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기도 /(빌 1:3-6)

미션(cmc) 2011. 1. 24. 14:07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기도
(빌 1:3-6)


(빌 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빌 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 1: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사람은 각기 나름대로 보고 느끼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사물을 본다고 해서 동일하게 느끼지 않는 것처럼 동일한 사건에 접했을 때에도 그에 대한 반응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직을 하거나 부도를 만나게 되었을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고 다 끝난 것 같이 보여 질 것입니다.
매사가 보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실패를 성공처럼 보거나, 성공을 실패처럼 보는 착시 현상 때문에 행복해야 할 한 순간을 원망하게 되고, 슬퍼해야 할 순간에 오히려 철부지처럼 좋아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오히려 그로 인해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준비해 주시고 보다 더 새롭게 되고, 더 좋아지게 하시려는 섭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평소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송의 가사처럼 장미꽃만 아니라 가시조차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울 사도처럼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항상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고 끝난 것 같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오히려 그로 인해 더 새롭게 되었고, 더 좋아졌고, 더 잘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시행착오가 없으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좀 더 믿음의 눈으로 보고, 좀 더 믿음의 귀로 들을 수 있다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요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가는 진입로인 것을 깨닫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중심을 보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만 보게 되면 실패가 성공처럼 보이고 성공이 실패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 때문에 행복한 순간에 원망하고, 슬퍼해야 할 순간에 즐거워하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모가 쌍둥이 두 아이를 데리고 장미꽃 밭에 갔다고 합니다. 한 아이는 겁을 먹으며 ‘엄마 가시가 너무 많아요’ 라고 불평을 하였으나 다른 아이는 엄마 장미꽃이 참 예뻐요 하면서 즐거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장미는 가시도 있지만 꽃도 있습니다. 어떤 색깔을 장미꽃이든지 장미는 다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시가 없는 꽃은 장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시가 아니라 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이 왜 예쁜 장미꽃에 날카로운 가시를 붙여 놓으셨을까요? 그것은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오래 감상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장미가 가시가 없다면 저마다 장미를 쉽게 꺾을 것입니다. 장미꽃은 함부로 꺾을 수가 없어서 담장 울타리로 쓰는 것입니다.
바울은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치료가 되는 능력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의 육체의 가시 때문에 평생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 때문에 자신의 연약함을 경험했고, 그 연약함을 인해 더욱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1. 바울의 옥중 기도
오늘 성경은 바울이 감옥에서 기록한 서신이지만 옥중서신에는 무려 열여섯 차례나 ‘기쁨’ 또는 ‘즐거워하다’라는 말을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힘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 같지만 그곳에서 새 일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지방을 전전하며 복음을 전하기만 하였으나 바울은 감옥에서 여러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영적으로 훈련지침이 무엇인가를 기도하면서 옥중서신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에게 감옥은 감옥이 아니라 도서관이요, 수양관이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옥중서신은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물론 후대 우리들에게도 수준 있는 신앙과 삶을 살게하는 좋은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고통스런 감옥에서 겨우 견딘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쁨이 넘치는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를 오늘 성경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반 기독교도이었던 사도 바울이 다메섹 길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다음 자신만을 위한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치료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행 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러나 바울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 손과 발이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을 갈수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없고, 하고 싶은 말이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루아침에 그런 처지가 된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떨까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낙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절망감으로 매일 매일을 죽지 못해 사는 부득이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을까요?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돕기는커녕 이제는 내가 누군가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도움을 기다리는 서글픈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비록 감옥이지만 바울은 감옥에 들어오기 전과 다름이 없이 마음에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삶았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다리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신만을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종종 생판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나 메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구치소나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로부터 책을 보내달라, 성경책을 보내달라, 영치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요즘 구치소나 교도소와 비교가 되지 않는 열악한 감옥에서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와 성도들에게 어떤 도움을 구하는 편지가 아니라 축복을 비는 편지를 썼습니다.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사도 바울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만복의 근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한시 빨리 출옥시켜 주시기를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자유롭게 살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복을 받기를 비는 기도를 매일 쉬지 않았습니다.
그 복은 흔히 사람들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부귀 권세나 건강 장수와 비교가 되지 않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축복입니다.
(빌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가) 은 혜
여기서 ‘은혜’라는 말 cavri"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이라는 말과 더불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친숙한 말로 ‘호의, 아름다움, 미덕, 사은, 감사, 친절, 즐거움, 호의의 표현, 돌봄, 감사의 빚, 보답'을 의미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물건으로 말하면 좋은 선물이고, 생각으로 말하면 좋은 뜻이고, 마음으로 말하면 기쁘고 감사한 것을 뜻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것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기쁘고 감사하고 즐겁게 되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고 이보다 더 귀한 복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없을 정도로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만 하면 행복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각 사람마다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누구든지 즐겁게 행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요, 태어날 때부터 빈손으로 태어난 인생은 영육 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때마다 필요한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나) 평강
그 다음 ‘평강’이라는 말 eijrhvnh는 전쟁과 반대되는 혹은 전쟁의 종식이 가져다주는 평화의 상태이며, 구약에서는 ‘샬롬’이라는 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선, 좋은 것, 구원을 의미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죄인인 인간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과거사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면 인간과의 평화도 깨지고 자연과의 평화도 깨지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라는 평화는 전쟁이 종식되어지는 것이지만, 지구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때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개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모두 다 평화를 원하지만 지구상 어디에도 전쟁이 없는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오로지 상대방보다 내가 더 강할 때만이 겨우 평화가 유지될 뿐입니다.
