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욥 11:13-20)

미션(cmc) 2010. 11. 9. 18:35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욥 10:8-14)
(욥 11:13-20)

(욥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욥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욥 10: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욥 10:11)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욥 10: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욥 10: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욥 10:14)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요즘 사람들은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면 자기 집을 오픈하지 않고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웃에 살면서도 전혀 남남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생활만 이웃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속내를 더욱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고민하고 걱정하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아이들도 옛날과 달리 독자나 무남독녀이기 때문에 형제간에 싸우고 화해하고 함께 대화하고 노는 훈련이 없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겉으로는 착한 아이가 뜻밖에도 대형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서 성인이 되고 나면 이웃과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공동체 속에서도 인간관계가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관계가 되면서 인간미를 상실하게 되고 사람들이 점점 고독해지고, 개인주의로 전락해가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 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내적으로 순환기에 막힘이나 약함이 없이 깨끗한 피가 사지백체에 골고루 잘 순환하고 나쁜 피가 신장에서 잘 걸러져서 시원하게 배출되는 사람입니다.
비단 육체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먹고 소화해서 배설하는 신진대사가 원활한 사람인 것처럼, 영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은 영적인 신진 대사가 원활한 사람입니다.

1. 영적 건강의 조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범죄하지 않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한 것처럼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타락한 아담처럼 부패한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언젠가는 그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욥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보호막이 되어주시고 축복의 원천이 되어 주셨을 때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고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흠 없는 성도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욥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그를 더욱 높이 드러 쓰시기 위해 마치 광산에서 캐어온 금광석을 용광로에 녹여서 정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사처럼 욥을 연단하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이 계속되자 그 같은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다 헤아리지 못하고 평범한 우리들과 다름없이 부패한 본성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욥 10: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이 같은 욥의 말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듣고 느끼는 대로 이야기 한다면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불평처럼 들려질 것입니다.
만일 욥의 불평이라면 사탄이 하나님에게 욥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고 제안을 하였던 것이 성공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욥은 절대로 원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셨던 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욥이 한 말을 꼼꼼히 살펴보면 욥만이 아니라 만일 욥의 처지라면 누구나 할 수 밖에 없는 불평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욥은 육체적으로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버티어 왔으나 욥의 친구들이 집요하게 욥을 흔들면서 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의지가 많이 약해져가고 있음을 나타내 보임으로 욥은 우리와 근본이 다른 인간이 아니라 동질의 연약한 인간임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을 참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자신이 까닭모를 고통을 겪는 동안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 이유를 단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욥은 영문도 모르고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면서 영적으로 심히 고통스러워졌던 것입니다.
(욥 10: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여기서 ‘곤비하니’라는 말은 ‘몹시 싫어하다’는 뜻이며, ‘불평’이라는 말은 불평이라는 뜻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명상, 묵상’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일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리 저리 고민하던 것을 더 이상 마음에 품지 않고 입을 열어 자신이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솔직하게 드러내 놓겠다는 의미가 ‘토로하고’ 라는 뜻으로 이제부터는 숨김없이 계속해서 말하겠다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또한 ‘마음이 괴로운 대로’ 라는 말의 괴로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쓰다고 불평하던 마라라는 말고 같은 말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는 예방 주사를 맞기도 전에 겁을 먹고 울상이지만, 어른들은 주사를 맞을 때 아프면서도 체면 때문에 안 아픈 척 했으나, 이제부터는 아픈 것은 아프다고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욥은 지금까지 마음으로만 품고 있으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마음에 고민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를 정죄하는 친구들 앞에서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다 털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정반대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욥에게 배울 것이 더 많은 친구들이면서 마치 자신들은 욥처럼 고난을 당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욥을 위로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더 의로운 척 하면서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정직하고 건강한 사람입니까? 괴로운 데도 즐거운 척 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며, 겉으로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의로운 척 하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까?
눅 18장에서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하나는 세리였다.”(눅 18:11) “바리새파 사람이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 즉 사기꾼, 죄인, 간음을 행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눅 18:12) “저는 일 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눅 18:13) “한편,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눅 18: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이 저 바리새파 사람보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범죄한 아담의 자손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문제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은 아무런 죄나 고민이나 문제가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위장하고 그것을 마음속에 쌓아두고 살아갈 때 점점 신앙이 약화되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신진대사의 균형이 깨지면 문제가 생긴 증거입니다. 음식이 먹기 싫어지고, 음식을 먹으면 대소변이 원활하지 못하고, 항상 뱃속이 더부룩하고 가스가 차고 오장육부가 통증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져야 하고, 영적인 건강진단과 적절한 치유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깨닫고 그렇게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고민을 하소연하며 도우심을 구하고, 자신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의 시간과 더불어 자신이 깨달은 죄를 낱낱이 드러내 놓고 회개하는 참회의 기도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알고 보면 그와 같은 기도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할 최선의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행복의 필수조건인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겸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2. 잘못된 편견
욥에게는 육체적인 고통도 그를 괴롭혔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몹시 괴롭힌 것은 하나님의 참 뜻을 발견하지 못한 큰 번뇌와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같은 욥이 하나님께 탄식하는 기도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욥 10:2)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여기서 ‘아뢰오리니’ 라는 말은 ‘이야기하다, 생각하다, 기도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미완료동사로 계속적으로 탄원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왜 자신을 정죄하시고 변론하시는지 더 이상 자기를 정죄하지 마시고 그 이유를 알려달라는 기도입니다.

