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경외하는 사람
(욥 15:4-10)
(욥 15:4)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욥 15:5)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욥 15:6)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욥 15:7)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욥 15:8)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욥 15:9)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욥 15:10)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가장 쉽게 말한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없는 것은 북한이나 이슬람권에는 보이는 교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깊은 뜻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외적인 형식이전에 내면적인 것으로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이 무려 171회나 언급이 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결코 공포심이 아니라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두렵게 생각하는 마음’과 같은 뜻입니다.
(레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성경에서 최초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물론 아브라함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는데 우리가 매 주 상고(詳考)하고 있는 욥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욥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을 보면 엘리바스는 친구 욥에게 (욥 15:4)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라고 정죄하였는데 쉬운 번역에서는 ‘하나님 경외하기를 내 던져 버렸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내 던져 버렸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친구로부터 그 같은 소리를 들어야만 하였을까요?
욥에게 문제가 있거나 엘리바스가 오해를 하거나 과장한 것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 사람의 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경외하기를 내 던져 버린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귀
사람은 어느 누구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으며 그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는 위로하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가 아니라 비난이나 정죄를 한다면 그것은 마치 환부를 수술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내어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욥이 극한 고난을 겪고 있을 때 친구들이 위로가 아니라 도리어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음을 강해를 계속해서 들으면서 공감하였을 것입니다.
그 중에 소발이라는 친구는 욥의 고통을 두 눈으로 역력히 보면서 욥을 가리켜 ‘허망한 사람’이라느니, 채 길들여지지 않아 머리가 텅 빈 ‘들 나귀 새끼 같다’라고 노골적으로 비난을 하였습니다.
(욥 11: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오늘 성경은 욥의 친구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엘리바스의 두 번째 권고입니다. 엘리바스는 이미 욥4-5장에 걸쳐서 욥에게 빗대어 정죄하는 말을 한 바가 있습니다.
(욥 4: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욥 5:12)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욥 5: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그러나 엘리바스의 두 번째 권고인 오늘 성경 말씀은 그 보다 더 논리적으로 강도 높게 비난하고 정죄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욥 15:2)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여기서 ‘동풍’ 이라는 말은 시리아나 북 아라비아 지방에서 특히 봄철에 가나안 지역으로 많이 불어오는 열풍으로 농작물에 커다란 피해를 주는 좋지 않은 바람을 가리킵니다.
엘리바스는 과거에 욥이 누구보다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하지만 막상 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니 마치 동풍과 같이 백해무익 한 말을 한다고 경멸하였습니다.
(욥 15:3)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여기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익하다’는 말은 미완료 동사로 지금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욥에 대한 지식만으로도 과연 욥이 이처럼 무시를 당할 만큼 어리석은 말을 하였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물론 엘리바스가 이처럼 욥을 무시한다고 해서 엘리바스가 욥보다 더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야비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일은 힘이 없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배운 것이 없다고, 못생겼다고 무시를 당하는 일입니다. 더구나 나보다 잘 난 것이 없는 사람에게 무시를 당한 다면 더욱 화가 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누가 가장 많이 예수님을 무시하였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었고, 유대인들이었고, 심지어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을 잘 가르치지 못해서나, 무슨 잘못을 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도리어 존경과 칭찬을 받으셔야 할 만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단지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불신하고 조롱하였습니다.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여기서 ‘배척한지라’라는 말은 ‘함정, 덫, 걸림돌’에서 유래된 말로 예수님을 실족하도록, 불쾌하도록 만들었다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단지 목수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그 같이 삐뚤어진 마음을 고치지 않았을 때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무시한 적이 없습니까? 내가 조금 더 가졌다고, 많이 배웠다고, 지위가 높다고, 힘이 있다고, 오래 믿었다고, 잘 생겼다고 생각하고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하고 나보다 약한 사람에 대해서는 엘리바스처럼 무시하고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도 남을 높이면 내가 인격적인 사람으로 보여지지만, 남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면 오히려 내가 더 천하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남을 높이고, 섬기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면 아무리 말을 잘못하는 사람에게서도 내가 배워야 할 것이 있고, 내가 상대방을 오해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불신하거나 무시하는 자세로 말을 주고받게 되면 상대방이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건방지게 생각되어 귀에 거슬리게 됩니다.
정반대로 상대방이 실수를 하게 되면 그것을 말꼬리를 잡아 상대방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기회로 삼기 때문에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해가 생기고, 더 깊어지게 되고, 결국은 관계가 악화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사람은 상대방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대로 말하기 때문에 누구나 실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약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도 말에 실수가 있고, 또한 듣는 사람이 곡해함으로 오해가 생길 수 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누구와 대화를 나누든지 무엇보다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입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눈
욥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연장자 엘리바스는 욥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욥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만 하지 않고 욥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본질적인 면을 정죄하였습니다.
(욥 15:4)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라는 말은 ‘깨뜨리다, 쳐부수다, 헛되게 하다, 실패시키다’ 라는 뜻에서 나온 미완료 동사로 개역 성경에서는 ‘폐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엘리바스의 눈에는 욥이 하나님을 믿기를 포기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욥을 보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께 기도할 마음을 식어 버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 평소에 존경하였던 사람의 허물이 드러나게 되면 실망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예수를 믿는 것이 헛된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엘리바스의 말처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그만 두었습니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그만 두겠다고 말했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욥기를 살펴본 바로는 엘리바스가 무슨 근거로 그처럼 심각한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욥은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없고 단지 하나님께 자신의 아픔이나 고민이나 갈등을 사실 그대로 아뢰었을 뿐입니다.
