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친구(욥 2:11-13)

미션(cmc) 2010. 9. 25. 09:56

친구(욥 2:11-13)

(욥 2: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욥 2: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욥 2: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에센 바흐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천명의 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 이상으로, 한 명의 친구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그러한 좋은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어느 누구입니까?

오늘 성경 말씀은 욥이라는 사람이 동방 땅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정도로 흠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세상에 사는 동안 겪게 되는 모든 고난을 총체적으로 다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욥은 일순간에 그 많던 재산과 십남매의 자녀와 더불어 남은 단 하나 건강까지 다 잃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욥을 시기하는 사탄은 그것도 모자라서 욥을 시험하여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고름이 질질 흐르고 너무나 가려워서 기와조각을 주워서 온몸을 긁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처절한 고통을 겪게 하였습니다.
욥의 질병은 너무나 극심하여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한센병자처럼 성 밖에 쓰레기를 불태우는 잿더미에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온몸을 긁어도 시원치 않은 처지였습니다.
(욥 2: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러한 욥을 과연 어느 누가, 그 무엇으로 위로하고, 고통을 덜어주고,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1. 욥을 찾아 온 친구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고, TV 혹은 신문지상에 부각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그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다 알정도로 저명인사나 유명연예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설령 평범한 사람의 이름이 인터넷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검색하는 사람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욥은 동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높은 산은 멀리서도 보이는 것처럼 욥은 당대 동방에서 제일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욥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욥을 부러워하고 존경하며, 자기들도 욥과 같은 복을 받고 싶어 하는 축복의 모델이거나 아니면 까닭 없는 오해와 시기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향력입니다. 그와 같은 영향력 때문에 욥이 철저하게 망가졌을 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처럼, 그 소식은 입소문을 통해서 동방 온 땅에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 성경에서 욥을 찾아온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욥 2: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여기서 ‘ 그 때는’는 욥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고통을 당하는 때이며, 또한 그와 같은 욥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때를 뜻합니다.
그러한 욥의 상태를 가리켜 오늘 성경은 ‘재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재앙은 결코 본인의 실수나 부족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신적인 형벌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모든 재앙이 내렸다 함을 듣고‘ 라는 말은 한 두 번이 아니라 처음서부터 계속 듣고 있는 와우 계속법 미완료 시제임을 볼 때 욥의 친구들이 처음서부터 욥에 대한 소문을 다 듣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뜻 나서기를 꺼려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도 혹시 그와 같은 재앙을 받을까봐 두려워서이거나, 아니면 재앙을 만난 친구를 도우려면 막대한 희생이 요구되고, 만일 그것이 겁이 나서 돕지 않게 되면 심적으로 죄의식에 빠지거나 큰 부담을 안게 되기 때문에 피하고 싶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지금까지 욥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들어서 그러한 부담을 느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욥을 찾아온 것은 그 만큼 우정이 깊지 않다면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들은 머나먼 곳에서 찾아온 것입니다.

1) 지역
그들은 한 곳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곳에서 온 친구들로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고 한 말씀에서 데만은 에돔 전체를 지칭하며, 수아는 중부 유부라데스 지역으로 추정하고, 나아마는 어디인 알 수 없는 불명확한 지점으로 결코 가까운 곳이 아닐 것입니다.

2) 신분
그들이 후일에 욥과 나눈 대화를 분석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아는 것이 많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흔히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욥과 절친한 친구들이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들이 욥에 대한 소식을 듣고 외면하지 않고 의기투합하여 욥을 찾아왔다는 것은 톨스토이가 ‘다정한 벗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천리길도 마다 하지 않으리라’ 고 한 말처럼 머나먼 길을 달려 온 것입니다.