1)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견딜 수 없는 혹독한 처분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본성의 자비로움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묻는 탄원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욥 10: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여기서 ‘학대하시며’라는 말은 권력을 남용하여 낮은 위치에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억누르고 짓밟는 것을 의미하는 말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또 ‘멸시하시고’라는 말은 어떤 요구를 거절하고 멸시하는 것을 뜻하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이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인데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학대하시고 자신의 요구에 대해서 거절하시고, 그 대신 자기를 대적하는 악한자의 말에 대해서는 좋게 여기신다고 항의하는 기도입니다.
2) 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수로부터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고문대에 올려놓고 고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묻는 탄원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욥 10:4)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욥 10:5)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욥 10: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3)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악한 사람이 아님을 아실 것인데 왜 자신을 멸하시려고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욥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여기서 ‘악하지 않은 줄을’ 이라는 말은 선하신 하나님의 본성과 대조가 되는 악한 행동을 뜻하며 자신이 사악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시면서 자신을 멸하려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기도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욥의 기도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은 이러 이러한 하나님이실 것이라고 가설을 설정해 놓고 하나님께 따지려고 하는 배은망덕한 기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 욥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까닭 없이 욥을 정죄하시거나(2 절), 학대하고 멸시하거나(3절), 인간들처럼 허물을 찾고 죄를 들추거나(6절), 멸망시키려고 하시려고(8절) 욥을 괴롭히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오해하고 생각일 뿐이지 실상 하나님은 욥을 누구보다 사랑하시고 욥을 위해 깊으신 뜻을 가지고 계시며, 욥이 고난을 겪는 것을 보시면서 내심으로 안타깝게 여기시고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자성어로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묶으셨다고 생각이 되면 낙심하지 말고, 나를 묶으신 하나님이 또 풀어주실 것이라는 긍정적인 믿음으로 인내하고 굳게 신뢰한다면 그것은 이미 '고난'이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욥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께 믿고 있고 기도할 때 내가 성경을 바로 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서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보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아주 사소한 오해가 심각한 문제로 발전을 할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원인은 그 사람을 내가 잘 알지도 못하고 그 사람과 내가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눠 보지도 않았고, 그 사건을 내 눈으로 보거나, 그 말을 직접 내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면서 다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을 듣고, 내 느낌으로, 내 생각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적대적인 관계가 될 때가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 사람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함께 친구가 되고 보니 내가 들었던 것과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함을 깨닫게 될 때 상대방을 오해했던 것에 대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오해를 풀면 간단한 것도 오해를 풀지 않기 때문에 관계가 계속 나빠지고 일을 더 어렵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보다 더 심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 성경 해석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지 못하면 구원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믿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바른 생각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른 기도를 해야만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기도의 응답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되 균형있게 읽으라고 하는 것이며, 만일 구약만 보고 신약을 보지 않거나 소홀히 하면 율법에만 얽매여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기 쉬우며,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매우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으로 오해하거나, 정반대로 존재하나 마나한 가벼운 하나님으로 오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아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없게 하기 위해 ‘힘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자’고 권고하였습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3. 건강한 믿음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으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알 때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지만, 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는 행복하지 못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물론 욥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욥의 고백을 통해서 욥의 믿음이 마치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배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만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어도 배는 침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어떤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긍정적인 믿음
욥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마치 토기장이가 흙으로 옹기를 빚는 것처럼 자기를 지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욥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욥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욥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지으시되 마치 발달된 현대 의학을 통해서 어린 생명이 어떻게 수정이 되어 점진적으로 자라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욥 10: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욥 10:11)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욥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으시되 육체만이 아니라 생명과 은혜와 영혼을 주시고 그것을 보살피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하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욥 10: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여기서 ‘지키셨나이다’ 라는 말은 보존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감시하다, 주의하다’ 라는 뜻의 완료형 동사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창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시고 보이는 육체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까지 지키심을 믿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도 본받아야 할 긍정적인 신앙입니다.
(시 119: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향한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개입하셨음을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것을 깨달아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진정한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은혜의 깨달음 없이 자기 힘만으로 감당하려 하면 신앙생활이 힘들어 집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유는 우연이나 내 의지가 아니고 오직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의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여기 까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 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그러한 믿음은 성도들을 뒤흔드는 세상의 허무주의와 향락주의를 배격하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일깨워 줌으로 보다 더 적극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줍니다.

