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슬픔 중에 기도/(욥 16:15-22)

미션(cmc) 2010. 12. 14. 10:22

슬픔 중에 기도
(욥 16:15-22)


[15]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18]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22]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항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지만, 인생을 살아보면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원치 않는 슬픈 일도 당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거나, 큰 기대를 걸었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고통이 점점 더 가중되거나,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하찮은 사람에게 멸시를 당할 때 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슬픈 일은 자신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해야 할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가슴을 치며, 어떤 사람은 소리를 지르며, 어떤 사람은 조용히 머리를 쥐어뜯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주셨기 때문에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 연구팀이 건강한 사람과 위궤양을 앓는 남녀 137명을 조사한 결과
건강한 사람이 슬플 때 더 잘 운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 동맥경화증 환자도 소리 내 우는 사람일수록 심장마비 발병률이 낮았다고 합니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 헨리 모슬리는 "슬플 때 울지 않으면 다른 장기가 대신 운다."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울라고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애 2: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늘 기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슬픈 일을 당할 때가 있다면 그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그 슬픔을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슬픔을 이기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 위로대신 아픔을 주는 친구들
만일 어느 친구에게 자기의 아픔과 고민을 쏟아 놓았더니 그 말이 귀에 거슬린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하면 그 말을 듣는 심정은 어떠할까요?
“그래도 슬기롭다는 사람이 어찌 쓸데없는 말을 그렇게 해대는가? 슬기로운 사람치고 자네같이 말하는 사람은 없네. 자네는 정말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는군.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법도 모르고 말이야. 자네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자네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네. 그저 혀만 간사하게 놀리기만 하는군. 그래, 자네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기에 우리에게 모르는 소리 말라고 하는가? 도대체 자네만 깨달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말해 보게.”

1) 재난을 주는 위로자
이것은 지난 시간에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두 번째로 욥의 말을 정면으로 비난하는 말이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몽둥이나 손에 잡혀진 검이 아니라, 마치 바람처럼 보이지도 잡을 수도 없습니다. 말은 한 번 입에서 나오는 순간 바람처럼 사라져 두 번 다시 들려지지 않는 소리입니다.
그와 같은 말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고 바른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가슴에 사랑이 없는 마음에서 울어 나온 소리라면 공허한 바람소리처럼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만일 그 사람의 마음에 미움이나 증오심을 품고 하는 말은 듣는 이에게 몽둥이보다 더 아프게 느껴지게 되고, 검객의 예리한 칼보다 거 깊이 마음을 찌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된 싸움이 나중에는 살인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친구 엘리바스가 마치 비수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마음 아픈 말을 하였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욥의 친구들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욥에게 집을 마련해 주고 아픈 곳을 치료받게 해주고 생활비를 모아 주고 상한 마음을 위로해준 것이 아니라 마치 원수를 대하듯이 이구동성으로 욥을 공격하는 말을 하므로 더욱 마음 아프게 하였습니다.
욥은 자기 마음을 아프게 하는 친구들을 가리켜 위로를 주는 친구가 아니라 오히려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고 하였습니다.
(욥 1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 16: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여기서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 이라는 말은 위로자라는 뜻이 아니라 수고롭게 하는 힘든 노동과 불쾌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일으키게 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위로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무엇보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친구가 듣고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친절해야 하며, 상대방의 아픔을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입장을 바꿔 놓고 공감해야 하며, 설령 잘못을 범하였을지라도 상대방을 짓밟고 넘어뜨리는 자가 되지 말고 용서하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오히려 욥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몰인정하게 욥을 정죄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진정한 위로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가정에서 부부 사이에 이웃이나 친구나 교우들과의 관계에서 욥의 친구들처럼 상대방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상대방을 평가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게 되면 재난을 주는 위로자가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그 만큼 너그럽기 때문도 아니요,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남이 아닌 내가 그 같은 복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눅 6: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2) 마음이 드넓은 친구
욥은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인 친구들과 무엇이, 얼마나 달랐을까요? 전혀 다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욥은 자기를 정죄하며 마음 아픈 소리를 거듭해서 말하고 있는 엘리바스에게 독을 품고 대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욥 16: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만일 입장이 뒤바뀌어 욥의 친구들이 고난에 처한 상태였다면 자기 자신도 친구들처럼 머리를 흔들어가면서 입에 거품을 품고 비난하고 정죄하며 상대방을 괴롭히는 말을 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욥의 친구들이 위로가 필요한 욥의 입장이 되어 욥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졌어야 하는데, 정반대로 욥이 몰인정한 친구들의 입장을 바꾸어 이해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기가 친구들의 입장이었다면 자기는 상처를 더하는 재난의 위로자가 되지 않고 오히려 친구들을 격려하고, 안심시키는 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 16: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우리는 그와 같은 욥을 보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가정이나 이웃이나 교회에서 상대방이 심한 말을 할지라도 욥처럼 상대방을 이해하는 진정한 위로자로 살아왔는지 우리 자신을 한번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말은 입으로 맛을 볼 수 없지만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위로하는 말은 꿀보다 더 달콤하며, 보약처럼 활력을 줍니다.
(잠 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어느 누구나 재난을 당하는 것은 벌써 큰 상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상처받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밖에 없습니다.
(고후 1: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인간의 말은 잘못 사용하게 되면 상대방을 실족케 하고 번뇌케 하는 사탄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고난을 겪는 욥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마음의 격려입니다. 죄를 묻고 따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오늘 우리도 누가 고난을 당할 때 그에게 죄를 묻기 전에 그의 필요를 물어야 합니다. 그가 그 재난을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최선의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히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2. 위로 대신 슬픔을 주시는 하나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마음에 평화만이 아니라 육신의 건강과 재물의 축복까지 받아야만 합니다.
사람의 따뜻한 위로의 말이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병든 육체까지는 고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입술로 위로의 말을 하여 근심을 풀어 준다고 해서 고픈 배가 불러지고, 병든 육신이 건강해 지고, 부도난 사업이 회생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운동과 영양관리를 해야 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가 아님은 건강을 자랑하던 사람도 어느 날 암 선고를 받고 밤낮 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기업도 부도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데 불신자들은 그것을 가리켜 운이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욥은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고 누구 못지않게 부요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견딘다고 하는데 동방에서 제일가던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욥도 그 사실을 깨닫고 오늘 성경에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렇게 만드셨다고 하였습니다.