다만 그것을 듣고 있던 엘리바스가 단도직입적으로 욥의 입에서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포기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편견이 아니라 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니 욥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욥 15:5)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바스는 그것이 자신의 편견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책임을 몽땅 욥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욥의 말을 들어보니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폐한 사람이라고 단정을 지은 것입니다.
(욥 15:6)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밝히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마음이 통하려면 흔히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이해할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고 대화를 나누어야 이해도하고, 오해도 풀리고 마음이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을 때 내 느낌만으로 그 말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짓된 인간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아첨하는 말이 그렇고 거짓말이 그렇습니다.
또한 사람이 마음에 없는 말을 하게 될수록 그럴듯하게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처럼, 속으로 미워하면서 사랑하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은 그것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심지어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을 하고서도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외적인 종교의식이 아니란 내면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부는 다른 사람의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본인 자신의 주관적인 고백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행동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 고백을 통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도 자칫하면 엘리바스처럼 ‘누구누구는 하나님을 잘 믿고 누구누구는 하나님을 잘 못 믿고’ 라고 단정을 지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라톤의 순위는 출발점이나 반환점이 아니라 오로지 최종 골인점에서 결정되는 것처럼, 누가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릴 수가 없고 오로지 죽음이 와야만 최종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눈은 설령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정죄하지 말아야 하고,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꾸준히 지켜보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마음
엘리바스가 욥의 친구로서 고난당하고 있는 욥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믿음을 북돋아 주는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고, 이처럼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나쁜 친구가 되었을까요?
1) 교만함
그것은 엘리바스의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의 입술은 자비하고, 교만한 사람의 눈은 비판적이고, 교만한 사람의 귀는 말을 왜곡하여 듣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남을 무시하는 말을 잘하는 반면 자신을 자랑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는 무엇을 자랑하였을까요?
엘리바스는 친구들 가운데 연장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엘리바스는 욥의 말을 무시할 때 자기 나이를 내세우며, 욥의 말을 무시하였습니다.
(욥 15:9)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욥 15:10)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욥보다 더 나이가 많기 때문에 인생에 더 많은 경험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영적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욥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 15:11)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욥 15:13)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욥 15:15)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영적인 감각을 송두리째 상실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서 성경을 계시하여 주셨고 그것을 읽고 듣고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듣고 배워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지라도, 마치 자기가 경험을 해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나이 많은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 15:17)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욥 15:18)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마치 자기 스스로 터득한 것처럼, 자기 혼자서만 알고 있는 것처럼, 남을 무시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세상에 태어날 때 백지처럼 무지한 상태로 태어났고, 흑지처럼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면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이며, 무엇인가 선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며, 무슨 병이든지 치료약이 있다고 해도 교만은 치료약이 없는 난치병이며,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시 31: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은 여호와께서 좋아하시는 것과 미워하시는 것을 혼돈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2) 정죄함
엘리바스의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들을 때는 무척이나 정의로운 사람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 15:15)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욥 15:16)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엘리바스는 악인에 대해서 하나님의 무자비한 심판과 징벌이 있을 것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하였습니다.
(욥 15: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욥 15:23)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욥 15:29)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할 것이라 (욥 15:34)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엘리바스는 정의감으로 그렇게 악인의 형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욥을 악인으로 설정해 놓고 욥이 지금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정죄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자기를 제외하고 욥을 악인이라고 정죄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은 마치 부메랑처럼 엘리바스 자신을 함께 묶는 말이기 때문에 욥이 그러한 심판과 정죄를 받아야 한다면 엘리바스 자신도 그와 같은 심판과 정죄를 받게 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욥 15:16)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여기서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라는 말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타락한 아담의 자손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 14: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으며,. 또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하나님은 높이 계셔도 마음이 겸손한자와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는 증거는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인의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하셨고, 또한 겸손해야 할 것을 요구만 하시지 않고 겸손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악인이 번성한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악인이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악인의 소득은 물거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악인의 소득이 도리어 엄청난 것처럼 보이고, 그것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순간적이요, 불확실한 것이며 말짱 헛된 것이요, 이 세상에서만 국한 된 것이며, 끝내는 하나님의 심판의 자료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시 73: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시 73: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정의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찾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여 나와 같이 사죄함과 구원을 받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본래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나를 예수님께서 그렇게 용서하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남을 정죄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고,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책임과 의무만 있는 용서받는 죄인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가 엘리바스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닮지 않고 하나님을 팔아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실족시키는 삶을 더 이상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슨 도를 닦는 일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입과 귀와 눈을 닮는 것이며, 그러한 우리를 도우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령께 우리의 입과 귀와 눈과 마음을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삶인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 말하는 입과 듣는 귀와 보는 눈과 마음의 자세가 다릅니다.
1) 어느 누구와 대화를 나누든지 거짓이 없는 진실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입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려고 힘쓰는 사람입니다.
2) 설령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무시하거나 정죄하는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그 결과 겸손한 자는 높아지게 되고 교만한 자는 낮아지게 됩니다.
4)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설령 내가 그렇게 산다고 할지라도 악하게 사는 사람을 미워하고 정죄하지 말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아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도록 기도하고, 전도하고, 제자 삼고, 양육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고 복을 더 받을 사람이고, 복 받는 자 답게 사는 사람입니다.
(잠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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