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7:11-15)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육신은 흙으로 지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그와 같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과로한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나 오염된 공기를 호흡하고 오염된 음식물을 섭취하게 되면 면역력이 무너져서 온갖 질병에 걸려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병원에 가서 건강여부를 진단하여 신체의 약한 부분과 병든 부분을 찾아내어 예방이나 치료를 받지 않으면 병에 장사가 없는 인간은 평소에 누구보다 건강해 보였던 사람도 갑자기 발병을 하여 병마에 싸워야 하는 고통의 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그와 같은 육체적인 고통과 질병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거나 신령한 은혜를 지속적으로 공급을 받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그 영혼과 마음까지도 병이 들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평소 그처럼 믿음이 좋았고 마음이 착하고 온순했던 사람도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부정적이고 과격해지고 입만 열면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그러한 시험에 들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내가 혹시 영적으로 허약해져서 병들어가고 있지 않은지 말씀을 통해서 진단을 받고 성령으로 치유를 받는 복된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욥의 고통
인간은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가난하게 되고 연약해지게 되면 평소에 믿음이 좋고 성격이 좋았던 사람도 점차 변형되어 가는 것을 욥에게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왔던 욥이 사탄의 시험을 받아 물질적으로 가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겪는 고통이 어느 정도 심했는가 하는 것을 욥의 고백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생이란?
오늘 성경 말씀은 욥의 인생 고백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명제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인생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몇가지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욥 7) “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인생’이라는 히브리 성경 원어>(v/na) 에노쉬 의 의미는 ‘약하다, 병들다’에서 파생된 말로 인간의 무가치함과 연약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왜 그렇게 연약한 존재일까요?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장 존귀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처럼 연약한 존재가 된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고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육체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아무리 큰 소리를 친다고 할지라도 죽음으로 말미암아 본래 지으심을 받을 때의 원소재인 티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시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여기서 ‘돌아가라’는 말은 처음 있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백년도 채우지 못한 채 누구나 다 티끌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백년도 채우지 못한 채 누구나 다 티끌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기서 ‘돌아가라’는 말은 처음 있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일에 시달리는 인생
인간이 일평생 당하는 고통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하는 수고와 또 하나는 원치 않는 질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 짤막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양이 많지 않으면 질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욥의 고백을 들어보면 기쁨과 좋은 날은 잠깐이고 기나긴 날들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게 보내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 7: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힘든 노동’은 과거 개역 성경에서는 ‘전쟁’이라고 번역을 하였으나 개정판에서는 ‘힘든 노동’이라고 개정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뒤에 나오는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다는 말 때문에 전쟁을 힘든 노동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수고가 헛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수고만 죽도록 하고 그 결과는 다른 사람이 누리는 헛수고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 128: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한 평생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생존경쟁은 전쟁과 다름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전선에는 싸우는 군인이나 뼈빠지게 수고하는 품꾼처럼 일하지 않으면 남보다 앞서가거나, 더 높아지거나, 더 잘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인생살이는 전쟁이요 곧 노동입니다.
그와 같은 인생이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가 수고한 것에 대한 응분의 보상과 일에서 벗어나는 ‘쉼과 안식’일 것입니다.
(욥 7: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그와 같은 욥의 모습은 현대인들의 처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도 쉬운 일은 없으며, 누구나 원하는 것은 그 일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라며 퇴근시간, 주말, 봉급날, 휴가를 간절히 원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일에 시달리는 인간에게 진정한 안식과 쉼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3) 질병에 시달리는 인생
욥은 누구보다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욥 7: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욥의 고통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우연이가 아니라 피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몸을 뒤척이느라고 밤마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욥 7: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몸이 아파본 사람은 쉽게 경험하는 일이지만 낮의 한 시간과 밤의 한 시간은 시계로는 같은 한 시간이지만 느낌으로는 천지차이입니다. 밤이 오면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욥 7: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몸이 가렵다 못해서 살에 구더기가 낫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긁기 위해 흙바닥에 몸을 비벼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다는 것입니다.