1) 주께서 시들게 하셨다.
(욥 16: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여기서 ‘시들게’라는 말은 미완료 동사로 붙잡다, 채어가 버리다 는 말로 자신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채가셨다는 것입니다.
2) 주께서 진노하사 찢으셨다.
(욥 16: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여기서 ‘찢으셨다’라는 말은 육식 동물을 붙잡아 그 살을ㄹ 찢어 먹어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3) 주께서 나를 악인에 넘기셨다.
(욥 16: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여기서 ‘악인’은 불법한 나 부정한 자를 가리키고, ‘행악자’는 난폭하고, 압제적이고, 탐욕스럽고, 음모를 꾸며 가난한 사람에게 적대적인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4) 주께서 나를 꺾으셨다.
(욥 16:12)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여기서 ‘꺾으시며’ 라는 말은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깨뜨리고, 쳐부수고, 헛되게 만드는 것을 뜻하고, ‘부숴뜨리시며’라는 말도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산산히 분산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5) 주께서 나를 치셨다.
(욥 16:14)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여기서 ‘치고 다시 치고’라는 말은 ‘깨뜨리고, 파괴한다’는 미완료 동사로 거듭 반복해서 치시는 것을 뜻합니다.
욥은 과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해서 받아야 할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욥을 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욥이 극도의 재난에 직면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회적인 힘, 명성, 권능 등이 온전히 실족되고 상실함으로 인해 깊은 슬픔에 젖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욥은 고난 중에서 눈에 보이는 친구들에게는 물론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도 전혀 위로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큰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욥은 마치 상주처럼 굵은 베옷을 꿰매어 입은 자처럼, 체면은 땅 바닥에 떨어지고, 그 심정은 깊은 슬픔에 젖어 눈물을 쏟으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욥 16:15)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욥 16: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욥은 슬픔으로 인해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었고, 두 눈에는 죽음의 그늘이 서렸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욥과 같이 사람과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한 슬픔을 맛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욥은 자신에게는 형벌을 받을 만한 아무런 죄가 없고, 자신의 기도는 등잔에 사용하는 깨끗한 감람유처럼 정결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욥 16: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욥은 만약 자신의 손에 포학이 있었다면 그것이 숨겨지지 않기를 원하였습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처해 있는 자신의 무고한 피가 아벨의 피처럼 하나님께 상달되어 무죄성이 증명될 수 있게 하도록 해 달라고 욥은 호소합니다.
(욥 16:18)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그렇다면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누구보다 욥을 사랑하시면서 왜 그와 같은 고난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욥만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때로 억울한 고난을 당하여 마음이 슬픔에 가득차 통곡의 눈물을 흘리게 될 때 사람을 바라보고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고 하늘에 유일한 중보자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욥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내려 고통스럽게 하실 때 누군가 자신의 무죄함을 사람이 보증을 서줄 사람이 없을지라도 여전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욥은 자기의 무죄함에 대해 친구들은 오해를 할지라도 자신의 무죄함에 대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증인이 되어 주실 분은 오직 하늘 높은 곳에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욥 16: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자기를 위로해 주어야 할 친구들마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자기를 변호해 주지 않는 억울하고 슬픈 날에도 욥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중보자가 되심을 한 결 같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욥 16: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세상에 누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형통한 날에 분별하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날에는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은 물론 하나님마저 자신을 외면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에, 전후좌우가 캄캄하게 느껴질 때에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욥처럼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며 하나님이 계신 하늘 나라는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욥 16: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욥 16:22)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내가 욥처럼 아무런 까닭 없이 비난을 받는 자신의 결백함을 아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어서 불원간에 모든 것을 밝혀 주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무엇보다도 크나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욥은 고난 중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비겁해지거나 비양심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거나 기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필연적인 죽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면서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준비는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은 세상에서의 장수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의 영생이라면, 우리도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면서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1)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짧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백만 년을 살 사람처럼 이 세상의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미련을 갖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와도 같습니다. 언젠가는 떠나온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그네와 같은 세상에서의 삶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돌아갈 하늘에 소망을 두고 그곳에 가서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주신 사명에 충성을 다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일회적인 유한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다시 오지 못합니다.
따라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일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 그 일을 위해서는 건강도 시간도 물질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과 건강과 물질을 주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 일에 대해서 얼마나 충성했는가를 심판받게 될것을 믿고 두려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전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3) 슬픔 중에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지금까지 나의 삶이 고난의 연속일지라도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성도의 환난을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고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의 슬픔을 무시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살피신다는 사실 만으로도 얼마든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슬픈 일을 당할 때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향하여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1) 설령 사랑하는 가족, 친지, 친구가 나의 슬픔을 헤아려 주지 못한 다고 할지라도 우리 곁에는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이 늘 함께 계십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 하늘에는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밝은 미소와 웃음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왜냐하면 주님은 세상에서 욥보다 더 큰 고난과 슬픔을 겪으셨으며 그럴 때마다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신 주님은, 우리가 슬픔 중에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