2. 부정적인 편견
욥은 친구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자기를 의롭다고만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비록 자기가 의로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머리를 들 수 없도록 자기 자신 속에는 부끄러운 것들이 가득한 죄인으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겸손히 고백하였습니다.
(욥 10: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렇게 드러날수록 그와 같은 나를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가 절실하게 요청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에 대해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만일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죄인으로 주목하시고 자신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오해하였습니다.
(욥 10:14)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여기서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라는 말과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라는 말은 미완료 동사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욥을 정죄하시고 죄를 사해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욥의 그 같은 편견은 하나님이 자기를 고통 중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나 소망을 일체 다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으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차라리 죽기를 원하였습니다.
(욥 10: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을 고통 중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이상 간섭하지 마시고 그냥 내버려두시면 죽음이 오기 전에 잠시나마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였습니다.
(욥 10: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욥 10: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바로 이점이 욥의 잘못된 편견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하는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함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들추시는 것은 정죄가 아니라 사죄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우리를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시다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로 약속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고, 약속하셨다고 하셨을지라도 그것을 미루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이 되었으며, 그 사랑의 끝은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변경되거나 중단되지 않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허락되어진 너무나 고귀하고 크나 큰 사랑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끊을 수 없고 가로 막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인 것입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아니면 어려움입니까? 핍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아니면 칼입니까?””(롬 8: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롬 8: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하늘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힘이나,”(롬 8:39) “가장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의 믿음도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인생살이가 늘 평안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욥이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 견디기 어려워 차라리 세상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절박할 때도 있습니다.
그 원인이 자신의 부족이나 허물 때문이든, 아니면 하나님께서 연단하시기 위해 주신 고난이든지 그 원인을 찾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기도할 것은 기도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정석이요, 정도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욥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뻐할 일을 도리어 슬퍼하고 감사할 일을 도리어 낙심하고 좌절하고 열심히 하면 될 일을 도피하려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 부부간에 마음이 맞지 않으면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맞춰주려고 노력을 해보지도 않고 이혼할 생각부터 하기 때문에 작은 불화가 큰불이 되는 것입니다.
2) 직장에서도 상사가 못마땅하고 봉급이 적으면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해서 앞질러갈 생각을 하기보다는 사표부터 내고 다른 직장을 구하려고 합니다.
3) 교회를 다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그 사람과 화해를 하고 사랑할 생각을 하지 않고 교회를 떠날 생각부터 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그 같은 편견이나, 현실도피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하면 건강한 그리스도인,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욥처럼 자신의 현실이 좀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의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이 겪는 고난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자신에 대한 기대가 크시다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설령 우리의 죄로 인해 징계를 하실 지라도 그것은 멸하시기 위해서 아니라 회개시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면 역시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나를 모태 중에서 지으시고 생명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내 영혼을 지켜 주시기를 변함없이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어떤 시련이 와도 놓치지 말고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로 어떤 고난 중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모델이었습니다.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러한 성도들의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계획하신대로 차질 없이 이 땅에 이루어져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의탁하고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