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욥 5:6-11)

미션(cmc) 2010. 11. 9. 18:28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욥 5:6-11)

“6”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8”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9”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사람은 어느 누구나 가족, 친구, 이웃, 교우와 같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중에 친구는 혈육이 아니지만 때로는 혈육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차라리 친구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백해무익한 친구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친구는 어떤 친구일까요? 어느 글에 보니 이런 친구가 좋은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는 정직하게 나의 허물을 지적해 주고 교만해졌을 때 쓴 소리를 하여 제동을 걸어주고, 불행이 닥쳤을 때 용기와 위로를 줄 수 해줄 수 있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내가 게을러지려고 할 때 곁에서 귀감이 되어주고, 곤경에 빠졌을 때 곁에서 함께 해결책을 찾아주고, 지혜롭고 사리분별에 밝아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나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친구는 한 마디로 나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그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하는 말과 끼리끼리 어울려 논다는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만일 나의 주변에 좋은 친구가 많고 그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다면, 얻는 것이 많고, 스트레스가 줄이고,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엘리바스의 비난
욥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 중에 있을 때 이역만리에서 찾아온 친구들이 칠일 밤낮을 욥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욥의 친구들의 우정이 얼마나 돈돈한 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 성경은 욥이 고통 중에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을 내려놓고 솔직한 감정으로 자신의 심정을 거짓없이 고백한 것은 아마도 친구들에게 비난이 아니라 위로 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럴 때 욥의 친구들은 무엇을 해주었어야 하며, 또 고통받는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을까요?
욥의 친구들은 나름대로 친구로서 충고는 하였지만 위로가 없었고, 욥의 무거운 짐을 더 무겁게 만드는 친구들이었음을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이는 욥이 고통 중에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죽기를 원한 것에 대해서 엘리바스는 그것을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인간인 이상 분노와 시기의 감정이 발생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명한 이들은 차분하고 냉정하며 점잖게 대응합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주 순식간에 분노와 시기의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가인의 경우 분을 삭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죄를 다스리도록 권면했지만 결국 동생을 죽이고 인류 최초 살인자가 됩니다(창 4:7).
분노와 시기의 감정 폭발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이기 때문에 더욱 무섭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와 시기와 감성에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엡 4:26). 성경은 이런 자를 가리켜 용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였습니다(잠 16:32).
(잠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 14:30)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분노하는 자는 미련한 자라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였습니다.
“3”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여기서 나무가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는 것은 과거 욥이 잘 살았던 것을 비유로 하는 말이며, 현재 욥이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식으로 욥을 비난하는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4”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5”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1) 욥이 그동안에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어버린 것도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과 저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2) 욥이 재산을 몽땅 빼앗긴 것도 그 때문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시 근동 지방의 사람들은 추수한 뒤 곡식 단을 가시나무로 가려 보관하거나 그 낱알을 덮어 보관하였습니다. 이는 짐승이 물고 가거나 먹는 것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종종 출몰하여 식량을 약탈하는 침입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은 악인이 그 곡식(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자구책을 강구하나 결국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이 다 빼앗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인과응보라는 논리로 틀리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을 적용하는 목적이나 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옳은 말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욥은 엘리바스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께 범죄를 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바스는 편견을 가지고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요, 잘못된 비판이요, 잘못된 충고인 것입니다.
물론 모세 오경에도 엘리바스가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죄 값으로 자녀들이 저주를 받게 될 것에 대해 경고한 말씀입니다.
(신 28:4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신 28: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
설령 욥이 그와 같은 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엘리바스가 진정한 친구라면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욥에게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친구의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2. 엘리바스의 신앙
세상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세상을 살아오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경험하면서 각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생겨지게 됩니다.
엘리바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바스는 때로 비몽사몽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다고 고백할 정도로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가 믿고 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을까요?
엘리바스가 욥에게 자신은 정의롭고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처럼 욥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을 통해서 엘리바스가 경험하고 깨달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을까요?

1) 심판주 하나님
(욥 4: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2) 창조주 하나님
(욥 4: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3) 징계하시는 하나님
(욥 5: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2.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엘리바스는 욥에게 그 같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셔서 큰 일을 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욥 5:9)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여기서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말은 탐구하거나 조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무한하신 분임을 '기이한 일‘이라는 말은 비범하고 놀랍고 뛰어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행하신다‘는 말은 일을 만들고 형성하고 이루신다는 현재진행형으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계속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1) 교활한 자를 꺾으심
(욥 5:12)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여기서 ‘교활’하다는 말은 간교하고 거짓된 자를 뜻하며,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의 계획과 생각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정도가 아니라 ‘꺾으사’라는 말씀처럼 박살을 내시고 헛되게 하시고 실패로 돌아가게 하시는 정의로우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2) 가난한 자를 구원하심
(욥 5:15)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여기서 ‘가난한 자’라는 말은 경제적으로 궁핍할 사람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호를 필요로 하는 힘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러한 사람들은 돈도 배경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메마른 세상은 그러한 사람들이 강자들이나 교만한 자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1) 엘리바스의 강조점
고난의 근원은 인간의 죄성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욥의 고난과 불평, 죽음을 갈망하는 것은 욥의 신앙이 잘못된 데서 기인한 것이라 주장하며,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만이 고난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였습니다.

