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세계 어느 나라 교인이든지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배의 형식은 다소 차이가 나지만 신앙고백은 동일합니다.
그 이유는 세계 어느 나라 기독교인이든지 다 같이 동일한 성경을 신앙의 근거로 삼기 때문에 동일한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삼위일체와 같은 전통적인 신앙 고백이 다르다면 바른 기독교라고 할 수 없고 반드시 멀리해야 할 이단일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한다고 하면서도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감리, 성결, 침례, 순복음 등 여러 개의 교파로 나누어진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만이 아니라 똑같이 대한 예수교 장로교 라고 하는 이름아래 자그만 치 100개의 크고 작은 교단이 분열을 거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신학적인 차이와 교회 정치 제도의 차이와 교권의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교단이 분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면서 신학적인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사자 성어로 군맹모상(群盲摸象), 군맹평상(群盲評象)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는 범인은 모든 사물을 자기 주관대로 그릇 판단하거나 그 일부 밖에 파악하지 못한다는 비유입니다.
인도의 경면왕이 어느 날 맹인들에게 코끼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그들을 궁중으로 초대하여 코끼리를 만져보게 한 다음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가?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물론 각기 코끼리의 상아와 귀와 머리와 코와 다리와 배와 꼬리를 만져 본 사람들이 자기가 경험한 대로 어떤 이는 무와 같다, 키와 같다, 절구공과 같다, 널빤지와 같다, 독과 같다, 새끼줄과 같다고 각기 다르게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각자가 개별적으로 경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과 진실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동일한 성경을 읽고,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논하게 될 때 답은 제 각기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전체의 맥락을 보지 못할 때, 하나님에 대해서 각기 경험한 것을 절대시 할 때 마치 서도 다른 성경을 보고 다른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모순과 상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보고 있는 욥기가 대표적인 성경으로 어떻게 해야 성경 전체의 맥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고 인생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을 통해서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보다 더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엘리바스의 칭찬
욥이 고통 중에서 칠일간의 침묵을 깨뜨리고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죽음을 소원하는 탄식 소리를 욥의 친구들이 귀 기울여 듣고 나서 제일 연장자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그에 대한 답변을 한 것이 오늘 성경 본문입니다.
[2] 자네에게 말 한 마디 할 테니 마음 상해하지는 말게나.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구만. 그 누구도 한마디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걸세. [3] 이보게, 자네가 전에는 여러 사람들의 힘이 되어 주었지. 또 두 손 축 늘어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지. [4]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따뜻한 말로 위로해 걷게 하지 않았는가. 무릎에 힘이 빠져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지 않았던가. [5] 그런데 자네에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 닥치고 보니 어찌할 줄 모르는군. 자네가 어려움 겪더니 이렇게 힘이 빠져 있구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는가에 대해서 하나님이 거듭 거듭 칭찬하신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욥의 신앙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8)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 2:3)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좌와 더불어 우가 있기 때문에 좌우로 치우지 말고 균형을 잘 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대하 34: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이를 테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는 인정을 받지만 가정이나 사회에서는 비난을 받거나, 어떤 사람은 정반대로 가정과 직장에서는 인정을 받지만 교회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어떠하였을까요? 욥이 어떻게 세상을 살았는가 하는 것은 욥의 가족이 나 아니면 가까운 친구들이 제일 잘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지금까지 욥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욥 4: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여기서 ‘보라’는 감탄사로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의도이고, ‘훈계하다’라는 ‘rs'y 잇싸르타’는 ‘징계하다, 징벌하다, 가르치다’란 뜻으로 ‘아싸르’는 회초리를 들거나 벌을 주어 잘못된 행위를 바로잡는 것을 묘사합니다.
