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고 기뻐하리라
(빌 1:15-18)
(빌 1: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빌 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빌 1: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진 인간이 좋은 일이 있을 때면 기뻐하며 즐거워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근심하며 슬퍼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사명감이나 믿음이 아니고는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힘으로 매일 매일이 육신적으로는 매우 고통스러운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참은 정도가 아니라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를 좀 더 쉽게 번역한 성경을 보니 (빌 1:18) “하지만 그들이 내 마음을 속상하게 한다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기뻐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견디기 힘든 환경이나 외부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어제, 오늘, 내일을 가리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라는 전 전후 기쁨인 것입니다.
과연 평범한 육신과 연약한 믿음을 가진 우리도 가능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의 바울 사도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도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는 전천후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바울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 구원받은 기쁨
먼저 평범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라는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답변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라는 대답입니다.
물론 정답입니다. 문제는 과연 누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증명서를 발급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를 찾는다면 간접적인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된 증거,
2) 예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진리의 사람이라는 증거,
3) 예수님이 기쁨과 소망이시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항상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었더니 평소 마음에 원하는 소원이 다 이루어지고 만사가 형통하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이전보다 더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구원의 확신을 갖기 전과 이후가 너무나 대조가 되는 변화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1) 이전에는 남부럽지 않은 부귀권세가 누리면서도 만족과 기쁨이 없었고,
2) 건강할 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고와 죽음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과,
3) 사랑은 좋은 것이며 나도 사랑하며 선하게 살고 싶으나 오히려 죄가운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내 모든 죄가 사함을 얻었다는 사죄의 확신을 얻고 난 다음부터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부터 평화가 넘쳐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늘 좋은 일만 있는 것도, 만사가 형통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때로는 내가 원치않는 질고와 시험과 고통으로 인해 잠깐 근심할 때도 있지만 그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찾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교회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 그 무엇도 나와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비밀을 깨닫게 될 때 근심과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도 도리어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는 전천후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노라면 우리의 삶이 반드시 그와 같이 항상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예전처럼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분노하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렇다면 나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인가? 라는 회의 때문에 신앙의 근본이 흔들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쁨이 처음 믿을 때와 똑같이 매일 매일 유지되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설교를 유창하게 잘 하고 남을 웃기는 유명 연예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왜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유명 연예인들이나 유명 인사들이 자살을 할까요? 그 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악착같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말입니다.
예화
영국의 맨체스터에 있는 해밀턴 박사에게 한 환자가 찾아와서 저는 우울증에 걸려 고독과 공포 때문에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죽고만 싶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했을 때 당신의 일상 생활에서 한번 벗어나서 웃음을 찾아보라고 하면서 서커스의 광대 그리말디의 연기를 한번 구경하라고 추천했습니다. 그 때 환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바로 그리말디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삶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지 몰라도 실제로 세상을 살아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연조가 점점 더해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십자가의 사랑이나 구원에 감격이 점점 식어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감격이 식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극복하여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를 위해서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랑과 기쁨의 영이신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1) 말씀을 깨우쳐 구원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2) 병든 마음과 육체를 치료해주시고, 3) 슬픔과 걱정과 미움으로 가득한 마음을 비워 주시고, 4) 믿음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5) 그 위에 기쁨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행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닐지라도 1)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고, 2)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않고, 3)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삶을 소홀히 한다면, 그 때 마귀가 틈타서 내 마음에 근심과 염려와 미움과 시기와 탐욕이라는 잡초와 엉겅퀴를 심어 나를 죄에 빠져 기쁨을 다 도둑질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을 받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기서 ‘술’은 마시는 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하는 모든 죄악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소극적으로는 시험에 들어 죄악에 빠지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기쁨이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성령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2. 영혼 구원의 기쁨
성령 충만한 삶이 기쁨 충만한 삶이지만 그 기쁨을 감성적으로 느끼려고 한다면 그 것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한 삶을 마치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상태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지속하려면 내가 기쁨을 느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나를 종교라는 사슬로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내게 기쁨이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일까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처럼 수직적으로는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그 다음 수평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그처럼 관심을 쏟으시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구원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영혼구원을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화
아무리 금슬이 좋은 부부라고 해서 일평생을 결혼식 당일 신혼기분으로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영원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사랑을 담는 그릇이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고 새는 바가지처럼 금이 가있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우리 결혼을 반대하면 같이 도망가든지, 같이 죽자던 부부도 세월이 흐르니 부부싸움도 하고 심지어 이혼소리까지 들먹이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육신의 사랑에는 권태기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부에게 자녀를 선물로 주셔서 그 자녀들을 사랑으로 키우는 과정을 통해서 그 권태기를 극복하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이해와 용서와 사랑을 나누면서 점차 피차의 소중함을 깨닫는 노년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자녀들에게 효도를 받으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복음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헌신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1)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사명감입니다.
2) 내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며, 그것이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사명임을 깨닫게 됩니다.
3)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것도 기쁘지만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그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될 때 기쁨이 더 큰 법입니다.
4) 더 나아가서 복음 전도를 위해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으로 알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숙한 믿음의 삶입니다.
(벧전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5) 성숙한 믿음의 사람의 소원은 예수님을 닮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배우고, 따르고자 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제자의 삶입니다.
6)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축복을 받는 것 못지않게 고난을 받는 것이 더 큰 축복임을 알고 그 일에 구체적으로 시간과 물질과 노력과 생명까지도 드려야 하겠다는 헌신을 삶입니다.