그와 같은 인생들에게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나라와 이웃이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까닭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궁극적인 이유도 바로 그와 같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가 됨으로 샬롬의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샬롬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는 평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금과 은이나 핵무기가 아니라 십자가 예수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유가 없는 감옥에서도 그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맛보았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그와 같은 축복을 빌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가장 긴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역시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해야 할 가장 큰 축복은 은혜와 평강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평강은 나만을 위해서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해, 나라와 민족과 교회의 평강을 위해 간절히 구할 때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감사와 기쁨의 내용
사도 바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감옥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세운 교회와 성도들의 형편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 빌립보 교회는 한 두 번이 아니라 자주 자주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축복을 비는 기도를 할 때마다 바울 사도의 마음은 감사와 기쁨이 충만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 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빌 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친 이유는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어떤 은혜와 평강을 주셨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빌 1: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기서 ‘복음을 위한 일’이란 사도 바울처럼 직접 복음 전도를 하는 일이며, 그 전도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며, 그 전도에 필요한 기금을 후원하는 일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 건너가서 복음을 전한 첫 열매로 자주장사 루디아를 비롯해서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의 가족들로 더불어 빌립보 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물론 신앙연조가 매우 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회는 처음서부터 사도 바울과 더불어 복음 전도 사역에 동참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오늘 성경에서는 ‘참여하고’ koinwniva 라는 말로 ‘나누어 주다, 교재하다, 자선품이나 기부금을 내다’는 뜻으로 빌립보 교회가 바울 사도와 더불어 복음 전도 사역에 동참한 유일한 교회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오늘 성경은 ‘착한 일’이라고 칭찬하고 있으며 그 일을 빌립보 교회가 시작할 수 있게 된 주체는 빌립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를 통해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개척한 여러 교회들이 있지만 빌립보 교회처럼 복음 전도를 위해 참여한 교회가 별로 없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가 그와 같은 착한 일을 한 두 번 하다가 중단하지 않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더욱 기뻤던 것입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여기서 바울이 빌립보 교인을 향해 감사하고 기뻐한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빌립보 교인들 가운데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기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눈으로 목도하고, 또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빌립보 교인들이 착한 일을 하도록 시작하신 하나님은 시작만 해 놓고 흐지 부지하시지 않고 그것이 마침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생명을 걸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칭찬과 상급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쁜 죄를 범한 죄수처럼 차디찬 감옥에 갇혔습니다.
[빌 1: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여기서 ‘매임’이라는 말(desmo;")은 ‘올가미, 착고, 감금, 투옥’이라는 뜻으로 본래 ‘묶는다’는 말(devw)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바울과 같은 처지라면 그 같은 고통을 묵묵히 참아내는 것조차 어려웠을 것이나, 바울은 참은 정도가 아니라 그러한 중에서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 증거는 바울이 옥중서신을 통해 ‘기쁨’ 이라는 말을 자그만 치 16번이나 기록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빌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기서 ‘기뻐하라’는 동사 caivrete 는 동명령, 현재 능동형으로 현재부터 앞으로 계속해서 기뻐하라는 지속적인 기쁨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바울과 같은 처지라면 고통을 참아내는 것도 어려웠을 것인데 바울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 그 이유는 감옥에 바울 혼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2) 바울이 비록 차디찬 감옥에서 자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기 때문에 기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핍박자들이 바울의 몸은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으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까지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빌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그 중에 한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감옥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단순히 예수만 믿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믿음의 아들로 삼을 정도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몬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바울에게 감옥은 감옥이 아니라 도서관이요, 수양관이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물론 후대의 여러 교회들과 오늘 우리들에게도 옥중서신은 수준 있는 신앙과 삶에 대한 좋은 지침서가 된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1) 만일 우리도 바울처럼 매사를 원망 불평하기 전에 범사에 감사하고,
2)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남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고,
3) 매사를 긍정적인 믿음의 안목으로 보고 생각한다면 어떤 처지에서도 바울처럼 감사하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매사에 무엇이 먼저 보입니까? 아름다운 장미꽃입니까? 아니면 날카로운 장미 가시입니까?
만일 꽃을 먼저 보게 되면 가시는 있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믿음의 눈은 가시가 아니라 꽃을 보는 눈입니다.
그렇게 꽃이 먼저 보이는 사람은 그 다음 가시가 보여도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가시가 있음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가시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우리를 때때로 아프게 찌르는 고통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와 같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마치 암에 걸린 사람이 말기가 되기 전에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치료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처럼 불행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시라는 고통이 있음으로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신앙이 더 순수하게 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믿음의 종교다, 구원의 종교다’ 기타 등등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싶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에 동의할 수 있는지요?
만일 동의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며, 반대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는 두려움과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달려 모든 불행의 근원인 죄를 속해주시고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제 부활과 생명과 사랑과 기쁨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근심과 걱정과 슬픈 일이 없어서가 항상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저절로 기뻐진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의 원리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주셔서 내가 처한 환경여하에 따라 자연 발생적으로 웃음이나 분노나 슬픔이나 기쁜 반응이 일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는 말씀은 기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상황이든지 그것을 전화위복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일어나는 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만한 환경에서만 기뻐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기뻐하기 어려운 역경에서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어려운 상황이 좋아질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 어떤 처지에서도 바울처럼 우리도 감사하며 기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천당을 가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많은 세상에서 기뻐할 것이 없는 세상에서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도 절대 요소인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와 같은 기쁨의 원리를 깨닫고 확신함으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