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의 기쁨이 넘치는 일꾼
(고후 8:1-5)
(고후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고후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후 8: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타락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신론자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예수를 믿어 중생을 하고, 스스로 성경을 읽어 통달을 하고, 스스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누군가의 전도와 양육과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예화 일대일 제자 양육 이야기
‘헌신’이라는 말은 그러한 성장 과정에서 남을 돕기 위해 시간과 물질과 노력과 마음을 쏟는 구체적인 행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개인의 신앙 성장이나, 교회의 부흥이나, 지역의 복음화나, 세계 선교 역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헌신자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는 좋은 헌신자들을 만나야 하고, 국가적으로는 헌신자들이 많아야 살기 좋은 나라가 되고, 교회적으로는 헌신자들이 많아야만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같은 헌신은 반드시 희생이 동반된 수고로운 일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일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지는 기회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서 어른이 된 후 겨우 밥벌이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존경받는 자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만 많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새 신자가 변화를 받고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기쁨으로 헌신하는 일꾼들이 계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교회입니다.
1953년에 설립된 수원제일교회의 역사 벌써 58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도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헌신하는 일꾼들이 좀 더 많아져서 헌신의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 여러 부서와 기관마다 좀 더 충성스런 헌신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일은 많지만 헌신하는 사람들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2011에는 우리 모두 나 홀로의 신앙에서 탈피하여 헌신의 기쁨이 넘치는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헌신자의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마게도냐 교회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마게도냐 교회들의 설립 배경
(고후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마게도냐는 현재의 발칸 반도인 그리스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로마에 의해 정복당하여 식민지가 되었습니다(B.C.168-142).
바울은 소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 쪽으로 선교를 하려고 마음먹었으나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그의 민족을 도와 달라고 부르는 것을 본 후에,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아시아의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을 하여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행 16: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 16: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행 16: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첫 번째 개종자를 얻었는데 그가 바로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데살로니가와 암비볼리와 베뢰아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세워진 교회들이 바로 마게도냐 교회입니다.
바울 사도가 핍박자들로 인해 마게도냐 지방을 떠나서 아덴과 고린도에서 안식일마다 강론을 하는 동안에 마게도냐 교회의 사역은 실라와 디모데에 의해 계속되었습니다.
(행 18: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행 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바울 사도의 마게도냐 교회에 대한 관심은 그 후 믿음의 아들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어 지속적으로 교회들을 돌보게 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행 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사실 마게도냐는 어느 지역보다 핍박이 극심했기 때문에 바울이 마게도냐를 방문했을 때 두려움이 심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 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여기서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라는 말은 한 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인 환난을 뜻하는 현재 진행형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qlibovmenoi: 동분사 현재)입니다.
또 ‘두려움이었노라’는 말은 공포심과 두려움과 놀람과 경악을 느낄 정도의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에게 마게도냐 선교가 얼마나 힘들었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주 성령의 기쁨이 충만한 대표적인 교회로 꼽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에 어느 지역의 교회보다 마게도냐 교회에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빌 4: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마치 항상 무더운 열대 지역이 아니라 일교차가 심한 고랭지에서 자란 채소가 더 싱싱하고 맛있는 것처럼, 교회 역시 환난이 극심한 지역인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의 믿음이 다른 어느 지역의 교회들보다 건강하였습니다.
그것은 비단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신앙도 예전보다 부요해지고, 신앙의 자유가 많아진 요즘이, 핍박이 심했던 예전보다 부패하고 느슨해져 있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은 헌신을 할 수 있을까요? 얼핏 생각하면 배부르고 등 따신 교회와 성도들이 헌신을 더 많이 하고 잘할 것 같으나 성경에 나타난 교회들을 보게 되면 정반대로 배고프고 추운 교회와 성도들이 더 많은 헌신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는 마게도냐 교회들인 것입니다.
2.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신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 교회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해서 마치 요즘 목회자들처럼 자기 교회만 관심을 두는 근시안적인 사역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와 상관이 없고 오히려 자기를 왕따 시키는 것처럼 생각되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음을 볼 때 역시 큰 그릇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행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는 말씀처럼 여러 번의 흉년과 기근이 있었슴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벌리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일을 가리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롬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사실상 예루살렘 교회의 열매들입니다.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없었다면 지상 교회가 세워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를 지상 교회의 모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을 만나서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 헌금하는 일을 기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롬 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여기서 ‘가난한 자들’이란 말(ptwcov")은 ‘두려워하며, 움츠려들다, 쭈그리다, 웅크리다’라는 말(ptwvssw)에서 온 것으로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어느 정도로 가난했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또한 ‘기쁘게 ’라는 말은 ‘기뻐하다’라는 뜻과 더불어 ‘좋게 생각하다, 찬성하다, 만족하다, 행복하다, 준비하다’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또한 ‘연보’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참여하다 나누어 주다 친교하다 자선하다는 의미입니다(koinwniva).
이는 결코 마게도냐 교회들이 누가 강요해서 억지로 마지못해 헌금한 것이 아님을 뜻힙니다.
이에 대해 마게도냐가 어떤 심정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하였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오늘 성경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넘치는 기쁨’이란 말은 ‘풍부한 정도가 아니라, 과다하여 넘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기쁨이 차고 넘쳤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헌금도 넘치도록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는 마게도냐 교회들이 얼마나 큰 교회이기에 그렇게 많은 헌금을 드릴 수 있었을까? 궁금할 것입니다.