마치 열대 지방에 가면 야생동물들이 몸이 가려워서 진흙탕에 몸을 비비고 나서 햇볕에 쪼이면 흙물이 말라 갑옷처럼 된 것을 상상하면 욥이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베틀 북과 같은 인생
사람은 오늘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내일에 희망이 보인다면 그것을 참아낼 수 있지만 만일 내일에 희망이 없다면 오늘의 즐거움도 즐겁게 느껴지지가 않고 도리어 불안할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인생의 한 평생의 허무함을 고백하였다면, 이제 욥은 다시 인생의 사후 세계에 대해서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인생의 신속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한 시간과 만나서 대화하는 한 시간은 시계라는 기계적인 측정으로는 동일한 한 시간이지만, 감성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길이는 천지차이임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욥도 그와 같이 세월의 신속함과 더불어 인생의 무상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자신이 지금 고통을 당하고 하루하루가 베틀의 북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지만 내일이면 자신이 나아진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늘 하루하루가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욥 7: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여기서 베틀 북은 베틀로 천을 짤 때 실을 끼워 오르락내리락 실을 한 올 한 올 옮겨 다니며 옷감을 짜는 도구로 신속하게 움직이는 속도만큼 더 많은 천을 짜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욥은 인생이 마치 그 베틀 북처럼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5) 바람과 같은 인생
욥은 인생의 한 평생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한낱 바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고 멈추게 할 수 없고 돌이키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욥 7: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 때는 태풍이 되어 큰 나무를 쓰러뜨릴 정도로 강력하지만 그 자리에 머무는 법이 없고 스쳐 지나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참으로 허망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태풍하면 보통 폭우로 인한 산사태나 농경지 침수, 해안 지방의 해일 피해 등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번 중부일원을 지나간 콤파스 태풍은 하루 밤 잠깐 스쳐 지나간 강풍인줄 알았으나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자연들이 모인 안면도 일대의 송림공원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광능래 숲을 무참히 짓밟고 지나갔습니다.
그러한 피해는 망치나 도끼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하나로 그와 같은 피해들을 준 것은 바람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다고 권력이 있다고 젊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바람과 같은 죽음이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이 어느 누구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떠나야 하고 한번 떠난 사람은 되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욥 7: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5. 구름과 같은 인생
욥은 인생의 한 평생을 구름으로 비유하였습니다. 구름의 종류에는 둥근 산봉우리처럼 솟아나는 뭉게구름, 비와 번개와 천둥을 동반하는 소나기구름, 높은 하늘에 떠 있는 양떼와 같은 둥글둥글한 구름, 새털모양의 흰색 구름 등이 있습니다.
(욥 7: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욥 7: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그와 같은 구름의 특징은 아무리 구름이 아름다워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바람에 밀려서 곧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음부 곧 스올은 고대 히브리인들 이 죽은 자의 영혼이 내려간다고 한 어두운 지하 세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 간 자는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도 믿고 있었습니다.
자연 세계를 관찰하게 되면 구름이 어떤 형태를 유지하면서 점차 바람에 밀려 점점 흘러가버리는 것을 맑은 가을 하늘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뭉개구름처럼 화려한 꿈을 꽃피우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영원하지 못하고 마치 구름이 바람에 밀려가듯이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여 음부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인생이 죽음으로 다 끝나 버리거나 죽음 이후에 무덤에 묻혀 한 줌의 흙이나 재로 변하는 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올이라는 사후의 세계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유명 인사도 되돌아 올 수 없게 되고 세월이 흐르고 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다 잊혀지고 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전 9: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지나간 사람들 중에 누가 예외가 있으며, 살아있는 사람 중에 욥의 말은 억지라고 결코 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2. 욥의 소원
인간의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혼은 이론적으로는 구분이 되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바늘과 실처럼 분리할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고통을 당하게 되면 영혼도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기쁘고 즐거우면 영혼도 기쁘고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욥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다가 보니 마음이 약해지고 영혼이 병들어 가는 모습을 욥의 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고난이 너무 오래 계속되고 내일이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은 채 여러 날, 여러 달이 지나가게 되자 고난 중에서도 묵묵히 침묵하며 입을 다물고 말을 절제하여 왔던 욥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입을 금하지 않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게 됩니다.
(욥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여기서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라는 말은 앞으로는 계속해서 말을 절제하거나 억제하거나 삼가지 않겠다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또한 ‘불평하리이다’ 라는 말은 말하다 탄식하다 불평하다의 미완료 동사로 계속해서 불평하겠다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욥이 그렇게 하려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듣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시 55: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그 이유는 지금 욥이 고통스러운 것은 온 몸이 썩어 악취가 나고 몸에 구데기가 기어 다니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영혼과 그의 마음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와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과거에 그렇게 말이 많던 사람이 침묵을 한다면 무엇인가 마음에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고, 정반대로 전에 말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면 무엇인가 좋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경건했던 욥이 그처럼 입을 금하지 않고 불평을 늘어 놓겠다고 하는 것은 욥에게 그 만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릴 정도로 큰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보아야 합니다.
욥을 더더욱 견딜 수 없게 하는 고통은 육체적으로 곪아 터지고 구데기가 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침묵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던 욥에게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정죄하고 비난하는 말을 퍼붓고 있기 때문에 욥의 영혼과 마음까지 아프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욥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번 쯤 가슴앓이를 해본 사람은 그 고통이 육체의 아픔보다 더 크다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때로 돈과 명예를 다 가진 유명 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끓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가난하고 병든 서민들이 고통스럽다고 자살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겪는 고통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이 될 때 영혼이 느끼게 되는 고통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이 될 때 마음으로 느끼는 고통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욥은 육체적인 고통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지만 잘 참아 왔으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욥이 영혼과 마음의 아픔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부정적으로 말하게 되고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그와 같은 불평으로 늘어 놓게 되었습니다.
