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두려움이 밀려 들 때 (욥 3:20-26)

미션(cmc) 2010. 9. 25. 09:57

두려움이 밀려 들 때 (욥 3:20-26)

[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



구나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일곱 가지 감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일곱 가지가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희(喜)·노(怒)·우(憂)·사(思)·비(悲)·경(驚)·공(恐)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노라면 아마도 그 같은 감정들을 자주 경험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긍정적인 감정은 기쁨과 즐거움과 생각하는 것이라면, 부정적인 감정은 악과 분노와 욕심과 미움과 근심과 놀람과 두려움일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떤 마음의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시 31:24 )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자주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믿음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경 말씀대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을 돌이켜 보면 오히려 자주 분노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욕심 부리고, 화내고, 근심하고, 놀라고, 두려워하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 부정적인 삶을 살 때가 더 많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특히 누구보다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성도들에게도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누구나 다 원치 않는데도 그렇게 사는 원인은 믿음이 없어서 일까요? 아니면 세상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일까요? 그럴 때 믿음의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고자 합니다.

1. 욥의 탄식
욥은 우리와 똑같은 성품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면서도 우리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물질적으로 가정적으로 신체적으로 매우 가혹한 시험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티끌만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탤런트처럼 연극을 한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두 번이나 거듭해서 칭찬하고 자랑하실 정도로 진실이었고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욥 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그러한 욥을 보면서 만일 나에게도 욥과 같은 어려움이 밀려든다면 나도 욥처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을까? 라고 자문을 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욥처럼 될 수 없다’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욥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고, 우리는 욥처럼 될 자신이 없다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100m 경주에서 일이삼등은 잘만하면 결승점에 가서 얼마든지 순위가 바뀔 수 있지만, 마라톤 경주에서 일등과 꼴등은 결코 순위가 뒤집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신앙 위인들은 세상 위인전기처럼 아무런 약점이나 오류가 없는 인물로 묘사되지 않고, 때로는 하나님 덮어 놓으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될 정도로 허물과 치부를 적나라하게 기록해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하나님을 대면한 모세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나 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들처럼 허물과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록하신 이유는 그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큰일을 하셨다는 점을 통해서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이 택하시고 변화시키시고 세우시면 얼마든지 큰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점만이 아니라 단점이 있고, 앞과 뒤가 다를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며 상처를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묵묵히 지켜보면서 기다려야만 그 사람의 속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사람에게 속지도 않고, 실망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 아래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신격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
반대로 아무리 잘못을 범했다고 해도 정죄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용서하고 사랑으로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동방에서 제일가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자랑하셨던 욥의 이중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욥 3: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여기서 ‘그 후에’ 라는 말은 욥이 재앙을 만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이 칠일 밤낮을 욥 곁에서 떠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 준 때를 가리킵니다. 욥은 더 이상 침묵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욥은 지난 날 친구들보다 더 잘나가던 때를 생각해서라도 마지막 남은 손톱만큼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기 위해 침묵을 깨고, 자신의 소감이나 입장을 친구들에게 어떤 모양으로든지 말을 해야만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끝까지 가면을 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찬송을 부르거나 아니면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잘못 믿었다고 후회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도 저도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일을 저주하니라’는 말의 저주는 8절에 나오는 ‘저주하는 자’라는 말의 종교적인 저주와는 다른 단어로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것을 후회하는 말입니다.
이는 욥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신의 출생을 ‘ 하찮고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겼다는 의미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한번 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였음을 1-10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욥 3: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욥 3:4)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욥 3: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욥 3:8)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욥이 그렇게 되지 못한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모친의 태문을 닫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 3: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아무리 가난하고 인생살이가 힘들고 어려워도 생일날이면 평소와 달리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조촐하게 음식을 먹으며 축하하는 기분 좋은 날이 아닙니까?