이는 평소 욥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권위를 갖춘 인물로 이웃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정의로운 지도자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손’을 의미하는 ‘dy야드’는 ‘능력, 행위, 보호, 은혜’를 상징하는 말로 ‘손이 늘어진 자’란 힘을 상실하여 낙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평소에 욥이 그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용기와 희망을 주는 역할을 균형있게 수행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욥 4: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넘어지는 자’는 경제나 건강이 여의치 않아 흔들려 넘어져 가는 자, 실패로 인해 파멸에 빠져 가는 자를 든든히 세워주었다는 의미로 과거 욥이 얼마나 선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무릎이 약한 자들’은 ‘자기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이라는 의미이고, ‘강하게 하였거늘’ .qZEj'T]는 피엘 미완료형으로, 이는 외적으로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강하게 하여주었음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으로 지도층이 있는 사람들이 비리를 범하게 되면 지탄받는 이유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나 재물이나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만을 위해 살게 되거나 잘못 살게 되면 혹독한 비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동방에서 제일가는 거부요 하나님이 칭찬하실 정도로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멀리 사는 그의 친구들이 다 알 정도로 이웃을 위해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바람직한 삶을 살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엘리바스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욥의 잘한 점을 칭찬하는지를 알 수 없으나 어찌하든지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을 인정해주고 칭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이 같은 칭찬은 지금까지 까닭을 모르는 고난을 겪고 있는 욥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정죄, 비난, 이론적 설득하는 것보다 이해하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줌으로 감성을 다독여주는 것이 더 큰 감동을 주고 설득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정죄하였던 세리, 죄인, 창기,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등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감싸 안아주시고, 아픔을 어루만져 주심으로 그들을 회개시키셨습니다.
배부른 친구에게 비싼 불 갈비를 사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 남지 않는 일이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무일푼이 된 친구에게 건네 준 단돈 십만 원은 평생 잊지 못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돈을 주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이웃의 아픔을 싸매고 좋은 점을 칭찬해 주는 일인 것입니다.
(롬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살전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2. 엘리바스의 정죄
고기를 잡는 어부는 낚시 바늘을 드러나게 하지 않고 미끼로 감싸서 고기를 속게 만듭니다. 고기가 그것을 모르고 덥석 물게 되면 여지없이 낚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칭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칭찬이 선물이 아니라 낚시 밥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그의 친구 욥을 칭찬한 것은 어떤 의도에서 한 것일까요?
지금까지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만 엘리바스의 근본 의도는 욥을 고난당하는 욥을 위로하고 칭찬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한 낚시 밥이었음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욥 4: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엘리바스는 과거 욥이 사랑을 베풀었던 손이 늘어지고 넘어지고 무릎이 약한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욥 자신의 처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과거에 그렇게 당당했던 욥이 막상 입장이 바뀌고 나니까 힘들어 하고 놀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욥 4:6)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을 자랑하고 흠없이 바르게 사는 것을 소망하던 욥이 이제 와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흔들리고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입으로 자신을 저주하며 부정적인 말을 하는가? 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같은 엘리바스의 비난과 책망은 욥을 모함하는 말이 아니고 계속되는 고난으로 인해 마음이 약해진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죽기를 소원하며 원망아닌 원망을 쏟아 놓는 것을 보고 친구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충고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마치 장난삼아 던진 돌에 머리를 맞은 개구리처럼 고통당하는 욥에게 돌맹이가 되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비수였습니다. 엘리바스는 추호도 욥을 이해하고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욥이 아파하면 할수록 좀 더 큰 돌을 던졌습니다.
(욥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여기서 ‘생각하여 보라’에 해당하는 ‘제카르나’는 ‘너는 부디 기억하라!’란 뜻입니다. 이어지는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는 대조적인 말은 인과응보론적 상선 벌악을 주장하는 말입니다.
이는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엘리바스는 지난 날 욥이 선하게 산 것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욥이 그렇게 살았다면 상을 받아야 마땅한데 지금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숨겨진 죄악에 대해서 당연히 받아야 할 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엘리바스는 고통당하는 욥에게 평소 ‘인간이 겪는 고난’의 원인에 대해 평소 자신이 소신으로 삼고 있는 ‘인과응보론’적 견해로 직격탄을 날려 욥의 항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 4: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욥 4: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고대 사람들은 번개나 천둥, 폭풍 같은 자연 재해는 하나님이 노하셨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의 콧김’ 역시 하나님의 ‘극심한 진노’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엘리바스가 가졌던 이같은 인과응보 논리의 결론은 악을 심은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아예 소멸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이와 같은 견해는 성경 여러 곳에도 기록된 사실로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원리입니다.
