다운 말로 기록하였다. 예(例)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빌립보서 1장 3-7상반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마음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2) 고린도후서 3장 2상반절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3) 고린도후서 7장 3하반절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함이라.”

바울은 성도들을 사랑하기 위해 살았다.

 

 

4) 데살로니가전서 2장 7-8절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줄 만큼 교인들을 사랑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예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바쳤다.

 

복습

 

사도행전 20장 1-17절에서 우리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공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어떤 신학이나 어떤 실질적인 적용을 담고 있는 말씀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아주 단순한 말씀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행동들에 나타난 그의 마음의 자세를 본다. 사랑이란 단순히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행함으로 증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앞의 본문에서 사랑이란 말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본문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 장(章) 중의 하나이다. 이 본문은 바로 사랑이 증시되고 있다. 이 본문 상반부에서는 바울이 교회를 사랑하는 모습과, 나머지 하반부에서는 교회가 다시 바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몇 가지 면에서 사도 바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살펴보았다. 바울은 그의 세번째 전도 여행 중이었으며, 지중해 동쪽 연안에 대한 마지막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가 지금까지 사역한 장소들 한 곳, 한 곳을 모두 다시 들렀다. 그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 작별을 고하고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다. 우리는 몇 가지면에서 바울의 사랑이 나타남을 살펴보았었다.

 

그의 애정(1상반절)

 

 

우리는 먼저 1상반절 말씀에서 생각해 보았었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바울이 그 곳에 끼친 영향으로 인하여 은장색들의 수입이 줄어 들었기 때문에 에베소에 큰 소요가 일어났었다. 우리는 ”포옹하다”라는 말을 이 본문에 대한 공부의 시발점으로 삼았었다.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날 사랑, 어떤 행위로서의 애정에 대하여 살펴보았었다. 사도 바울은 애정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조금도 점잖을 빼거나 위엄을 자랑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20장 37절에 보면 장로들이 모두 그를 껴안고 입맞추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애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바울은 차원이 높아서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처럼 쉽게 접근하고 사랑하고 그들의 애정을 쉽게 보여 줄 수있는 사람이었다. 신약성경에 보면 거듭 거듭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하고 있다(롬 16:16/고전 16:20/고후 13:12/살전 5:26/벧전 5:14). 두번째로 우리는 바울의 사랑을 그의 구제에서 볼 수 있다.

 

그의 구제(1하반절-2상반절)

 

 

계속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1하반절-2상반절에 묘사된 바울의 구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연보를 모으고 있었다. 그는 철저히 이타적(利他的)이었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돕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옛날 이야기지만 대도시의 주거 밀집 지역에서 사역하고자 하는 거의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돈을 모으는 데 관심을 둔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에게도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돈을 모으면서도 자신의 필요를 자비량해서 조달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 자질이다. 요한은 ”...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했다(요일 3:18). 만일 사람이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 3: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요일 3:16/롬 5:8). 바울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랑을 나타내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 필요를 채워 주고자 했다. 세번째로 그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의 가르침에서이다.

 

그의 가르침(2하반절)

 

 

2하반절에서는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전 지역을 여행하며 가르쳤다. 헬라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 곳에서 로마서를 썼다. 그는 성도들을 가르치도록 위임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단순히 어떤 간단한 권고를 한 것이 아니라 많은 권고와 교훈과 위로를 주었다. 사람의 사역에 대한 표는 앙 무리들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가르침과 이타심(利他心)이다. 선한 목자는 그의 양 무리들을 보호하고 먹임으로 돌본다.

베드로전서 5장 2-3절에서 베드로는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먹이고 보호하고 돌봄)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타의에 의해 하지 말고, 직업상의 요구에의해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열의와 열성)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들을 다스리고 인도하는 방법은 지배하고 위협하며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3하반절)고 명하였다. 양들은 위협함으로가 아니라 본이 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모든 사역에 대한 열쇠는 먹이고 지키는 것이다.

기진맥진하고 지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사도 바울의 사랑의 심정은 그가 방문하는 모든 곳에서 성도들을 가르쳤다고 하는 사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당신은 ”그가 왜 그렇게 했는가?”를 묻고 싶을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불타는 욕망은, 성도들을 장성케 하는 것이었다. 네번째로 우리는 그의 사랑을 그의 지속적인 인내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인내(3-6절)

 

 

3절은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함으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인내의 사람이었다. 그는 수리아로 가서 그 곳에서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그를 죽이려는 공모를 알게 되었지만, 그 공모조차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그 공모는 단지 그에게 마게도냐를 돌아가도록 만들었을 뿐이었다.

사도행전 20장 19절에서 바울은 그가 모든 환란을 당한 것을 인정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主)를 섬긴 것과....”

그리고 22-24절에서 그는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성령이 각 성(城)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主)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바울을 단념시키지 못했다. 그는 정말 끈질긴 사람이었다.

바울은 인내의 용어로 사랑에 대하여 기록했다. 고린도전서 13장7절에서 그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을 인하여 그는 무엇이든 견디어 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그는 바라고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인내하는 사랑의 특성이다.

사도행전 20장 4절에 보면 바울은 어떤 사람들을 그의 여행에 함께 데리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를 가지고 온 교회의 대표자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 교회들의 사랑을 보여 줌으로써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연합을 이루기 위하여 헌금을 직접 전해 줄 사람들이었다. 다섯번째로 바울의 사랑은 그의 관후성(寬厚性)에서 나타난다.

 

그의 관후성(7-13절)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신은 관후(寬厚)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만일 서너 명의 사람들이 당신에게 시간을 내어달라고 요구하면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겐 시간을 내어줄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위해 관후(寬厚)한 사람이 되었다. 7-13절은 그의 관후성(寬厚性)에 대한 이해를 제공해 줄 것이다. 사도행전 20장 6절은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4절에 언급된 사람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가는 배를 타기 위하여 드로아에서 이레를 기다렸다.

 

1. 바울의 관후성(寬厚性)의 배경(7절)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대한 첫 기록을 보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였을 때 무엇을 했으며, 왜 그들이 모였는가에 대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교회가 모이는 때(7상반절)

”안식 후 첫날에...”

 

(1) 매일 모임

당신은 아마 ”그들은 매일 모이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매일 집에서 모이기를 힘썼다(행 2:46).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저 일 주일에 하루 모이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일 주일 내내 성경 공부나 떡을 떼기 위하여 집에서 모였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교회가 날마다 모이는 것이 아주 평범한 일이었다.

 

2) 매 주일 모임

한 주간의 첫날에 교회가 함께 모였다. 당신은 왜 그들이 한 주간의 첫날에 모였는가를 물을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요한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대하여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라고 말하였다. 안식 후 첫날(한 주간의 첫날)은 유대인들의 달력에서는 토요일 밤부터 시작되었으며, 해가 지면 안식은 끝이 났다. 하루는 해가 질 때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해가 질 때까지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사실 토요일 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 주간의 첫날, 즉 주일날이었다. 우리는 이 날을 일요일(Sunday, 태양의 날)이라고 부르기를 꺼려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날을 일요일이라고 부르면 태양의 날, 즉 태양신(太陽神)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태양신(太陽神)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 날을 주(主)의 날(주일)이라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요한은 ”주(主)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라고 말하였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그들이 함께 모여 있었을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일 주일 후에 같은 날 그들은 함께 모였고, 주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20:26). 한 주간의 첫날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일요일날 함께 모여서 교제하고 가르치고 예배함으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했다. 교회의 이 모임은 아주 중요하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하고 있다. 당신은 믿는 성도들과 함께 모여야 한다.

 

안식일에 대한 진부한 논쟁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안식일날 교회에 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 이것은 진부한 논쟁이다.

어느 주일날 오후에 나는 하와이와 호놀루루에 있는 2류에 속하는 KOBL방송의 토크 쇼(talk show)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송을 통하여 질문하고 답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세 시간이나 마련해 주었다. 그 방송 프로그램에 대답하는 자가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 토크 쇼 방송을 시작하자 곧바로 어떤 사람이 나와서 ”어떤 날에 교회가 모여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내가 미끼에 걸려들고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주일(主日)에 모이는 것에 대하여 꽤 시간을 들여 답을 했다. 내가 답변을 마치자 전화기가 불이 나기 시작했다. 호놀루루에는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를 신봉하는 자들이 아주 많았다. 내가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잘못 연 것이었다(제우스가 판도라에게 보낸 상자 뚜껑을 열자 안에서 온갖 해독과 불행이 나옴-역자 주). 그 많은 전화들을 방송국이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답변을 통해서 계속해서 토요일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첫째 교회사에 대한 무지(無知)요, 둘째는 아직까지 옛 언약이 계속 시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세째로 이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간략하게 말하였다.

그들이 나의 이와 같은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는 나의 주장에 대하여 성경을 가지고 증명하였다.

1)골로새서 2장 16-17상반절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라....” 실체가 오게 되면 더 이상 그림자는 필요하지 않게 된다.

2)고린도전서 16장 2절 : 역사적으로 또한 성경적으로 볼 때, 주일(主日)은 교회가 함께 모이는 날이 된 것을 볼 수있다. 바울은 너희의 연보를 너희가 모이는 한 주간의 첫날에 가져오라고 말하였다.

 

만일 당신이 안식일날(토요일)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자 한다면 당신은 옛 언약 전체를 믿어야 할 것이며, 행함으로 구원받아야 할 것이다. 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사람이 안식일날 모이는 것을 장시간 주장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당신의 교리에 대해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왜 당신은 오직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자들만이 선택된 사람들이며, 주일날 예배드리는 자들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라고말합니까? 당신의 믿는 신학이 그래서입니까?”라고 물었다. 오랜 침묵 후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행함 - 전체 구약과 율법을 지킴 - 으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것이다.

 

2) 교회 모임의 내용(7절)

”...우리가...모였더니...”

 

(1) 모임의 방식

교회는 주일(主日)에 정기적으로 모였다. 나는 교회들이 아주 적을 무리들로서 시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고 믿지 않는다. 교회가 함께 모였다.

 

● 고린도전서 11장 20 상반절

”너희가 함께 모여서...”

바울은 그들이 함께 모인 것을 말하고 있다.

 

● 고린도전서 14장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오늘날 우리가 주일(主日) 오전에 예배드리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처럼 항상 한 곳에 모였다.

 

유대주의의 사멸

 

 

초대 교회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받은 이후에도 안식일과 절기들을 계속해서 지켰다. 유대주의의 사멸은 그들에게 있어 납득하기 힘든 점이었다. 심지어 바울도 그가 말씀을 전파하는 자가 된 후에도 유대인들이 하는 서원을 했던것을 볼 수 있다(행 18:18/21:24-26).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로마에 있는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매달려 있었다. 한 가지 그럴만한 이유로는, 유대인들이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교도들은 쉬는 날이 없었다. 유대인들 밑에서 채용되어 일하는 다른 유대인들은 안식일날 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깨끗한 마음으로 그들은 안식일날 회당에 가거나 그리스도를 예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안식일은 신성한 날이었다. 사실상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셈이다. ”그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라. 그와 다투지 말라. 만일 그것이 네 형제의 문제라면 그에게 깨달을 때까지 자라게 두라 네 자유함으로 약한 형제에게 짐이 되게 말라”(롬 14:1-4)

로마서 14장 5-6절에서 바울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主)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라고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의 양심이 올바른 이상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다. 당신의 형제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말라. 그가 아직까지 안식일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를 손상케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규례의 부재(不在)

 

 

신약성경에는 주일(主日)에 규칙적으로 모이라고 하는 지시는 없다. 오래 전에 어떤 사람이 안식일의 모든 제한들을 주일(主日)에 끌어들여 사람들에게 강요하였다. 내가 필라델피아에서 자랄 때는 주일날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신문을 읽거나 공놀이도 할 수 없었으며, 하루종일 좋은 옷을 입고 제한된 활동 범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와 같은 규례들은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나도 주일날에는 적절한 균형(다른 날과는 좀 따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시간을 주실 때에 쉬는 것도 좋다. 그리고 또한 주일 낮 예배와 밤 예배 사이에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실질적으로 당신 삶에 적용하기 위하여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이 날은 영적 회복을 위해 아주 좋은 날이다. 이전 사람들은 아주 나쁜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당신이 자전거를 타거나 그와 비슷한 일을 주일 오후에 했다고 해서 당신이 나쁘다고 말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2) 모임의 장소

초대 교회는 어디서 모였는가? 사도행전 20장 8절에 보면 그들이 ”윗 다락”에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 성전

맨 처음 그들은 성전에서 모였다. 얼마나 인기있는 모임이었겠는가!

 

● 회당

그 후에 그들은 회당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바울이 당도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그들은 계속해서 회당에서 모였다. 나중에 그들은 그 곳에서 나와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따로 시작했다.

 

● 가정

그들이 모이는 자연스러운 장소는 가정이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수용하기에 충분한 부유한 가정들이 많았을 것이다. 2세기 중반으로부터 2세기 말에 그들은 그들의 모이는 장소들을 짓기 시작했다. 바울은 골로새서 4장 15절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집에 있는 교회를 말했었다. 빌레몬서 2절에서도 가정에서 모인 교회를 말하고 있다. 가정에서 모이는 것은 초대 교회 시대에 아주 흔한 일이었다.

 

교회가 어떤 장소에 함께 모인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따로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교제, 즉 몸의 연합이 필요하다.

 

3) 교회가 모이는 목적(7중, 하반절)

사도행전 20장에 나타나 있는 이 적은 모범이 우리들에게 교회가 어떤 목적으로 모였는가에 대한 좋은 실례(實例)를 보여 주고 있다. 7-8절은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라고 말하고 있다.

 

(1) 떡을 뗌(7중반절)

”...떡을 떼려 하여 ...”

옛 팔레스틴에서는 손님이 왔을 때 정식(定式) 식사를 시작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떡을 떼는 관습이 있었다.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나누는 애찬과 주의 만찬을 의미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애찬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것은 서로 나누기 위하여 갖는 간단한 식사와 같은 것이었다.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것 중의 하나가 교제와 사랑이다. 가난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을 만큼이나 또는 자신들의 먹을 것조차 없이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것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몫도 싸 갖고 왔었다. 그래서 모두 한 자리에서 사랑의 표현으로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떡을 떼고 나서 하는 교제였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떡을 떼는” 모습이며, 아가페적 애찬과 성찬인 것이다.

 

애찬과 성찬의 쇠퇴

 

 

아가페적 애찬이 기독교에서 사라졌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교인들에게 그들이 애찬을 완전히 왜곡시켰다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편지를 썼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애찬을 왜곡시켰다.

고린도전서 11장 20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主)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라고 말했다. 달리 말해서, ”너희는 주(主)의 만찬을 위해서 함께 모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너희가 주(主)의 만찬을 더럽혔기 때문에 더 이상 먹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21절에 계속해서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음으로...”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은 각 사람이 자기들의 음식을 먹어 보라는 말도 없이 구석으로 가지고 가서 자기들만 먹는 식사 자리를 상상해 볼 수 있는가? 가난해서 굶주린 사람들,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래서 바울은 ”...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21하반절)고 말했다.

달리 말해서, 가난한 자들, 굶주린 자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부한 자들은 너무 취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22절)고 말했다. 그들은 사실상 교회의 연합을 경멸했다.

아름다운 애찬의 의식(儀式)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주의 만찬은 또한 역사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카톨릭 교회가 세상을 지배했었다. 함께 모여서 주님을 기념하고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나누던 자연스러운 주(主)의 만찬이 이제는 신비적이고 제의적(祭儀的)인 미사로 전락되어 버린 채 시행되고 있다. 개신교가 이 주(主)의 만찬을 성경에 좀더 가깝도록 접근시켜 놓았다. 아직도 우리는 이 주(主)의 만찬을 전자 오르간의 선율이 은은히 흐르는 가운데 수찬 위원들이 은쟁반들을 가지고 교회당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주의 만찬(성찬식)이 한편으론 이와 같은 모습을 띠지만 참다운 주의 만찬은 우리 모두가 이행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主)의 만찬의 때

 

 

당신은 어느 때든지 자기가 원하는 때에 주(主)의 만찬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主)의 만찬의 의미에 대하여 가르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당신의 가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아주 흥분하여 ”오직 안수받은 목사들만이 주(主)의 만찬을 집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예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를 행하라 그리고 내가 그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이를 행하리라”(마26:29/막 14:25/눅 22:18)고 말씀하셨다. 주(主)의 만찬은 바로 당신의 의무이다.

당신은 저녁에 어떤 그리스도인들과 집에 앉아서 ”이 얼마나 헛되고 무익하게 보낸 밤인가! 우리는 주님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는데 빈둥거리며 이웃집 사람이나 어떤 다른 사람들의 단점만 이야기했다”고 자성(自省)해 본 적이 있는가? 두세 팀의 부부들이 함에 모여서 떡을 떼는 것은 어떠한가? 만일 그와 같이 한다면 당신의 무료한 저녁 시간의모습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떡을 떼는 것은 초대 교회의 모습의 중요한 일면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평범하고 흔하고 자연스러우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넘치는 사랑에서 우러나왔다. 우리도 이와 같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하나의 형식적이고 의식적(儀式的)이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해 우리는 그 동안 희생되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2) 가르침(7절)

 

● 가르침의 우선성(7하반절)

”바울이 ... 저희에게 강론할새...”

교회가 함께 모일 때는 첫째로 가르침을 위해서 모였다. 때로 그들은 떡을 떼기 위해서 모였는데 - 이것은 자주 행해져야 했다 - 그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었다. 때로 성찬식에 참석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일 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7절에 있는 ”강론할새”(preached)라는 말은 대화식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말씀 전파자가 성도들의 질문에 답하고, 성도들이 이에 대해 말하며, 그가 또 성도들과 말씀을 나누고 하는 대화식의 가르침이다. 이보다 앞서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행 6:4)고 말했다. 사도행전 6장 7절을 말씀과 교회가 흥왕했던 것을 말하고 있다(행 12:24/19:20).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그 곳에 이를 때까지(말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가장 먼저 와야 할 것이다.

 

 

● 가르침에 몰두함(7절)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관후성(寬厚性)이다. 바울은 정말 휴식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든지 가르침을 시작하면, 자신이 다음 날 험난한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쉴 줄 모르고 밤중까지 계속 가르쳤다. 그는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정도로 관후(寬厚)한 사람이었다. 이 초대 교회 시대에는 사람들이 말씀에 굶주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함께 모였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은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내 평생에 아직까지 젖을 원하지 않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말씀의 가르침을 원하는 것 같지 않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보았다. 그들은 교회의 공적(公的)인 집회에 왔다가 가는 것만 해도 마치 큰 기여를 한 것같이 생각한다. 만일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굶주림이 없다면 당신은 당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큰 병이 들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초대 교회에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오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교회사에 있어 종교개혁이나 부흥이 일어났을 때 나타나는 특징들이었다. 죤 칼빈이나 마르틴 루터는 매일 네 시간씩 가르쳤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은 매일 매일 가르쳤고, 그 곳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와서 배웠다.

 

 

2. 바울의 관후성(寬厚性)의 힘(8-13절)

 

1) 하나님의 능력에의 의뢰(8-10절)

 

(1) 유두고가 떨어진 이유(8절)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당신은 ”그 곳에 빛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물을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는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부도덕하다고 비방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은밀한 목적을 위하여 모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두운 가운데서 추행을 저질렀다고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했다. 어떤 주석가들은 성령께서 이 말씀을 이 곳에 덧붙이신 것은, 드로아의 어느 누구도 그들이 어두움 속에서 모였다는 것으로 비방할 수 없었음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두번째 이유가 이보다 더 분명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유두고가 어떻게 떨어졌는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행20:9). 이 등불들은 기름을 태워서 켜는 등불이었다. 그래서 이 등불들은 좋지 못한 그으름과 연기를 내어 방안 공기를 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 그 윗 다락은 30-40명 정도 모일 수 있는 집이었을 것이며, 어쩌면 50-60명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방안 공기는 이내 탁해졌을 것이다.

 

(2) 졸음의 결과(9상반절)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그는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장소에 앉을 수 있었던,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창문들은 격자창으로서 유리가 없이 열려 있었다. ”이기지 못하다”라는 말은 헬라어상으로 현재분사로서 그가 졸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점점 더 잠이 내리누르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3) 생명이 끊김(9하반절)

”...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결국 그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잠듦으로써 삼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다. 성경 말씀에 보면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하심 아래 이 책을 쓴 누가의 인용이었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가 다만 죽은 것같이 보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떨어진 곳은 삼층이었다. 그는 분명히 죽었던 것이다.

 

(4) 바울의 포옹(10상반절)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바울은 유두고의 몸에 단순히 엎드린 것이 아니고 그를 자신의 몸으로 껴안았다. 여기에 ”안고”라는 말은 자신의 몸으로 그의 몸을 감싼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왜 바울이 자신의 몸으로 그를 감쌌느냐?”고 물을 것이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죽은 어린 아이를 자신들의 몸으로 감싸 살려 낸 적이 있다(왕상 17:21/왕하 4:34). 유두고는 젊은이로서 어쩌면 십대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5) 바울의 격려(10하반절)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한 자유주의 주석가는 바울이 자신의 몸으로 유두고를 껴안았을 때 그는 유두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죽은 자였다. 그곳에서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다. 빌립보서 3장 10상반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라고 기도하였다. 바울은 부활의 권능을 알았다. 유두고의 모든 부러진뼈와 상처들이 다시 회복되었고, 그는 살아났다.

 

● 믿음의 증대

그 사건이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미쳤을 영향을 당신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이적들을 행하신다. 아마도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누구냐? 우리가 그에 대하여 듣기는 들었지만 이 드로아에서는 그가 뭐 별 볼일 없는 사람 아니냐?”라고 말했을 것이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오랜 시간을 보냈던 고린도나 에베소에서처럼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그가 말한 모든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느냐? 그가 정말 하나님의 선지자와 선생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말했는지 모른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뽑은 선생들의 직분을 이적을 통하여 확증하셨다. 당신은 그들이 그 곳에 둘러서서 ”그가 젊은이를 살린 것을 보니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근심의 소멸

바울은 사람들에게 ”떠들지 말라”고 말했다. 여기서 헬라어 「도루베이스데」(thorubelsthe : ”떠들다”)는 통곡하며 슬퍼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마 9:23/ 막 5:38). 이것은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울며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울며 슬퍼하는 것을 중단하라. 그는 살았다”라고 말했다. 나는 성경에서 부활에 대한 기록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나의 부활을 보증해 주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봉사(11-13절)

 

(1) 그의 가르침에서(11-12절)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모든 사람이 이제는 믿는 마음과 신뢰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그의 가르침을 더 듣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들은 집회를 계속해야만 했다. 그것은 참으로 긴 설교였다. 그들은 저녁에 시작해서 밤중까지 계속했고, 밤중에 잠시 쉬었다가 다시 새벽까지 계속했다. 그리고 바울은 긴 여행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을 아끼지 않고 그들을 위해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다.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그는 제대로 쉬지도 않고 그렇게 가르쳤던 것이다. 사랑은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이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검토해 볼 때 ”너는 사도 바울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너는 주일날 몇 시간 설교한 것을 가지고도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사람들을 가르쳤다. 나는 이번 주일에 성경 공부 시간을 가졌다”라고 내세운다. 바울은 그의 은사의 사역에 있어 한계가 없는 사람이었다(사람들의 요구에 대해 ”아니오”가 없었다). 당신의 은사는 얼마나 관후(寬厚)한가? 당신은 얼마나 관후(寬厚)한 사람인가? 바울은 그의 교회에 대한 사랑에 있어 관후(寬厚)한 사람이었다. 만일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만한 값이 지불되든지 고려하지 않고 그는 그 필요를 채워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2) 그의 교제에서(13절)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처신이다. 걸어서 가는 바울을 제외한 모든사람들은 드로아에서 배를 탔다. 당신은 왜 바울이 걸어서 갔는가를 물을 것이다. 사람이 떠나갈 때 그를 배웅하기 위하여 그 떠나는 사람을 어느 정도 따라가는 잣은 당시의 한 관습이었다. 바울은 그들이 배웅하러 따라 나왔기 때문에 그들과 좀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관후(寬厚)한 사람이었다. 그는 30-50 km를 걸었고, 배에 있는 그의 동료들을 만나기 전 5-10 km정도는(그들을 떠나보내고) 주님과 조용한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관후(寬厚)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나는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의 관심에서 나타난다.