1. 욥의 불평
1) 하나님의 지키심에 대한 불평
(욥 7: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여기서 ‘지키시니이까’ 라는 말은 감옥 또는 파수꾼이라는 말로 하나님이 자기를 철저하게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불평
(욥 7: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으로 욥에게 나타나 주셨다고 하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3) 하나님이 마음에 두심에 대한 불평
(욥 7: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여기서 ‘크게’ 라는 말은 성장하고 강해지고 찬양한다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하나님이 욥을 지금까지 그렇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에 두시고’ 라는 말은 단순히 두는 것이 아니라 배치하여 자리를 잡는다는 뜻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욥을 그처럼 마음에 두고 계신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4) 하나님께서 연단하심에 대한 불평
(욥 7: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여기서 ‘권징하시며’ 라는 말은 계수하다, 시찰하다, 방문하다 는 뜻의 미완료 동사이며, 단련하다는 말은 마치 검수원이 제품을 검사하는 것처럼 욥의 신앙을 시험하고 검사하신다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역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욥의 고백처럼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특별히 집중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설령 욥이 잘못된 길을 걸어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무슨 해가 되시는 것도 없으신데 욥이 그것을 원치 아니하시는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하시는 것을 감사하기는커녕 불평하고 있습니다.
2. 욥의 소원
욥은 오래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는 동안 그 영혼과 마음이 연약해지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접고 어서 빨리 세상을 떠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욥 7: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여기서 ‘택한다’는 말은 마음에 뼈를 깎는 고통을 겪으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당장 숨이 막혀 죽은 것을 결심하고 선택하겠다는 미완료 동사로 다른 바람과 소원은 없고 오로지 죽음만을 소원하였습니다.
(욥 7: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이와 같은 욥의 고백은 자신의 생사를 결정하는 권한이 자기에는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성급한 현대인들 같았으면 욥과 같이 기도하지 않고 당장 빌딩에서 뛰어내리든지 스스로 목을 매는 자살을 결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무리 죽기를 소원할지라도 그 결정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생명은 내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은 욥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은 이 고통의 과정을 욥이 무사히 통과하기만 하면 마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면 곧 바로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욥을 위해 축복된 미래를 준비해 놓고 계심을 욥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감사해야 할 처지에서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하며 죽기를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어려움을 당할 때 욥처럼 감사를 잃어버리고 원망 불평을 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영혼이 건강해야 하고 마음이 감사로 가득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욥처럼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아주 사소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하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하고 나를 왜 이 지경에 몰아 넣으셨는가? 라고 하면서 때로는 죽겠다고 하고, 교회 안다니겠다고 하고, 교회를 떠나겠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욥처럼 부귀와 영화를 누릴 때도 있지만 욥처럼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이 아프고 마음까지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되는 대로 말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고 말하고, 부정적으로 말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불평의 요소를 찾지 말고 감사의 요소를 찾아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인생의 결국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 때 비로소 겸손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질고 많은 세상에서 수많은 환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과 질병에서 치료해 주셔서 건강을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헛되지 않은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것은 한 마디로 신앙의 선진들처럼 사나 죽으나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만으로 다 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더 많은 생각과 깊이가 있는 삶입니다.
1) 그것은 자신이 가난하고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면으로 보나 다른 사람보다 더 많고 크고 강하다고 할지라도 인생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전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2) 그것은 자신이 아무리 젊고 유능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영원히 머물 수 없고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는 나그네임을 잊지 말아야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3)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도 베틀의 북과 같이 한 순간임을 깨닫고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약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4)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인생이 누구인가를 바로 아는 것만으로 되어지지 않고 인생의 길잡이로 세상에 오셔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고 주님께 나온 자들마다 가르치시고 치료하시고 가르치시고 변화시키시고 제자로 삼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5) 세상살이가 힘들어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는 반드시 태풍같은 죽음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갈 때가 있음을 알고 사후에 욥처럼 막연한 스올이 아니라 예수께서 예비해 놓으신 아버지 집 하늘나라가 있음을 믿고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골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그렇게 할 때 그 영혼은 아픈 것이 아니라 건강해지며, 그 마음은 괴로운 것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설 교 > 이규왕목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 앞에서 어찌 의로우랴(욥 9:1-3) (0) | 2010.11.09 |
---|---|
하나님을 찾는 자와 잊어버린 자 (욥 8:3-7) (0) | 2010.11.09 |
그칠 줄 모르는 고통 중에 위로(욥 6: 8-10) (0) | 2010.11.09 |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욥 5:6-11) (0) | 2010.11.09 |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욥 4:1-5) (0) | 2010.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