3) 목적
아무리 머나먼 길이라고 할지라도 부귀와 명예와 권세를 얻을 수 있다면 누구나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머나먼 천리길을 달려 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아무리 머나먼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욥을 찾아 온 목적은 욥에게 도움을 받기 위한 사사로운 목적이 아니라 고난 받는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라고 한 말씀처럼 욥을 불쌍히 여기고 애도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머나먼 길을 달려 온 것입니다.
이는 욥의 친구들이 잘나가는 욥이 망한 것을 달가워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당한 일처럼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친구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를 잘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2. 욥을 위로하는 친구들
잿더미 위에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욥을 찾아온 세 친구들은 먼 발치에서 전과 너무나 다른 욥의 참혹한 모습을 보자마자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슬퍼하면서 울어대기 시작하였습니다.
(욥 2: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여기서 멀리 보매 라는 말은 멀리 떨어진 간격을 뜻하고 보매라는 말은 주목하여 보는 것을 뜻하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울고 겉옷을 찢고 티끌을 날리는 동작은 하나 하나가 미완료 시제로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찾아 온 것은 동기가 욥을 위로하기 위한 순수한 것이었으며, 욥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욥을 위문하되 마치 중환자실 면회나 조문을 하는 것처럼 잠시 다녀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가족이나 간병인처럼 욥의 곁을 떠나지 않고 욥과 더불어 티끌을 날려 자기들 머리 위에 뿌리면서 칠주야를 욥과 함께 슬퍼하며 고통하는 욥을 위로하였습니다.
(욥 2: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여기서 ‘욥과 함께 땅에 앉았다’는 말은 잠시 앉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거하였다는 말입니다. 욥의 온몸에서 악취가 풍기고 진물이 줄줄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자그만치 칠 주야를 욥과 더불어 생활하였다는 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최선의 애통을 표시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밤낮 칠일은 죽은 자를 슬퍼하는 애도의 기간입니다.
(창 50: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욥의 친구들이 머나 먼 곳에서 욥을 찾아온 이유가 위로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통하는 욥을 보면서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한마디도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욥의 친구들이 누구보다 언변과 이론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지만 현재 욥이 처한 상황은 그 어떤 말도 욥의 귀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때로는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말로 위로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는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도리어 상처가 되고, 화해한다고 하는 말이 상대방을 더욱 화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 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아무리 올바르게 말하고 행할지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친구의 감정을 손상시키고, 친구를 잃어버린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아무 말도 하지말고 그저 곁에 함께 있어주기만 해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만 해도 상대방이 위로가 되는 경우가 허다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해야 할 때와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하여 해야 할 말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서 할말만 하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3. 우리의 진정한 친구
우리 중에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최소한 한두 명의 친구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가 많은 것을 자랑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과연 좋은 친구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구가 많다고 해도 나에게 손해를 주고, 마음 아프게 하는 친구라면 차라리 친구가 없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친구는 어떤 친구일까요?
런던타임스지가 오래 전에 ‘친구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공모한 적이 있는데, 당선된 글 중에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이 세상과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릴 때, 나를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라고 한 글이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친구 가운데 좋은 친구가 몇 명이나 있을지 마음으로 한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내게 그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 하나는 나의 도움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고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러한 사람들을 붙여 주셨는데 그들이 바로 나의 가족이고, 친구이고, 교우이고, 친구이고, 이웃으로 때로는 내가 물질이나 따뜻한 말이나 내가 알고 있는 전문 지식이나 지위를 이용해서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마음에 위로를 주고, 하는 일을 도와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나에게 붙여 주신 것은 그들을 통해서 내가 덕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성경의 욥처럼 그들이 위급한 일을 만났을 때 내가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심적으로 영적으로 사랑과 도움을 주어야 할 친구인 것입니다.
(잠 17:17)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2) 하나는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인 아닌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무런 도움이 없이 유아독존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내가 남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내 주변에는 나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부모이고 스승이고 친구이고 목회자입니다.
정말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존심을 버리고 마치 세탁소나 은행처럼 병원처럼 언제든지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관계가 더 긴밀해지고 후일에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와 같은 도움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원수입니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때로는 까닭 없이 나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피해를 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고, 마음에 상처를 받고, 영적으로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할 수 만 있으면 대적하지 말고 피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원수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좋아하지 말고 걱정하고 염려해주고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명령하신 최고의 사랑인 원수를 네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패하고 연약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나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남에게 의도적으로나 본의 아니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상처나 피해나 손해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웃을 위로하고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도움을 주는 욥의 친구와 같은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누구보다 내가 지금 필요한 것이 많고, 상처가 많고, 위로받기를 원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먼저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그 친구의 도움으로 힘을 얻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 나도 다른 친구를 위로하고, 사랑하고,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친구 /나명욱

좋은 친구는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고
울어주는 친구보다
친구의 기쁜 일에 질투나 시기함이 없이
함께 기뻐하고
웃으며 축하해줄 수 있는
마음이 넉넉한 참다운 친구입니다

좋은 친구는
같이 어울리는 동안
혹 친구의 허물이 보여도 말하기보다
그 친구만이 가진 인간적인 매력으로 받아들이며
인정해주고 감싸주며
오히려 그 허물마저
돋보이도록 해줄 수 있는 친구입니다

좋은 친구는
서로의 간격이 없는
이미 서로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무언의 동의를 얻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관계이기에
친구의 장단점마저
있는 그대로 아끼고 위하며
좋아해줄 수 있는
그 또한 자신의 한 그림자로 생각하는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친구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에게 그런 친구가 누구이며, 어디가면 만날 수 있으며, 어떻게 나의 친구로 삼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그러한 친구가 있다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러한 친구가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그 친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그 친구가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3) 그 친구의 집은 욥의 친구들과 비교할 수 없이 머나먼 하늘나라입니다.
4) 그 친구는 욥이 앉아 있던 잿더미와 비교되지 않는 이 세상에 직접 오셨습니다.
5) 그 친구는 칠일 밤낮이 아니라 자그만 치 삼십 삼년을 세상에 우리와 함께 머무셨습니다.
6) 그 친구는 우리의 모든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직접 경험하시면서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분입니다.
7) 그 친구는 마음으로 걱정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고난과 죽음을 대신하여 갚아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8) 그 친구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우리가 죽은 후에도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이미 길을 닦아 놓으셨습니다.
9) 그 친구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도움의 기도를 중단하지 않으시고 계속하시는 분입니다.
10) 그 친구는 우리가 그 친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응답하시도록 중재하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 친구가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감히 나 같은 죄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천사들 앞에서 나의 친구라고 소개 시키실 참 좋은 친구입니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영원하고 좋은 친구가 되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좋은 친구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예배자의 자세이고 책임이기도 합니다.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좋은 친구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이웃의 친구가 되어 사랑을 나누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좋은 친구되신 예수님처럼 이웃에게 좋은 친구가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 자신도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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