 

그의 관심(14-17절)

 

 

1. 여행 경로(14-15절)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밀레도는 옛 이오니아의 수도(首都)로서 에베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원래 이곳은 그레데의 식민지로서 극도로 부강해진 곳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장엄한 신전 중의 하나인 아폴로 신전이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2. 배편의 선택(16절)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더라.”

 

 

아마도 그 배가 에베소에서 무척 오래 머무를 예정이었던 모양이다. 바울은 촉급한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그는 드로아에서 밀레도행(行) 배로 갈아 탔다. 왜냐하면 그 배가 에베소에 머무를 배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배였기 때문이다.

 

3. 장로들에게 대한 부탁(17절)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당신은 아마 ”장로들을 청한 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그는 그의 여행 중 밀레도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쉬지 못한 피곤한 몸이었다. 그는 에베소 장로들을 더 가르치고 교훈하고 권고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 이 장로들을 오게 했다. 바울의 교회에 대한 헌신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 장로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베푼 모든 사랑에 대하여 다시 사랑으로 보답했다.

 

바울의 본을 따름

 

 

당신이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에 빌립보서 3장 17상반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도 사도 바울이 교회를 사랑한 것 만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빌립보서 4장 9상반절에서 그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사도 바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본다면,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인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의 이 모든 사랑의 모습들이 또한 내 삶에 있어 사랑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이 모든 그의 사랑의 요점들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9절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당신은 거짓없이, 진실로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앞에서 영적 은사들에 대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롬 12:6-8절). 이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신실히 사랑할 수 있는가? 바울은 어떻게 사랑했는가?

 

1) 애정 : 로마서 12장 10상반절은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라고 말한다.

2) 구제 : 13상반절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라고 말한다.

3) 가르침 : 6-8절에서 바울은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말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너희 은사가 무엇이든지 그 은사대로 하라고 한 뜻이다. 바울은 그의 가르침의 은사를 발휘함으로 그의 사랑을 나타내었다.

4) 인내 : 로마서 12장 11-12절은 ”... 열심을 품고 주(主)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말한다. 14절에서는 그는 ”너희는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다. 달리 말해서, 모든 적대적인 것에 대해서도 교회 사랑의 정신을 좇으라는 말이다.

5) 관후성(寬厚性) : 하반절은 ”...손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관후성(寬厚性)이다. 나그네들에 대한 사랑,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자원해서 자신을 바치려는 사랑이다.

 

6) 관심 : 15절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우리들도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또한 사랑을 나타내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바울의 삶의 모범이 우리 모든 사람의 삶의 모범이 되기를 기도한다.

 

 

확인 질문

 

 

1.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무엇이 목회자로 하여금 큰 영향을 미치게 하는가?

 

2. 무엇이 사도행전 20장을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 장(章) 중의 하나가 되게 하는가?

 

3. 양무리들에 대한 사랑의 사역의 표는 무엇인가?

 

4. 베드로전서 5장 2-3절을 볼 때 양들을 인도한 합당한 방법은 무엇인가?

 

5. 초대 교회 시대에는 교회가 얼마나 자주 모였는가?

 

6. 왜 교회가 한 주간의 첫날에 모이기 시작했는가?

 

7. 만일 당신이 토요일에 주님을 예배할 것을 고집한다면 당신은 어떤 것 세 가지를 허용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믿음에는 어떠한 방식의 구원을 믿는가?

 

8. 안식일에 매여 있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바울이 교훈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9. 주일(主日)에는 어떠한 일들로 보내는 것이 좋은가?

 

10. 초대 교회는 왜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가?

 

 

11. 애찬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왜 순수한 목적에서 왜곡되고 말았는가?

 

12. 누가 주(主)의 만찬을 집례할 수 있으며,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가?

 

13. 교회가 함께 모이는 가장 첫째 이유는 무엇인가?

 

14. 당신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기갈(飢渴)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한가?

 

15. 하나님께서는 왜 유두고를 다시 살리셨는가?

 

16. 바울은 그의 시간들에 대한 우선 순위를 어떻게 정했는가?

 

17. 바울은 왜 앗소로 걸어서 갔는가?

 

18. 교회에 대한 우리의 임무는 무엇인가?

 

정리

 

 

1. 히브리서 10장 21-25절을 읽어 보라. 다른 성도들과 함께 모이기 위하여 교회가 함께 모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함께 모일 때, 주일날 교회에 들어갈 때의 생각은 어떠한가? 21-22절을 다시 읽어 보라. 우리가 가까이 나아가야 할 분은 누구인가?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연관해 우리들이 이 말씀에서 점검해 보아야 할 네 가지 요점은 무엇인가? 주일날 교회당에서 다음과 같이 당신 자신을 점검해 보라.

 

 

”나는 묵상을 통하여 말씀에서 하나님을 보는가? 그리함으로 내 마음이 그분께로 더 가까이 나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가? 나는 단순히 믿음으로만 이곳에 올 수 있으며, 또 믿음만이 필요한 전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사역 때문에 내가 이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가? 나는 내 삶에 있는 죄를 해결하고 순결한 가운데 이곳에 왔는가?”

다음에 당신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이와 같은 질문들을 당신 자신에게 해 보라. 참된 자세로 그분을 예배하라.

 

2. 바울은 항상 그의 은사의 발휘에 있어 관후(寬厚)했다. 당신의 은사 발휘는 얼마나 관후(寬厚)한가? 교회를 섬김에 있어 당신은 얼마나 관후(寬厚)한 사람인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에 당신은 얼마나 관후(寬厚)한 사람인가? 당신 삶의 목표들과 우선 순위들 중에 몇 가지나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이나 교회와 연관된 것인가? 바울의 관후성(寬厚性)과 비교해 볼 때 당신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데 바꾸어져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당신은 바로 지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을 갖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라.

 

3.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나타난 여섯 가지 면의 목록을 만들어 보라. 이 여섯 가지 부분에서 당신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1-10까지의 점수로 평가해 보라. 어느 것들이 많은 점수로 나타나며, 어느 것들이 적은 점수로 나타나는가? 적은 점수로 나타난 것들 중에서 당신이 의욕을 가지고 시정할 수 있는 것을 골라 보라. 그것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 이 필요한 과정들을 잘 밟아나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기억하고,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라. 사랑하는 것은 감정이 동반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감정」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당신 자신을 돌보지 말고 그 기회를 선용(善用)하라.

 

 

 

● 사도행전 20:17-20 ●

 

4. 사역에 대한 바울의 입장(1)

 

 

서론

 

 

1. 사역의 실행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시작한 일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세상에는 미완성 조각들과 미완성 그림들, 그리고 미완성 저작물들, 미완성 교향곡 등 많은 미완성품들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이 자기가 죽을 때까지 한다 해도 자기의 위대한 꿈이 절반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면에서 볼 때 인생은 참 서글픈 것이다. 불경건하고 불신실한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보증이 없다. 그들의 삶에 의미를 찾기 위해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어쩌면 전혀 이루어지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도 그렇다고는 믿지 않는다. 내가 말씀으로써 확신을 얻어 마음속 깊이 믿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일들을 마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주신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는 그에게 성령의은사를 주시고 문을 여시며(기회를 주시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실뿐만 아니라 그 일을 마치는 데 필요한 시간도 주신다고 믿는다.

 

1) 바울의 확신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간증에서 나온 것이다. 사도행전20장 23-24상반절에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감에 대한 경고를 받고 있었다. ”오직 성령이 각 성(城)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主)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그의 앞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있는 것과 그 시간 안에 그의 사역을 마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마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확신이 있었다.

 

2) 하나님의 부르심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으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수한(壽限)을 정해 주신다고 믿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악을 위해 당신을 부르신다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틀 내에서 그 일은 마칠 수가 있다. 하나님은 절대로 마칠 수 없는 사역에 당신을 부르지 않으실 것이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마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마치지 못하고 죽는 데는 그들이 너무 늦게 시작했거나 아니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 부르심을 이행치 못함

● 죽음에 이를 죄를 범함으로써

나는 하나님께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그들에 대한 사역있을 시작하기도 전에 하늘로 데려가실 수도 있다고 믿는다. 고린도전서 11장 30절에 보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세속적이었고, 그 세속성을 주(主)의 만찬에서까지 드러낸 것을 볼 수있다. 그들은 주님의 징계로 죽임을 당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순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죄에 거함으로써 세상에 주님께 대한 선한 증거를 나타내는 것보다 욕을 돌릴 때 주님은 그를 데려가신다.

 

● 시간을 낭비함으로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적어서가 아니고 그가 주어진 시간을 적절히 잘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例)를 들면, 바울은 두 번이나 ”세월을 아끼라”(엡 5:16/골 4:5)고 말했다. ”세월”(time)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제한된 시간”이며 ”아끼다”(redeeming)라는 말은 시간을 ”값을 주고 사다”는 뜻이다. 바울은 모든 순간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의 사역을 마치기까지 모든 순간들을 ”아끼는” 삶을 살았다.

 

(2) 부르심을 이행함

● 믿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자원들을 주셨다. 고린도전서 12장에 의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은사를 주셨다. 은사들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과 경영과 직임들이 있다. 로마서 12장 3절에 보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은사들과 사역들을 활용할 수 있는 믿음도 주신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받은 은사에 적합한 믿음을 또한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시간을 선용(善用)한다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마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 23)라고 듣게 될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들이 완성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들을 허락해 주신다.

 

● 시간

- 베드로전서 1장 17절 :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은 ”너희에게 주어진 정해진 시간을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지내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나그네로 있을 때”라는 구(句)는 아주 개인적으로 지정된 시간을 말하는데, 특별히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뜻한다.

- 베드로전서 4장 2절 : ”그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시간을 한정하셨다.

 

● 방향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시간이라는 것으로 한정하셨다. 이와 같은 사실은 나에게 내 삶의 방향에 대한 중대성을 인식하도록 해준다. 만일 내가 내 시간을 잘 활용한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마칠 수 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나의 일을 완수하는 것에 대해 염려한다. 만일 내가 내 시간을 잘 활용하게 되면, 나에게 주어진 일을 다 마치고 주님께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나는 성취감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세로 당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시간의 제한성과 활용을 믿은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것을 전하였다. 디모데후서4장 5절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그의 사역에 전념할 것을 명했다. 골로새서 4장 17절에서 그는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主)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말했다. 그는 젊은 디모데와 젊은 아킵보에게 두 번이나 이것에 대해 말했다. 바로 이 젊은 시절이 바로 당신의 사역에 있어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할 때이다.

 

2. 사역의 완수

 

1) 생(生)의 목표

사도행전 20장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마치면 주님께로 갈 것을 알고 시간을 아끼며 분투했던 사람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과 함께 지내고 싶지만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말했다(빌 1:23). 그의 생(生)의 목표는 맡겨진 일을 마치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그는 ”누가 나를 죽인다고 말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면 일어나라. 어떻든 나는 나의 일을 마치겠다. 그 모든 것들이 내게 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해야 나를 이 세상에서 떠나 주님과 함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뿐이다”라고 말했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살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일을 마치는 것이었다. 내가 바라기는, 당신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그 일을 마치기 위해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맥아더 목사님, 당신은 계속해서 그렇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좀 쉬어야 됩니다. 무리하게 하지 마세요. 운동도 좀 하시고 휴식도 좀 취하세요”라고 말한다. 운동도 하고 잘먹고 몸을 잘 돌본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당신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회들을 잘 활용하고 완수했을 때에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의 생(生)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나는 죽는 것을 염려함으로 생(生)의 기쁨을 빼앗기지는 않겠다. 나는 그저 내 일을 완수하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당신은”목사님, 목사님이 그러한 의욕을 갖는 것은 참 좋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절대로 목사님의 일을 마치지 못할 것입니다. 목사님이 하는 일은 너무 방대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물론 이 일이 방대한 일인 줄은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하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적은 부분을 맡겨 주시고 ”맥아더야, 이것이 네가 할 부분이다. 이것을 해라”하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부분이다.

 

2) 죽음에 있어서의 영광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의 종반에 와서,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아마도 영원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를 말을 하였다. 디모데후서 4장 6절에서 그는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라고 말했다. 그는 ”주님, 이제 제가 죽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당신은 ”바울 사도여,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아직도 구원받아야 할 온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다”(딤후 4:6)라고 말했다. 당신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알았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7절에서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어느 정도의 한정된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바란다. 당신은 ”나는 사역자는 아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사역자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인 것이다. 당신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가 무엇이 되었든지, 장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시간 한도에서 그 시간을 선용(善用)하여 당신의 일을 완수해야 한다. 당신이 당신의 일을 다 마치게 되면 주님께 있는 기쁨과 영광이 그 보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20장 17상반절의 ”... 밀레도에서...”라는 말씀에서 고찰을 시작했었다. 이 아시아 연안에서 배는 정박해 있어야 했다. 바울은 그의 세번째 전도 여행의 막바지에서 지중해 동쪽 지역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작별을 하고 있었다. 로마와 스페인을 포함한 그의 장래 계획으로 인하여 그는 다시 이곳에 올 것으로는 계획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것이었다(16절). 그는 밀레도에 정박해 있는 동안 그들과 함께 그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나누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바울은 거의 3년간을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양육하며 가르쳤다. 그들은 몇 명의 장성한 자들이 일어날 정도로 자라났다. 양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양들을 인도하고 돌볼 수있는 성숙한 장로들이 일어났다. 바울은 그의 이 제자들을 만나기 위하여 불렀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적인 모범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한 것처럼 당신 교회의 지도적 일꾼들도 당신이 한번 키워 보라. 그는 교회를 그들에게 맡겨 성장시키도록 했다.

 

장로들과 감독들

 

 

17절에 나오는 ”장로들”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레스뷰테로이」(presbuteroi)이며, 이에서 장로와 장로회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은 단순히 ”성숙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은 꼭 세상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영적으로 장성한, 성숙한 사람들이다. 때로는 디모데처럼 젊지만 영적으로 깊이 성숙하여 장로로 보아야 할 정도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장로”라는 말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 사용되어야 할 말이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서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라고 한 말에 주의하라. 17절에 장로라고 부름을받은 자들의 임무가 28절에 ”감독”이라는 말로 묘사되어 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에피스코포이」(episkopoi)로서 오늘날의 ”감독”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장로는 양무리를 다스리는 성숙한 사람이다. 그는 큰 매를 들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본(本)으로써 다스리고 돌보는 자이다(벧전 5:3).

 

바울이 이 지도자들에게 한 말은 아주 중요하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한 말 중 사도행전 안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부분이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많은 설교와 말을 했지만 이 말씀만이 누가가 그의 기록 가운데서 기록한 말이다. 이 특별한 말씀은 사도바울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여 준다. 이 성子(聖句)에는 바울의 고유한 어법(語法)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다른 성도들과 대화를 나눔에 있어서 어떤 어투를 사용했는가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18절에서 그는 ”...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라고 시작하고 있다. 그는 ”내가 여러분 가운데 올 때부터 어떻게 일했는가를 여러분이 다 아십니다”고 말한 것이다. 당신은 ”그는 왜 말을 그렇게 시작했을까?”라고 물을 것이다. 이 말은 어쩌면 변명적인 말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에 대해 변호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어떤 사람이 사도 바울이 떠난 뒤에 그 교회에 들어와 사도 바울의 평판을 손상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사역에 대한 방법과 모범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했을 것이다. 29-30절은 이에 조금 더 강도(强度)를 더하고 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은 단순히 그 자신의 사역의 모범에 대하여 설명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어쩌면 ”여러분, 나는 이제 떠납니다. 이제 내 일은 여러분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처음 이곳에 올 때부터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일했는지 잘 아십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사역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한 셈이다.

19절에서부터 바울은 사역자로서의 자신의 사역관을 피력하고 있다. 비록 그 개념들은 단순하지만 이것들이 당신의 사역에 있어서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우리들의 사역의 네 가지 관점, 즉 하나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불신자들에 대하여,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나의 사역에 대한 효과는 내가 교회와 불신자들과 그리고 나 자신과 어떠한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사실 바울은 ”나는 내 사역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면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는 내 자신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보고, 교회에 대하여는 가르침, 불신자들에 대하여 전도, 내 자신에 대하여는 제물로 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역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 섬김(19절)

 

 

바울은 그의 사역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사역을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

 

1. 섬김의 본질(19절)

 

”주(主)를 섬긴 것과 ....”

첫날부터 바울의 사역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27장23절에서 바울은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항상 자기의 사역관에 대하여 생각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원칙이 사역에 대한 어떤 기본을 세우기 때문이다.

 

1) 섬기는 자세에 대한 부연

 

(1) 하나님의 지지(支持)를 추구함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아주 결정적인 대조를 하고 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만일 당신의 사역의 목적이 사람들 가운데서 유명해지는 것이라면 당신은 이미 끝장난 사람이다.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 본문에서 바울은 그들을 호되게 꾸짖고 있다. 유대주의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이 유명해지고 싶어서 율법을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게 한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여러분은 할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지켜야만 합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바울이 사람들 앞에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런 교훈을 했다고 비난함으로써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과 그의 명예를 떨어뜨리려고 노력했다.

갈라디아서 1장 8-9절에서 바울은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헬라어로는 ”아나데마”(anathema)]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저주를 받을지어다」(아나데마)”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었다. 당신의 사역에 있어서도 사역의 초기이든 아니면 나중이든간에 사람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 말은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당신 사역의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을 당신이 분명히 이해한다면 당신은 사람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추구함

이것은 교회에서 당신이 하는 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모든 활동적인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에베소서 6장 5절은 ”종들아(고용된 자들) 두려워하고 떨며 ... 육체의 상전(고용주)에게 순종하라 ...”고 말하고 있다. 당신은 ”나는 그렇게 행합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거기에다 ”성실한 마음으로(그분이 너에게 명한 것을 이루려고 하는 일념으로) ...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5하반절)는 말을 더하고 있다. 당신은 당신의 직장에서 마치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날 당신에게 오셔서 ”나를 위해 이것을 좀 해다오”라고 부탁하셨다면 당신의 반응은 어떤 것이라고 상상하는가? 우리 모두는 아마 그 일을 위해 전력을 다 기울일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누구를 섬기든(그리스도인이든 불신자이든)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섬긴다고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세속적이고 신성한 일의 구분이 없다. 당신의 영적인 은사의 발휘가 되었든 시계를 고치는 일이든 모든 것이 다 그분께 하듯 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기억하심

마태복음 25장 34-40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재림 때에 있을 민족들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은 오른쪽에 있는 양들에게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나라를 상속하는 이유는 ”내(그리스도)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들은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주님은 그들에게 ”...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이 그리스도께 한 것으로 적어 놓으신다.

 

3) 섬김의 행위에 대한 점검

당신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가? 당신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통해 그분을 섬기고 있다”라고 대답할지 모르겠다. 일주일에 2-3시간 주님께 드리는 것, 참 좋은 일이다. 그럼 일주일에 그 나머지 시간들은 무엇을 하는가? 당신은 아마 ”나는 기술자이지 목사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생업(生業)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들이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의 고용주시라면 이제 우리들의 섬김은 더 이상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수많은 섬김들이 하나님께 대한 섬김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섬김이다.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회피하고 있는지, 이는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절에 나와 있는 ”섬김”의 의미는 ”굴종 또는 노예 생활”을 의미한다. 문자 그대로 노예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 말을 그의 서신서들에서 17번이나 사용하였다. 만왕의 왕, 만주(萬主)의 주(主)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노예로 부름을 받은 것은 아주 고귀한 부르심이다.

 

2. 섬김의 정신(19절)

 

1) 겸손(19하반절)

”모든 겸손과...”

종의 마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과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당신이 만일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다면 그 고용한 사람들 중에서 싸움 잘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고용한 고용주들은 항상 그와 같은 자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것은 모든 겸손으로 주님의 종이라는 지각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며, 당신이 하기를 좋아했던 일을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 것이다.

 

(1) 바울

능력있고 빈틈없으며 최고로 지적(知的)인 사람 중의 하나였던 바울, 그러나 그는 겸손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고린도전서 15장 9-10절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런 자격도 없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가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는 한,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다. 바울은 ”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육체의 가시나 핍박, 또는 환난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모든 것들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 것은 내가 약할 때 강하기 때문이다”(고후 12:7-10)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로 구원받을 수 있도록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그 자비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 고린도후서 3장 5-6상반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우리가 무엇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 때문이다. ”겸손”이라는 말의 의미는 ”헌신적인 복종, 즐거운 순종”이다.

 

(2) 암브로스

그는 초대 교회에 있어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위대한 학자였고, 교역자였으며, 로마령(領)의 몇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 장관이었다. 그는 지방 장관으로서 아주 능력있게 잘 다스렸고, 영적인 면에서도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지역의 감독이 죽었을 때 지도자들은 그에게 정치를 버리고 신학을 택하게 하여 감독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역사가들은 그에게 있어서 이 일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 책임을 맡기보다는 밤중에 그 회의 장소를 뛰쳐 나왔다고 말한다. 후에 그 지도자들은 그를 다시 만나 하나님께서 그를 감독의 직분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우리의 이 사역은 항상 자신에 대한 부족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의 능력 안에서의 부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 안에서의 부족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적으로 그분의 능력을 의존해야 한다.

 

 

(3) 죤 낙스

그는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자였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는 그가 설교자로 부름받았을 때에 대하여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자신의 방에 숨기도 하였다. 그 날부터 그는 공적(公的)인 가르침의 장소에 설 때까지 그의 표정이나 행동에 있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슬픔과 고뇌를 나타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씀을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운 책임감으로 인하여 마음이 녹았으며, 그로 인해 눈물을 흘렸다. 겸손은 효과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 기본이다. 주님을 섬기는 데는 겸손을 필요로 하며 또한 고난을 필요로 한다.

 

2) 고난(19중반절)

”...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종에게는 많은 고난이 따른다. 예수께서도 종이 되셔서 고난을 당하셨다. 이사야서 53장에서 볼 수 있는 종의 고난이 그 좋은 예(例)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는 종이었으며, 우리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벧전 2:21).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만일 당신이 진실로 겸손한 주님의 종이라면 당신은 분명 어떤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 고난이 오는 데는 두 가지 방면이 있다. 즉, ”많은 눈물”은 내적(內的)인 고난이며, ”시험”은 외적(外的)인 고난이다.

 

(1) 내적인 고난

나는 당신이 진실로 어떤 내적인 고난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주님을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떤 꾸민 슬픔이나 형식적인 것이 아닌 진실한 내적 고통을 말한다.

 

 

● 고난의 두려움

바울은 눈물을 흘렸다. 그의 주님에 대한 섬김은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다. 왜 그와 같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을까?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지 못할 때 그는 마음에 아픔을 느꼈다. 이 세상의 세가지 것들이 그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

 

- 회개치 않는 세상 : 로마서 9장 2-3절에서 바울은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라고 말하였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들로 인하여 울었다.

- 육적(肉的)인 그리스도인들 : 그는 고린도전서를 가장 육적(肉的)인 무리들을 상대로 해서 썼다. 그는 그 편지를 쓰기에 앞서 울었다. 과연 우리도 바울만큼 육적(肉的)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염려하는가? 고린도후서 2장 4상반절에서 그는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의 감정을 기록하였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그는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 그들의 육적(肉的)인 것과 변덕을 인하여 울면서 썼다.

- 거짓 교사들의 위협 : 그는 거짓 교사들로 인하여 울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0장 31하반절에서 바울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30절에서 그는 그들에게 바로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경고했었다. 빌립보서 3장 18절에서 바울은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말했다. 바울은 불신자들로 인하여 울었고, 육적(肉的)인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울었으며, 거짓교훈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침해를 받을 때도 울었다.