1) 그러나 놀랍게도 마게도냐 교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하거나, 신앙이 자유로워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방에서 핍박을 가해 옴에도 불구하고 넘치도록 풍성한 연보를 했다는 것입니다.
2)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게도냐 교회들도 예루살렘 교회 못지않게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이유를 마게도냐 교회들이 부자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매우 가난하지만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는 진정한 헌신이 무엇이며, 바람직한 헌신의 자세와, 헌신가 받게 되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 기쁨이 넘치는 헌신의 자세
‘헌신’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해야 할 이유를 설득했을 때 그것을 공감하고, 자신에게 소중한 시간이나 물질이나 노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누는 행위입니다.
물론 타락한 인간은 매우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헌신이 불가능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게 된 것은 먼저 바울을 통해서 그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 설명을 들었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 교회들에게 영적인 떡을 나눠준 모교회로 흉년을 만나 주리고 있을 때 지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을 돕기 위해 나누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공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롬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요롭고, 갖가지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하는 일에 매우 소극적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설득을 할지라도 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헌신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현명한 생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섬기며 헌신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필요성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마음을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흔히 은혜라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은혜는 소극적인 은혜와 적극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소극적인 은혜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신의 선행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마게도냐 교회들이 받은 헌신의 은혜입니다. ‘헌신’이라는 은혜는 자유의지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시는 은혜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값없이 받은 은혜인 구원에는 상급이 없으나 자발적인 의지로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헌신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헌신을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 중에 가장 수준 높은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 사실이 믿어지고, 이 사실이 소망되어질 때 헌신자는 기쁨이 넘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헌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헌신은 결코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재능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특권층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설령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처럼 남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신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 더더욱 기쁨이 넘치는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극심한’이라는 말은 ‘바닥이라는 뜻으로 더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낮아진 상태입니다. 또 ’ 가난‘이라는 말은 마치 거지와 같이 비천하고, 궁핍한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연보’라는 말로 단순히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헌금할 때 마음의 자세가 ‘순진, 성실, 정직’해야 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드리는 헌금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내면의 자세가 순진하고, 성실하고, 정직함의 표현이어야 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결과 마게도냐 교회들이 ‘넘치는 기쁨’이라는 말처럼 순진하고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차고 넘치는 기쁨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마게도냐 교회들이 그어려운 중에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는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헌신과 봉사는 타인을 위한 행위이지만 결과적으로 봉사는 봉사하는 사람을 행복감에 젖게 합니다.
예화; 일대일 제자훈련 양육이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수록 사람들이 일하는 것보다 놀고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조차 나 홀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입니다.
그 결과 아무리 주일 낮 예배에 출석하는 사람이 많다고 할지라도 교회 각 기관에서 헌신하는 사람들은 늘 소수의 사람들로 제한이 되어있습니다. 그 결과 그 기관에는 변화와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 모든 직분자들이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 각 부서에서 한 가지씩만이라도 맡아 헌신하고 봉사한다면 우리 교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만족할 수 없습니다. 헌신하되 한 부서에 오래 머물러 타성에 젖지 말고, 순환을 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듣고 배운 것만큼 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부서에 같은 사람들이 오래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전문성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를 거부하는 관행과 타성이 되기 쉽습니다.
당신이 우리 교회 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렇게 설치느냐? 는 식의 이야기를 삼가야 합니다. 각 부서가 등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새로운 사람들을 영입을 한다면 우리 교회 안에도 많은 일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교회는 점차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교회를 맴돌고 문지방만 밟던 사람들이 점차 나 같은 사람도 이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헌신하게 될 때 기쁨이 넘치는 교회로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충성된 종들을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실 뿐 아니라 그와 같이 헌신하는 사람은 남이 경험하지 못한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세상에서는 놀고먹는 불안한 기쁨이 있을지 모르나, 주안에서는 헌신과 수고로 말미암은 고상한 기쁨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시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 우선 나만이라도 교회 안에서 봉사할 수 있는 부서는 크게 아무런 재능이 없어도 오직 시간을 내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면 가장 아름다운 헌신인 것입니다.
2) 나부터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살려서 구체적으로 헌신을 한다면 교회는 분명히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3) 시간도 재능도 드리지 못하지만 헌금이나 회비를 드림으로 교회가 더 많은 일들을 원활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화
미국이 낳은 가장 유명한 행동 과학자라고 할 수 있는 칼 메닝거가 타계하기 전 한 기자와 인터뷰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기자가 말하기를 박사님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한 가지 요법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메닝거 박사는 진정제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라고 하지 않고 대뜸 하는 소리는 ‘그 사람보다 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돕게 하라’고 권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을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부터 도우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침대에 누워서 수발을 받는 환자보다 환자를 수발하는 사람이 더 건강한 법입니다. 헌신은 남을 돕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도움을 받는 일이며, 헌신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최선의 일인 것입니다.
멀리 가서 모르는 사람을 도우려고 하지 말고 가까운 이웃을 먼저 돕는 것이며, 내게 없는 것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으로 돕는 것이 헌신입니다. 이를 위해서 내가 교회 안에서 할 수 있는 일과 내 주변에 아는 사람을 위해서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우선 한 가지씩만 골라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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