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8:3-7)
(욥 8: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욥 8: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욥 8: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욥 8: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세상에 갖가지 종류의 종교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논할 수 있는데 하나는 외적인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와 또 하나는 외적인 형식을 거부하고 내적인 마음의 자세를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그 중에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있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길까요? 아니면 마음을 중요하게 여길까요?
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삼상 16:7)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게 되면 다양한 형식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만일 그 형식을 조금이라도 어기거나 범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하셨습니다.
(민 3:4)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이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마음만 받으시고 행위나 형식은 거부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 행위나 형식 속에 진심과 마음이 담기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균형잡힌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마음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음이 육체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고 늘 육체와 더불어 역사하기 때문에 그 행위를 통해서 마음을 표현합니다.
마음이 슬프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마음이 기쁘면 입가에 웃음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여부는 구약시대 간절히 드린 제사처럼 이 시대는 간절한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헌신을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믿고 사랑하는가가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어떤 축복을 약속하셨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에게 어떤 형벌을 준비하셨는지 오늘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빌닷의 진단
오랫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 중에 처한 욥은 친구들에게 위로받기를 기대하였으나 도리어 은근히 자기를 정죄하는 말에 대해서 자기는 아무 죄도 없다고 변명하였습니다.
(욥 6: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욥 6: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설령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한들 하나님께 무슨 해가 되기에 자기의 사하여 주지 않고 , 죄악을 제거해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욥 7: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욥 7: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
욥이 견디기 힘든 고통 중에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아 위로를 받기를 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빌닷은 이해와 동정심에 찬 따뜻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욥의 말이 광풍과 같이 싸잡아 비난하였습니다.
(욥 8: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여기서 ‘거센 바람’이란 개역에서 ‘광풍’ 즉 미친 바람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욥을 정죄하는 빌닷의 말이 자식들을 몽땅 잃은 욥의 가슴에 대 못질을 하는 광풍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 26: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빌닷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결코 심판을 굽게 하시지 않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은 정의를 굽게 하시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욥 8: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그러나 빌닷의 이러한 일방적인 논리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맞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의 임금이나 법관처럼 이권과 금권에 의해 단 한 번도 잘못되거나 굽혀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욥이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욥은 누구보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신 분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함을 믿기 때문에 평소 자기 자녀들이 범죄한 것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잔치가 끝나면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욥 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닷이 욥의 자녀들의 죽임에 대해서 다양한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모든 죽음에 대해서 죄의 결과라는 동일한 진단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아 사람 빌닷은 욥에게 그의 십남매 자녀들이 일시에 몰살한 것은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은밀하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공의로운 재판을 하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욥 8: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여기서 ‘죄’라는 말은 빗나가다, 그릇 행하다, 죄를 짓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욥의 자녀들을 그 죄에 붙이셨기 때문에 욥의 자녀들이 일시에 다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범죄 하였다는 사실을 단정하고 있으나, 그의 주장은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정확한 물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관적인 심증에 불과한 것입니다.
욥은 누구보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신 분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함을 믿기 때문에 평소 자기 자녀들이 범죄한 것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잔치가 끝나면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욥 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닷이 욥의 자녀들의 죽임에 대해서 다양한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모든 죽음에 대해서 죄의 결과라는 동일한 진단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그 이유를 묻고 따지기 전에 먼저 먹고 마실 것을 주는 일이 최선이고, 불의의 사고를 만나 죽어가는 환자에게는 그 사유를 따지기 전에 응급조치를 하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상처받은 상대방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빌닷처럼 정죄와 비판이 아니라 사랑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고 동정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안에서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상대방에게 말을 하거나,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위로와 도움을 준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나 상처나 고통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빌닷의 처방
무슨 질병을 막론하고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어야만 그 병에 적합한 약물치료와 시술을 통해서 완벽한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잘못 진단을 하였다면 아무리 소문난 의사가 고가의 약을 처방할지라도 그 병은 치료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고 맙니다.
오늘 성경에서 빌닷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닷은 욥의 고난을 진단하기를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재판을 굽게 하시지 않는 하나님이 욥에게 심판을 내리신 것이라고 진단을 하였습니다.
물론 오진이었습니다. 욥의 경우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처방으로는 욥이 치료가 될 수 없고 특수 처방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닷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통달한 사람처럼 욥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이 필요하다고 처방을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찾으라.
(욥 8: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여기서 ‘하나님을 찾으며’라는 말씀은 형식과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되 시간적으로 일찍 구하라는 것이고, 심정적으로 간절히 구하라는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사 26: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2)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라.
여기서 ‘간구하라’는 말씀은 ‘은혜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이는 불가능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창 28: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그에 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한 불쌍한 자들임을 알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도우심을 빌라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3) 청결하고 정직하라.
(욥 8: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씀이 아닙니까? ‘청결하고 정직하면’이라는 말씀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 친히 욥을 보증하시던 말씀입니다.
(욥 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그러므로 욥이 지금 고난을 당하는 것은 빌닷의 말처럼 욥이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거나, 청결하고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욥에게 징벌을 내리셨기 때문이 아님을 빌닷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빌닷의 말처럼 오늘 우리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기도하고 인간관계에서 청결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변함없이 복을 주십니다.
오늘 성경에서 빌닷이 욥에게 ‘만일 욥이 완전히 정직한 자라면 하나님께서는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신다. 비록 지금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라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빌닷이 욥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은 역설적으로 ‘욥이 지금 고난을 당하는 것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다. 만일 욥이 사곡한 자이면 하나님은 욥를 도우시지 않고 도리어 재앙 가운데에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실 것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축복과 형벌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기록인 구약과 예수님이 오시고 난 다음의 기록인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복주시기 위해 언약하신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실 축복과 믿지 않는 불순종 자에게 형벌과 저주에 대한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을 찾는 자의 축복
지나 간 과거가 아무리 과거가 역겨울지라도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이며, 현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입니다.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현재는 아무리 잘나간다고 할지라도 불안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아픈 과거는 치유를 받아야 하고, 현재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아야 하고, 미래에 희망이 약속되어 있어야 합니다.
