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오히려 큰 도움 /(빌 1:12-14)

미션(cmc) 2011. 3. 21. 09:42

오히려 큰 도움
(빌 1:12-14)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오늘 설교제목이 ‘오히려 큰 도움’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이와 같은 제목을 붙였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좀더 쉽게 번역된 성경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빌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쉬운번역)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가 여기서 당하고 있는 수모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으로 생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고의 존재이기 때문에 내면적인 사고의 전환과 변화가 없이는 외적인 행동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를 받게 되면 무엇보다 ‘내면적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만 비로소 ‘외적인 행동의 변화’도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만물과 사건을 대하는 내면적 사고의 변화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이나, 다른 종교를 믿었을 때에는 허무하고 무가치하게 여겼던 것들과 심지어 불행과 저주처럼 생각되어졌던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는 동일한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고, 생각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한 변화는 우리가 하나님께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가장 큰 축복 중에 하나이며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1. 전화위복의 축복
성도들이 좋아하는 성경 중에 하나는 시편 1 편의 복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이 어떤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만사가 꼬이기만 하는 세상에서 만사형통(萬事亨通)이라는 말과 같은 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만사형통이라는 복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설령 그러한 복을 받았을지라도 그것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됩니다.
타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은 만사가 형통하기만 하다면 안일무사해지고, 교만해지고, 영적으로 게으름과 탐욕으로 인해 오히려 믿음이 약화되고 병들기 쉽다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 좋은 증거가 바로 한국의 기독교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까? 그로 인해 기독교가 엄청난 물량적인 부흥이 있었지만 질적으로는 갈수록 퇴보하여 사랑과 연합과 섬김과 희생은 찾아보기 어렵고 갈등과 대립과 분파와 세속화로 인해 점점 지탄의 대상이 되어가면서 무엇보다 전도가 더욱 어려워져가고 있습니다.
흔히 대박, 대박 하는데 대박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이는 만사형통만이 절대적인 복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나서 매사가 다 만사형통하여 풍요와 자유로움 속에서 사는 것만이 최상의 축복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서 만사형통보다 하나님의 더 좋은 축복이 있다면 과연 그것이 어떤 복일까요?
그것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축복일 것입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어떤 사건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틀림없이 나에게 손해요, 고통이요, 화가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시간이 지나니 오히려 결과적으로 더 유익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만사형통’보다 ‘전화위복’이 더 좋은 축복이 되며, 어떻게 해야 전화위복의 복을 받을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깨닫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목적은 고달픈 현실을 이겨나가는데 힘을 얻고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을 절대자의 힘을 빌려 성취하고자 하는 복을 받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종교 때문에 핍박과 고난을 받게 된다면 믿음이 약한 사람은 자기가 믿는 종교를 쉽게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믿음이 연약한 빌립보 교회나 로마 교회의 신자였다면 사도 바울이 복음 전파를 하다가 로마 감옥에서 고난을 겪는 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혹시 예수를 믿는 자기들에게도 예수를 믿기 때문에 고난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 로마 교회 성도들의 신앙 수준은 그 정도로 연약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낙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도 바울을 위로하기 위해 에바브로 디도를 위로의 사절로 로마에 파송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도 변함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복음 전도에 큰 유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빌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는 사도 바울의 감옥 생활이 ‘만사형통’과는 정반대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보면 오히려 복음 전도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전화위복’이라는 말입니다.

2. 복음의 진보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이 편지를 쓴 때는 그가 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이었다. 바울은 로마 군대의 핵심인 시위대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시위대' 라는 말은 본래 로마 황제의 친위대를 가리키는 말로 로마의 군대 중 최강을 자랑하는 정예 부대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법에 따라 하루 24시간 동안 보초가 4교대로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누구와 면회를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개인적으로 기도하거나 편지를 쓰려고 할 때 마다 시위대의 로마 병사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로마 병사가 그를 감시하든지 간에 죄수로써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소한 것까지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간수를 만나게 되면 평소에 허용되었던 것들이 제한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러한 환경에서도 긍정적인 자세로 도리어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교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음에 대해서 도리어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투옥되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비굴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재판하는 권력자 앞에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구차하게 살기 위해서 변명을 하거나 살려달라고 애걸을 하지 않고 도리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재판장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행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로마 교인들에게 그러한 바울의 모습은 신앙을 위축시킨 것이 아니라 더욱 북돋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 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로마 교인들은 자극받아 더욱 활발히 복음을 증거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그같이 의연한 태도가 로마 교우들에게 고난의 두려움을 극복케 하는 요인으로 크게 작용하여 점점 과열되는 로마 황제들의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촉진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이년이라는 장기간의 수감 생활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복음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시위대 사람들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처음에 로마 교인들에게 위대한 복음의 사도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되어 온다는 소식은 매우 절망스럽게 들렸을 것입니다.
복음 전파로 인해 바울이 투옥되었다는 사실은 로마 교인들의 복음 전파 사역을 위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자신들도 얼마든지 옥에 갇힐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부도덕한 죄를 짓고 호송되어 온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선한 일로 인해 호송되어 왔다는 사실은 로마 교인들에게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로마 교인들에게 그러한 바울의 모습은 신앙을 위축시킨 것이 아니라 더욱 북돋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 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로마 교인들은 자극받아 더욱 활발히 복음을 증거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그같이 의연한 태도가 로마 교우들에게 고난의 두려움을 극복케 하는 요인으로 크게 작용하여 점점 과열되는 로마 황제들의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촉진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 화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Triumph in Christ)’라는 책에서 “달빛만이 비치는 어두운 밤, 고적한 시간에 수많은 감시병들이 바리새인으로서의 그의 초기 삶,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적대감과 박해, 그의 놀라운 개종 그리고 그가 투옥되게 된 이유 등에 대한 바울의 증거를 들었을 것이다. 분명히 이 모든 것은 친위대 보초들 중에 오고간 대화의 주제였으며, 그들이 그의 부당한 투옥을 이해했을 때 군인들 사이에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바울을 묶은 사슬은, 개종만 된다면 그들이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때 세상 끝까지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로마제국의 우수한 군인들과 의사를 소통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되었다. 그것은 삶의 모든 환경이란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택한 백성의 삶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강단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아멘이 아닙니까?
오늘 성경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들도 그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를 믿는 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 답은 우리가 만사를 접할 때 ‘내면적 사고의 전환’이라는 변화가 우리 속에 일어나야만 합니다. 저는 그것을 믿음의 정수기라고 비유로 말하고 싶습니다.