 

 

● 고난의 열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섬김은 내적인 고난을 동반한다. 그래서 그 내적인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여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기게 한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기쁨이 충만한 섬김이라 할지라도 열매가 많지 않을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위와 같은 것들로 인하여 많은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께서 열매들을 맺게 하실 것이다.

- 설교자의 눈물 : 나는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이 죽은 후에 있었던 그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한 젊은 목사가 맥체인이 가르쳤던 교회를 방문했다. 그 교회 사찰이 그를 안내했는데, 그는 그 젊은 목사를 조그만 방으로 안내해 조그마한 발판(Stool:발판 또는 등 없는 걸상-역자 주)을 하나 보여 주었다. 그 나이 많은 사찰이 젊은 목사에게 ”목사님, 저기 발판이 보이지요?”라고 말했다. 젊은 목사는 자기에게 발판을 보여 주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 사찰은 젊은 목사에게 ”저 발판은 머레이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무릎을 꿇고 울었던 곳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목사를 강대상으로 안내했다. 강대상 위에 놓인 큰 성경에 빗물 자욱이 많이 나 있는 것을 보고 목사는 ”성경 위에 있는 이 많은 자욱들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 사찰은 이에 대해 ”이 자욱들은 맥체인 목사님이 말씀을 전할 때 흘렸던 눈물 자욱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위대한 설교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아직도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나는 어떤 감정주의를 옹호하는 자는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직한 연민을 말하는 것이다.

- 씨 뿌리는 자의 눈물 : 시편 126편 6절은 아주 아름다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돌아오리로다.”

이 말씀을 영적인 면에서 적용해 본다면, 어떤 사람이 좋은 씨인 하나님의 말씀을 연민과 주의력을 가지고 나가 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단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는 사실이다. 신실하게 씨를 뿌리는 자에게는 꼭 추수가 있을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데는 겸손과 고난을 필요로 한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올바른 견지에서 바라보고 자신의 삶이 주님을 섬기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당신은 그 삶이 곧 눈물을 필요로 하는 삶이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데는 또다른 종류의 고난이 있다.

 

(2) 외적인 고난

● 핍박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해 간계를 꾸몄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핍박이다. 겉으로 보기에 항상 사도 바울과 싸운 것은 유대인들인 것같다. 사도행전 20장 3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배에서 죽이려고 공모한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는 배를 타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5장 30-31절에 기록한 것이 바로 이 때를 기록한 것이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그의 생명에 대한 줄기찬 위험 속에서 살았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이교도로 보며 그들의 종교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죽일 계략을 꾸몄다.

 

● 반발

부도덕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도 고난 중의 하나이다. 세상의 어떤 조직도 이를 관용할 수 없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의 조직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느냐 따라 당신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영향을 측량할 수 있다. 부도덕한 사회조직으로부터 무언가 당신의 거룩한 삶에 대한 반발이 있어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의 핍박도 그렇지만 만일 그리스도인이란 사람들이 당신을 대적하게 되면 그것이 더 큰 시련인 것이다.

 

세상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큰 종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모든 기독교 신문이나 월간지에 사진이 실리고, 어떤 큰 행사에 그 이름이 나오고, 또 그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 그가 얼마나 명성이 있는가, 그가 얼마나 많은 학위들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한다. 그들 중에는 진실된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전(全) 삶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에 최우선권을 두며 모든 겸손과 고난받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를 큰 종으로 인정하신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사람들이 상 받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역에 대한 바울의 관점의 두번째는 교회에 대하여이다.

 

교회에 대하여 - 가르침(20절)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것, 또는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을 가르침으로 보았다.

 

 

1. 진리에 대한 섬김

 

1) 가르침의 유익(20상반절)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꺼리다”라는 동사는 27절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나 주저하지 않고 전했다.

 

(1) 진리를 고수함

여기 사역에 대한 한 가지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의 사역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칠까 또는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기를 끌 것인가를 신경쓰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하여 당신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공격이 되는 어떤 것을 피하게 된다. 당신은 어떤 특정한 의견들에 대하여는 때론 잠잠하게 있는 것이 좋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과 진리의 문제일 때, 즉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일 때에는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제시해야 한다.

 

● 베드로의 타협

이에 대한 좋은 예(例)가 안디옥에서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일어났다. 베드로는 그 곳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이방인들과 교제하면서 자신이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왔을 때 베드로는 이방인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유대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모든 규례를 지켰다. 바울은 이러한 베드로에 대해 대단히 노했다. 갈라디아서 2장 11하반절에서 바울은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고 말했다. 14절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공적으로 꾸짖은 것은 기본적으로 ”당신도 못하는 것을 이방인들에게 시키려고 하느냐”라고 한 것이다.

당신은 아마 ”그렇게 꾸짖으면 베드로의 감정이 상할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베드로의 사상이 고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절대로 어떤 가르침에 대하여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교리나 권고나 필요한 훈계를 꺼리지 않았다. 그는 어느 것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진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땐 그것을 적용하였다.

 

● 교회의 타협

세상에는 하나님의 진리를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 교회에 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 그들과 의견 충돌이 생겨서는 교회 일을 원활하게 못하지”라고 말한다. 또는 ”그 사람들이 우리 교회 장로들인데 내가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이라고 말하면서 지레 체념한다. 이와 같은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처신이다. 어떤 한 목사는 나에게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異見)이 많기 때문에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확실히 몰라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것은 죄(罪)이다. 주님의 재림을 말하지 않고 어떻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의 재림은 우리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사건이다.

한 사람이 나에게 ”우리는 교리적인 것을 피한다”라고 말했다. 또다른 사람은 나에게 ”당신 교회는 교회의 권징을 믿습니까? 당신 교회의 장로들이 범죄한 교인들에게 가서 그를 권징합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물론이지요”라고 말했더니, 그는 ”그래요? 우리는 몇년 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말씀하고 있으니 당신도 해야만 합니다”라고 말했더니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첫째 이유로는 한두사람이 아니고 대부분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2) 진리에 맡김

바른 교리의 적용에 대한 결과야 어떻든 그 적용에 대한 답은 성경에서 간단히 말하고 있는데, 성경은 결과야 어떻든 바른 교리는 적용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당신에게 차가운 사람이 되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바른 것은 행하라는 것이다. 당신은 유익한 것을 어느 것이든 꺼리는 태도를 가져서는 당신의 사역을 완수할 수 없다. 당신은 ”그러면 유익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유익하니.” 사도행전 20장 27절에서 바울은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진리를 주셨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덕(德)을 세우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의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은 방면에서 유익하다.

- ”...책망과...” : 이 말은 다섯 번이나 ”꾸짖다”로 번역되었다(딤전5:20/딛 1:13/2:15/히 12:5/계 3:19). 마태복음 18장 15절에서 이 말은 ”그의 잘못을 「말하라」”(개역 한글성경에는 '권고하라'로 되어 있음-역자 주)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성경은 ”사랑하는 형제여, 이 말씀이 말하기를 형제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소”라고 말하기(권고하기에)에 유익하다. 이것이 바로 책망이다.

- ”... 바르게 함....” : 당신이 누구를 책망했다면 당신은 또한 그 사람의 행실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연장도 가진 셈이다.

- ”... 의(義)로 교육하기에 ...” : 당신이 누구를 책망해서 그를 올바른 길로 바로잡아 주었다면 이제 당신은 계속해서 그를 의로운 삶으로 교육해야 한다.

 

● 시편 40편 8-10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主)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내가 대회 중에서 의(義)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3) 진리를 전파함

● 에스겔의 임무

에스겔은 대단히 독특한 임무를 받았는데, 이것은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임무이기도 하다. 에스겔서 33장 7절에서 하나님은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말하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는 그들이 그 모든 책망들을 싫어할 것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8절에 계속해서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로부터 특별한 임명을 받고 어떤 사람에게 가서 ”이 악한 사람아, 너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에스겔이 주저할 것을 아셨다. 그래서 ”네가 말로 그 악인에게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8하반절)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내 진리를 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너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 진리를 전파한다면 형벌은 받지 않게 된다.

 

● 그리스도인들의 임무

이것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었다고 해서 당신을 지옥에 보낸다고 하는 뜻은 아니다. 이 말씀에 대한 적용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책임이 있으며, 전파하지 않았을 때 그 전하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징벌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들에 대하여 나는 ”당신은 에스겔서 33장을 읽어 보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와 같은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하게 하신 것을 감추어 두는 처사가 됩니다. 만일 그 사람이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는다면 그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당신은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구원받고 받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말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말하든 하지 않든 그들의 죄 가운데서 그들이 죽는 이상,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결정할 문제이다. 이것은 다만 당신이 당신의 임무를 실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징벌의 문제이다.

만일 당신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것들에 관해 경고하려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선포하고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전파하라. 그렇게 될 때 당신의 사역은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이 될 것이다. 이와같은 이유로 나는 성경을 강해적으로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2) 가르침의 장소(20하반절)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1) 공적인 집회 장소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그는 3개월을 회당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2년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다(행 19:8-10). 그들은 공적인 집회를 가졌고 사람들은 그 집회에 나와 말씀을 배웠다.

 

(2) 가정집

● 말씀의 적용

바울은 공적으로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어떤 사람들의 특별한 필요에 따라 그 말씀을 적용시켜 준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이 말씀에 근거해서 각 집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변호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영적인 진리들을 적용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가정이나 집에서의 성경 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 말씀의 설명

사도 바울이 당신 집에 온다면 당신은 맨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 당신은 아마 ”바울 사도님, 이 말씀을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나는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는 한에 있어서는 질문받는 것을 좋아한다.

본문의 의미는 강대상에서 가르쳐진 진리를 어떤 사람들의 실제 삶에 적용해 성취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이 각 집을 돌아다닌 것은 그가 실제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의 실정을 살폈다. 당신에게 말씀이 적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려면 당신이 전파된 진리의 말씀에 의거해 생활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면 된다.

 

하나님께 대한 나의 의무는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나의 의무는 가르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공적인 가르침이거나 공적인 가르침을 실질적인 삶에 적용하도록 가르치는 사적인 가르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우선적인 과제이다.

 

 

확인 질문

 

 

1.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맡기신 사역을 자신이 마칠 수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2. 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마치지 못하고 죽는가?

 

3.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을 무슨 의미인가? 이것이 자신의 사역을 마치는 일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4.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은사와 직임들을 활용할 수 있는가?

 

5.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주권적으로 한정된 시간을 주시고 그 삶에 대한 감지력을 주신 것이 어떠한 점에서 사실인가?

 

6. 바울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7. 맡겨진 일을 완수함에 대한 보상은 무엇인가?

 

8. 장로에 대해 정의해 보라. 감독에 대해 정의하라. 이 두 가지의 관계는 무엇인가?

 

9.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18절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그렇게 특별하게 말한 두 가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10. 바울의 사역에 대한 네 가지 관점은 무엇인가?

 

 

11. 사역에 있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12. 실제에 있어 고용된 자들이 위해서 일한 대상은 누구이며, 왜 그들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

 

13. 종의 마음 자세 중의 하나는 무엇인가?

 

14. ”겸손”을 정의해 보라. 우리는 어떤 일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15.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섬김에 있어 우리는 무엇을 지속적으로 인식해야 하는가?

 

16.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 경건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17. 세상의 어떤 것 세 가지가 사도 바울을 슬프게 만들었는가?

 

18.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섬김에 있어 그 섬김에 내적인 고난이 동반되는 것이 왜 중요한가?

 

19. 왜 유대인들은 줄기차게 바울을 대적하고 죽이려 했는가? 이것을 거룩하게 사는 삶과 연관시켜 볼 때 어떤 원리를 나타내보여 주는가?

 

20. 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는가? 바울은 그의 행동에서 무슨 원칙을 따랐는가?

 

 

21.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설명해 보라. 그것이 유익한 방면들은 무엇인가? 각각의 의미를 설명해 보라.

 

22. 에스겔서 33장 7-8절에서 에스겔의 독특한 임무는 무엇인가? 그는 왜 그의 임무를 이행해야 했는가? 왜 이 임무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가?

 

23. 공적으로 가르치고 그것을 각 집마다 가르치는 것이 왜 사도 바울에게 있어 중요했는가?

 

정리

 

 

1. 당신은 당신이 하려고 시작했다가 마치지 못하여 실패의 쓴 잔을 마셔 본 적이 있는가? 그때의 감정은 어떠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도록 주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일 당신이 어떤 특별한 사역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어느 경우든 당신은 당신에게 맡겨진 일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시간을 바치는가? 당신이 쉬는데, 즉 노는 데는 시간을 얼마나 사용하는가? 당신의 시간을 좀더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현재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다음 주간의 시간표를 짜놓고 당신의 모든 일정을 적어 보라. 당신이 변화를 받아야 할 부분이 어느 부분인가를 깨닫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2.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섬김에서 당신은 사람들의 칭찬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추구하는가? 당신이 사람들의 칭찬을 추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어떤 특별한 것들이 당신의 삶에 나타나는가?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어떤 특별한 것들이 증시되는가? 당신은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당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자원하는 마음과 행동을 통한 순종을 증대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들을 적어 보라. 당신이 적은 것들을 따를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3. 당신은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당하는가? 당신은 내적인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가? 당신은 불신자,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또는 거짓 교사들의 방해로 인하여 울고 있는가? 이 사람들에 대한 당신 마음의 슬픔에 대하며 1-10까지로 그 강도(强度)를 적어 보라. 이와 같은 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슬픔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한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왜 받았으며, 또 왜 받지 못했는가? 당신의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증거는 얼마나 효과적인가? 당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바울은 내적으로, 또한 외적으로 고난을 받았다. 당신은 얼마나 간절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울처럼 고난받기를 원하는가? 이 면에 있어서 당신이 변화를 받아야 할 부분을 보여 주시도록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가지라.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되기를 원하신 만큼 되지 못하도록 막은 죄에 대하여 고백해 보도록 하라.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분을 더 의지하라.

 

4.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들을 전함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었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것과 타협하는 자신을 발견하는가? 타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의 평가에 의해서 자신을 세밀히 살펴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지 않는 것이왜 중요한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유익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중요성을 분명히 기억하기 위하여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을 암송하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사도행전 20:21-24 ●

 

5. 사역에 대한 바울의 입장(2)

 

 

서론

 

 

1. 성공의 방법

 

만일 우리가 사도 바울을 고찰하고 또 그가 만일 우리와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아마 그의 성공의 방법에 대해 알고자 했을 것이다. 오늘날 성공의 방법론은 하나의 좋은 상품이다. 심지어 오늘날 교회들이나 종교계 안에서도 이 성공의 방법론을 사고 팔고 있다. 우리는 이 성공을 어떤 방법과 연관시켜 볼 때가 많다.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곧 그가 어떻게 성공했는지 그 방법을 따르려고 한다. 만일 바울이 오늘날 이곳에 있다면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그 주위에 몰려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퍼부었을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성취했습니까? 한 도시를 복음화하는 그 기술은 어떠한 것입니까? 교회 성장의 패턴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당신이 사용하는 방법은 어떤 방법입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로 바른 생각을 하도록 도와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이와 같은 질문들을 퍼부을 것이며, 또 그것에 대해선 아무런해답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성공은 직접적으로 그의 방법과는 무관하며 간접적으로 그 방법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2. 성공에 대한 멧세지

 

나는 목회자들을 위한 10주 훈련 코스의 수양회에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다. 거기에 참석한 목회자들은 그 훈련 교재로 많은 도표들과 그래프들을 사용하였다. 나는 그 훈련 코스를 총 마무리할 수 있는 멧세지, 즉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 성경적인 성공에 대하여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처음에는 한 마디로 모든 목회에 대한 것을 요약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멧세지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담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모범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회에 있어 가장 능력 있는 것은 본(本)이 되는 것이다.

 

1) 모범들

이 모범에 대한 것은 성경을 통하여 설명되었다. 몇 가지 예(例)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반복해서 자신의 모범을 통하여 가르치셨다. 그분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本)을 보였노라”(요 13:15)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요 13:4-5). 예수께서는 재삼재사 그들이 해야 할 것을 자신이 친히 해 보이셨다.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누가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기를 시작하심부터 ...”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친히 본(本)을 보이셨다.

 

 

(2) 베드로

그는 장로들에게 ”양 무리를 돌보고, 양 무리를 먹이고, 양 무리를 치고,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本)이 되라”고 말했다(벧전5:2-3)

 

(3) 바울

그는 디모데에게 지도자가 어떠해야 되는가에 관하여 편지를 썼다.

”... 믿는 자들에게 본(本)이 되어...”(딤전 4:12).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는 내게 ...본 바를 행하라”(빌 4:9)고 말했다. 바울이 그렇게 크게 성공한 이유는 그 자신이 본(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언행(言行)에 있어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바울의 삶을 본받았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말했다. 성경적인 지도력은 본(本)이 되는 것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다. 바울이 사용한 방법들이 바울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그의 삶을 통하여 본(本)이 됨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사역에 있어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큰 교회당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당신의 마음에 있는 그 목표가 무엇이든지간에), 먼저 영적으로 바른 사람이 되도록 하라. 당신의 지도력에 있어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사용하든 그것에 상관없이 당신 자신이 올바른 본(本)이 되지 못한다면 당신은 절대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세상사(世上事)에 있어서도 사실인데, 영적인 면에서는 더욱더 확고하고 영원한 진리이다.

 

2) 존재됨에 대한 점검

바울이 사용한 사역의 방법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 나는 그의 존재됨(됨됨이)에 관심을 기울인다. 만일 내가 내 삶에 사도 바울을 영적으로 성공하게 만들었던 것들을 본받을 수 있다면 나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열매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 20장을 살펴볼 때에 우리는 그 곳에서 효과적인 사역에 대한 어떤 통찰력을 얻게 된다. 이것들은 오직 사도 바울의 삶의 한 부분이다. 그를 단순히 어떤 성공적인 기교의 면에서만 보고 그것들에 대한 목록으로만 요약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태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간단히 말해 당신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성령께서 당신을 통하여 일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 바울은 그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되었다. 그는 그 능력에 자신을 의탁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으며, 성령의 길을 따라 복된 사역을 감당하였다.

 

복습

 

사도행전 20장 17-24절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았다. 이 성경 구절들은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바울은 그의 사역을 네 가지 차원으로, 즉 하나님에 대하여, 구원받은 자들에 대하여, 불신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이해했다. 내가 만일 사도 바울이 처했던 그 처지가 될 수 있고 또한 사역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이 네가지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나의 삶으로 인해 엄청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또한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네 가지 차원이 사도 바울의 성공의 핵심 원리가 되고 있다. 이 앞 장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살펴보았다.

 

하나님께 대하여 - 섬김(19절)

 

 

바울은 사역할 때에 항상 그의 마음 자세가 ”나는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의 일시적인 변덕이나 기분을 맞춰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든지 나는 사람들이 내게 무엇이라 말하든 상관하지 않고 그 일을 한다”라는 것을 견지하는 사람임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다. 로마서 1장 9절에서 그는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라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외적으로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내적으로 즉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는 자신을 종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묘사하기 위하여 「둘로스」(doulos)라는 헬라어를 여러 번 사용했다. 이 말의 의미는 ”종, 노예, 종살이”라는 의미이다.

 

1. 섬김의 본질

 

종의 정신은 ”나는 명령에 순복한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에 대한 정신도 순종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그것을 내가 순종하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 반응이 올 것인가, 또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를 염려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만일 자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아름다운 것은 그가 그의 행실에서 뿐만 아니라 그 마음에서도 순종하는 심령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 때문에 그의 전하는 멧세지를 변형시키거나 그의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맡기셨다고 믿으면 그것을 실행했다.

불행하게도 교회사를 통하여 보면 교회가 사람들의 기호(嗜好)를 맞추기 위해 후퇴하며,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많은 사역들이약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는 완전히 종이 되어야 한다. 그분이 무엇을 명하시든지 우리는 순종의 심령으로 복종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2. 섬김의 정신

 

사도행전 20장 19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의 두 가지 요소를 보게 된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主)를 섬긴 것과.”

섬김에 있어 두 가지 요소는 겸손과 고난이다. 고난은 두 가지 것으로부터 오는데, 내적(內的)으로는 눈물이며 외적(外的)으로는 핍박이다.

 

겸손에 대한 예(例)

 

 

종이 되는 데에 있어 겸손은 기본이다. 당신은 당신의 주인보다 자신을 낮게 보지 않고는 좋은 종이 될 수 없다. 고린도전서에 이것이 예시되어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여러 당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고린도전서 1장에 의하면 그들은 당파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싸움, 말다툼, 분리, 그리고 혼란에 있었다(10-11절). 고린도전서 1장 12-13절에서 바울은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베드로)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말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대단한 말을 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그는 ”너희는 우리가 무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너희에게 접근하실 수 있는 하나의 통로에 불과하다. 내게는 조금도 영광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 저희는 주(主)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나오는 ”사역자들”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로서 ”섬기는 자”(servants)라는 뜻이다. 당신의 사역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주님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다른 무엇을 하든지 당신을 섬기는 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근본적으로 종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섬기는 자가 아니라면 무엇을 하는 자인가? 바울은 섬김을 나타내는 단어(diakonos)에서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섬김의 정도(doulos)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보았다.

 

바울은 사역에 관한 두번째 차원을 교회에 대한 것으로 본다.

 

교회에 대하여 - 가르침(20절)

 

 

1. 진리에 대한 섬김

 

사도행전 20장 20절에서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라고 말했다. 바울은 자신이 본(本)을 보임으로 그들을 가르쳤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사도 바울이 한 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하는 행동에 있었다.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 그는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꺼리지 않았다.

당신은 ”유익한 것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유익하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가르친 내용이었다. 교회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바울에게는 가르침의 성격을 띠었다.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하여 편지를 쓸 때, 그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말했다(딤전 4:13). 나중에 그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쓰라”고 말했다(딤후 4:2). 바울은 또한 두 곳에서 가르쳤는데 공적으로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고(행 19:9), 각 집에서 그의 가르침을 강화하였다.

 

2. 진리에 대한 청지기

 

이 일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며 가르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전서 4장에서 설명하였다. 1절에서 그는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책이 기록되고 우리의 이름이 기록될 때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청지기)」로 기록하라”고 한 말이다. ”비밀”은 감취었던 것으로서 지금 드러난 것을 말한다. 성경은 많은 계시된 비밀들을 담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맡은 청지기들이다.

 

1) 청지기의 임무

 

(1) 관리

당신은 ”청지기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당신이 좋은 집과 땅과 종들을 가지고 있고 바울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또한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고, 많은 가축들을 기르며,많은 사업들을 하고 있다. 당신이 모든 일들을 다 책임지고 할 수없는 이상 당신은 청지기라는 사람에게 그 일들의 관리를 맡겨야 할 것이다. 그는 품꾼들의 품삯을 지불하고, 시간 계획을 세우며, 해야 할 일들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등 모든 것을 지시할 것이다. 그는 식솔들이 너무 탐식함으로 식량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배려할 것이다(그는 또한 식솔들이 영양 실조에 걸리지 않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도록 배려할 것이다). 그는 식당에 일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관장할 것이다. 그는 모든 일을 관리한다.

 

(2) 충성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그리고 맡은 자(청지기)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말했다. 만일 당신이 충성되지 못한 사람에게 모든 일의 경영을 맡겼다면 당신이 집에 왔을 때는 집안이 온통 혼란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땅 속에 달란트를 묻어둔 종을 엄히 다루신 것이다(마 25:24-30).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조금도 늘이지 않고 줄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의 청지기직에 충성하지 않고 묻어 두었다. 청지기는 충성되어야 하며 믿을 수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2) 청지기직의 실천

당신과 나는 성경과 하나님의 비밀들에 대한 청지기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먹이도록 성도들을 내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을 주셨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은 나의 청지기직이며 내 임무이다.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것에 충성해야 한다.

