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내가 사는 길은?(욥 13:15-16)

미션(cmc) 2010. 11. 9. 18:38

내가 사는 길은?
(욥 13:15-16)

 

(욥 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욥 13:16)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오늘 성경 본문인 (욥 13:16)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는 말씀을 쉽게 풀어 번역한 성경에는, (욥 13:16) “오직 그것만이 내가 사는 길이라 믿네. 악인은 그분 앞에 감히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지.” 라고 한 말씀을 따라 오늘 설교의 제목을 ‘내가 사는 길은?“ 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죽음을 전제로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잘살고 못 살고가 아니라, 다만 누가 먼저 죽고 누가 나중에 죽느냐?’ 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자신에게는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지만 죽음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준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미리 공원묘지를 예약해 놓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후 세계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좀 더 세상에서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것이 최대의 소망이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힘들어도 사후 세계에 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오늘도 사단의 세력은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거나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사후의 세계를 불신하게 만들어 반드시 오는 죽음이후에 그 영혼들을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모든 희망도 사라지게 되지만 죽음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믿는 사람은 죽음이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이 똑같은 세상을 살지만 두 사람의 가치관이나 마음의 자세나 생활은 전혀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갖가지 고난을 겪으면서 어떤 삶을 살았으며, 과연 구원 얻는 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였는지 오늘 성경 욥 12장과 13장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면서 과연 우리가 사는 길, 우리가 구원받는 길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신앙인의 인간관계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과연 소발이 욥의 친구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욥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고통당하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로부터 아무런 위안을 얻지 못하고 논쟁을 거듭할 수 록 친구 간에 상대방을 서로 비방하고 공격하는 적대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욥이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끝까지 변명하는 소리를 듣고 못 마땅히 여긴 소발은 욥을 미련하고 고집이 센 들 나귀 새끼로 비유하여 공격하였습니다.
(욥 11: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또한 소발은 욥이 살길은 오직 회개하는 길이며, 올바른 회개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욥 11: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욥 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그 같은 소발의 말은 원론적으로 다 옳은 말입니다. 욥이 그 같은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욥이 신앙 인격자라면 비록 듣기에 거북하고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친구들의 말이 정말 옳은 말이라면 그 말대로 하나님께 엎드려 손을 들고 회개하였어야 하면 만일 그렇게만 하였다면 욥기는 벌써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과 친구들은 마치 국회 청문회장처럼 동문서답을 하고, 잡아떼고, 서로 약점을 찾아 공격하는 식의 논쟁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한 욥의 모습과 오늘 나의 인간관계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1) 욥의 자기 자랑
욥은 친구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였습니다.
(욥 12: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 12:2)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어떻습니까? 욥이 전혀 공감하지 않고 도리어 반감을 갖고 친구들을 비웃는 말을 거침없이 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친구들보다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고 자기 자랑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신앙의 인격자답게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은 티끌만큼도 찾아 볼 수 없고, 친구들의 말에 발끈하여 친구들과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모습으로 친구들을 공격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욥 12:3)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욥이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욥은 본래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고 인격적으로도 잘 수양이 된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욥을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죄인으로 규정하고 마치 재판관이라도 된 것처럼 고압적인 자세로 정죄하면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를 강요하였습니다.
마치 독사를 약을 올려 독이 오르게 하는 것처럼 자존심이 상하게 되었고,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하면서 친구지간에 나눌 수 없는 격한 말도 내뱉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아무 잘못이 없고 의롭고 온전한 자기를 친구들 때문에 이웃에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친구들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욥 12: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누가 내가 사랑하는 자식을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피부색이나 소유와 상관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격이나 능력이나 외모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바 된 성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힘이 없다고 조롱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것임을 깨닫고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잠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마 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2) 욥의 하나님 자랑
욥은 친구들이 자기를 공격하기 위해 지혜로운 척 한 말들이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하나님이 지으신 짐승이나 공중의 새나 바다의 고기들에게 물어보아도 대답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유치한 소리라고 무시 하였습니다.
(욥 12:7)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욥 12: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더구나 욥은 젊은 소발이 잘난 체하는 것을 가소롭게 여기고 인생의 경험이 많은 노인들에게 지혜와 명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욥 12:12)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욥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생의 경험이 많은 노인들이 젊은이보다 더 지혜가 있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은 더더욱 지혜로우실 밖에 없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욥 12:13)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경 말씀을 보면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많은가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보면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가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은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욥은 잘난 체 하는 친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 지를 욥 12:14-25 에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1) 하나님이 헐면 다시 세울 수 없고, 가두시면 풀어 줄자가 없고,
2) 하나님은 자연을 지배하여 비를 멈추게도 하시고, 비를 내려 홍수가 내게도 하시며,
4) 세상 모략가와 판사와 왕들과 제사장들과 힘이 있는 자들과 귀족들과 장군들과 세상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능력 아래 지배를 받개 하시고,
5) 캄캄한 어둠 속의 비밀을 대낮처럼 밝히 드러내시고,
6) 나라와 민족들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욥이 그렇게 말한 것은 그것을 친구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하나님만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친구들의 주장을 뭉개버리기 위해서 한 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자랑하는 욥을 보면서 긍정적인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욥만이 아니라 평소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그처럼 장황하게 설교를 하였지만 과연 욥의 친구들의 얼마나 공감을 하였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왜냐하면 욥이 친구들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면 욥의 친구들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인간관계의 책임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양방향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랑하는 부부나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 간에도 논쟁이 일어나고 오해가 생기고 갈등과 반목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차라리 아는 사이가 모르는 사이보다 못하고, 만나는 것이 안 만나는 것보다 못하고, 대화하는 것보다 말 안하는 더 났다면 큰 문제인 것입니다.
부부간에 친구 간에, 교우 간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내 자존심을 내 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화를 할 때 내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을 이해시키려고 하면 상대방이 마음 문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내 자존심 때문에 내 마음이 괴롭고 죽을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길은’ 내가 먼저 자존심을 죽이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먹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결과적으로 단절된 대화의 매듭을 푸는 일이요, ‘내가 사는 길’임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고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의 개선이 시급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1) 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강한 면을 내세워 형제의 약점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연약하고 오류투성이인 존재임을 깨닫고 덕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롬 14:1-12).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나만 잘 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좀 깨달았다고 해서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단정하게 되면 불행입니다. 그 지식에 대하여 나보다 더 깊이 알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나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그만 두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나보다 나은 사람을 대체시켜 그 일을 완성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쓰임 받은 도구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겸손히 주어진 일을 해야 합니다.