어느 장로님이 부부 휴가를 가서 어느 날 아침 부인 집사님에게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주어서 참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하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부러워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필리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 사람들과 다른 점은 잘 웃고 낙천적으로 사는 것과 더불어 두드러진 특징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조차도 식구들의 생일을 철저하게 챙겨먹는 문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안면만 있으면 자기 생일은 물론 자기 가족의 생일까지 며칠 전부터 미리 알려서 선물을 준비해 오라고 요청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욥은 자기 생일을 축하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 매우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다는 것은 부모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보다 궁극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 은혜마저 부정합니다. 부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왜 그때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냐고 반문하고 항의합니다. 이와 같은 욥의 모습은 이전에 하나님을 찬송하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욥의 그 같은 모습을 보면서 변덕스런 인간이 상황 변화에 따라 변심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떤 경우에서도 큰소리치며 장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욥의 소원
욥은 처음에 그가 잉태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노래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잉태되었더라도 태중에서 죽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것으로라도 행복했을 것을 노래했습니다.
욥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을 뿐 아니라, 어차피 자기가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면 사산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죽음을 동경하였습니다.
(욥 3: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구약 시대에 출생은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하였다면(창 33:5;48:9;시 127:3), 낙태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징벌과 저주로 인식을 하였습니다.(출 21:22-25;민 12:12; 시 58:8 호 9:1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자신의 생일 저주하고 차라리 낙태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한 것은 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가? 하는 것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욥 3:16)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병이나, 가난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열심히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건강식과 보조 식품이나 보약을 선호하는 이유는 건강을 잃으면 죽게 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욥은 정반대로 죽음을 동경하고 소원한 것은 요즘 자살 클럽 회원처럼 염세주의에 빠져서 아니라 사는 것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죽음을 왜곡된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죽음 너머에 사후의 세계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곳은 지상에서의 모든 수고에서 벗어나 영원한 휴식의 기회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욥 3: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욥 3: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그 이유는 욥이 살아있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모두 다 고통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 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오로지 죽음뿐이라고 믿었습니다.
(욥 3: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이는 온 몸에 퍼진 질병으로 인해 처참한 절규를 내 뱉는 욥의 상태를 보다 적나라하게 묘사해 주고 있는 것으로 욥이 고통으로 인해 신음하는 소리가 마치 바다 물소리처럼 그칠 줄 몰랐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욥은 현재의 고통이 너무도 크므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욥은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 휴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죽음 뿐이라고 생각하고, 삶에 대한 아무런 미련이나 두려움이 없이 마치 죽음을 보물을 찾는 것처럼 소망하였습니다.
(욥 3: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욥은 현재의 모든 고난과 불평등이 종결되고 안식이 보장되는 곳이 사후(死後)의 세계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묻힐 무덤을 찾아 얻는 다면 최고로 기뻐하는 잔치를 열겠다는 것입니다.
(욥 3: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여기서 '기뻐하다'라는 원어의 의미는 감정의 흥분 상태에서 주위를 빙빙 돌며 춤을 추는 행위가 동반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은 '즐거워하다'라는 말과 더불어 역설적으로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마치 청문회를 시청하면서 실망감을 금할 길 없었던 것처럼 혹시 욥이 신앙을 상실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비 신앙적인 것으로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욥은 지금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매우 크나큰 고통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장탄식을 발할 수밖에 없었고 그 돌파구로 죽음을 동경하고 예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유일한 돌파구인 죽음을 소망한 것은 단순히 고통에서 도피하려는 염세주의가 아니라 죽음 너머에 차별이나 고통이 없고 오로지 안식과 평화가 있는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욥 3: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욥 3:19)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우리는 그와 같은 욥의 모습을 통해서 그 많은 부귀영화가 죽음 앞에서 한낱 휴지와 같은 것으로 두려움을 제거하거나 고통을 감하지 못하며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세에 대한 영원한 소망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붙잡고 사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 순간에 욥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탄이 목적하고 기대했던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욥의 그렇게 두려워하는 모습에 가장 긴장하고 실망하실 분은 욥의 신앙을 자랑하셨던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욥에 대해서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기다리셨습니다.