 

(1) 기본적인 사역

이러한 사실은 나에게 내 사역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준다. 성경에서 진리들을 얻어 당신의 마음 속에 심어 주는 것이 나의 사역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이며 그의 임무는 사람들이 배우고, 먹고, 자랄 수 있도록 이 비밀들을 분배하는 것이다.

당신은 ”나는 사역자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당신이 목사는 아닐지라도 당신은 주님의 종이다. 당신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고, 그 은사를 활용해야 하는 것이 당신의 청지기직이다. 만일 당신이 충성되게 그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불충한 청지기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해 주고 집안전체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며 주님께 속한 좋은 것들을 위탁맡은 자들이다.

이것을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보자.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이라면, 당신은 가정에 있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이다. 만일 당신이 그 청지기로서 맡은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불충한 청지기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이와 같다. 우리 모두는 청지기들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도움이 필요한 자들, 우리가 돌아볼 필요가 있는 자들에게 사용해야 한다.

 

(2) 흠없는 청지기

바울이 디도에게 한 다음의 교훈은 특별히 목사에게 교훈하고 있다. ”감독(목사)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딛1:7).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 방식대로의 삶을 영위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비밀을 나누어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강대상에 서는 자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진리들을 분배하는 자가 아닌 다른 자로 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직 바람직한 사역의 길은 말씀을 강해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바울도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고 말했다. 이것은 음식을 나누어 주는 문제이다.

이러한 것을 잘 할수록 분쟁은 적어지리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아주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나, 죤 맥아더를 따를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고 싶다. 만일 당신이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면 나는 내 청지기직을 잘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죤 스토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씀과 청중 사이에 설교자가 부각되지 않을수록 좋다. 실제적으로 가족을 먹이는 것은 모든 것을 공급하는 가장이지 그것을 나누어 주는 청지기가 아니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말씀의 빛에 의하여 자신이 가리워지고 하나님의 음성에 의하여 자신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될 때 가장 만족한다.”

 

(3) 균형 있는 배식(配食)

지혜로운 청지기는 충분한 식사를 공급한다. 그는 항상 변함없는 같은 음식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안겨 주지 않고 균형있는 식사를 공급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다. 바울은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꺼리지 않았다.

 

3. 진리의 근원

 

진리의 근원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밖에 없다.

 

(1) 인간의 사색인가?

사람들은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분명히 믿는다”라고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자신들이 믿기 때문에 자신들이 믿는 것이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어쩌면 그렇게 사람들이 무지할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것은 참 절망적인일이다. ”성경이 말하기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말하는 데는 권위가 있다. 인간의 사색은 망을 통해 빠지는 모래와 같은 철학으로서 그 안에 전혀 무게가 없는 것들이다.

 

2) 무오(無誤)한 교회의 제도인가 ?

달라스 제일 침례교회의 크리스웰(Criswell)목사는 다음과 같은 간증을 썼다.

”일전에 나는 뮌헨에서 쮜리히로 가는 한 열차에서 13년 동안을 로마에서 살았으나 지금은 디트로이트 시(市)로 옮기게 된 카톨릭 수사(修士)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는 베네딕트파 사람이었으며 사제의 서품을 받기 위하여 15년 과정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대화의 결과는 탐탁치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나는 바로 조금 전에 유명한 잡지에서 로마 카톨릭 신도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물어 보면 그 대답이 아주 분명하고 선명한데, 개신교 신도들에게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물으면 그에 대한 대답은 항상 불투명하다는 기사를 읽었던 참이었다. 나는 이 잘 훈련된 베네딕트파 수사(修士)와 이야기를 나누면 내가 불리해져서 기분이 상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 주어진한 기회인데...'하는 생각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교황은 로마에서 그 해 11월 1일이 오면 마리아 몽소승천(蒙召昇天) 교리를 정식 공포할 것이라는 전율할 만한 성명(聲明)을 발표했다. 교황은 신실한 신도들 가운데서 교리를 대적하고 논쟁하는 자들의 논쟁을 약화시킬 따끔한 일침을 가한 것이었다. 교황은 그 교리를 공포할 것을 건의받았다고 말했고, 만일 그가 그것을 공포하면 그것은 물론 진리가 되며 오류가 없는 것이 된다. 신앙에 관한 것이 도덕에 있어, 교황은 불완전이나 실책 같은 것을 초월한 존재였다. 한 마디로 말해 로마 카톨릭은 그 교리를 믿어야 하며 그렇지않으면 치명적인 죄를 짓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마리아가 육신을 가진 상태로 승천했다는 그 교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교회의 머리가 진리라고 말했기 때문에 진리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당신도 믿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믿음으로써 종교적 확신을 얻지 않느냐」고 물어 왔다. 나는 그에게 '예, 나도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이유가 있지요 나는 내가 믿는 것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내게 「당신이 가진 증거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는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약성경에는 매 장(章)마다 마치 내가 그분과 직접 악수를 하고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육신을 가진 상태로의 마리아 승천을 믿는 당신의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교황이 말했기 때문에 진리라는 말밖에 다른 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거기에서 화제(話題)를 바꾸어 다른 일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가 마리아의 무죄성(無罪性)이나 요셉과의 결혼 또는 화체설(化體說)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는 그가 그의 믿음에 대하여 그들의 교회, 즉 무오(無誤)한 교황이라고 부르는 자에 의해 공포된 교리밖에는 다른 기초가 없는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소위 무오(無誤)한 인간적 제도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다.

 

3) 성경적인 계시이다 !

이것만이 오직 무오(無誤)한 진리의 근원이다. 만일 하나님이 진리시고 그분이 말씀하신 것이 진리라면, 그분의 진리가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진리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모든 사람들이그들의 사역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가?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았다. 하나님의 고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배하는 청지기들이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던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였다(행17:11).

바울의 하나님께 대한 사역관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었으며, 교회에 대하여는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세번째 불신자들에 대하여는 전도하는 것이었다.

 

불신자들에 대하여 - 전도(21절)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1. 복음의 집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어떤 영광이나 칭찬을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말했다. 로마서 9장 3절에서 그는 ”나의 형제 곧 골육과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말하고, 1장 14-16절에서는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말했다.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구원에 대한 멧세지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아무것이나 다 복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이라는 말을 흔히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장차의 이스라엘 땅으로 갔다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이다. 아무것이나 다 복음이 아닌 것이다. 복음은 직접적으로 구원에 대한 계획,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에 관한 것이다.

”증거하다”[헬라어로는 「디아말투로메노스」(diamarturomeno-s)]란 말은 복합동사로서 ”철저한, 완전한 증거”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증거한 복음은 항상 철저하고 완전한 것이었다. 그것은 절대로 가짜나 어떤 요소들을 빠뜨린 복음이 아니었다.

 

2. 복음의 균형

 

복음의 멧세지에서는 고려되어야 할 두 가지 면이 있다.

 

(1) 소극적인 면 - 회개

당신은 ”회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고 싶을 것이다. 이 말의 헬라어 「메타노이아」(metanoia)는 ”마음을 바꾸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신의 행동과 사고 방식을 180도로 바꿔 돌아선다는 뜻이다. 이것은 구원에 관한 인간 체험에 있어서 제일 첫째 국면이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 자체에 있어서 제일 첫째 국면은 아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인간(구원) 체험의 제일 첫번째 국면이다.

 

(1) 회개의 중요성

어떤 사람들은 죄에 대한 회개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와 같은 주장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다음의 성경 몇 구절이 회개의 중요성을 보여 주고 있다.

 

● 누가복음 24장 47상반절

”그(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

만일 회개가 중요하지 않았으면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만일 회개가 구원에 있어 죄사함(용서)처럼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주님께서는 같은 본문에 회개를 포함시키지 않으셨을 것이다.

 

● 사도행전 17장 30하반절

”하나님이 ...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당신은 당신의 죄로부터 돌아서기 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은 당신의 마음이 죄 가운데서 사는 생활로부터 하나님을 위해 사는 생활로 바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죄로부터의 회개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구원이 과연 참된 것인지 나는 의심스럽다. 구원의 확실성은 그들이 정말 그들의 마음으로 회개했는가 하는 것이다.

 

● 누가복음 13장 3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베드로후서 3장 9절

”주(主)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2) 회개의 요소들

회개는 죄인이 그의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의식적인 행동이다. 회개에는 세 가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지적, 정서적, 의지적 요소이다.

 

● 지적 요소

회개는 지각(知覺)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의 배경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를 죽인 후의 일이다(23절). 그들은 예수가 사기꾼이며 메시야가 아니라고 판결을 내렸다. 사도행전 2장 22-35절에서 베드로는 예수에 대하여 그들의 생각을 바꾸라고 호소했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이루어진 예언들과 사실들을 말함으로써 그들의 지각(知覺)에 호소하였다. 그는 이것을 36절에서 요약하였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달리 말해서, ”모든 사실이 그러할진대 그는 메시야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당신은 사실들을 깨닫기 전에는 회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의 지적(知的)인 접근은 ”예수에 대한 당신의 평가를 바꾸시오 당신은 그분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여기 이 사실들은 그분이 메시야인 것을 말하고 있소”라고 말하는 것이다. 회개는 당신이 복음 앞에서 자신을 직시하고 ”나는 그리스도가 그분 자신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그러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 정서적 요소

회개에는 정서적인 반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2장 37절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야를 자기들이 못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마음에 정말 아픔을 느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 그들을 아프게 했다. 나는 모든 참된 회개는 마음에 정서적인 반응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였다고 하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게 되면 그 곳에는 엄청난 정서적 자각이 수반된다.

 

● 의지적 요소

이것이 열쇠이다. 지적인 요소와 정서적인 요소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회개에는 의지가 따라야 한다. 탕자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동안 돼지 분뇨가 섞인 흙탕물 가운데 있었다. 그는,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 하리라”(눅 15:18-19)고 말했다. 이 때가 그가 돼지 치는 곳에서 벗어나 그의 아버지의 축복 가운데 들어간 때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의지로써 결정을 해야 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할 수 있고, 또한 자기 아버지는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를 떠나 아버지에게로 가야 했다.

 

회개에는 자신이 잘못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정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서 당신의 잘못된 위치 때문에 마음이 상한다. 그리고, 의지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 위치에서 돌이켜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회개는 후회가 아니다

 

 

당신은 회개와 후회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감정적인 반응(슬퍼하는 것)과 혼동하기 때문에 구원의 교리에서 회개를 빼버리려고 한다고 생각된다. 감정적인 반응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후회는 죄의 결과를 슬퍼하는 것이고, 회개는 그 결과를 초래한 죄를 정죄하는 것이다. 후회는 ”내가 걸려 들어서 유감이다”하는 태도이고, 회개는 ”내가 그것을 해서 유감이다”는 태도이다.

흠정역의 마태복음 27장 3절에서 유다가 ”회개했다”(repented)고 말하고 있다(개역한글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뉘우치다”로 표기됨-역자 주). 그러나 이 단어는 헬라어에시 회개를 의미하는 「메타노에오」가 아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후회를 뜻하는 단어이다. 많은 사람들이 후회는 많이 하지만 회개는 하지 않는다.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자신에 대하여 생각을 바꾸고 그리스도께로 돌이키지 않았으며, 죄에서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그는 그의 생애가 낭패케 된 것에 대해 후회했다. 후회는 절대로 그를 구원할 수 없다.

욥은 회개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는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섰다.

 

바울은 참된 회개를 전파했다. 사람이 회심의 단계에 이르고, 하나님께 나아와 구원받으며,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하는 삶을 살았음을 지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지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바른 복음의 내용을 전해야 되는 이유이다. 이렇게 할 때 성령께서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을 깨우치고 감정을 움직이실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 의하면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의(義)에 대하여, 심판에 대의여 책망하심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이 뜻을 정하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소극적인 면은 회개이다.

 

2) 적극적인 면 - 믿음

당신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당신은 당신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게 된다.

 

 

(1) 믿음의 중요성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무엇을 뜻합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이것은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운데 살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메시야시며, 구세주이십니다. 그뿐은 내 삶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나는 뜻을 정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 돌아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할 때 바로 당신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때이다. 이것은 복음이 진리이며, 내 삶을 그것으로 채우겠다고하는 적극적인 신념을 표명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데, 그분과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2) 믿음의 요소들

이것 또한 지적, 정서적, 의지적 행동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사도행전 2장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들었고, 내부에서 정서적으로 그것을 느껴 마음이 찔렸으며,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38절)고 말했다. 그들 중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세례(침례)를 받았다.

 

3. 복음의 담대성

 

바울은 구원을 전하기 작심(作心)했다. 그는 자신을 포고자(herald)로 이해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서 그는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사용한 ”전한다”라는 말은 헬리어로 「케루소」(kerusso)로서 ”포고자”(to herald)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고어(古語)이다. 당시에 그들은 신문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포고해야 할 때에 해당 지역 포고자들을 채용했다. 그는 길 모퉁이 같은 데 서서 ”여러분, 들으시오 여러분, 들으시오”라고 외쳤는데, 헬라어로는 아마 「아쿠에, 아쿠에」(akoue, akoue)라고 외쳤을것이다. 일반적으로 이같은 포고로 그 도시의 새로운 법령, 그 도시에 고관(高官)이 도착한 것, 또는 어떤 특별한 사건들을 알렸다.

그리스도인 전도자들도 이와 같은 방법을 따랐다. 그들은 도시에 도착해 그 도시 길모퉁이 같은 데서 ”여러분, 들으시오. 여러분, 들으시오, 예수가 바로 메시야입니다”라고 외쳤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전한 머릿기사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했다. 그는 도시들로 돌아다니며 목숨을 걸어 놓고 예수를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들에 대한 그의 사역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있어 청지기로서의 바울의 임무는 가족을 먹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고자로서의 그의 임무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사역이기도 하다. 좋은 목사와 좋은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맡겨진 무리들에 대한 가르침과 불신자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일을 균형있게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며 사람들에게 믿도록 청하였다.

 

4. 복음의 간청

 

1) 화목에 대한 호소

하나님의 주권하에 그분의 모든 뜻이 정해졌으며 서명되었고 인봉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면 당신은 ”나는 사람들을 권고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자는 그 안에 있는 자이고 밖에 있는 자는 밖에 있는 자이다. 하나님이 알아서 처분하시도록 나는 맡기겠다”고 말할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견해를 취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5장 20하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사람들에게 간청하고 빌었다. 그는 계속해서 간청하며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도록 노력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울기까지 하셨다. 선포(포고) 없는 호소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며 호소 없는 선포(포고)를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선포할 때 그에 대한 간청도 해야 할 것이다.

 

2) 화목의 사신(使臣)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1656년에 「개혁주의 목회자」(The Reformed Pastor:생명의 말씀사에서 「참 목자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됨-역자 주)를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또한 차갑게 가르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나는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사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가서 주님 앞에 회개하라고 간청하지 못하며 지켜보고만 있는가? 그들이 어떤 자세로 그것을 받든지, 그리고 그 문제가 어떠한 것이든, 그 아픔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 내가 강대상에서 실수하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양심은 나에게 더 이상 심각성과 열렬함이 없다고 나를 책망한다. 인간의 어떤 꾸밈이나 우아함의 결여가 거친 말 때문에 나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은 나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명과 죽음을 그와 같은 마음으로 말할 수 있는가? 죄인들에 대하여 당신은 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은 크게 울어 그들의 범죄들을 지적하며 생명과 죽음을 인하여 간청하고 애원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애원하는 열정적인 마음을 가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린도후서 5장 18-20절에서 바울은 우리를 가리켜 사신들(ambassadors)라고 말한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부르도록 하기 위하여 화목의 사역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애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의 하나님께 대한 사역관은 섬기는 것이었고, 교회에 대하여는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불신자들에 대하여는 전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한 사역관은 희생이었다.

 

 

자신에 대하여 - 희생(22-24절)

 

 

바울은 자신에 대한 사역을 자신에 대한 희생과 자신의 뜻에 대한 희생으로 보았다. 그가 살아가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역하기 위한 것이었다.

 

1. 바울의 사역에 대한 압박감(22상반절).

 

”보라 이제 나는 영(spirit : 개역 한글성경에는 「심령」으로 번역됨-역자 주)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

”매임”이라는 말은 쇠사슬이나 밧줄 또는 족쇄를 의미하는 아주 강한 말이다. 그는 아주 강한 압박감 가운데 있었다. 로마서 7장 2절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중대한 의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완전히 이 일을 이루는 데 매여 있었다. 그는 ”영(靈)에 매인바”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성령”에 매인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인간의 영(심령)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속 심령이 예루살렘에 가도록 강요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는 모금한 구제금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나눠 주어야 했으며 그것이 교회가 하나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중요했다.

 

2. 바울의 사역에 대한 핍박(22하반절-23절)

”...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城)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그는 확실한 것은 잘 몰랐다. 다만 그가 안 것은 자신이 다시 환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마서 15장 30-31절에서 그는 로마교인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데 무엇이 기다리는지알지 못하므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간 안 것은 성령이 계속 그에게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1) 그의 죽음에 대한 준비

사도행전 21장 10절에 바울은 두로에서부터 오다가 아가보라고 하는 한 선지자를 만났다. 그는 바울의 허리 띠를 가지고 자신을 묶으면서 바울에게 말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예루살렘을 도착하면 어떠한 일을 당할 것인가를 성령이 말씀해 주신 것이었다(11절).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主)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는 자신의 생명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았다.

 

2) 그의 사는 목적

바울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살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일을 마치는 것이었다. 그는 그저 그것을 마치고 떠나고 싶었다. 그가 사명을 완수한 것같이 당신도 완수했다면 당신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우선 순위에 있어 맨 마지막 것이 자기 보신(保身)이었다. 우리들의 우선 순위 목록에는 자기 보신(保身)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첫째 자리인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한 사람이 와서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 18:21)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직 죽지도 않았었다. 그는 그저 자기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기에게 돌아오는 재산을 차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보신(保身)은 바울에게 있어서 맨 마지막 순위였다. 그는 ”내가 묶이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마시오. 만일 주님의 뜻이라면 나는 죽기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확신을 겸비한 태도이다. 그의 관심은 오직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3. 바울의 사역의 우선 순위(24절)

 

”나의 달려갈 길과 주(主)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

당신은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염려하지 않는다. 나는 내 생명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살았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마치는 것이었다. 그가 그 사명을 마쳤을 때 그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딤후4:6). 바울의 사역관에 있어서 그 자신에 대한 태도는 희생이었다.

 

1) 희생의 부재

희생이라는 말이 당신의 가슴에 와닿는가? 당신이 가장 최근에 희생적으로 드린 위로와 금전과 시간은 언제인가? 오늘날의 기독교는 희생의 활동들이 없기 때문에 한가하고 나른한 시간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는 최고로 한가한 휴식기(休息期)에 들어와 있다. 우리 모두는 초특급의 유명한 설교자들의 그늘 아래 안주하여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의 속사정인 것이다. 당신의 신앙이 이런 상태이면 큰 문제이다.

 

2) 희생의 자세

바울은 그의 생(生)을 하나의 제물로 보았다. 그는 오직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을 마치기 위해서 살았다.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은 오직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과업과 사역을 마치는 것이었다. 만일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사명을 주셨고 그분이 당신의 삶을 주장하심을 믿는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당신의 생명을 그분께 맡기고자 할 것이다.

 

3) 희생의 진실성

 

(1) 성실한 삶

빌립보서 2장 25-30절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30절에서 그를 받아들여야 할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그는 자신의 생명에 연연하지 않는 가운데 주님을 섬겼다. ”돌아보지 않다”의 헬라어는 「파라볼류오마이」(paraboleuomai)인데, ”주사위를 던지다, 생명을 걸고 내기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심한 병에 걸렸는데도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주장하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간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계속해서 그의 일을 함으로 하나의 도박을 했다.

 

(2) 이기적인 삶

당신은 ”너무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잘 먹고 잘도 충분히 자고 운동도 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과잉보호를 하고 있다. 나는 아직까지 주님을 섬기느라 너무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수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당신은 당신의 사역을 마치기 위하여 모든 것에 위험을 무릅쓰고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담대히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열정이었다. 그는 ”나는 그들이 내게 행한 행동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의 이 가르치는 일을 마치려 할 뿐이다. 일을 마치면 나는 주님께로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울은 그의 사역을 정당한 관점에서 보았다. 주님께는 섬기는 것으로, 교회에는 가르치는 것으로, 불신자들에게는 전도하는 것으로,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는 희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확인 질문

 

 

1. 성경에서 지도력을 한 마디로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2. 예수께서 어떤 모범으로써 가르치셨는지 한 가지 예(例)를 들어보라.

 

3. 바울은 어떤 연고로 그의 사역에 있어서 그렇게 성공하였는가?

 

4. 그리스도인들이 종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 자세는 무엇인가?

 

5.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6. 바울 당시대에 있어서 청지기의 임무는 무엇인가?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 한 가지는 무엇인가?

 

7.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청지기직은 무엇인가?

 

8. 진리의 새 가지 가능한 근원은 무엇인가? 하나 하나를 설명하라. 왜 그 중에 하나만이 참된 진리의 근원이 되는가?

 

9.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10. 복음의 소극적인 면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11. 구원에 있어 왜 회개가 중요한가?

 

 

12. 사람의 삶에 있어 회개가 포함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는 무엇인가? 왜 그 요소들이 중요한가?

 

13. 회개와 후회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 두 가지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14. 복음의 적극적인 면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15. 어떤 면에서 바울은 복음의 포고자였는가? 이것이 어떻게 그의 사역에 부합되는가?

 

16. 왜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애원해야 하는가? 리차드 백스터 목사는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느꼈는가?

 

17.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환경(생명의 위협이 따르는 환경)에 대한 바울의 자세는 어떠했는가?

 

18. 바울의 우선 순위에서 맨 끝은 무엇이었는가?

 

19. 바울이 살아가는 한 가지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20. 에바브로디도는 희생의 지선을 어떻게 나타내 보였는가?

 

정리

 

 

1.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사와 사역에 있어서 청지기이다. 그 청지기직에 대한 당신의 의무는 무엇인가? 당신은 당신의 청지기직을 어떻게 발휘하고 있는가? 당신은 이것을 충성되이 감당했는가? 아니면 불충하게 감당했는가? 불충하게 했다면 왜 그랬는가? 어떤 면에서 개선이 필요한가? 가장 크게 개선이 필요한 것을 하나 하나 꼽아 보라. 그렇다면 다시 당신이 개선할 수 있는 것들을 적어 보라.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길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그 개선의 계획들을 끝까지 다 이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의지하라.

 

2. 당신은 불신자들에 대하여 마음에 무거운 부담을 갖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는가? 고린도후서 5장 11-21절을 읽어 보라. 왜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애원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몇 가지 들어 보라. 우리의 삶에 대하여 우리는 누구 앞에 그 책임을 져야 하는가? 왜 그러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임무는 무엇인가? 이 일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당신은 어디에서 대사(大使)들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사신)들에 대하여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당신의 임무는 무엇인가?

 

3. 당신이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취하라. 바울의 목적과 비교할 때 어떠한가? 당신의 삶에 대해 우선순위를 정해 보라. 그 순위에서 당신 자신의 보신(保身)에 대한 평가는 어느 곳에 와 있는가? 그 순위에서 당신의 보신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그것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당신 삶의 우선 순위에서 1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의 삶에서 1순위는 무엇인가? 당신의 우선 순위에서 자지 보신을 맨 끝으로 끌어내리는 데 사도 바울의 우선 순위가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 사도행전 20:25-28 ●

 

6. 신약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권면(1)

 

 

서론

 

사도행전 20장 25-38절에서 우리는 교회 내에서의 지도력(lead-ership)에 대한 우선 순위를 보게 된다. 오늘날 지도력은 아주 중요한 상품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오고 가는 경비와 식사대가 포함되지 않고 오직 훈련비만 15만원을 받는 3일 과정의 지도자 세미나가 있다. 상업적인 기업이나 조직이나 협회나 어떤 사업의 운영이 되었든지, 그 곳에 좋은 지도자를 얻는 데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지도력에 대한 중요성이 오늘날 굉장히 강조되고 있다. 미숙한 지도력은 그 단체를 파괴시키지만 좋은 지도력은 그것을 일으켜 세운다.