2) 엘리바스의 모순
하나님의 섭리 일면 만을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온유, 자비 사랑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고난과 재앙은 보편적인 진리이나 때로 예외가 있음을 간과하였습니다. 그 결과 징계가 아니라 특별한 곤경에 처해있는 욥에게 성경을 무리하게 적용하므로 욥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는 공허한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엘리바스의 강론을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성도들이 명심해야할 교훈입니다. 고난 그 자체가 인간 개인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올 경우 엘리바스의 설득은 매우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 성찰해야 합니다.

엘리바스는 당시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동방 땅에서 교회와 성경이 없었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그와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또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바스나 욥의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더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신구약 66권 성경을 주셨습니다.
2) 주님이 피 흘려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주셨습니다.
3)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깨닫고, 이해하고, 믿고,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리바스보다 더 복된 자임을 알고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힘써 구하여, 더욱 깊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하고 믿어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3. 엘리바스의 권면
엘리바스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욥에게 그 원인이 무엇이며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제시하였습니다.

1.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고통의 원인은 두 가지로 말미암아 오는데 하나는 선천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후천적이라는 것입니다.

1) 선천적인 고통
“6”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이 말은 인생에게 있어서 고통이란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유별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이 겪게 되는 고난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고난을 피할 수 없도록 숙명적으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만 고통당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욥과 같이 매우 성실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일수록 더욱 이와 같은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마치 백화점에서 상인들이 각기 다른 물건을 팔듯이 고통의 종류가 다르고 정도가 다를 뿐이지 일평생 단 한 번도 마음고생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은 마치 여름에는 더운 것이 정상이고 겨울에는 추운 것이 정상인 것처럼 인생이 살아있는 동안에 고통과 고난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처럼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묵묵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그것을 이겨내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2) 후천적인 고통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엘리바스는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되는 후천적인 원인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범한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셨기 때문에 욥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말처럼 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에 대해 징계하시는 내용이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징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도구로 말씀하고도 있습니다.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욥이 지금 고통을 당하는 원인은 하나님께서 욥의 죄에 대해서 징벌을 내리신 것이 아님을 엘리바스는 알지 못하고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마치 진리처럼 생각하고 욥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다고 진단을 한 것입니다.