문제는 욥보다 신앙이 못한 우리가 욥과 같은 고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가 욥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욥을 변절자요 하나님을 실망시킨 자라고 비판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욥이었다면 나는 욥과 달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큰소리치며,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닥치는 환경적 요소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즐거운 일에는 웃고, 고통에는 슬픔과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욥의 경우에 있어도 그는 무한정 인내 하거나, 외부의 환경적 요소에 대해 전혀 무반응을 보이는 목석(木石)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극한의 고난 중에 죽음을 사모하는 욥의 모습은 욥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신 34:10) 모세(민 11:10-15),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한 엘리야(왕상19장),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이나 견뎌냈던 요나(욘4:3),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렘 20:14)와 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도 욥처럼 하나님께 죽음을 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기적을 행하였으나 신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도 할 수 없는 것들을 부모라고 해서 자녀들에게 강요하고 교사라고 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상관이라고 해서 부하에게 강요하고 목사라고 해서 성도들에게 설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기가 말하고 가르친 것을 그대로 살아 보려고 하면 결코 그것이 쉽지 않고 때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하나님이 욥에게 하시는 것처럼 묵묵히 지켜보아야 합니다.
진실한 믿음의 성도들도 얼마든지 욥이 당한 것과 같은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당한 고난은 죽음이 아니라, 용광로에 제련을 하는 것처럼 욥의 신앙을 더 순수하게 만들고 욥을 죽음이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올림픽에서 42.195km를 완주해야 하는 마라토너들에게는 늘 포기의 유혹이 뒤따른 다고 합니다. 목이 타는 듯한 심한 고통은 선수로 하여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살이는 100m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승의 영광은 완주 후에 얻게 되는 것처럼 인생의, 참된 행복은 고통 후에 찾아옵니다.
어떤 행복도 대가를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고통입니다. 고통 없이 얻은 행복은 참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 다음에 찾아 온 것과 같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을 더 크게 부르고 더 가까이 오라는 사랑의 채찍입니다.
(신 4:30, 31)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고난을 겪을 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곧 영생의 주인,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3. 욥의 두려움
사람은 가난하거나 부요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를 막론하고 다 나름대로 두려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물질을 상실하고 가난하게 되지 않을까, 건강을 잃고 병들어 고통을 당하다가 죽지 않을까, 명예를 잃고 비천하게 되지 않을까, 인기를 잃어버리고 무시를 당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등등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그와 같은 위기에 빠지게 되면 한 없이 약해지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모든 것들을 이미 다 경험하고 초월한 사람입니다. 욥은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고 오로지 하나 죽는 것뿐이지만 그 죽음조차도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의 대상이었다면 과연 욥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욥은 크게 매순간마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마치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이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욥이 그처럼 두려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욥 3: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 3: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이러한 욥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인사 청문회 전에 화려한 업적 때문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 청문회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각가지 비리와 이중성 때문에 더 크게 실망을 하는 것처럼 욥에 대해서 실망감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모습에서 인간의 실체를 보아야 하며, 그 실체는 인간은 어느 누구도 신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신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한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 또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통 중에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밤낮으로 신음과 저주의 목소리를 발하며 죽음을 갈망하는 모습이 마치 신앙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욥이 신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인간임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에 직면하게 되면
어떤 사람은 반항을 하고 어떤 사람은 절망을 하고 어떤 사람은 담담하고 각기 나름대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재산이 있고 자녀가 있고 건강이 있을 때나 그것을 다 잃은 때나 항상 욥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근심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하나님을 부인하게 될까? 염려하는 영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욥 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랬던 욥이 지금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더 이상 고통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혹시나 내가 이러다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밀물처럼 몰려 온 것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은 결코 신앙의 변질이 아니라 성숙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두려움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비굴하게 타협하는가하면, 또 어떤 이는 필요이상의 만용으로 맞서는가, 어떤 이는 자살을 시도하고, 어떤 어디론가 무작정 잠적해 버리는가하면, 간혹 어떤 이는 진정한 믿음에서 우러나온 용기와 현명한 지혜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폴 틸리히는 ‘존재하려는 용기’라는 글에서 “인간은 고통과 불운, 역경을 수용하고 헤쳐갈 때 비로소 인생에 담긴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눈물과 수고보다 더 많은 것으로 기쁘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그 두려움 때문에 문명을 발전시켰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한 기계 문명은 비행기나 자동차나 크루즈나 컴퓨터와 같은 것들이 대부분 전쟁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무기로 개발했던 부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어둠이 두려워서 불을 찾아내고, 사나운 짐승이 두려워서 무기를 만들고, 배고픔이 두려워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추위가 없고 과일이 흔하고 일 년에 여러 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부자로 잘 살 것 같으나 미개발 국가들이 많습니다. 