 

1. 지도력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

 

하나님께서는 이 지도력을 대단히 중시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천사들도 조직화되어 있다. 천사들 가운데는 정사와 권세와 주관자들이 있다(엡6:10). 그리고 천사장이 있다(살전 4:16). 하나님은 모든 것에 권위와 복종, 곧 상하(上下)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신다.

 

1) 구약에서

구약에 있는 많은 것들이 지도력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구약에는 모세, 사무엘, 다윗 등 위대한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주요 지도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나라의 일을 하셨다. 지도력이 이와 같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부적합하거나 무능한 지도력에 대하여 강력한 자세를 취하셨다.

 

(1) 호세아서 4장 9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죄를 말씀하셨다. 그분은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고 말씀하셨다. 달리 말하면 ”지도자들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2) 이사야서 9장 14-16절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거룩한 길로 인도치 못하고 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지도자들을 징벌하시려는 것이었다.

 

(3) 예레미야서 5장 31상반절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사람들은 그들의 온당치 못한 지도를 좋아했다.

 

 

(4) 에스겔서 22장 26-29상반절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聖物)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별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그 가운데서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不義)의 이(利)를 취하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였거늘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異象)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主)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였으며 이 땅 백성은 강포하며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

하나님께서는 지도하는 데 실패한 제사장들과 방백들과 선지자들을 고발하고 있다.

 

2) 신약에서

마태복음 15장 14절에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셨다.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지도력을 장려하셨다. 또한 그분은 적절한 지도력에 대한 최고의 표준을 정하셨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표준이라면 또한 이것은 사도 바울의 표준이었다.

 

2. 지도력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그의 세번째 전도 여행을 마무리짓고 있다. 그가 탄 배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 밀레도에 머물렀다.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한 연보를 전해 주기 위하여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노력했다. 배가 잠시 정박한 틈을 타 그는 사람들을 약 50 km정도 떨어져 있는 에베소로 보내 장로들을 청하였다. 그가 바란 것은 그들에게 그의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것이었다.

 

1) 책임에 대한 묘사

 

(1) 성경적인 지도(指導)의 우선 순위

바울은 3년 동안이나 에베소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가 여기에서 이 사람들에게 말한 것을 이미 전에도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합당한 지도력의 필요성에 대하여 마음 가운데 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잠시 그 곳에 머무는 터에 그들을 불러 ”지도력 행사에 따르는 우선 순위에 대하여 다시한 번 여러분들에게 말해야만 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도행전 20장 17-3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과 사역에 있어서의 지도력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다.

 

지도력의 양면(兩面)

 

 

성경에서 지도력은 양면이 있고, 그 결과도 역시 양면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책임이 중대한 만큼 큰 기쁨이 있는 일이며, 또한 책임이 중대한 만큼 큰 심판을 받아야 할 일이다. 훌륭한 지도자들은 갑절로 축복을 받지만 무능한 지도자들은 갑절로 형벌도 받아야 하는데, 이는 많이 받은 자들에게 많이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눅 12:48). 야고보서 3장 1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5장 17절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좋은 지도자들은 배나 존경을 받지만 무능한 지도자들은 배나 중한 심판을 받는다. 지도하는 일은 아주 중대한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 장로들을 세움.

사도들이나 전도자들의 직무는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는 일이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훈련을 받고 양육을 받아 성숙하여 바울에 의해 장로로 지명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령에 의하여 세운 바 되었다. 디도서 1장 5절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각 성(城)에 장로들을 세우게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각 성(城)에 있는 목사들은 전도자들이나 사도들에 의하여 안수를 받았다.

 

● 모범을 따름

바울이 직접 훈련시킨 이 사람들에게 권면한 것은 사도행전 20장에서 나타난 모습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바울이 말한 것은 교회에서의 지도력에 대한 기본 원리들이기 때문에 영구한 것이다. 만일 교회가 신약의 교회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마땅히 성경적인 모범들을 따라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가 그 지도급의 수준에서 성경적인 모범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평신도들의 수준에서도 따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개혁, 곧 진정한 신약의 회복과 교회에서의 진정한 부흥은 지도급의 수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바울이 한 이 말들은 역사 속에서 단순히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한 인간적인 말이 아니라 성령께로부터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신 말씀이다. 이 말들은 바울이 그 당시에 에베소 장로들에게 주었을 때 그들에게 유익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익하다. 이 말들은 항상 우리들에게 교회안에서 목사와 장로의 임무에 대한 개념을 말해 주고 있다.

 

 

● 성도들을 온전케 함

하나님 나라의 다른 모든 차원에서처럼,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의 현시(現示)는 인간의 지도력에 의존한다. 에베소서 4장 11-1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가 세움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12-14상반절).

그분은 교회가 사랑없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15상반절).

이러한 일이 교회 안에서 발생하려면 먼저 ”그(그리스도)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11절)가 먼저 와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교회의 생산력이라 열매들을 포함한 교회의 삶은 직접적으로 교회 지도자의 지도력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는 ”...충성된 사람들...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지도력은 교회에서 가장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며, 이것은 또한 중대한 책임에 따르는 일이다.

 

(2) 성경적인 지도력의 관점

지도력이 이와 같이 중요한 이상 우리는 신약 교회의 지도력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20장은 무리들에게 이에 대한 아주 좋은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다.

 

 

● 지도력이 아닌 경우

- 정치적인 권세 행사 : 20상반절은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라고 말하고 있다. 세베대의 어머니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시시한 사람이 아니라 수위급에 속하는 제자들이었다. 그녀는 ”...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윈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主)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主)의 우편에, 하나는 주(主)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1절)라고 했다.

이것이 제자들 가운데 서로 말다툼을 일으켰다. 그 말다툼의 주요 내용은 그 나라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들 때 했던 말다툼이었다(눅 22:24). 누가 크냐 서로 싸우기에 바빠서 그들은 아무도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지 않았다(요 13:4-5).

마태복음 20장 22절에 이야기는 계속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떠한 길을 가셔야 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23절에 계속해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하고 원하지 않은 것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24절은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들보다 앞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그 문제를 말한 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화가 났다. 신약성경에서의 지도력은 정치적인 권력 행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 당신은 합법적인지도자가 된다. 두번째로, 성경적인 지도력은 집단적인 독재정치가 아니다.

- 집단적인 독재 정치 : 25-2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교회 안에서의 지도력은 집단적인 독재 정치가 아니다.

- 일인(一人)의 카리스마적 통제 : 27절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으뜸”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참으로 놀라운 인물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당신도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종(노예)이 되라.

신약의 지도력은 정치적인 권세 행사가 아니며 집단적인 독재 정치도 아니고, 일인(一人)의 카리스마적 통제도 아니다.

 

● 지도력은 섬기는 것이다.

28절이 지도력에 대한 기본 원리를 규정하고 있다.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세상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종이었으며 그는 우리들에게 지도력에 있어 아주 중대한 원칙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본(本)이 되는 것이었다.

 

진정한 지도력에 대한 열쇠는 본(本)이 되는 삶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을 교인들이 본받아 할 때 나는 진정한 지도자, 장로, 목사가 될 수 있다. 교인들이 나를 따라오지 않을 때 나는 지도자라는 직위는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더 이상 지도자는 아니다. 교인들은 나의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보고 이 두 가지가 일치되는 것을 볼 때에라야 나를 따라올 것이다. 바울은 그의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도자들을 양육할 수 있었다.

 

2) 책임의 이행

 

(1) 책임의 차원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순위에 따라 사역할 것을 권면함으로써 그 자신의 교훈을 끝맺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또한 친히 그대로 살아 왔던 우선 순위들을 제시했다. 17-24절에서 그는 사역의 네 가지 차원을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교회에 대하여는 가르치는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하여는 전도로,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는 희생으로 이해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것을 말한 다음에 그들에게 교회를 능력 있게 가르치는 가르침의 보다 중요함을 깨우쳐 주기를 원했다.

 

(2) 책임의 증시(證示)

그는 이러한 우선 순위들을 말하기 전에 25-27절에서 먼저 그 차원들을 요약하였다.

 

● 바울의 사역의 종국

25절에서 그는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너희에게 사역의 차원의 모든 요소들을 말해 주었다. 이제 너희는 너희의 임무가 하나님께 대하여는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 교회에 대하여는 가르치는 것으로서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꺼리지 않아야 하며, 불신자들에 대하여는 전도해야 하고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회개와 믿음을 전해야 하며, 너희 자신들에 대하여는 자신의 삶에 대한 것들은 계산하지 않고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내 삶으로 보여 준 것들이다. 이제 나는 떠나간다.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든 것들을 가르쳤다”라고 말했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역사(役事)와 통치를 의미한다.

 

● 바울의 사역의 성취

26절에서 그는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라고 말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이라고 한 것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말한다. 그는 믿는 사람들에게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 어느 계층의 사람들이든지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 하였다. 우리는 그를 불충했다는 것으로 비난할 수 없다. 왜 그를 책망할 수 없는가? 27절에서 그는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나는 내 임무를 다하고 이루었으며 성취했다”라고 말하였다.

 

(3) 책임의 의미

바울은 26하반절에서 아주 흥미로운 말을 하였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당신은 ”지도자나 교사 또는 목사가 어떤 사람들의 피에 대하여 죄를 짓게 되는 일이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분명히 있다.

 

● 위험성

에스겔서 33장 8절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명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자신이 준 멧세지를 충성되게 잘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씀하셨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며...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에스겔이 지옥이 가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에 대한 불충으로 인하여 징계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바로 에스겔서 33장 8절의 책무를 완수했다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것이다.

 

● 분기점(分岐點)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일들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그 일들에 대하여 불충할 때 그 불충으로 인하여 징계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의 삶이 왜 그렇게 잘못되어만 가는지 의아해 하는 목사들이 있을 줄로 안다. 그들은 좀더 자세하게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겨 주신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일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멸망당한 자들의 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착임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한 말의 의미이다.

 

● 책임을 벗음

바울은 ”나는 내 사역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그것을 이루었으며 하나님의 권고를 전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나를 대적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며 내게 이제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당신은 ”그가 교만해서 그런 게 아닌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이제부터는 너희(에베소 교회 장로들)의 책임이다. 내가 너희에게 본(本)을 보인 것처럼 너희의 임무를 충성되게 행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중대한 책임들을 지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목적과 원칙이 교인들에게 전달되기 위하여 지도자들에게 맡겨졌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에게 맡기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바울은 지도력의 중요성에 대하여 아주 분명한 교훈을 하고 있다. 이것은 배나 축복이 될 수 있고, 만일 실패하면 배나 중한 징계를 받게 된다. 이 전반적인 사역에 대한 숙고를 통해서 바울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중요성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장로들, 감독들, 목사들

 

 

사도행전 20장 17절에 ”장로들”이란 말을 헬라어로 「프레스뷰테로이」(presbuteroi) 또는 「프레스뷰테로스」(presbuteros)로서 ”장로 또는 장로교인”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28절에 있는 ”감독자”(overseers)란 말은 헬라어로 「에피스코포이」[(episkopoi로서, 다른 곳(빌1:1/딤전 3:2)]에서는 ”감독”(bishop)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먹이다”(to feed)라는 말은 [헬라어상으로 「포이마이노」(poimaino)] 장로들, 감독들, 그리고 목사들이라고 성경에 언급되지만 모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교회 안에서 장로나 목사나 감독 사이에 서로 다른 차이점이 전혀 없다. 많은 교회가 교회 안에 두고 있는 성직(聖職) 서열은 성경적인 방식이 아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교회를 치리해 나감에 있어 지도력에 대한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함(28상반절)

 

 

”너희는 자기를 ... 삼가라 ...”

최우선 순위는 당신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기 전에는 결코 사역하거나, 사역에 포함된 어떤 일을 견뎌 내거나, 사역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1. 개인적인 성결의 중요성

 

1) 누가복음 21장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주님은 ”주(主)의 날이 임하는데 그 임하는 날에 너희가 깨어 있을수 있도록 너희 자신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 디모데전서 4장 16상반절

”네 자신을 삼가라...”

사역에 있어 우선 순위는 자신을 삼가는 것인데, 이는 곧 자신의 인격을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네 가르침을 삼가라”고 말했는데, 이때의 가르침은 신조(信條)를 말한다. 그리고 ”...의 일을 계속하라”고 했는데, 이는 행위를 말한다. 당신의 인격과 신조와 행위를 삼가도록 하라. 당신의 사역에 있어 당신 자신이 열쇠이다.

 

 

3) 디모데후서 2장 20-22상반절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달리 말하면, 큰 집에 두 벌의 도자기가 있어 한 벌은 귀한 것으로서 진열장에 장식용으로 진열되어 있고, 다른 한 벌은 매일 식사 시간에 식기로 사용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분명하게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금에 있는 그릇들 중에서 어떤 그릇들은 하나님이 귀중히 여겨 중요한 일들을 위하여 쓰실 것이라는 뜻이다. 21절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릇들 중에는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있고 사용하실 수 없는 것이 있다. 거룩하지 못한 사역자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당신이 목사, 장로, 지도자, 또는 사역자라는 직위는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이 사역하는 곳에는 축복이나 지도력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일하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은 존귀하고 거룩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22절은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 의(義)를 좇으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도구를 사용하신다. 맥체인은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무서운 도구”라고 말했다.

 

4) 고린도전서 9장 25하반절-27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달리 말해서 바울은 자신의 삶에서 성결이 없어질 때 그의 영향력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을 알았다. 내가 거룩하게 살 때, 즉 거룩한 삶으로 내 자신을 성령께 드릴 때라야만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

 

당신은 교계(敎界)에서 크게 활동하는 사역자들이 어떻게 그리 크고 심각한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까 하고 의문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는 사역자로서 자격이 없다. 그는 거룩하지 못하고, 무용하며, 수치스러운 그릇이 된다. 칭의(稱義)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구원은 안전하다 할지라도, 그는 교회에 대해서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나 가치를 잃고 무익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성결은 모든 사역에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것이다. 사역의 기본 요소는 인간의 특출한 재능이 아니며, 권세있고 힘있고 극적이고 역동적인 지도력도 아니다. 그리고 또한 요령있는 정치 감각도 아니다. 다만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召命)과 그 자신에 대한 성결이다.

 

2. 개인적인 성결에 대한 예증(例證)

 

1) 장로의 자격

디모데전서 3장 1절은 ”미쁘다 이 말이며 사람이 감독(목사, 장로,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그 다음에 그 자격들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절도가 있으며, 지나치지 않고) 근신하며 아담하며(영적인 면에서 규모 있는 삶)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 또한 외인(外人)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2-5절, 7상반절).

당신은 이 자격들 중에서 영적인 자격이 아닌 것을 찾아 볼 수 있는가?

바울은 디도서 1장 6-9절에서 또다른 자격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7상반절에서 바울은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고 ...”라고 말했다. 교회가 그를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문제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목사님, 목사님은 과거에 범죄한 적이 있는 사람도 계속해서 장로나 목사로 교회에서 일할 수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나는 한 아내의 남편이냐 아니냐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결백성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삶에 큰 얼룩이 있다면, 이 다음에 그가 바로 그런 부문에 관하여 성도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려 할 때 정면으로 거부당할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가 책망할 것이 없으며, 결백하며, 계속해서 거룩한 증거와 본(本)이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않거나 지도자로서 다시 그 사람을 회복시키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어떠한 일에도 책망받을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지도자로서 어떤 결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결점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게될 때 그의 권위가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책망할 것이 없음”은 성결의 중요한 자질이다.

 

2) 다윗의 마음

(이것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논의되었다)

 

 

3) 맥체인

(이것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논의되었다)

 

바울은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本)이 되라”고 말했다(딤전 4:12).

이 모든 영적인 분야에서 본(本)이 되라. 신약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두번째 우선 순위는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하는 것이다.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해야 함(28절)

 

 

먼저 당신 자신의 영적 문제를 돌아본 다음에 양들의 문제를 보살펴야 한다. 양들을 돌보는 일을 자기의 삶의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사역자들이 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는 교회를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지만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옳은 말이다. 사실, 그가 교회를 위해 바쁠 때 그는 그보다 먼저 와야 할,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실패하게 된다.

목사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나의 가장 큰 의무는 내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하는 일이다. 내가 만일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다면 나는 교인들 앞에서도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기독교의 사역에서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지도자 자신들의 삶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0장 28상반절은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말한다. 지도층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일학교 교사이든 성경공부 교사이든, 우선 순위가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둘째가 일터인 것이다.

 

 

1. 교인들(28중반절)

 

”... 온 양떼를 위하여...”

 

1) 양 무리에 대한 인식

양 무리에 대해서는 편애가 있을 수 없다. 교회가 양 무리로 비유된 사실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양같이 힘없고 무지한 무리들이다. 이 말은 역사적인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주님의 양 무리로 부르셨다(렘 13:17/슥 10:3). 누가복음 12장 32절에서 예수께서는 일단의 제자들을 적은 무리의 양떼로 부르고 있다. 우리는 양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다. 요한복음 10장 11, 14절에서 예수님이 ”선한 목자”로, 히브리서 13장 20절에서는 ”큰 목자”로 지칭되었다.

 

2) 양 무리를 나눔

교회는 큰 목자와 한 무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지역에 따라 소그룹으로 나누셨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장 2절에서 말한 내용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너희 중”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엔 휴민」(en humin)으로 지역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전체 양 무리들을 적은 무리들로 나누어 거기에 목자들을 세워서 그 나누어진 무리들을 돌보도록 하셨다. 목사들은 솔직히 말해 큰 목자(그리스도) 밑에서 일하는 보조 목자들이다.

 

2. 준비(28중반절)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성령께서 양 무리를 나누신다. 근본적으로 베드로전서 5장 3절은”맡기운(너희에게 할당된)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라고 말하고 있다. ”맡기운”이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할당된 몫, 또는 배분된 부분”이다. 지역 교회 목사는 배분된 양 무리의 목자들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양 무리를 돌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조 목자들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복된 일이다.

 

3. 우선 과제(28하반절)

”...양 무리를 치게...”

보조 목자들에게 두 가지 임무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인도하고 먹이는 일이다. 여기에 사용된 ”치다”라는 말에 해당되는 일반적인 헬라어는 「포이마이노」로서 ”목자의 모든 일을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먹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목사가 돌보고, 훈련하고, 상처를 싸매고, 통제하고 옳은 길로 인도하고... 어느 것이든 목자가 하는 일은 이 「포이마이노」라는 말에 포함될 수 있다.

 

1) 먹임

목자의 주요 임무는 먹이는 것인데, 목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양들이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양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21장은 목회자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먹이는 일이라는 것을 하나의 좋은 예(例)로 보여 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사역을 확인시켜 주고 계시는데, 세 번이나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세 번이나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을 사랑한다[헬라어로는 「필레오」(philea)]고 대답했고,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15-17절). 두번째는 주님이 ”치라”(「포이마이노」)고 말씀하셨고 첫번째와 세번째는 「보스코」(bosko)라는 말을 사용하셨는데, 이는 간단히 말해서 ”치다”(to feed)는 말이다. 세 번 중에서 두 번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면 하나님의 양 무리를 먹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많은 경우에 「포이마이노」가 ”먹이다”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그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2) 인도함

 

(1) 방향을 정함

인도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의미로 생각하는가? 그것은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을 받는다(딤전 5:17). 다스린다는 것은 교회의 방향을 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양은 어느 목양지로 가야 할지 또는 어디에 양 우리를 지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다. 양은 그저 목자를 따라 갈 뿐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지도력을 권위하는 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의 손에 맡기셨다. 양들은 목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2) 다스리는 자들에 대하여

지도자는 양들을 명령이나 권세나 군림하는 것으로가 아니라 본(本)이 되는 것으로 인도해야 한다.

 

● 히브리서 13장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17상반절).

우리 교회(저자가 시무하는 교회)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도들이 장로들에게 순종하는 태도이다. 장로들이 무엇을 결정하면 성도들에게 이를 순종하는 훌륭한 자세가 있다. 우리 교회에서는 결정 사항에 대하여 싸우는 일이 없다. 이것은 경건한 태도이다.

17절은 계속해서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會計)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대부분의 교회들의 장로들이 이 말씀을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게 맡겨 준 양들을 어떻게 돌아보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회계(會計)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을 때 양을 돌보는 자세에 변질을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이 장로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는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말게...” 하기 위해서이다(17절).

어떤 사람들이 싸우고 대들며 순종하지 않을 때 이는 참 슬픈 일이다. 목자는 그가 사랑하고 먹이는 성도들로부터 받는 슬픔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사역에 있어 사단과의 싸움과 저항하는 자들 때문에 겪는 번민으로 인한 슬픔만 해도 충분하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했다.

 

● 베드로전서 5장 4절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어떻게 할 때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양들의 본(本)을 보임으로 잘 인도했을 때이다. 양들은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목자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만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면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3) 대가를 지불함

목자나 장로가 충성되지 못하면 그에 대한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5장 19절은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누가 누구에게 들었다는데, 누구 누구가 어떻게 했다더라”는 말을 듣는가? 두세 사람의 분명한 증인이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을 자들에 대하여 송사하지 말라. 20절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도자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지도자는 그의 성결이든 죄이든 무엇을 하든지 공적(公的)이다. 만일 장로들이 범죄하면 그 죄의 처리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공개되어야 한다. 비록 큰대가가 따르는 일이지만 지도자가 그 일을 충성되게 감당했을 때는 큰 기쁨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딤전 5:17).

 

4. 소유(28하반절)

 

”...하나님(의) ... 교회...”

진실로 나를 자극하는 것은 이 교회가 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저 그분의 소유를 돌볼 뿐이다. 당신은 어떤 다른 사람의 소유를 돌아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그들이 당신에게 맡긴 것들에 신경이 쓰여서 그것들을 깨거나 잃어버리기 전에 주인이 왔으면...하고 바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는 이유 중의 하나인데, 내가 다 망쳐 놓기 전에 그분이 오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내 어린 양과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베드로의 양이 아니고 나의 양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양이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양을 돌보기를 원한다.

 

5. 피로 삼(28하반절)

 

”...자기 피로 사신...”

 

1) 목회의 본질

하나님의 양 무리는 아주 고귀해서 그분이 최고의 값을 지불하셨다. 만일 양 무리가 그렇게도 그분에게 고귀한 것이라면 내게도 그처럼 고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형태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친히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값을 지불하셨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다(벧전 1:19). 그분이 그렇게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산 교회를 내가 어떻게 조금이라도 경솔히 대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이 귀한 양 무리를 내게 맡기셨는데, 내가 어떻게 이를 교묘히 이용하고, 굶기며, 이 교회에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이 교회를 얻기 위해 얼마나 큰 값을 지불하셨는가를 생각할 때 감히 내가 어찌 내게 맡겨 주신 이 무리에게 불충할 수 있겠는가? 성도는 보배로운 값으로 산 보배로운 양 무리이다. 나는 양 무리의 그 고귀함처럼 고귀하게 양무리를 대할 것이다.

 

2) 목회의 모범

바울이 우리의 모범이다. 에베소서 5장 25-27절에서 그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분은 깨끗하고 거룩하며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이 없는 흠 없는 교회로 세우기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그분이 거룩한 교회를 원하실진대 나도 거룩한 교회를 원한다. 보조 목자는 마땅히 목자장과 동일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내 임무는 양들을 하나님의 진리로 먹이며 의(義)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력의 두 가지 기본 원칙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구주께 드릴 수 있도록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나머지 세 가지 원칙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확인 질문

 

 

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 안에서 어떻게 지도력을 세우셨는가?

 

2. 유능한 지도력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3. 지도력에 있어 그 양면(兩面)은 무엇인가?