(롬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고전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2. 신앙인의 하나님과의 관계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나라 기독교인들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수하지만 인간관계가 미성숙하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가정에서 불화가 끊이지 않고 교회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욥의 논쟁은 13장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위해 한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거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무시해버렸습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말을 듣기 전에 이미 다 보았고 다 알고 있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입을 막았습니다. 마치 감옥 문처럼 마음을 닫아 버렸습니다.
(욥 13: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욥 13: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욥은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친구들을 거짓말쟁이로 몰며 자기 말을 들어 보라고 공격적으로 말하였습니다.
(욥 13: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욥 13:5)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욥 13:6)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친구들이 아무리 욥을 위해 좋은 말을 할지라도 그 말들이 욥에게 위로나 자책이나 회개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더 강퍅하게 만드는 역효과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 이유는 친구들이 말에 논리성이 없거나 오류나 모순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친구들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깨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친구들이 욥을 위해 말을 하면 할 수 록 욥에게는 고통스러울 뿐이기 때문에 차라리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욥 13: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욥은 먼저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친구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자기를 위로한다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네게 숨겨져 있는 죄가 있을 것이니 회개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친구들에게 실망한 욥은 눈을 돌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잘못을 지적한 후에는 자신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이러한 욥의 자세를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어떤 어려움이든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해답을 얻으려는 자세를 성도들은 가져야 합니다.
(욥 13: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여기서 ‘전능자에게 말씀하려’라는 말은 친구들과의 대화를 접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겠다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또 ‘하나님과 변론하려’라는 말은 욥이 친구들과 더 이상 논쟁하기보다는 하나님과 계속해서 논쟁하겠다는 말입니다.
욥은 이제 자기가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하나님마저 자신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고난보다 욥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명쾌한 이해가 없는 한 욥은 더욱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이제 욥은 비록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말처럼 자기를 벌하고 죽이려고 하시기 때문에 아무런 희망이 없을지라도 자기는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무죄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욥이 위기 중에서도 마음 깊은 곳에 포기하지 않는 굳센 믿음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설령 자기를 치시고 버리신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인 것입니다.
(욥 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이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또한 모든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 안에서 처신되어지기를 바라는 욥의 신앙의 일단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욥은 설령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시려고 할지라도 자기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하는 것만이 자기가 사는 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 13:16)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그래서 어떤 번역본에서는 오늘 본문을 “오직 그것만이 내가 사는 길이라 믿네. 악인은 그분 앞에 감히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지.” 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경건하지 않은 자’라는 말은 '신성 모독적인, 불경건한‘ 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욥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단절의 대화의 중단인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은 기도의 교통이 없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러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욥 13:21)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욥 13:22)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많은지 자신의 죄와 허물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욥 13:23)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은 마치 마른 낙엽과 같고 검불과 같이 하찮은 존재인 자기를 하나님께서 왜 내버려두지 않고 놀라게 하시고, 뒤쫓으시는지 그 이유를 묻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욥 13:25)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
욥은 하나님 앞에서 조차 자신이 티끌만큼도 잘못이 없는 의인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자신이 젊었을 때에 지은 죄값을 받게 하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욥 13:26)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욥은 하나님의 엄중한 손아래에 눌려서 '썩은 물건과 좀 먹는 의복'처럼 후패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욥만이 아니라 이것이 모든 인생의 후반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욥 13:27)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욥 13:28)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내가 아는 사람들을 좋은 사람과, 안 좋은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 좋았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게 되고, 좋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 중에 막상 사귀어 보니 좋은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람도 큰 위기를 만나거나, 게임이나 운동 경기를 해보면 평소에 몰랐던 숨은 성격이 역력히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역시 해아래서 특별히 좋은 사람이 따로 없고 오십 보가 백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모세처럼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본받을 것이 많은 모범적인 신앙위인입니다.
그러나 욥은 오랫동안 고난을 겪으면서 아름다웠던 신앙인격이 퇴색되어 인간의 부패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그들의 편협한 이론을 자기에게 잘못 적용하고 있다고 질책하면서 자기도 친구들을 비난하고 정죄함으로 친구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랬던 욥이 친구들을 비난하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자신의 처지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며, 어떻게 믿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이고 내가 사는 길일까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거들랑, 누구도 자신을 돕는 사람이 없거들랑,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거들랑 욥처럼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지혜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고 해결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만이 내가 살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요,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돈돈하게 하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악인의 형통일 것입니다. 욥이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다’(6절)고 탄식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 그 자체가 벌써 재앙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형통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자기 함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육체적인 평안이 오히려 재앙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적인 일에만 몰두하는 자들은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평안은 참된 평안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것 자체가 재앙이기도 합니다.
(눅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그러나 의인의 고난은 잠자는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작용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더욱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오늘 성경의 욥처럼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마음에 품고 있는 모든 의문과 갈등과 고민과 소원을 낱낱이 기도로 아뢰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 3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