물론 그 때문에 손해를 보고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후회하거나 슬퍼하거나 원망하거나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에 상급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경험하게 되는 내면적인 기쁨, 진정한 기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기쁨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까닭은 개인 구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오신 때를 가리켜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이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나라의 주체이시며, 그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지체로서 주기도문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가장 첫 번째 해야 할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눅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천국 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화
세계 여러 나라들 가운데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흔히 경제 성장율을 가지고 말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정신의 차이입니다. 아무리 경제가 성장한다고 할지라도 국가나 이웃은 안중에도 없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개인이기주의는 극심한 빈부차와 심각한 양극화와 이데오르기와 정당과 각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라가 평안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진국은 온 국민이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안정과 평화를 더 우선으로 하고 이를 위해 성실한 납세와 국법을 준수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정신으로 나라는 안정되고 더욱 부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전 국민의 단합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는 한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총체적으로 하나로 연합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비난하지 말고 격려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로마 감옥에 수감되기 전까지 사도 바울은 세 차례의 선교 여정을 통해서 많은 수고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로 인해 여러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 수감이 되어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세우는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바울을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으나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은 가두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도가 위축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 전도를 확산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음으로 도전과 자극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활발하게 복음이 전파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대되어갔습니다.
오늘 성경은 복음 확대가 상반된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산불처럼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 1: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 여기서 ‘투기와 분쟁’은 믿음이나 하나님 사랑이나 사명감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업적과 인기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를 이용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로마에는 교회가 있었고 어떤 전도자들은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여 큰 변화가 일어나고 그 사실이 로마의 교우들에게 퍼져나가자 이미 로마에 있던 기존의 지도자들의 지위가 흔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바울에 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되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 즉 명예와 존경을 받을 높은 지위를 회복키 위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목적와 이유가 오로지 복음 전도의 성과에 있어서 바울을 누름으로써 자신들의 명예와 지위를 확고히 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전하면서도 정작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하는 본인들은 다툼과 분쟁과 불화와 싸움판을 벌리게 되는 것입니다.
2) 그에 반하여 ‘착한 뜻으로’라는 말은 복음에 대해서 주님에 대한 사랑과 구원에 대한 감사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와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빌 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움을 받은(빌 1:16)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능력과 은사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받는 존경과 사랑에 대해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바울이 했던 것처럼 사랑이 그들의 동기가 되어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의 경우는 바울의 투옥으로 인하여 믿음이 약하여지기는커녕, 감옥에 갇히고서도 전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바울을 보고서 더욱 용기와 힘을 얻고 '겁 없이'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빌 1: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들은 바울을 본받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거룩한 신앙의 지도자를 본받겠다는 자세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후자인 '착한 뜻으로‘ 일 것입니다.
물론 전자인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여기서 ‘겉치레’라는 말은 거짓된 동기나 가장하여 나타낸다는 뜻인 반면에, ‘참으로’는 ‘숨겨지거나 위조되거나, 왜곡되거나, 생략되거나, 은폐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기뻐하고’라는 말은 현재 능동형으로 계속 기뻐하고 있는 모습이고, ‘기뻐하리라’는 말은 미래 수동태로 앞으로도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잘못된 동기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복음이 확산되어진다면 그것 때문에 바울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를 독점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확산되는 것만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나 아니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내가 하는 식으로 해야만 한다는 아집을 버렸습니다. 누가 복음을 전하느냐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얻은 명예나 지위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확산되어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만이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추종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모든 기쁨의 근원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일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는 사람은 환경의 변화에 관계없이 지속적인 평안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그렇다면 바울이 무엇으로 인해 그렇게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이었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우리도 그 비밀을 배워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는 복된 삶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지난 날 화려했던 업적을 추억하며 사는 사람이 니라 언제 어디서나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지상에서의 온갖 사역은 근심과 슬픔과 죄악과 죽음으로 고통당하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내가 믿고 구원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2) 그 복음을 나 혼자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믿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신과 같은 기쁨을 얻는 것을 보게 될 때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3) 그 복음을 전도 때문에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될지라도 낙심하지 말 것은 하늘에 상급이 예비되어 있음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4) 자신이 지금 옥중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함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함을 받고 복음이 더 널리 확산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하게 됨을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외부적으로 석탄이나 기름이나 가스를 공급받지 않아도 원자로 안에 끊임없이 핵분열이 일어남으로 엄청난 열이 발생되는 것처럼 영원한 기쁨의 원천은 복음 그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할 때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가 나타나고 변화가 일어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인에 대한 판결은 검사나 변호사가 아니라 오로지 판사의 주권인 것처럼 교회 안에서 선악간의 행위를 판단하는 주권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권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권한은 오로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고 돕고 협력하고 세우고 칭찬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평소 낯선 길은 두려워하고 즐겨 다니는 길만 다니고, 친한 사람과만 대화를 하고, 단골집만 찾아다니는 속 좁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주를 지으시고 다양한 생명체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여러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여러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일을 하시든지,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지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방법과 다를지라도 우리는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의 방법만이 통하고, 하나님만이 승리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는 것이 최선이요, 결과적으로 내가 잘되는 길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업적이나 자기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에게 자기를 인정해 주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기쁨의 근원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의 삶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일을 시기하거나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짐을 기뻐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감옥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마음이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오로지 그리스도와 그의 일이 잘되어지는 것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는 사람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심을 믿고 바울과 같은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변함없이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는 기쁨 넘치는 복을 주실줄 믿습니다.
(18절)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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