 

4. 교회의 지도급의 수준에서 성경적인 모범을 따르는 것이 왜 중요한가? 교회의 어느 수준에 먼저 부흥이 와야 하는가?

 

5.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볼 때 교회가 세움을 입기 위해서는 교회에 무엇이 필요한가?

 

6. 성경적인 지도력이 아닌 세 가지는 무엇인지 설명해 보라. 성경적인 지도력은 무엇인가? 성경적인 지도력의 열쇠는 무엇인가?

 

7. 왜 아무도 바울을 불충했다고 책망할 수 없는가? 왜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했는가?

 

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임무를 이행하는 데 실패함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가?

 

9.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이 왜 당신의 사역의 기본적인 요소가 되는지 설명해 보고, 당신의 대답을 입증해 보라.

 

 

10. 거룩하지 못한 사역자의 사역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11. 장로의 자격 중에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함”이 왜 중요한 것인지 설명해 보라.

 

12. 양 무리를 돌보는 것보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에 더 착념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13.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를 돌보시는가?

 

14. 목회에 있어 그 중심이 되는 것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중심이 되는가?

 

15. 교회를 인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6. 양 무리가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에게 슬픔을 주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가?

 

17. 불충한 목사와 장로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무엇인가?

 

18. 왜 하나님의 양 무리가 그분에게 고귀한가? 지도자들이 양 무리를 돌보는 데는 그 사실이 어떻게 영향을 미쳐야 하는가?

 

정리

 

 

1. 에베소서 4장 11-16절을 읽으라. 교회에서 지도자의 임무는 무엇인가? 교회 내에서 모든 성도들의 책임은 무엇인가? 모든 성도들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이 또한 당신의 목표인가? 그렇다면 왜 그러하며,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점점 온전해져 가고 있는가? 당신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중인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당신에게 어떤 부분의 변화가 필요한가? 우리 모두가 다 지도자는 아니지만 우린 모두는 사역의 책임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책임이 있음을 기억하라.

 

2. 잠시 조용히 자진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라. 당신은 당신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가? 무엇 때문에 소홀히 하고 있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이 쉽게 당신을 판단할 수 있는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임무를 실행할 수 있는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언행(言行)이 불일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우선 순위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것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보다 먼저 온 것이 있는가? 당신의 삶에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필요한가? 당신은 당신의 매일의 삶 가운데 당하는 유혹들에 보다 잘 자신을 대비하기 위해서 더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의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가? 당신의 말하는 것에 일관성이 있는가? 이 모든 분야에 당신의 문제점들을 고치는 데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을 열고 정직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3. 당신을 지도하는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했는지 반성해 보라. 당신은 그들이 즐거움을 가지고 사역하게끔 했는가? 아니면 그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는가? 그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면 왜 그랬는가? 에베소서 5장 21절을 읽어 보라. 당신이 보기에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말씀은 당신의 어떤 자세를 요구하는가? 빌립보서 2장 1-8절을 읽고 묵상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 사도행전 20:29-38 ●

 

7. 신약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권면(2)

 

 

서론

 

 

사도행전 20장 17-38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목사들, 장로들, 감독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목사, 장로, 감독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도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이들은 교회에 있어 구약 시대의 하나님 백성들에게 제사장, 선지자, 왕이었던 사람들과 같다. 그렇다면 이제 특별히 교회에서 이 지도자들을 유능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1. 외적(外的)인 표준에 의한 지도력

 

세상은 지도력에 대한 표준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표준은 아니다. 예(例)를 들어, 이스라엘은 왕을 세우기 원했는데, 그들은 완전한 사람을 찾았다. 그 땅에 그보다 더 준수하고 그보다 더 키가 큰 자가 없었다. 키크고 건강미가 넘치는 잘 생긴 사울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당신은 ”지금도 사람들은 그와 같은 표준에 의하여 지도자들을 택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그러하다. 어느 정도의 정신적인 자질이 있고, 말 잘하고 사교성이 있으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 자격들이 거의 대부분 천부적인 것이나 내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라는 점이 참으로 슬픈 사실이다.

 

2. 본을 보이는 것을 통한 지도력

 

성경적인 지도자들의 유능한 인도는 어떤 훈시나, 말을 잘 하는 것을 통하여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이는 것을 통하여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축복하신 인도는 말을 잘 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본이 되는 삶을 통하여 인도하는 것이다. 예(例)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관련 성구(聖句)들

 

(1) 베드로전서 5장 3절

장로들은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2) 빌립보서 3장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는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보인 본을 따르라고 권하였다.

 

(3) 빌립보서 4장 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4)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리라”(5절).

 

 

달리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것과 그들의 인격에 어떠한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의 전하는 말씀을 그들의 삶으로 증명하였다. 6하반절은 ”우리와 주(主)를 본받은 자[헬라어로는 「미미타이」(mimital)]가 되었으니 ...”라고 말한다. 바울은 본이 되는 사람이었기에 위대한 지도자였다.

 

(5) 디모데전서 4장 12하반절

”...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 ....”

 

(6) 디도서 2장 7상반절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

”본”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그 길로 따라오고 모방할 수 있도록 당신이 그 삶의 윤곽을 잡아주는 것을 말한다.

 

2) 실천

 

(1) 경건의 모범

그리스도인의 지도력은 본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누군가가 그를 따라오는 사람이다. 진정으로 신령하고 경건한 지도자는 그의 경건함에 추종자들이 따르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이 내가 제시한 영적인 것들을 따라올 때라야만 나는 진정한 영적인 지도자인 것이다.

 

(2) 문제점

지도자로서의 임무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하루는 스누피(Snoopy : 미국 일간지 만화 주인공-역자 주)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비글(beagle:토끼 사냥에 쓰이는 작은 사냥개-역자 주)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지 않다. ”지도하는 데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기란 언제나 쉽지않다. 그 한 가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람들에 대한 아주 중대한 책임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3장 17절은 우리가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회계(會計)해야 한다고 말한다. 야고보서 3장 1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임무를 이행하는 데 실패하면 심판을 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지도자로서 임무를 잘 수행하면 실패했을 때 받는 징벌과 대조되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진정한 지도력은 자신의 삶을 따라오게 함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지도자는 본을 보임으로써 인도해야 한다. 히브리서 13장 7하반절은 장로들에 대하여 ”...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지도력은 ”본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이다.

 

복습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성경적인 지도력의 모범인 본이 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7-38절에서 그는 그들에게 지도력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는데, 그는 그 구절들에서 그들이 배운 교훈들과 원리들에 대한 그 모범이 어떠한 것인가를 주지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그 예(例)로 들었다. 교회 지도력에는 다섯 가지 원칙(우선 과제)이 있다. 영적 지도력이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함(28상반절)

 

 

”너희는 자기를 ... 삼가라...”

 

1. 개인적인 성결의 중요성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려면 먼저 당신이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딤후 2:21). 개인적인 성결은 기본적인 것이다.

 

2. 개인적인 성결에 대한 예증(例證)

 

1) 장로의 자격

디모데전서 3장 1-7절, 그리고 디도서 1장 6-9절에 의하면 장로의 자격은 모두 영적인 자격들이다. 거룩하고 하나님을 위해 성별되지 않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어질 수 없다.

 

2) 다윗의 마음

구약에서 다윗의 삶이 이에 대한 한 좋은 예(例)가 되고 있다.

 

(1) 그의 죄

 

● 간통

사무엘하 11장 1절은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스라엘 군대는 싸우러 나갔으나 다윗은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나갔어야 했을 것이다.

2절 초두에 흥미로운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2상반절)

당시에 지붕은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었다. 2절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다.

”...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다윗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저가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2하반절-5절).

이보다 더 조잡하고 부도덕하고 난폭하고 공공연한 죄악은 없을 것이다.

 

● 살인

다윗은 그녀를 너무 원했기 때문에 그는 주도면밀하게 상황을 짜맞추어 그의 남편을 죽게 하였다. 15절에서 그의 군인들에게 편지하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고 했다. 그는 결국 죽었다(17절). 그래서 다윗은 간통과 살인 죄를 지었는데, 이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무용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거룩하지 못한 도구가 되었다.

 

(2) 그의 자복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말씀하셨고 다윗은 그의 죄로 인한 괴로움으로 인하여 그 마음이 찢어졌다. 그의 마음이 죄로 인한 괴로움으로 찢어질 때의 감정이 시편 51편에 기록되었다. 다윗이 그의 죄로 인한 징벌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여 주(主)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主)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主)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主)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主)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내가 정(淨)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主)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8절).

그는 ”하나님,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나를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가게 해 주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10절에 계속해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靈)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좇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聖神)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道)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10-13절)라고 말하고 있는데, 다윗은 그 자신이 깨끗하게 되기 전에는 아무도 가르치거나 돌이키게 할 수 없었다. 사역에 있어 각 사람이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은 그 자신의 성결이다.

 

3) 맥체인의 글

맥체인은 그의 교훈이나 모범에 있어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1840년 9월에 그의 동료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내가 대하는 모든 것, 내가 하는 그 모든 성경 공부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께서 이 스코틀랜드에 깊고 순결하고 넓으며 또한 영속적인 역사를 일으키시도록 기도하게 만듭니다. 만일 이것이 깊고 순결하지 않다면 이것은 오직 혼돈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그리고 또한 나는 만일 우리가 이와같은 일에 쓰임받는 도구가 되려면 먼저 우리가 자신이 모든 육신과 영혼의 더러운 것들로부터 깨끗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성결과 어린 양의 보혈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추구하고 ...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역의 모든 성공이 오직 당신에게 영원한 혼돈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항상 이것에 얼마나 힘썼는가를 당신이 아십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에게 이것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친구여, 내 말을 명심하십시오. 어떠한 평범한 죄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말고 그것이 영원한 심판을 가져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당신도 거룩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당신도 순결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당신도 온전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교만과 자만과 개인적인 허영심과 나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죄들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더 크게 쓰임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 우리들의 평강을 깨뜨리고 영혼을 더럽히는 추악한 죄여 !”

 

사람이 오직 거룩할 때에만 주님을 섬기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다. 지도력에 있어 제일의 원칙은 당신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도력은 두번째 원칙은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하는 것이다.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해야 함(28절)

 

 

”...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회중 정치(Congregational Rule)에 대한 문제

 

 

회중 정치는 회중들이 다스리는 제도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는 낯선 것이다. 성경에는 회중들이 장로들의 권위에 순종하도록 되어 있다. 회중들이 장로들 위에 군림할 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권위에 대한 모범은 깨진 것이다. 이것은 자녀들이 그 부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나 일반 백성들이 정부지도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회중들이 그들 중에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을 선택할 권리는 있지만(행 6:3-4) 그들이한번 선택해서 안수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곳에 세우셨으면 직분자의 위치는 그리스도의 보조 목사들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다스리는 자리이다.

 

양 무리를 인도하고 지혜로운 결정을 하며 그들에게 유익할 것들로 인도하는 이 지도력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는가? 당신은 항상 그들을 먹을 것이 많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먹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고 다음에 양들을 먹이고 인도해야 한다.

 

양 무리를 지키고 경고해야 함(29-31절)

 

 

충성된 목사와 장로는 그가 다스리든 가르치든 양 무리들을 감시하고 경고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은 소극적인 면에서의 인도이다. 이것은 보호하는 것이다. 선한 목자는 그의 양들을 어느 목장의 좋은 풀밭에 풀어 놓고 잠이나 자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언덕을 살피고 양들을 찢어 삼킬 이리가 숨어 있을 만한 굴이나 갈라진 틈을 살핀다. 먹이고 인도하는 것은 앞을 보는 것이지만, 뒤를 보는 것은 뒤에서 무엇이 접근하지나 하는가 경계하는 태도이다. 목자에게 있어 가장 크고 격렬한 투쟁 중의 하나는 양무리를 지키는 것이다.

 

1. 거짓된 교훈의 침투(29-30절)

 

1) 외부로부터(29절)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위험하고, 힘센)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바울은 그가 떠나자마자 거짓 선생들이 올 것을 알았다. 당신은 그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바울은 사단이 말씀이, 뿌려진 곳에 거짓을 심을 것을 알았다. 밀이 뿌려진 곳에는 어디든지 가라지가 있다. 어디든 진리가 전파되는 곳에는 사단이 거짓으로 이를 손상시킬 것이다.

 

(1) 거짓 선생들에 대한 예상

바울은 거짓 선생들을 ”흉악한 이리”라고 표현했다. 마태복음 7장15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리들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10장 16상반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열 두 명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양의 옷을 입고 있는 이리들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길을 떠났다. 세상에는 겉보기에는 선하고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양의 옷을 입고 있는 사단의 이리들이 있다. 나는 그들 모두가 자신들이 양의 가죽을 쓴 이리인 것을 안다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아주 희박하지만) 자신들이 만연시키고 있는 교훈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2) 거짓 선생들의 출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거짓 선생들이 올 것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말했는데 그 거짓 선생들이 그곳에 나타났다.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목사로 있을 때 그에게 두 편지를 썼는데, 그 두 편지에서 바울은 거짓 교훈들에 대한 언급을 했다.

 

● 그들의 미혹

디모데전서 4장 1상반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후일”은 메시야가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1하반절에서 그는 계속해서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靈)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미혹케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외식 가운데서 거짓을 말하고, 혼인을 금하며, 모든 거짓 교훈들로 사람들을 미혹한다(23절). 상반절에서 그는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라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은 사람들에게 거짓 선지자들과 사단의 거짓 교훈과 미혹의 영들에 대해 경계시켜 주는 사람이다.

한 번은 어떤 교인이 나에게 와서 ”목사님, 우리 교회 A.C.T.S.(Active Christian Training Seminar)를 이수 중에 있는 교사 중 한 사람이 어떤 이단적인 단체에 미혹된 것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나는 내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그러한 일이 더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이렇게나마 하나님의 말씀의 순결성이 지켜진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가 이에 대해 자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더 많은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들을 지키고 경고하는 장로들에 대하여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노략질하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침투할 것이다.

 

● 그들의 전략

성경은 아주 강력하게 그와 같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2장 1-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생들을 더러운 점과 흠이라고 말씀하시고, 물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세상의 미혹하는 이들을 피하려고 애쓰며 하나님을 찾고 종교적인 해답을 구하는 자들을 넘어지게 만든다(18절).

 

 

● 그들의 교회 정복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썼을 때 그는 아마도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들을 생각했겠지만 온갖 거짓 선생들이 에베소에 들어온 것이 그 후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당시에 아시아에 있는 많은 도시들 가운데서 교회가 있었던 곳은 오직 서머나, 버가모,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와 에베소뿐이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이미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서 거짓 교훈들로 교회들을 정복하고 말았다. 요한계시록 2장 6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한 가지를 칭찬하셨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우리는 이 니골라당의 교훈이 어떤 부도덕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교훈으로 벌써 에베소 교회에 역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2장 9절께서 그분은 서머나 교회가 사단의 회(會)의 지배를 받았던 것을 말하고,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는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계 2:14)고 엄중 지적하셨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그분은 ”너희 중에 음란하게 하는 이세벨의 행위를 따르는 자들이 있다”(계 2:20)고 말씀하셨다. 바울이 그의 사역을 마치고 떠나간 지 불과 몇 년 후에 거짓 교훈들이 들어와 아시아에 있는 적은 교회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2) 내부로부터(30절)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헬라어로는 「디아스트레포」(diastrepha)로서 「뒤틀어진」이라는 뜻]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거짓 선생들은 항상 추종하는 세력이 있다. 거짓 선생들은 자기들을 추종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를 공포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외부에서 또는 내부에서 거짓 선생들이 일어날 것을 경고했다.

 

 

(1) 에베소에서의 사례(事例)

교회 내에서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지 않나 생각된다. 당신은 ”에베소에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렇다. 에베소에서 그와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교회는 바울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교회 모든 장로들은 개인적으로 바울의 양육을 받았으며, 몇 년 전에 디모데에 의해 교회 장로로 일하도록 안수를 받았는데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당신은 ”그러한 일이 일어난 줄을 어떻게 압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사람들(거짓선생들)의 이름을 밝혔다. 첫 서신은 그가 에베소를 떠난 지 불과 몇 년 후에 쓴 것이다.

 

● 권면

디모데전서 1장 3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라고 말했다. 불과 그 몇 년 사이에 이미 그들 중에서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거짓 교훈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4상반절에서 바울은 ”신화(神話)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들은 율법주의를 가르쳤던 것같다.

 

● 범죄자들

바울은 이 거짓 선생들의 이름까지도 밝히고 있다. 디모데전서 1장 19하반절-20절에서 바울은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디모데후서 1장 15절에서 그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2장 17절에서는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고 말했다.

나머지 그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은 디모데후서 3장 1-9절에 나와 있다. 5상반절에서부터 그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5상반절-8절)고 말하였다.

거짓 선생들이 교회 외부와 내부에서 들어와 세상의 미혹하는 데서 겨우 피한 자들을 온갖 왜곡된 것들을 말하여 끌어갈 것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2) 싸울 것을 권함

유다는 유다서 3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道)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가? 사역은 장난이 아니다. 4절은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色慾)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主宰) 곧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애찬에도 참석했다. 유다는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라고 했다. 그들은 교회 생활 가운데로 들어왔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現時代)에 비교해 보라. 오늘날 미국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거짓 선생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것은 참 슬픈 일이다.

 

2. 거짓 교훈을 피함(31절)

 

1) 바울의 명령(31상반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watch) 내가 삼년이나... 각 사람을 훈계하던(warn) 것을 기억하라.”

일깨우고(지키고) 훈계하는(경고하는) 것은 목회의 우선 순위에 있어 세번째 것이다.

 

(1) 지킴

경계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목사나 장로들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의무감이 아닌 양들을 돌아보는 마음에서, 거짓 선생들을 경계하고 곡식 가운데 뿌려진 가라지를 경계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25-29절에서 예수께서는 가라지가 뿌려질 것인데 추수 때까지 자랄 것이므로 뽑으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 가운데 한 번 뿌려진 가라지를 뽑아낼 수 없다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가라지를 막는 길은 오직 뿌려지지 못하게 지키는 길 뿐인데, 그것이 바로 영적인 책임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순결한 처녀로서 드려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모든 일에 ...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겔 3:17)고 말씀하셨다.

 

(2) 경고

”훈계”(경고)라는 말의 헬라어는 「누데시스」(nouthesis)이다. 이것은 경고가 들어 있는 조언이다. 이것은 온화한 동시에 단호한 태도이다. 우리는 양들을 지킬 뿐만 아니라 경고도 해야 한다.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 양무리를 늑탈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경계하라. 당신이 믿는 그 믿음을 알고 정직한 마음으로 굳게 붙잡고 굳게 서라.

 

2) 바울의 간절함(31하반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바울이 왜 울었는지 아는가? 이는 거짓 선생들의 늑탈에 대한 무서운 결과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았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9절과 3장 10절에 보면 그가 밤낮 일한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언제 잠을 잤는지 잘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바울은 그의 사역을 의인화(擬入化)했다. 목자가 밤에 양 무리를 지키는 것같이 목사와 장로들도 거짓 교훈을 가지고 들어오는 이리들로부터 양 무리를 지키기 위하여 경계를 서야 한다. 당신 개인의 영적인 삶과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하는 일과 더불어 양 무리를 지키고 경고하는 일도 해야 한다. 네번째로 해야 할 것은 기도와 연구이다.

 

기도하고 연구해야 함(32절)

 

 

이 네번째 과제는 6장 4절에서 사도들이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된 원칙이다. 이것은 지도자의 삶에 있어 중심이 되는 원칙이다.

 

1. 기도(32상반절)

 

”지금 내가 너희를 주께... 부탁하노니...”

 

1) 사람들을 하나님께 맡김

내 머리에 들어 있는 모든 지식과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진리들을 우리 교인들에게 준 다음에 나는 우리 교인들을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없다. 나는 ”하나님, 나는 그들에게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전했습니다. 말씀에서 얻은 것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 손에 맡기는 것 뿐입니다”라고 기도한다. 이것이 바로 사역이다. 당신이 이룰 수 있는 만큼 이루고 그것에 만족하며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분의 양 무리이다. 내가 이들을 그분께 맡김은 그분이 최종적인 보호자이며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이와 같은 맡김의 자세가 필요하다.

 

2) 사역을 하나님께 맡김

 

(1) 기도가 없이는 섬김도 없다

기도는 모든 사역에 있어 먼저 와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사도행전이 바로 기도로 맡기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뽑을 때 그들은 모여서 기도했다(행 1:24). 사도행전 2장 42절에 보면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고, 교제하며, 기도하기 위해서 함께 모였다. 사도행전 6장 6절에서 그들은 집사들을 세워 안수하기 전에 기도했다. 나중에 그들은 또한 바울과 바나바를 새로운 지역으로 보낼 때 그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고 보냈다(행 13:3).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기도로 시작했다.

 

(2) 기도를 대신할 것이 없다

오늘날 교회는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방법들과 주장들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기도는 마음의 소원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행위가 되어버렸다 - ”주님, 우리가 이것을 하려고 하는데 축복해 주십시오.” 그때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는 때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일을 생각하여 그 일을 진행하면서 하나님께 그 일을 축복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에서 말하는 기도가 아니다. 기도를 대신할 것은 없다. 번영도 아니고, 좋은 아이디어도 아니며, 좋은 프로그램, 성숙, 성공, 확신, 재능이 기도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체제를 잘 정비하고, 놀라운 프로그램과 좋은 위원회들, 세속적인 성공과 이를 유지하기 위한 놀라운 방법들에만 몰두하기가 참으로 쉽다. 당신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만사형통해져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때 자신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태도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하반절).

 

교회가 하는 모든 것,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사역에서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나서가 아니라 그 생각들이 어떠한 열매나 결과를 가져오기 전에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3) 생각(idea)을 하나님께 맡김

만일 가능한 어떤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만한 일인지를 살피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나는 어떤 프로그램들을 세우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내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만, 이것이 당신께로부터 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기도로 당신께 맡깁니다. 만일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행하소서, 우리는 이를 따를 준비가 되었나이다”라고 기도하는 데 더 마음을 쓴다. 내가 젊었을 때 나는 어떤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거기에 성령을 개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내가 후에 깨달은 것은 그것보다 성령께서 임의로 역사하시는 가운데 나를 사용하시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훨씬 더 감동적인 일이다.

 

 

2. 말씀(32하반절)

 

1) ”... 은혜의 말씀께 ...”

바울은 장로들에게 ”나는 너희를 하나님과 그 말씀께 부탁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의 역사(役事)에 전적으로 의탁한다.

 

2) ”... 그 말씀이 너희를 든든히 세우사...”

말씀은 영적으로 장성케 만든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은 당신이 신령한 젖에 의해 자란다고 말한다.

 

3) ”...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말씀은 우리의 기업에 대한 약속을 확보해 준다. 사람들은 나에게 나는 의심스러운 게 많아서 확신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성경을 공부하십니까?”라고 묻는다. 당신이 성경을 충실히 공부하면 그것이 지속적으로 당신의 기업에 대해 보증해 줄 것이다. 성결케 된(분리된,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한) 자들에게는 기업이 있다. 이에 대한 확신은 당신이 성경을 공부할 때 온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먹이고 자라게 하며 확신을 준다. 기도와 말씀은 지도력의 우선적 과제들이다. 당신이 말씀을 공부할 때 세움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케 된 자들을 위한 기업의 약속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지도자의 다섯번째 과제는 사리사욕이 없는 것이다.

 

사리사욕이 없어야 한다(33-35절)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主)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당신의 사역에 있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사역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것을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다.