1) 현재의 축복
빌닷은 하나님을 찾고,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청결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욥 8: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여기서 ‘의로운 처소’는 ‘목장, 양떼나 목자의 거처’를 가리키고, ‘평안케 하실 것’이라는 말은 ‘형통하게 하다, 완전하다, 완성하다’는 말의 와우 계속법으로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는 욥이 잃어버린 가정과 목축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2) 미래의 축복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여기서 미약함은 전반부는 모든 것을 상실한 욥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며, 나중은 욥이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미래에 주실 축복으로 오는 미래가 과거나 현재 보다 훨씬 더 좋다는 희망을 뜻합니다.
(잠 4:18,19)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선한 것의 처음 시작은 매우 미약할지라도 그 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창대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욥기가 끝나는 후반부를 보게 되면 빌닷의 말처럼 욥의 나중은 심히 창대해지는 축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정의가 바르지 못한 사회의 두드러진 징조는 사법부의 재판이 공정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힘이 있는 사람들이 법관을 매수하고 압력을 가하여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욥 8: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라는 말씀처럼 공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고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공평하신 재판장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의 형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왜 그 같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오늘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 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여기서 ‘잊어버리는 자’ 라는 말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신앙이 시들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능력과 말씀에 무관심한 불신앙의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나 성경이나 세상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무지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 무지한 존재로 전락하여 허망한 삶을 살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허약한 삶-갈대와 같은 삶
(욥 8:11)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욥 8:12)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곡한 자들은 왕골과 갈대는 빨리 자라는 것처럼 쉽게 흥왕합니다. 그러나 갈대가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는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아무리 무성하던 갈대도 물이 없으면 금방 시들어 말라 죽게 되는 갈대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린 악인의 결국은 패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2) 허망한 삶-거미줄과 같은 삶
(욥 8: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욥 8: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거미줄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고 보기에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는 일시적으로 화려한 번영과 사치스러운 삶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숨어서 약한 자가 거미줄에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걸리게 되면 재빠르게 낚아채는 거미와도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말은 지나가는 나그네가 나뭇가지로 한 번만 휘저으면 산산이 부서지는 거미줄처럼 마침내 멸망하고야 말게 된다는 것입니다.
3) 허무한 삶-돌짝 밭에 뿌리 내린 삶
(욥 8: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욥 8:18)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악인도 한 때는 나무가 동산의 토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서 양분을 마음껏 흡수하며 비좁은 돌 틈으로 뿌리가 파고 들어가서 견고해져서 폭풍우에도 잘 뽑히지 않는것처럼 번성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그 나무가 농부의 손에 들린 도끼나 톱으로 한순간 베어져버리면,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번성하는 악인은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갑작스런 심판으로 비참해질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해아래서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동등합니다. 누가 더 의롭고, 의롭지 못하고가 없습니다. 마치 도토리 키 재기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누가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인지 가려내는 기준은 누가 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인가? 에 달려 있습니다.
1) 어려운 일을 만날 때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도우심을 구하는가?
2) 기쁜 일을 만났을 때 혼자 좋아하고 자만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영광을 돌리는가?
욥처럼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아니면 기쁘고 즐거운 일을 당하거든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바리새인처럼 형식적인 종교인이 되지 말고 예배라는 형식 속에 신령과 진정이라는 알곡을 담아드리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든 찬송을 하든 봉사를 하든 무엇보다 열정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찾는 것을 매우 기뻐하시고 만나주시고 사랑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이란 생각이나 감정이 획일적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정반대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상대방에게 말을 하거나 도움을 준다는 것이 오히려 상대방에게는 부담이나 상처나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다 좋은 약은 아닙니다. 만일 의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 함부로 약을 오용을 하게 되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읽고 듣는 자에게 깨달음과 감동을 주어 심성을 변화시키는 신령한 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도 각 사람마다 적합한 말씀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성경을 인용하여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1) 아무리 옳고 성경적인 논리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자신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빌닷이 욥에게 한 말은 다 옳은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빌닷은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욥의 형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욥에게 강요한 것은 마치 환자를 오진하여 처방한 것처럼 오히려 욥의 마음을 더 굳게 닫히게 만들었습니다.
(욥 8: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욥 8: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욥 8: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빌닷은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굽게 하시지 않는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욥의 자녀들이 죽음을 당한 것은 어떤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빌닷은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언제나 죄에 대한 형벌 때문만은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에 대한 시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믿음의 사람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매우 고통스러운 고난을 오랫동안 당하게 하거나, 스데반처럼 처참한 죽임을 통해서 영광스런 순교자가 되게 하시기도 합니다.
2) 어떤 논리나 성경 지식을 적용할 때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균형 잡힌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빌닷도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 친구의 진정한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욥을 위로 하려다가 오히려 상처만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논리는 인간적 경험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닷은 과거의 전통과 편협한 성경 상식을 자기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자만하며 친구 욥의 현실 속에 전개되는 다양한 삶을 무시하고 무조건 정죄하고 매도한 것은 교만이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범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빌닷처럼 하나님은 공의에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간과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욥의 경우와 같이 때로는 의인일지라도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만 강조하면 하나님에 대한 균형 잡힌 신앙이 될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에 대해서 극단에 치우쳐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이성으로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오묘한 사랑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고난 중에서도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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