춥고 작은 나라 사람들이 못살 것 같으나 북쪽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이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사람들입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진정한 용기란?‘ 이라는 글에서 “진정한 용기는 인간과 늘 공존하는 고통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볼 줄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면 편하고 안락한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살아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바르게 믿어 보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면 인생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 본래 어렵고 힘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한일보다, 남은 일이 많아 보일 때, 온 길보다, 남은 길이 멀어 보일 때, 되돌아가는 것이 끝마치는 것보다 쉬워 보일 때, 실패가 성공의 과정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좌절을 실패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자포자기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닮고 배워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앞서간 위인들의 공통점은 그럴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헤쳐 나갔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어떤 과업의 실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과업을 이루는 과정 속에 겪어야 할 고난을 아름다운 신앙으로 견지해 내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한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그는 욥과 흡사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두 사이에 끼였다’고 했습니다(빌 1:23).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때 사도 바울은 오히려 자기가 사는 것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에 자신은 살 것이라는 확신을 전했습니다(빌 1:25). 죽음과 삶 속에 있는 자신보다 빌립보 교인들을 더 염려하며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살 것을 주문했습니다(빌 1:27).
욥과 바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오직 연단의 차이입니다. 욥은 지금까지 아무런 연단이 없이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화초처럼 살아왔습니다.
반면 바울은 온갖 풍상을 다 겪었기 때문에 스스로 고난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연단은 위대한 신앙의 스승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반드시 연단을 주시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두려운 순간이 없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두려운 환경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 또한 없습니다.
고난을 길, 즉 십자가의 길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잘 들어서 고난 대신 복만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조차 십자가의 쓴잔은 피해 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야만 당신을 따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9:23).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고난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두려운 순간이 없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두려운 환경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 또한 없습니다.
그 두려움을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환경을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내가 피한다고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것,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과 무관합니다. 시간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주가 주시는 고난의 십자가를 언제든지 달게 지고 따라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주자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원인은 풍랑 때문이 아니다. 배가 흔들리기 때문도 아니다. 그 원인은 다만 주님과 멀어져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지금 내 배 안에 아니 계시기 때문일 뿐이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그 주님이 지금 배 앞에 당도해 계신다.
주님을 모셔라. 그러면 두려움은 저절로 물러갈 것이다. 주님은 유령이 아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나를 사랑하시기에 거센 풍랑도 밟고 달려오시는 분이시다. 공연히 어둠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풍랑이 두렵다고 벌벌 떨지 말고, 주님을 온전히 보고 모셔 들여라.
주님은 우리가 배가 고파하면 광야의 한 복판에서도 만나를 내려 주시고
목이 말라 하면 사막 한 가운데의 메마른 바위에서라도 생수가 솟게 하시는 분임을 기억하라.
아무리 거센 폭풍우라도 밟고 달려오시는 분임을 반드시 기억하라. 모든 의심을 버리고 주님을 모셔 들이면, 두려움은 물러가고 기쁨이 찾아온다.
내 인생도, 내 가정도, 내 직장도, 다 변화한다. 믿어라. 그 믿음으로 주님을 모시면, 그 믿음대로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IT 전자 산업의 발달과 기독교의 부흥의 원인 중에 하나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긴장상황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은 이유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다 그럴 것입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며 분노하고 저항 할 것인가, 아니면 도피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세 번째 일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결심이 든다면 욥처럼 두려워해야 할 것 하나는 내가 힘들고 어렵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마지막 죽음이 오는 순간까지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바울 사도처럼 승리의 개선가를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딤후 4:8)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입니다. 주님이 바로 정의의 재판관이시기 때문에 마지막 그 날에 주님은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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