 

1. 탐심이 없음(33절)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돈을 밝히는 자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는다.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돈에 몰두한 사람의 사역에 ”실패자”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신은 하나님과 재물(돈, 마 6:24)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1) 바울의 모본

바울은 어느 도시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돈(사례비)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요구하지 않고 자신이 본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필요를 위해 일했던 것이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금전적인 것에 대한 존경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받을 권이 있지만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 않고 내 필요를 내가 채움으로 본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2) 사례비 결정의 모본

나는 하나님의 사역자는 무엇이든지 요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내가 어떤 교회에 시무하러 갈 때 나는 그 교회 대표자들에게 「사례비는 얼마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서로 이야기해서 내가 요구한 액수를 받고 일하게 되었지요”라고 말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내 마음은아픔을 느낀다. 나 같으면 차라리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은혜(담임 목사직)가 은혜되게 하는 일에 신경을 쓰겠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주시든지 그것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당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로서 받을 값을 미리 정한다고 하는 것이 내게는 온당하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그들의 수양회에 강사로 초청하면서 ”목사님, 이번 수양회에 목사님을 강사로 초빙하고 싶습니다. 보수는 얼마나 드려야 됩니까?”라고 묻는다. 이와 같은 말은 나를 격분하게 만든다. 나는 항상 ”무슨 말씀이지요?”라고 되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강사비를 얼마나 요구하십니까 ?” 라고 묻는데, 나는 ”만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당신이 당신의 사역에 값을 매기고 정가표를 달고 다닐 때 당신은 하나님의 축복에서 벗어나 자신을 스스로 상품화시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2년 정도를 전국을 순회하며 여러 집회들에서 말씀을 전했다. 집회가 있는 도시에 들어가서 ”이번 집회는 아주 굉장한 집회가 될 것이며, 사람들은 많은 감사 헌금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는 쉽다. 나는 그와 같은 것은 질색이다. 집회를 갖는 동안 나는 돈에 대한 것은 전혀 알고 싶지 않다. 나는 자유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싶다. 그들이 무언가 내게 준다면 좋고 주지 않는다 해도 좋다. 왜냐하면 어느 것이든 나는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역에 대한 대가를 미리 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며 도와 주시기를 바란다.

바울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헌금을 보내 주신다면 그것은 감사하게 받았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헌금을 내게 보내 주어 기쁘다. 이는 내가 필요해서가 아니고 너희에게 드리는 것에 대한 교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난과 부(富)에 어떻게 처해야 하는 줄을 알며 모든 것에 나는 만족한다. 너희가 희생적으로 이것을 드린 줄 안다만, 이 말을 너희의 마음속에 기억하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너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의 몇 배로 크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다”(빌 4:10-19)라고 말했다. 언제든지 영적인 지도자가 자신이 얼마나 돈을 받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떠나 그리스도를 상품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2. 구제에 대한 훈계(34-35절)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主)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흥미있는 인용 구문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아그라파」(agrapha: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인용)이다. 당신은 예수께서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도 말씀하셨느냐고 물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심히 많아서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도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좁을 것이라고 말했다(요 21:25). 바울은 이 말씀을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용하였다.

세상은 사역자를 항상 손 벌리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역자들이 요구하는 성직자 할인 제도를 싫어한다. 당신은 사역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조달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심령인가? 복음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하지 말라. 당신이 ”나는 목사가 되려고 하는데 그러면 할인 혜택을 받게 됩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것이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끼치겠는가?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사역에 있어서 가장 크게 우리의 경건을 나타낼 수 있는 길은 물질에 대해 착념치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를 때 당신은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된 것이며, 그분이 당신의 모든 필요를 풍족히 채워주실 것이다.

사역에 있어 우선적 과제들은 무엇인가? 자신에 대한 점검과 양무리를 먹이고 인도하며 지키고 경고하고 기도하며 연구하며 사리사욕을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역에 대한 보상에 대해 사도행전 20장 36-38절에 언급되어 있다. 36절은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겸손한 장로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했다. 37절은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라고 말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들이 바울을 좋아했다고 생각하는가? 바울이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말과 그의 삶이 일치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사랑했다. 그들이 그를 안고 계속해서 입을 맞출 때에 양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38절은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고 말하고 있다.

나도 이처럼 사랑을 받고 싶다. 만일 내가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께서 원하시는 곳에서 나의 사역을 마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성도들의 그같은 사랑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가 전한 말씀을 인하여 나를 사랑하기를 원한다. 충성된 사역자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있다.

 

 

확인 질문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기준에 의하여 사울을 왕으로 택했는가?

 

2.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장로의 필요한 자격은 무엇인가?

 

3. 그리스도인들의 지도력에 대하여 정의(定義)해 보라.

 

4. 일반 사람들에 대한 지도자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5.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범한 두 가지 죄는 무엇인가?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6. 시편 51편에 있는 다윗의 자복의 중요성을 설명해 보라.

 

7. 회중 정치에 대하여 설명하라.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8. 거짓 선생들로부터 지키고 경고하는 것을 한 마디로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9. 디모데전서 4장 6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은 어떠한 일을 하는 사람인가?

 

10. 거짓 선생들이 공격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11. 바울이 떠난 다음 그가 사역한 교회들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12. 그 거짓 선생들이 사용한 방법 두 가지는 무엇인가?

 

13.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후 그 교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대답해 보라.

 

14. 믿음을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5. 가라지가 뿌려지는 것을 처음부터 막는 것이 왜 중요한가?

 

16. 거짓 선생들에 대한 성도들의 책임은 무엇인가?

 

17. 지도자가 사람들을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는 것이 왜 중요한가?

 

18.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겼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19. 우리의 기업을 무엇이 보장해 주는가?

 

20. 바울은 왜 그의 사역을 위해서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공급을 요구할 수 있는 그의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는가?

 

21. 그의 사역에서 얼마나 돈을 버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사역자에게는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

 

22. 「아그라파」는 무엇이며, 바울은 왜 이 특별한 「아그라파」를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인용하였는가?

 

 

23. 사역에 대한 보상은 무엇인가?

 

정리

 

 

1. 사무엘하 11장 1절-12장 23절과 시편 32편과 51편을 읽으라. 당신은 다윗이 시편 32편 3-5절에서 느낀 것 같은 죄에 대한 중압감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한 것 같은 고백을 하는 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가? 당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기를 원하고 당신의 죄를 고백했는데도 당신은 다시 그 죄로 돌아가고 싶은 자신을 발견하는가? 고린도후서 6장 14절-7장 1절, 8-11절을 읽으라. 우리들의 죄를 고백하는 합당한 마음의 동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들의 회개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당신은 죄에 대하여 진실로 슬퍼하는 자신을 발견하는가? 왜 그러한가? 왜 그러하지 않는가? 당신은 이 기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심각하게 다루고, 진실로 마음으로 회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겠는가? 그분의 용서에 대하여 감사하라. 그분은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용서하셨다.

 

2. 거짓 선생들을 경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을 숙고해 보라. 당신의 믿음에 닥칠 저항들에 대한 준비를 위하여 유다서 3절을 암기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道)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3.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개인 기도를 점검해 보라. 당신은 왜 기도하는가? 그 기도에 몇 퍼센트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드리는가? 죄를 고백하는 것은 몇 퍼센트나 되는가? 감사하는 것은몇 퍼센트나 되는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몇 퍼센트나 되는가? 당신의 사역과 자신을 위해서는 몇 퍼센트나 되는가? 위에서 언급한 것들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필요를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하는가? 당신이 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바울은 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 맡겼는가? 좋은 기도의 모범에 대한 머리 글자를 모으면 ACTS가 된다. 찬양(Adoration), 고백(Confession), 감사(Thanksgiving), 간구(Supplication), 당신은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모범의 순위에 따라 기도할 마음이 있는가? 시편 51편에서 당신은 이와 같은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찾을 수 있는가?

 

 

 

● 사도행전 27장 ●

 

8. 지도력의 원리들

 

 

서론

 

참된 지도자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나는 지도력에 대하여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사도행전 27장을 읽을 때에 그 곳에서 내 마음에 와 닿는 지도력에 대한 원리들이 있었다. 그 장(章)을 좀더 공부하고 묵상했을 때, 지도력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좋은 원칙들이 내 마음에 선명하게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27장에 대한 세밀한 해석이 아니고 다만 거기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행동들에서 지도력에 대한 원리들을 실례(實例)로 사용한 것 뿐이다.

 

1. 선천적으로 강한 지도자

 

선천적인 지도자상에는 여러 요구되는 요소들이 있다. 세상이 전통적으로 추구하는 지도자상은 SNL로 약칭할 수 있는데, 이는 강한(Strong), 선천적인(Natural), 지도자(Leader)라는 말의 머릿글자들이다. 「하퍼」(Harpers) 잡지는 그 기사에서 대부분의 산업인들과 법인체들이 원하는 지도자는 최고 학벌을 마친 사람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지시에만 잘 따를뿐이지 창의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선천적인 강한 지도자의 자질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 이와 같은 형(型)의 지도자는 그 특성이 다음과 같다.

 

1) 비젼이 큼

그들은 항상 현실 그 너머를 바라본다. 문제는 그들이 먼 미래를 바라보기 때문에 현재 자기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건물에 건물을 건축하며, 그 다음 대륙을 정복하고, 또 그 다음 승리의 계획을 세우기에 바쁘다.

 

2) 활동적임

그들은 활동하기 위해서 항상 이동한다. 그들은 좀체로 한 곳에 눌러 앉아 있거나 심사숙고하지 못한다.

 

3) 용기가 있음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고 선천적으로 강한 지도자이며 또한 용기가 있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인간적인 용기일 뿐이다.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은 감히 시도하지도 않을 어떤 일을 당신은 할 수 있는 충분한 용기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4) 정력적임

만일 그가 어린아이라면 우리는 그를 특별히 활발한 아이라고 부를 것이다.

 

5) 목적 지향적임

그는 인간 위주가 아니다. 그는 목적의 성취를 중시하지 인간을 중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는 흔히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들로 사용한다.

 

6) 가부장적임

그들은 가부장(家父長)과 같은 인상을 풍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그들의 날개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는 큰 암탉으로 생각한다.

 

7) 자기 중심적임

그들은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도는 것으로 생각한다.

 

8) 다른 사람들의 무능을 용납하지 못함

한 가지 그들을 참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기대한 대로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이다.

 

9) 없어서는 안 될 사람

그들이 없이 당신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지도자상은 SNL로서 비젼이 크고, 행동주의적이며, 용기가 있고, 정력적이고, 목적 지향적이며, 가부장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무능을 용납하지 못하며,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만일 당신 교회에 이와 같은 특성들을 가진 목사님이 계시다면 당신은 정말 문제이다. 한 사람(목사)은 그의 비젼 가운데 날뛰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계속 죽을 힘을 다하여 그것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성경적인 지도력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부인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당신 자신의(선천적인) 전심전력과 모든 수단을 다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 갈고 다듬는 지도자

 

지도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루는 신문에서 스누피(Snoopy)가 ”나는 비글(beagle)의 머리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위치는 참으로 힘든 자리이다. 나는 가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목회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 일 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일은 참 힘든 일인데, 이는 자원해서 나온 뭇 심령들을 조직하고 인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인들 어느 누구에게도 명령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부디... 또는 미안하지만”이라고 말해야 하며, 아무도 함부로 파직할 수 없고, 자신이 실수를 저지를 때 그 실수에 대해 따지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 것이 바로 목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사역에는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성공이 있고, 무릎을 계속 꿇도록 만들 충분한 실패도 있으며, 당신을 넘어지게 하거나 성공하도록 유도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

 

1) 지도력에 있어서의 긴장

지도력에는 긴장이 따른다. 지도자가 되는 데는 직무상 어떤 걱정들이 그 마음에 싸인다. 그 긴장들은 다음과 같다.

 

(1) 실패에 대한 두려움

지도자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 가는데 이는 어떤 실수를 했을 때 숨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당신이 인간이며 또한 약하기 때문에,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들 앞에서 넘어질 수가 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당신은 자신을 과소 평가하고 두려움에 싸일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당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다.

 

(2) 개인적인 판단을 불신함

때로 당신은 굉장히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의 친구가 당신에게 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당신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무엇이라고 그에게 말하겠는가? 첫째로 당신 머리에 ”만일 내가 잘못된 것을 말하면 나는 이제 끝장이다”라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판단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지도자의 위치에 절대로 서지 않을 사람도 있다. 모든 지도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처리해야만 한다. 우리들의 판단에 전적으로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오직 성령의 능력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만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나의 확신이 되어 주신다.

 

(3) 사람들에 대한 신뢰의 부족

나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가 없어서 일을 맡기지 못하여 염려하는 한 목사님을 알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맡긴 것이 그가 말한 대로 정확하게 잘 되어가는지를 염려한다. 이것이 지도력에 따른 긴장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당신이 맡긴 일을 잘 해내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 이것은 당신에게 책임감이 있기 때문에 느끼는 정당한 긴장이다.

 

(4) 권위를 갖는 데 대한 죄책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내게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하나님 말씀에 관한 문제일 때 강권적이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 친한 친구가 내게 와서 문제들을 말하면 나는 그에게 ”성경은 말하기를 ...”이라고 시작하며 그에게 서너 구절의 말씀을 주고, ”이제 가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위협 가운데서 떠나간다. 지도자의 위치에서 당신은 강해야 하고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사람들을 몰아놓은 것에 대하여 당신은 어느 정도의 죄책감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지도자라면 당신에 대하여 화를 내는 자들을 잘 다루어야만 한다. 당신이 권위를 가지고 단호한 자세를 취하게 될 때 당신은 항상 어떤 사람들을 소원(疎遠)하게 만들 것이다. 당신은 그와 같은 것으로 인한 죄책감을 감당해야만 한다.

 

(5) 방어적임

당신에게는 자신을 보호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묵묵히 하는 대신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항상 모든 것을 명백하게 하기를 원할 것이다.

 

2) 지도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일할 수 있다면 당신은 다음의 사실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 당신은 실패할 것이다.

당신도 실패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대비해야만 한다.

 

(2) 판단하는 데 당신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당신은 일을 잘 해내지 못할 사람을 신뢰할 것이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자들을 지도자의 위치에 앉힐 것이다. 당신은 또한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잘못을 범할 것이다. 당신의 지혜에 실수가 있을 것이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라고 사람들에게 시킬 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와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거대한 야심이나 계획들,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소망이나 계획들을 시행하려고 하면 ”예,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은 하지 않고 완전히 적대적인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4) 당신은 너무 권위적일 것이다

당신은 때로 성경적인 권위의 개념을 초월해서 당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권위적이 될 것이다. 당신은 기분이 뒤틀리고 노할 것이다.

 

(5) 변호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때로 당신은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하여 왜 그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기준이 우리의 기준은 아니지만 긴장감은 같다.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근원은 우리에게 이 책임을 맡기신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완전한 지도자가 없었다. 모든 지도자들이 실수를 범했다. 당신은 그 모든 부족함이 있는 상태로 당신의 임무를 감당하라.

 

3. 특별한 지도자

 

2) 바울에 대한 푸대접

 

(1) 바울의 의향

우리가 사도행전 27장을 살펴보면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2년 동안이나 가이사랴 감옥에 있었다. 그는 그의 세번째 전도 여행을 마친 후 감금되었다. 그는 교회를 세우는 놀라운 사역을 마치고 이방인 지역에서 명절 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얻은 많은 구제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함으로 두 교회를 화목시키려 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오랫동안 인종적 분열이 있었다. 바울은 이 둘을 화목케 하는 가장 좋은 길은 모든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사랑의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그와 함께 여러 교회 대표자들을 데리고 왔다(행 20:1-5/고전16:1-3).

 

(2) 바울의 감금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의 최선을 다해서 교회들을 화해시키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그 모든 격동과 소란 속에서 유대 당국자들은 바울을 죄수로 잡아갔다. 그들은 그를 강제로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죄수로 그 곳에 가두었다(행21:27-24:27). 2년이 거의 다 될 즈음에 바울은 ”이렇게 있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나는 가이사에게 항소한다. 나는 어떤 것이든 최종적인 판결을 원한다”(행 25:10-12)라고 말했다.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 그와 같이 항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가이사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

 

2) 바울의 상승

사도행전 27장 1절에서 바울이 로마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 말단의 신분

여행이 시작될 때 그 배에서 가장 말단의 신분은 바울이었다. 그는 범인, 즉 죄수였다. 그는 아무런 권위도 없이 배 한 쪽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1절에 의하면 로마 아구사도대(황제의 특별 호위대)의 백부장도 그 배에 함께 타고 여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백부장은 백 명의 사람들을 지휘할 수 있었다. 그의 아래는 다른 직위의 장교들과 병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배의 선장과 일등 항해사 그리고 선원들이 있었다. 그 곳에는 바울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많았다. 바울은 지중해를 지나 로마로 가는 항해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었고 로마 군대의 편제나 조직도 전혀 몰라 그 군대를 지도할만한 아무런 자격도 갖추지 못했다.

 

(2) 우두머리로 다스림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배가 항구를 떠나 항해를 시작했을 때 바울이 모든 것을 주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항해를 마치기 전에 그는 그 배에 있는 각 사람의 삶을 지휘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이는 지도자가 필요한 곳에는 지도자가 자연적으로 부상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단의 자리에서 꼭대기까지 부상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지도력에 대한 특성들을 하나 하나보게 된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적용하기에 좀 모호한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아주 분명하다.

 

지도자는 신뢰를 받는다

 

 

사도행전 27장 1절에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바울과 누가)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이튿날 시돈에 대니 ...”(1-3상반절).

그들은 가이사랴를 출발했는데 시돈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112 km되는 곳이었다. 3하반절은 ”...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라고 말하고 있다.

 

1. 신뢰의 확신

 

이 말씀을 읽으며 나는 놀랐다. 바울은 아주 중범(重犯)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유대 민족들이 굉장히 분개했던 사람이었으며, 그의 위치는 로마를 위한 하나의 좋은 이용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그들이 팔레스틴 땅 어딘가에 다시 풀어 놓아 줘도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그가 로마 시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로부터 그를 지켜야 할 책임감도 느꼈을 것이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곳을 떠난 지 하룻만에 시돈에 도착했는데 율리오가 바울을 시내로 들어가 그의 친구들에게 대접을 받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바로 지도자의 첫째 특성이 있는데 그는 신뢰를 받았다는 것이다.

 

1) 율리오에 의해 입증됨

어떻든 바울은 단 하룻만에 율리오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로마 군인이 호송하는 죄수를 잃어버리면 어떠한 처벌을 받는지 아는가? 자신의 생명을 내 놓아야 한다. 그래서 빌립보감옥의 간수가 감옥이 지진에 흔들려 무너졌을 때 칼을 빼어 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죄수들을 잃어버린 것으로 인하여 로마로부터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보다 자살하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행 16:26-27). 로마 군인은 그가 맡은 죄수를 잃으면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율리오는 단순한 로마의 한 군인이 아니라 황제의 근위대를 통솔하는 자였지만, 바울과 하루 같이 지낸 다음에 바울을 가게 했다. 당신은 왜 그가 그렇게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가 바울을 신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친구들에 의해 입증됨

바울의 친구들 또한 그를 신뢰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주 쉽게 ”바울이 도대체 뭘 해서 죄수가 되었을까?”라고 말할 수 있었을 젓이다. 그들은 그를 운이 기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더 이상 그를 친구로 생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2년 동안이나 감옥에 있었고 그들과의 편지도 끊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2년이나 지난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그를 신뢰했다.

 

 

여기에 하룻만에 바울을 신뢰한 백부장이 있고, 2년이나 지났는데도 그가 죄수로 취급을 받고 있는 그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신뢰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확신을 잃지 않았다. 지도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2. 신뢰의 개념

 

만일 사람들이 당신을 신뢰하고 믿는다면 그들이 당신에게 품는 기대를 보고 당신은 놀랄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들에게 품는 기대를 보고 놀랄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성경 공부를 지도하거나, 어떤 것이든 당신이 지도할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당신에게 품는 기대에 놀랄 것이다. 당신은 ”목사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라고 물을 것이다. 나는 신뢰라는 말을 ”당신이 상대방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최상의 호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이 확신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율리오는 바울이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마음 중심으로 그들에 대해 최상의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때 그를 신뢰할 것이다.

 

1) 섬김

만일 당신이 사람들을 지도하려고 한다면 종의 위치에서 지도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에서 바울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군들[헬라어로는 「휘페레테스」(huperetes): 군함의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하급 노예]”라고 불렀다.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그는 지도자들을 종들로 말하였다. 심지어 주님은 ”인자(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20:28상반절)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종의 자리에서 섬기며 지도할 때 사람들은 당신의 마음이 그들에 대한 최상의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믿어 당신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의 마음 속에 당신 자신에 대한 관심밖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을 신뢰하기를 그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일에 이용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지도자는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가 중심으로 자신들에 대해 최상의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 그는 신뢰를 받게 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렇지 못할 때 이는 크게 실망되는 일일 것이다. 지도자가 종의 마음을 가질 때 그는 신뢰를 받는다.

 

2) 희생

마태복음 20장 25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말하고 있다. 이방인의 지도자들은 권세가 있는데 그들은 명령자들일 뿐이다. 26절에서 말씀은 계속되고 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小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26-28절).

세상의 지도력은 독재적인 지배이고 그리스도인의 지도력은 아름다운 섬김이다. 진정으로 당신의 마음 속에 그들에 대한 최상의 호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당신을 신뢰하며 따를 것이다. 바울은 하룻만에 그와 같은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도자는 선도권(先導權)을 잡는다

 

 

1. 바울에 의해 예증됨

 

지도력에 대한 두번째 원리가 사도행전 27장 4-10절에 나와 있다.

 

1) 배를 갈아 탐

그들이 시돈에 정박한 이후의 여정에 대하여는 4절부터 언급된다.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갈라디아 남쪽의 연안)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성(城)을 이르러”(4-5절).

무라는 애굽에서 이달리야로 곡물을 수송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항구였다. 루기아는 아시아의 갈라디아 남쪽 지방에 위치한 곳에 있었다. 6절은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서(西) 이달리야로 가는 배로 그 곳에서 바꾸어 탔다. 이야기는 7절에서 계속되고 있다.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美港)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성(城)에서 가깝더라”(7-8절).

그들은 천천히 진행하다가 멈춰야 했다.

 

2) 재난

그들은 미항에 있는 동안 짐을 풀고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9절은 ”여러 날이 걸려...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때가 아마 9월 14일에서 11월 11일 그 중간의 어느 때, 즉 지중해를 항해하기에는 위험한 때였을 것이다. 9절은 또한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은 ”바울은 죄수인데 이러한 경우에 무엇을 할 수있는가?” 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 두번째 원리가 있는데, 지도자는 항상 선도권(先導權)을 잡는다. 10절은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여행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는 ”지금은 위험한 때라서 떠날 수 없습니다. 만일 떠난다면 많은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제 당신은 ”왜 바울은 모범적인 죄수로 가만 있지 않고 앞에 나서는가?” 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자신이 안다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는 선도권을 잡은 것이다. 바울은 맨 하부에 속하는 사람이었지만 선도권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한 번 그 항해의 선도권을 잡은 다음에는 절대로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2. 느헤미야에 의해 예증됨

 

1) 선도(先導)의 원칙들

선도권을 잡는 데 대한 다섯 가지 원칙을 말하겠다. 느헤미야가 그 예(例)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1) 필요를 인식함

지도력은 문제를 구체화하고 그 필요를 인식하는 것이다.

”저기에 어떤 필요가 있고 전기에 문제가 있는데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느헤미야는 그 필요를 알았다(느 1:1-11).

 

 

(2) 해결책을 찾음

느헤미야는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왕에게 건의했다(느 2:1-8).

 

(3) 행동에 옮김

느헤미야는 왕에게 허락을 받고 성(城)을 재건하러 떠났다(느 2:9-16).

 

(4) 책임을 분담시킴

느헤미야는 성벽을 부분별로 맡아 재건할 가족들을 정했다. 그는 권위를 분담시켰다(느 3:1-32).

 

(5) 지도를 받는 사람들과 고락을 같이함

느헤미야서 5장 16상반절에서 그는 ”도리어 이 성(城)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모으거나 땅을 사지 않고 수건을 차고 사람들과 함께 성(城) 쌓는 일에 땀을 흘렸다.

