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12-16)

미션(cmc) 2011. 1. 7. 07:45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요 1:12-16)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이 하루 지났습니다. 성탄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날입니까?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한 날입니까?

예화
때로 우리가 돌잔치에 초대를 받아 큰 부패 음식점에 참석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간단히 예배가 끝나면 손님들은 맛있게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잔치의 주인공인 첫돌배기 아이는 손가락에 낀 금반지는 걸리적 거리고, 화려한 생일 옷은 부자유하고, 산해진미가 넘치는 음식상이지만 실상 먹을 것이 없고, 한바탕 휘젓고 기어 다니고 싶으나 꼼짝 달 싹을 못하게 합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 잔칫날 주인공은 첫돌배기는 지루함에 짜증을 부리고 때로는 칭얼거리기도 하다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잔칫날이라고 해서 정작 즐거운 것은 손님이지, 진짜 주인공인 첫돌배기는 하나도 즐겁지 않은 잔치날인 것입니다.

세계 만민이 기뻐하는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고통스러운 돌잔치의 주인공이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탄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셨고,
2) 그것도 작고 가난한 나라 이스라엘 땅 목수의 가정에서 삼십년을 고생하시며 사셨고,
3) 삼년의 공생애 기간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고,
4) 보통사람들과 달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다면, 과연 성탄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영광스럽고 즐거운 축제의 날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성탄절을 깊이 생각하게 되면 보다 깊은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왜 그 고생을 하실 것을 잘 아시면서 구태여 사서 고생이라는 말처럼 거절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에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겪으시는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 너무나 뜻 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뜻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처지에서 만족하지 않고 조금도 많아지고 높아지고 강해지기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그것이 마음대로 잘 되지 않기 때문에 피나는 수고와 오랫동안 인내와 눈물을 삼키는 서러움을 겪어야만 합니다.
설령 그렇게 할지라도 급작스러운 신분 상승은 쉽지않고 마치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것처럼 조금씩만 가능할 뿐입니다.
하물며 별로 수고하고 노력한 것도 없이 급격한 신분 상승은 낙하산 인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 현실의 삶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낙하산 인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신분상승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역설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특권을 부여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여러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데 그 중에 이해관계를 떠나서 끈끈한 혈연관계로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한 마디로 사랑의 관계로 내리 사랑이고, 오로지 희생이 동반된 죽을 때까지 변함 없는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와 같은 인륜을 저버리는 패륜아와 부모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예화
1) 경기도 고양경찰서는 2009년 2월 고양시내 자신의 집에서 아버지(63.무직)가 술주정을 부린다는 이유로 수차례 때린 뒤 목을 졸라 숨지자 시신을 김장용 비닐로 50여겹이나 감싼 뒤 테이프로 밀봉해 작은방 장롱에 감춘 것으로 드러났다.
2) 경찰에 따르면 어머니와 말다툼 도중 주방에 있던 흉기로 몸을 수차례 찔러 숨지게 하고 또 이를 말리는 조부 씨도 흉기로 찔러 살해한 후 태연히 경찰에 전화를 해 "강도가 들어와 엄마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도망갔다"는 허위신고를 한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왜 그렇게 사악해진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타락한 인류의 조상 아담의 후손으로 죄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인간을 가리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자식도 착하고 공부를 잘해야 학비를 대줄 마음이 있는 법이라면, 아무리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일지라도 그와 같이 타락한 인간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종이나 일꾼으로 쓰임을 받는다고 해도 황송한 일인데 어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부여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과분하다 못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유한한 존재입니다.
2)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어 티끌만큼도 죄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생각에서 행동에 이르기까지 티끌만큼도 의가 없는 흉악한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그 위상에 있어서 성품에 있어서 능력에 있어서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게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성품이 좋으면 되고 선행을 많이 했으면 되고, 전과가 없어야 된다는 조건이 없습니다.
오로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만일 우리들도 하나님의 그와 같은 사랑을 본받아 실천한다면 미움과 시기와 폭력과 살인이 난무한 세상은 이 세상은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입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실천되지 않고 오히려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시기가 가득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무엇인가 가로 막고 있는 담을 허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상호간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소통은 희생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예수님은 독생자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 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죄인인 우리와 격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죄라는 높은 장벽이 가로 막고 있기 때문에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허무시기 위해 인간의 죄 값을 대신하여 죄 없는 짐승이 대신 피 흘려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담을 허물어 교제가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제물은 일회용으로 밖에 효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여 인간과의 원활한 소통을 이루시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신 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화해가 이루어지게 하신 일입니다.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분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시고, 당신의 처소를 낮추시어 세상에 오시고, 당신의 행복을 포기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막혔던 죄의 장막을 찢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막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눅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가 먼저 낮추고, 버리고, 죽어지는 희생이 동반되어져야 이웃과 막힌 담이 허물어져서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본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고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소통을 위한 희생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것은 낮아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낮아짐은 예수를 믿는 우리가 어떻게 낮아져야 하는가를 본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희생은 죄 없는 자가 먼저, 강한 자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에게 전가하고, 정죄하고, 책임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의로우신 예수님은 죄인이 되시고, 죄인인 인간은 의롭다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희생한다고 하는 것은 낮아지는 척 하거나, 양보하는 척 하며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과 신분 교환을 통해 내가 낮아지게 되는 것을 각오하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요, 희생이요, 소통입니다.