예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양식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깨끗한 공기와 물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물을 찾아 헤매는 아프리카 인들이 짐승과 더불어 오염된 강물을 마시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국내에서도 즉석에서 마실 물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값비싼 생수나 생수기를 통해서 물을 마시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수기는 마시기에 부적합한 물을 필터를 통과함으로 해독을 시켜 식수로 전환을 시켜 마음 놓고 물을 마실 수 있게 해 줍니다.

1) 태풍에 대한 섭리
태풍이 불어 닥칠 때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엄청난 파괴와 손실 때문에 좌절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글을 인용하면 태풍은 겉으로 보면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 생태계적으로 보면 돈으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유익함을 준다는 것입니다.
① 태풍은 강과 바다를 뒤엎어 심각했던 녹조현상을 없애주고,
② 태풍은 하천에 썩은 오물을 씻어내며 온갖 더러움을 청소해주고,
③ 태풍은 바닷물을 정화하고 산소를 공급하여 바다에 생물들을 살게하며,
④ 태풍은 대기를 순환시켜 맑은 공기를 가져다주며,
⑤ 태풍은 부실공사를 무너뜨려 건축물과 교량과 도로를 보수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영적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태풍과 같은 고난 뒤에는 하나님의 잔잔한 은총이 숨어 있음을 깨달을 때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화
때때로 화산에 의해서 대규모의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이 초래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화산을 무섭게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화산은 인간에게 유익도 준다. 화산증기를 개발하여 열과 전력을 생산해 오고 있다. 온천은 의학적인 목적이나 세탁 혹은 목욕하는 데 사용된다. 용암은 건축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 경석은 인기있는 연마제나 광택제로 쓰인다. 용암층은 다공성으로서 물을 깨끗하게 거를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물의 근원이 된다. 놀라운 화산이 인간에게 주는 유익은 실로 많다.
그렇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없으면 땅은 사막이 되고, 장마가 오지 않으면 숲은 풍요롭게 자라지 못하고, 태풍이 오지 않으면 바다와 하늘의 오염은 씻겨지지 않습니다.
사람도 삶의 먹구름과 장마와 태풍 없이는 믿음이 건강하게 자랄 수 없고 영혼이 바다와 하늘처럼 맑고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2) 고난에 대한 섭리
하나님은 만사를 그렇게 섭리하시며, 하나님과 함께 일한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내면적 사고의 변화를 경험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사건은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온 가족과 이스라엘을 위기 중에서 구원해 내는 기회가 되게 한 일입니다.
요셉을 판 형제들이 그 사실이 애굽의 국무 총리가 된 요셉에게 발각되어 이제는 죽었구나 낙담하고 두려워 떨 때 요셉이 형제들을 안심시키며 위로하고 그들을 애굽으로 초청하여 살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요셉은 세상 만사를 긍정적인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아는 내면적 사고의 전환이 있었음을 그의 형들에게 한 말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나)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똑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으나 단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만 가나안 정복에 대해서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온 백성들을 절망에 빠뜨렸던 열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긍정적인 보고를 한 여호수와 갈렙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투에 참여를 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그것을 자손들에게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민 14: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민 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민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안목을 열고 세상만사를 보게 되면 육신에 필요한 공기나 물이나 대지만 오염된 것이 아니라 영혼에 필요한 사상과 논리와 생각들이 오염이 되어 우리의 영혼과 신앙에 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정수된 물을 마시고, 영양가 높은 음식물을 먹고, 영양제와 보약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에는 기쁨과 평화가 없고, 근심과 염려와 불안과 분노와 미움이 가득한 불행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다른 종교를 믿었을 때는 허무하고 무가치하게 여겼던 것들과 심지어 불행과 저주처럼 생각되어졌던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영적인 정수기의 필터를 거치면서 세상만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죄가 아니라면, 그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내게 복을 가져다 줄 것이요, 내게 유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낙심하지 마시고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눈으로 다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오히려 큰 도움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오늘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을 본받아 사건만 보지 말고 사건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줄 아는 믿음의 안목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인 ‘내면적 사고의 전환’입니다.
그렇게 될 때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과 그 행복과 기쁨을 나누고 공유하는 행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