2. 고통에 대한 처방에 대하여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단할 때 오진을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환자가 오진을 하게 되면 의사가 내리는 처방약이나 수술은 환자를 더 고통스럽고 위험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선천적인 원인과 후천적인 원인을 진단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처방전을 제시하였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8”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을 ‘찾겠고’ 라는 말은 vr'D ‘자주가다, 구하다, 문의하다, 노력하다’ 는 뜻으로 미완료 동사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찾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탁하리라’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를 수립하다’는 의미로 역시 미완료 동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정립해 나가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욥의 징계를 풀어주심으로 욥이 당하는 아픔을 싸매시고 고쳐 주실 것이며, 환난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며, 재앙이 미치지 못하게 하여 주실 것이라고 처방을 하였습니다.
(욥 5: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욥 5: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어떻게 보면 욥에 고난에 대한 엘리바스의 진단과 처방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하게 될 것이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는 만능의 진단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크고 작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고난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것입니다.
고난의 문제를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고난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우리 앞에 섭니다. 따라서 고난의 문제는 고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1) 인간으로 하여금 각성케 하고 자기 성찰을 하게하며, 궁극적으로는 회개케 함으로써 하나님께 굴복케 하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2)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 정화되고 치유되고 훈련시켜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하는 긍정적인 수단입니다.
3) 인간이 고난을 당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뒤따르게 하기 위한 특별한 섭리 때문입니다.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되면 의사의 말도 듣지만 자기와 같은 병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무엇이 약이 되고, 무엇을 먹었더니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민간요법인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이야기들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사실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효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부작용이 일어나서 병세를 더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엘리바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통은 욥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가 아니라 정반대로 욥의 신앙을 사탄에게 입증하기 위해서 연단하시기 위한 고통이었다면 엘리바스는 영적으로 오진을 한 것입니다.
한 번쯤이라도 자기보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인 욥이 왜 그렇게 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는지를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욥의 입장에서 욥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우선이었어야 합니다.
욥을 정죄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동정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게 되었을 것이고, 욥이 겪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바스만 그런 과오를 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사회에서 이웃에게, 교회에서 교우에게 상담을 한다고 잔소리나 충고나 상담을 한다고 하면서 엘리바스처럼 오진을 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부모에게 부부간에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고, 친구 간에 치료약이 없는 섭섭증이라는 증후군에 걸리게 되고, 교우 간에 상처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웃과의 관계에서 엘리바스와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게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어주신 것처럼 상대방을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내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하여야 하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 화
찰스 쉘던이란 작자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제목의 책을 지었습니다. 이 책은 1896년 저술된 이후 미국에서만 16개 이상의 출판사, 유럽과 호주 등에서 50여개 이상의 출판사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출간되었습니다.
지난 120여 년 동안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동안 21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미국에서만 3천 만 권 이상, 전 세계적으로는 6천만 권 이상 팔린 장기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주인공 헨리 맥스웰은 목회적 영역에서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사역하는 성공한 목회자였습다. 그런데 어느 날, 한창의 나이 40대 중반에 회사 부도로 인한 실직을 당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헤어져 살게 되면서 큰 슬픔과 상실감에 빠진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결국 남자는 맥스웰 목사의 품에 안겨 죽고 맥스웰 목사는 남자가 죽기 전 교회에서 외친 소리를 통해 자기 신앙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맥스웰 목사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고, 그것은 “예수님이 나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교인들의 삶까지도 확대되어 간다. 그리고 그 변화의 물결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들이 미국 레이먼드 제일교회 성도들과 맥스웰 목사를 중심으로 소개된 책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독자들이 이 책이 주는 강한 의미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삶에 큰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기독교 최고의 고전이기도 합니다.
정근모 박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물음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 어느 교회 성도들이 이 책을 소개받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간증이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를 길가에 버렸다가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시지 않을 것 같아서 차를 돌려 다시 돌아갔어요. 제가 버린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넣다가 그만 그 주위에 있던 다른 쓰레기들까지 다 줍고 왔답니다.”
“성가시게 구는 오빠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예수님 생각이 나서 자비를 베풀기로 결심했어요. 화를 꾹 참고 한번 씨~익 웃어 줬더니 오빠가 ‘드디어 너가 미쳤구나’ 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돌아서는 오빠의 등을 향해 정의의 펀치를 날렸어요. 분명히 예수님이라도 그렇게 하셨을 거에요.”
“시험 하루 전에 제 친구가 훔친 시험지의 복사본을 한장 줬어요. 그 시험지를 놓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몰라요. 그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훔친 시험지를 찢어버리고 난 다음 A 보다 더 영광스러운 C를 받았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언제나 화만 내시는 분이었어요.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를 생각했어요. 그날 밤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 친구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친구란?
환경이 좋던 나쁘던 함께 있었으면,
문제가 생겼을 때 저절로 고민을 떨어 놓고 싶어지는,
좋은 소식을 들으면 제일 먼저 알리고 싶은,
다른 사람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일도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때 의지하고 싶은,
내가 쓰러졌을 때 곁에서 무릎 꿇어 일으켜 주는,
슬플 때 기대어서 울 수 있는 어깨를 가진,
내가 울고 있을 때 그의 얼굴에도 몇 가닥의 눈물이 보이는,
내가 실수했다 하더라도 조금도 언짢은 표정을 하지 않는,
언제나 충고도 해주고 위로도 해주는,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는 사람이다.
여러분에게 그러한 친구가 있습니까? 저에게는 그러한 친구가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엘리바스와 같은 쓴 소리 대신에 우리 대신 매를 맞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요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오늘 우리 중에도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고 양심에 부끄러운 것이 없이 깨끗하게 산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엘리바스와 같은 과오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입에 식성에 맞지 않으면 먹는다는 것이 하나도 즐겁지 않고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체질에 맞지 않으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킬 뿐입니다.
사람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이 옳고 그르고 성경적이고 아니고 사실이고 아니고도 중요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정서에 부합하여야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고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야 말로 울리는 괭가리 소리처럼 공허하게 들리고 오히려 마음에 반감을 일으키게 될 뿐입니다.
만일 친구보다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더 높고, 재산이 더 많고, 신앙 연조가 더 오래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부모나 스승처럼 친구를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말을 할 때 아무리 옳고 바르고 성경적인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에 감동을 받거나 귀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만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는 의사와도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처럼 상대방을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아프게 하는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자주 주변 사람에게 말로 상처를 주게 되는데 흔히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와 같은 나의 잘못된 언행 심사가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직결되어 육신의 상처보다 더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되고 그 결과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은 말일수록 더 신중하고 조심해서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