2) 소통은 연합을 만들어 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소통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막힌 담을 허무심으로 말미암아 원활한 소통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독생자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이 되신 궁극적인 목적이 단순한 소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궁극적인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 하나님께 기도하신 대제사장의 기도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여기서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가족이 하나가 되고 민족이 하나가 되고 교회가 하나가 되는 연합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소통과 화해는 결과적으로 연합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탄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요 하나님께 가장 크게 영광을 돌리게 된 까닭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인간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로 연합하게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3. 예수님을 본받는 성도의 삶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복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필요를 살피시고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그 필요를 준비해 주시고 채워졌습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제와 만남과 대화가 항상 열려져 있었던 사랑의 관계였음을 창세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인류의 조상 아담이 그처럼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는 지상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참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누가 부럽지 않았고 무엇이 불만족하지 않았고 누가 밉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하나님과의 소통과 화목과 연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인간을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고 불신하고 불화하고 불순종하고 대립하도록 시험하는 유혹 앞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중단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패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와 고통과 죽음이 왕 노릇하면서 서로 의심하고, 불신하고, 대립하고, 갈등하고, 분쟁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동족 간에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남북 관계도 문제지만, 사소한 문제로 이웃과 다투고, 한 집에 살면서 가족끼리 불화합니다.
한 교회 안에서 한 목사의 동일한 설교를 듣고 함께 주일 예배, 고난주간, 부활절예배, 성탄예배를 드립니다.
한 목소리로 신앙고백을 하고 소리 높여 찬양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지만 사소한 문제로 논쟁, 폭언, 폭력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원수처럼 법정 시비를 벌려 불신 법관에게 비난과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소통과 화해와 연합을 위해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왜 그렇게 사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을 눈으로만 보고 설교를 귀로만 들을 뿐이지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 만일 남북 정상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화해자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닮아 불신의 벽을 헐고 서로 신뢰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통하고 화해하고 연합한다면 남북통일 정도가 아니라 세계 초일류국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물론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연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북한과 과연 소통과 화합과 연합을 할 수 있겠는가 의구심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124 년 전의 조선 땅은 복음의 불모지였으나 십자가의 복음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만들어 냈습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대대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지만 지하교회의 신도수가 대략 40만에서 50만 명이 될 것이라고 미국 자유 아시아 방송이 24일 보도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우리는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3) 그러나 기도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우선해야 할 일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먼저 내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를 낮추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남을 높이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죽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교우 간에 닫혔던 마음을 열고, 막혔던 담을 헗고, 먼저 나를 겸손히 내려놓고,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서로 협력하는 희생과 헌신을 실천하는 성육신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의 삶은 손해와 희생 같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높아지고, 내가 잘되고, 내가 복을 받는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눅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