 

선도권을 잡는다는 것은 당신이 어떤 필요를 보고 그것을 인식하고 그 필요에 대하여 염원하고 그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행동에 옮기고 그 책임들을 분담시키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서 일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이 어떤 필요를 보고(교회에서나 가정, 성경 공부 그룹, 주일학교, 직장...) 그 곳에서 지도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선도권을 잡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느헤미야가 그 좋은 모범이다.

 

2) 방해 음모

그는 또한 엄청난 방해를 받았는데 느헤미야서 4장 1절-5장 13절 그리고 6장 1-14절이 그 방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방해는 그를 비웃고 있다. 그 방해는 그를 비웃고 그에 대해 음모하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 방해자들은 엄청난 탐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선도권을 잡고 나서자 그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80년이 걸려도 할 수 없는 그 모든 성벽 보수하는 일을 그들은 52일만에 완성했다.

 

3) 비평자들의 저주

나는 교회에서 선도권을 취하는 자들이 많고 비평하는 자들이 적기를 기도한다. 뒤에 앉아서 ”이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기는 아주 쉽다. 우리는 ”저기에 필요가 있구나, 내가 가서 그것을 절실히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으며 실행하고 책임들을 분담시키며 그 문제가 바로 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일해야 되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당신은 ”직원들과 장로들, 평신도 지도자들을 어디에서 얻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우리는 앞장서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나오기를 바란다.

 

지도자는 심사숙고하여 좋은 판단을 내린다

 

 

사도행전 27장 9절은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라고 말한다. 지도자는 중요한 일들을 투기꾼과 같은 자세로 결정을 내리는 자들이 아니다. 지도자는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어떤 위험을 무릅쓸 수는 있으나 직업적인 도박꾼은 아니다. 지도자는 행운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이것을 합시다. 이 일에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1. 공통적인 문제

 

내가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내게 큰 두려움과 긴장이 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것은 내 목소리를 잃게 되어 가르칠 수 없게 된다거나 은행을 털게 되어 어떤 범죄자가 된다거나 부도덕한 행위에 빠질까 봐서가 아니다. 내가 사역하는 데 있어 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내가 어떤 어리석은 짓을 하여 모든 사람들이 ”우리는 이제 이 사람을 더 이상 따를 수 없다. 이제 그를 떠나 보내야만 되겠다”라고 말할까 봐서이다.

그 동안 나는 수많은 목사님들과 상담을 하면서 그들의 목회에 대한 주요 실패 이유가 그들의 어떤 도덕적인 문제나 가르침이나 심방이나 교회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에 대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 좋은 판단을 하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 대가는 생각지 않고 어떤 일에 너무 성급히 뛰어들었다. 그들은 주의하고 조심하며 민감해야 했으며, 지혜로운 권면을 했어야 했다.

 

2. 위안이 되는 해답들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한 과거의 경험에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배웠다.

 

1) 많은 권고를 받음을 통한 지혜

내가 우리 교회(Grace Community Church)장로들과 맨 처음 자리를 함께 했을 때 나는 내 스스로 어떤 주요한 결정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지혜로운 권고를 구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잠 12:15/19:20).

 

2) 성령께서 먼저 행하시도록 맡김

나는 성령께서 먼저 시작하시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지 성령께서 먼저 역사를 시작하신 일을 나도 따라서 했다. 나는 목회를 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것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그것들을 조직하기 위해 수 개월을 보내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쓸모없이될 것이고, 사람들은 ”우리 목사님은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수개월을 낭비했다”라고 말할 것이다.

사도행전 6장 1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과부들과 히브리파 과부들이 음식을 더 얻기 위해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들에게 성령이 충만한 자들을 택해서 그들로 그 일을 하게 하라고 말했다(행 6:2-3). 이 사람들은 교회의 첫 집사들이며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교회의 조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교회의 조직은 이미 발전된 일을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한 것이었다. 과부들에 대한 사역은 교회가 탄생했을 때 서로 나누고 섬기고 했던 것으로 인하여 생긴 자발적인 일이었다. 이 문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교회가 그 일을 조직하지 않았다.

 

나는 두 가지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이 일을 이미 시작하셨다고 믿기 전에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지도력에는 지혜와 건전한 판단이 요구된다.

 

3. 지속적인 가르침

 

사람들은 내게 ”목사님, 목사님이 어떤 교회 담임 목사로 가거나 아니면 어떤 성경 공부 그룹에 가서 그곳이 잘못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라고 묻는다. 나는 그저 그것과 연관된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까지 사랑스럽게 또한 부드럽게 가르치겠다.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그들을 변화시키도록 하겠다. 판단을 잘 하도록 하라. 당신은 지도자로서 당신의 지도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한 믿음을 좌절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도자는 신뢰할 수 있고, 선도권을 잡으며, 심사숙고하여 판단을 내린다. 네번째로 지도자는 권위있게 말한다.

 

지도자는 권위있게 말한다

 

 

1. 폭풍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

 

1) 출발

사도행전 27장 11절에서 그 기사를 계속 살펴보도록 하자.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문자적으로는 선장과 항해사)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당신도 한 죄수를 믿는 것보다 선장과 항해사를 더 믿지 않겠는가? 그래서 백부장도 그들의 주장을 믿기로 했다. 12절에서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2) 실망

13절은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남풍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북풍을 무서워했다. 14절은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고, 사실 바울이 예견했던 것이었다. 그는 지혜로웠고 조심스런 판단을 했었다. 15절은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달리 말해서 그들은 바람과 싸울 수 없어서 항해를 포기하고 배와 모든 것을 바람에 맡겨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3) 위험

 

(1) 거루를 잡음

16절에서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당시에 큰 배들은 뒤에 거루를 밧줄로 매달고 다녔다. 그들은 그것을 잃을까 봐 염려했는데, 이는 다른 배로 피하거나 육지로 피할 때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2) 배를 잡아맴

17상반절에서 계속해서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라고 말하는데 ”둘러 감고”라는 말은 옛 관습으로서 ”배에 덫을 씌우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많은 밧줄로 선체를 감고 그것을 크랭크에 감아 함께 잡아당겼다. 당시에 배가 부서지지 않도록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오직 못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밧줄로 배를 감고 잡아 당긴 것은 배가 폭풍우에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3) 스르디스를 두려워함

17하반절은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스르디스」(Syrtis)는 유사(流砂)로서 북아프리카 연안에 있는 배의 묘지였다. 북풍은 그들을 멸하고 모든 자를 삼켜버리게 할 그 스르디스로 배를 떠밀어 가려고 했다.

 

4) 절망

그래서 그 큰 두려움 가운데 그들은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리라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이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다(17하반절-20절). 이때쯤 아마 사람들의 사도 바울에 대한 확신이 더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5) 선포

21상반절은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 곳에는 이제 더 이상 죄수도, 군인도, 선원도 없고 오직 그들의 목숨을 위하여 싸우는 한 무리의 자포자기한 자들만 있을 뿐이었다. 21하반절에서부터 바울은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1하반절-24절)라고 말했다. 그 사람들에게는 바로 사도 바울이 한 것과 같은 권위 있는 말이 필요했다.

 

2. 말씀의 뒷받침

 

당신은 어떻게 그가 그리 담대할 수 있었을지가 궁금할 것이다. 첫째, 그는 그의 주제를 알았다. 그리고 둘째, 그 의미를 알았다.

 

1) 주제 - 진리

성경을 가르칠 때 당신은 권위를 가져야만 한다. 마태복음 7장 29절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치시는 것의 주제와 그 의미를 잘 아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목사님, 파나마 운하의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목사님, 불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그에게 ”불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드리지요. 성경에 이르기를...”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경우는 다르다. 왜냐하면 내가 그 주제를 알며 그 의미를 알고 있어서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권위를 추구한다. 만일 바울이 ”어이 ! 친구들, 내 생각에는 어쩌면 괜찮을 것 같네”라고 말했다면 어떠한 일인들 이를 수 있었겠는가? 만일 당신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권위있게 말하라. 당신이 진리를 알 때 권위를 가지고 그 진리를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2) 근원 - 하나님

당신이 권위를 가지고 말하려고 한다면 먼저 당신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실히함이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모든 권세를 자기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요 5:27). 또한 그분은 이 권세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다. 바울은 그 밤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신 말씀에 대해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말했다. 만일 당신이 지도자라면 권위를 가지고 말하라.

만일 사람들이 기술자와 목사, 가정주부, 그리고 의사를 불러 놓고 암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면 청중들은 앞의 세 사람에 대하여는 믿지 않겠지만 의사의 말은 믿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권위를 가지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권위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신뢰할 것이다. 지도력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서 사용하는 부드러운 권위이다.

 

3) 요지 - 명령

디모데전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을 명하고가르치라”고 말했다. 우리 교회의 교역자 회의에서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 말씀에 하나님이 그렇게 제안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당신은 정말 하나님이 제안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10가지 제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10가지 계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이 ”너희들이 고려해 볼 값어치가 있는 어떤 것을 너희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항상 ”주(主)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하신다. 성경에 그것이 사실이고, 당신이 이를 믿는다면 권위를 가지고 그것을 말하라.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을 강건케 한다

 

 

1. 효과

 

확신을 갖고 그것을 권위있게 말할 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힘있게 하는지 당신은 놀랄 것이다. 사도행전 27장 22상반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고 말했다. 25절에서 다시 그는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그의 모든 권위를 사용해서 그들을 인도하려 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위안으로 인하여 그들은 그 상황에서 안심할 수 있었다.

 

2. 대상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지도자들이 세워 줘야 할 사람들은 세가지 형(型)이 있다.

 

 

1) 규모없는 자

14상반절은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라고 말하고 있다. 규모없는 자들은 규범들을 잘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에게 당신은 ”형제여 ! 그러한 것은 교인으로서 할 일이 못 됩니다”라고 제한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규모없는 자들을 권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질서없이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2) 마음이 약한 자들

14하반절은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라고 말하고 있다. 중간에 서서 끝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합리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시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당신이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당신은 너무 날뛰어 문제 가운데로 빠져들어가는 자들을 다루어야하고, 어떤 사람들은 움직이도록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중에는 규모없는 자들이 있고 마음이 약한 자들 - 누가 항상 밀어 줘야 하는 소심한 사람들 - 이 있다.

 

2) 힘이 없는 자

이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을 강건케 해야 한다. 규모없는 자들을 강건케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제한들을 둔다는 것이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강건케 한다는 것은 그들로 좀더 모험적인 일을 하도록 그들을 뒤에서 밀어 준다는 것이며, 힘이 없는 자들을 강건케 한다는 것은 그들을 세워줄 수 있도록 그들의 약함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의 큰 확신과 담대함으로 이와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존경할 만하며, 신뢰할 만하며, 선도권을 잡으며, 좋은 판단을 내리고, 권위를 가지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을 강건케 한다.

 

지도자는 낙관적이며 열정적이다

 

 

열심을 내라 !

 

 

나는 한 여인이 신문에 기고한 기사를 당신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 기사의 주제는 ”열심을 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바로 조금 전에 로레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내게 마치 머리에 나사가 풀린 것처럼 속이 비고 끈이 풀린 것 같은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당신도 이 로레인 같은 사람을 만나 보셨지요? 예, 당신도 아마 그와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주 흔한데, 사실 그들은 국제적인 전염병이 될 위험도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큰 문제 가운데 빠져 있을까요? 평균적으로 보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병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탄이나 슬픔이나 후회로 인하여 마음이 짓눌린 것일까요? 좀처럼 그렇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까요? 그들은 희미하고 미지근하며 열정이 없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영양제들이 그들을 회복하게 할 수 있을까요? 가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텍사스의 황소처럼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작, 즉 그들이 어릴 때부터 받은 과잉 보호, 또는 무관심, 보턴만 누르면 이루어지는 편리한 자동 기계들, 기계적인 부모...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을 오늘날과 같은 무감각한, 멍청한 상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백만 명 중에 단 한 명도 그들의마음에 깊은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태평하게 인생을 표류하면서 이 혼돈된 세상을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그들은 그들의 세 끼 밥을 먹고, 태평스럽게 8시간 잠을 자고, 힘들이지 않고 일상 생활을 하며 ...마치 한 무리의 만족한 소떼 같습니다. 이 풍부한 세상은 모든 도전들과 모험들과 찬란한 꿈들과 높은 고지를 향한 시험들과 마음을 감동케 하는 아름다움과 용기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은 그저 한낮 건조한 바람과 같이 무의미할 뿐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치과를 다녀오는 것 외에는 움직이기를 싫어하고, 그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 주려고 하면 짜증을 냅니다.

그들은 그 가운데서 스스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은 그저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메뚜기마냥 뛸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은 조용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상당히 옳은 말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다 열정을 배울 수는 있습니다. 아무도 열정적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주위에 있는 세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만이 오직 당신의 머리에 축적된 그 적은 개인적인 기억들과 지배력의 톱니 바퀴를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밖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놀라운 기사들을 바라보십시오. 열망과 호기심을 가지십시오. 뜨거워지십시오. 열심을 내십시오.”

꼭 축구 코치가 하는 말 같다. 세상에서 다소의 열정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이다. 내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특권 곧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富)를 지닌 이상, 나는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일 수밖에 없다. 내가 도울 수는 없지만 열정적인 사람이 되라. 바울이 바로 그러했다. 바울은 배에 동승한 사람들에게 말할 때 ”안심하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라고 말한 것이다. 당신이 만일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열정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사도행전 20장 22-24절에서 바울은 ”나는 예루살렘에 급히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곳에서 이루도록 맡기신 일을 나는 완수해야만 합니다. 쇠사슬이나 환난이 나를 기다려도 좋습니다. 나는 아직 마쳐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주 열정적이었다.

좋은 지도자는 존경할 만하고, 선도권을 잡으며, 좋은 판단을 하고, 권위를 가지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을 강건케 하고, 끝없이 낙관적이며 열정적이다.

 

지도자는 그의 절대적인 것은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1. 선원들의 두려움

 

1) 물 깊이를 측정함

사도행전 27장 26-28절에서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 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 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 다섯 길이라.”

물 깊이가 말해 주는 것은 육지에 가까와질수록 얕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물론 그 곳이 오직 스르디스(모래톱, 배들의 매장지)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꺼렸다. 29절은 계속해서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배에 있는 닻을 내려서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 했다.

 

 

2) 도망을 막음

30절은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배에서 거루를 내려놓은 것은 사실은 도망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거루로 도망가면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31절은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 한 가지 법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다 이 배에 있어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32절은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고 말하고 있다.

 

2. 절대적인 것의 토대

 

이것은 아주 간단한 원리이다. 지도력은 결코 그 절대적인 것을 타협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수적으로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겠으나, 당신의 절대적인 것에 대하여는 타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분별하고, 또한 그 토대 위에 서서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어떤 분명한 것을 가르치지만, 당신이 대하는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들이어서 당신은 그 말씀을 그들에게 직접 적용하지 않으려 한다. 당신이 말씀을 타협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당신은 순결성을 잃게 될 것이다. 당신의 순결성을 잃으면,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잃게 된다. 당신은 당신의 절대적인 것들 - 지도력의 올바른 표준 - 을 결정하고 그것을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타협을 시작하면 당신의 특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당신의 특성을 포기할 때 당신의 혼을 버리는 처사가 된다. 당신이 당신의 혼을 버리면 이는 당신 자신을 버리는 것이 된다.

 

 

지도자는 목표를 바라보지 장애물을 바라보지 않는다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고 너희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행 27:33-34).

바울은 폭풍이나 그들의 문제들을 염려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분, 우리는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올 때 이를 감당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발생할 일들을 보지 않았다. 그는 폭풍이나 파선을 염려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모든 사람이 건강해서 모두 잘 헤엄쳐 나갈 수 있기를 원했다.

지도자는 마치 훌륭한 장애물 경주자와 같다. 그는 장애물을 보지 않고 오직 골인 선만 바라본다. 장애물은 조금도 당신을 막을 수 없고, 다만 넘어지게 할 뿐이다. 바울은 항상 과정을 바라보지 않고 결과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기는 한데, 우리가 그것을 이루기에는 너무 힘들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도자는 목표를 바라본다. 문제들은 다만 그가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뛰어 넘는 장애물에 불과할 뿐이다.

 

지도자는 본을 보임으로 인도한다

 

 

”음식을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행 27:34-35).

바울은 모범을 보였다.

 

 

1. 성경적인 모범

 

여기에 열쇠가 있다. 지도력은 본을 보임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1) 빌립보서 4장 9상반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2) 고린도전서 11장 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3) 디모데전서 4절 12하반절

”...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4) 베드로전서 5장 3하반절

”양 무리의 본이 되라.”

 

5) 히브리서 13장 7절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믿음을 본받으라.”

 

2. 살아 있는 모범

 

실제 살아가는 삶에서 본이 되도록 하라.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 자녀들에게 경건의 본(本)이 되어야 한다. 선생들은 자기가 가르치는 어린이들이나 청년, 어른들에게 경건의 본(本)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따라오도록 경건의 본(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모델들을 통해서 일하시기 위하여 지도자들을 택하셨다.

 

 

지도자는 사람들을 활동하게 한다

 

 

당신은 배의 항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바울이 다른 사람들을 활동하게 만든 사실을 아는가? 그는 군인들로 하여금 밧줄을 끊게 하고, 다른 사람들로 음식을 가져오게 하며, 또 다른 사람들로 이를 나누어 주도록 했다. 사도행전 27장 36-37절은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 육인이러라”고 말하고 있다. 지도자는 사람들을 활동하게 만든다. 바울은 모든 자로 참여하여 일하게 했다.

 

지도자는 그의 권위를 위임할 줄 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그는 그 곳에서 2주일밖에 거하지 않았다(행17:1-10). 그가 그 곳을 떠났을 때 그 곳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교회가 바로 그 증거가 전(全) 마게도냐, 아시아, 그리고 온 세상에 퍼진 교회였다. 바울은 그 곳에 지도자를 세우고, 그들에게 교회를 맡겼는데, 그들은 잘 감당하였다. 그는 이렇게 권위를 위임해야 할 줄을 알았다.

출애굽기 18장 19-23절에서 모세의 장인은 모세에게 ”자네 혼자서만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없네. 자네는 지도자들을 잘 길러야 할 걸세. 천을 다스리는 사람, 백을 다스리는 사람, 열을 다스리는 사람들을 세워야 하네”라고 말했다. 그래서 모세는 지도자들을 세웠다.

 

지도자는 성공한다

 

 

이야기는 38절에서 계속되고 있다.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가니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38-44절).

지도자는 바울이 성공한 것같이 성공한다.

 

바울은 죄수의 위치에서 지도자의 위치까지 올라갔다. 그는 신뢰를 받았으며, 선도권을 잡았으며, 옳은 판단을 했고, 말에 권위가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강건케 했고, 낙관적이며 열정적이었고, 절대적인 문제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았으며, 장애가 아니라 목표를 바라보았으며, 본을 보임으로써 지도했고, 사람들을 활동하게 할 수있었으며, 책임을 위임할 수 있었고, 성공했다. 그들은 모두 무사히 해안으로 나왔다. 그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쳐다보면서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여러 방면에서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신다. 당신은 이 원리들을 살펴보며 ”나는 그러한 자격들을 갖추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느꼈지만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목표들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위하여 지도자들을 점점 더 많이 세우시기를 기도한다.

 

 

확인 질문

 

 

1. 선천적인 지도자의 9가지 특성은 무엇인가? 하나 하나 설명해보라.

 

2. 왜 선천적인 지도자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문제를 일으키는가?

 

3. 왜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힘든 일인가?

 

4.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을 초래하는가?

 

5. 왜 많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는가?

 

6.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한 지도자들의 큰 두려움은 무엇인가?

 

7.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 권위를 갖는 사람에게 왜 죄책감이 생기는가?

 

8.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다섯 가지 사실들을 말하고 설명해 보라.

 

9. 왜 바울은 로마로 여행을 했는가?

 

10. 항해를 하는 동안 바울이 지도자가 된 것이 왜 놀라운 일인가? 지도자의 지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11. 율리오가 바울을 시돈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만나도록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그의 위험은 무엇이었는가?

 

12. 사람들이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에 대하여 믿는 것 한 가지는 무엇이며,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믿지 않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13. 그들이 미항에 있을 때 바울은 왜 그 배의 책임자들을 권고했는가?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

 

14. 선도권을 잡는 데 포함된 다섯 가지 원리들을 말하고, 그 하나하나를 설명해 보라.

 

15. 느헤미야가 선도권을 잡았을 때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가? 왜 그것이 중요한가?

 

16. 사람들이 목회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러한가?

 

17. 좋은 판단을 하는 데 지도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 두 가지는 무엇인가? 그것의 중요성을 설명해 보라.

 

18. 사도들이 사도행전 6장 1-3절에서 지도자들을 세우는 데 있어 그 방법의 중요성은 무엇이었는가?

 

19. 배에 있는 사람들이 왜 북풍을 무서워했는가?

 

20. 바울이 어떻게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21. 지도자가 세워 줘야 할 세 가지 형(型)의 사람들은 누구인가? 각 사람들의 특성을 설명해 보라.

 

22. 바울은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의 열정을 나타내었는가?

 

23. 우리는 왜 우리들의 절대적인 것에 타협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24. 좋은 지도자는 문제들을 어떻게 보는가?

 

25. 지도자가 본(本)을 보이는 것이 왜 중요한가?

 

26. 지도력에 대한 열 두 가지 원리를 무엇인가?

 

정리

 

 

1. 지도자가 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지도력에 있어 당신의 책임을 분석해 보라. 당신은 자원하는 자인가? 아니면 어떤 것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 부탁해야 하는 사람인가? 당신은 당신의 지도자들에 대해 비판적인가? 당신은 가끔 당신의 지도자가 맡긴 임무 수행에 실패하는가? 우리는 우리들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돕는 위치에 서야 한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히브리서13장 17절을 암기하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2. 신뢰란 말을 당신의 표현으로 정의(定義)해 보라.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느 정도로 당신은 그들을 신뢰하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삶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얼마나 당신을 신뢰한다고 믿는가? 당신은 그들의 신뢰를 보증하는가? 당신은 순수하게 그들에게 최상의 호의를 보이는가? 빌립보서 2장 3-5절을 읽으라.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겸손을 당신의 표현으로 정의(定義)해 보라. 당신은 당신의 삶에 그리스도의 겸손을 나타내는가?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이 분야에서 당신이 자랄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시도록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 문을 열어 놓는 시간을 가지라. 이번 주간은 각자가 신뢰받고 존경받을 수 있도록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에 신실하라.

 

3.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삶이나 사역에 있어 도와야 될 일을 보았을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당신은 지금 어떤 필요에 직면하고 있는가? 또는 아직 직면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올 것들이 있는가?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필요를 보았을 때 기도하였다. 필요에 대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 문제 해결의 좋은 방안들을 적어 보라. 실행할 수 있는 해결책을 보았을 때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한 행동을 개시하라. 당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결정하고, 그 필요를 돕는 것에 당신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라.

 

4. 마태복음 7장 29절은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지도자로 알려졌다. 마태복음 5-7장을 읽으라. 예수께서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신 말씀의 목록을 만들어 보라. 그분의 권위의 근원은 무엇인가? 당신이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그 근원은 무엇인가? 당신이 권위를 가지고 말하려면 당신이 말하는 것의주제와 그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 당신은 성경을 필요한 만큼 충분히 알고 있는가? 당신은 그 말씀의 진리를 알고 있는가?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1년에 통독할 수 있는 계획을 짜보라. 당신이 읽는 부분에서 명령이나 영적인 원리들과 연관된 말씀을 암송하라.

 

5.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 말씀을 타협하려는 경향을 발견하는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타협하게 하는 그 이유들은 무엇인가?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타협할 수 있는 환경이 왔을 때 타협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와 같은 이유들이 당신이 타협한 경우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것이 필요한가? 당신의 절대적인 것을 타협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