(잠 12:3)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바스의 말이 진리가 되지 못함은 엘리바스가 욥을 정죄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편파적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인과응보론적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정반대의 상황도 얼마든지 연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과응보론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은 때로 실족을 하거나 실망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그와 같은 모순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지 않습니까?
(시 73: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전 8: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모든 일이 인과 응보론적으로 처리되지 않고 때로는 예외가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고의 유연성입니다. 모든 상황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균형 있게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 시간의 흐름이 해결해 주고 판결해 줄 때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
엘리바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 보다는 자기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욥 4:12)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이는 엘리바스가 체험한 것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신적기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은밀하게 찾아오셔서 자기 귀에 속삭이는 말씀을 직접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와 같은 신적 계시는 영적인 임재로 그 영이 자기 앞으로 지나갈 때 두렵고 떨려 뼈마디가 흔들리고 몸에 털이 주뼛할 정도로 생생한 것이었다고 말함으로 부인하거나 절대로 거역해서는 안 되는 권위 있는 말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욥 4: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욥 4: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엘리바스는 자기 앞에 서 있는 한 영을 보았는데 그 형상을 잘 알아볼수는 없었고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욥 4:16)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러므로 엘리바스는 욥이 한 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돕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니 어서 잘못을 시인하고 자복하라고 닦달을 하였습니다.
(욥 4: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물론 엘리바스의 말은 다 사실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거룩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한 줌의 티끌과 같고, 때가 되어 장막 줄이 풀어지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 무덤으로 가야만 하는 연약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욥 4:20)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욥 4:21)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
어떻습니까? 엘리바스가 그같이 생생한 영적체험을 한 사람으로서 욥에게 말한다면 엘리바스의 말은 다 옳은 말이며, 엘리바스의 말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하고 수용하여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까?
과연 엘리바스가 그같은 신비로운 체험을 했으니 엘리바스의 말은 전부 다 옳은 말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도 될까요?
물론 엘리바스의 말은 사실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엘리바스의 논리는 귀담아 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은 엘리바스의 사견일 뿐이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성경 말씀처럼 그대로 믿고 순종하고 따라야 하는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까닭 없이 고난 받는 욥에 대해서 잘못 적용하는 억지라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만일 엘리바스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잣대를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엘리바스조차 지금 살아서 욥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에 하나님의 징계로 벼락을 맞고 죽었을 사람임을 엘리바스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는 무죄한 의인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죄인이 따로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고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다 죄인이라고 시편 기자는 시 14편과 53편에 거듭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시 53:2-4).
(시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 14: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러한 죄인들을 즉시, 전부 멸하지 않으시고 살려 두시는 것은 정의롭지 않으시기 때문이거나 죄를 용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과응보의 잣대로 심판하시면 당장 멸해야 하며 그렇게 하면 세상에 한 사람도 살아 남을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인을 벌하고 멸하는 총체적인 심판을 집행유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실 뿐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것이 죄없는 짐승을 대신 제물로 드려 죄를 속죄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욥이 재앙을 받기 전에 항상 가정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엘리바스의 말처럼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처럼 인과응보론으로 싸잡아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믿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 죄를 사함 받은 사람, 욥처럼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하나님이 아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을 지켜주시는 분임을 엘리바슨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선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교만할 수 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본래 멸망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었던 나의 과거와 나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원죄의 부패함이 언제 발동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처럼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죄를 회개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송을 가까이 하고, 욥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인 책임도 성실히 이행하려고 애를 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균형잡힌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선악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절대 불변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세적이고 기계적인 인과응보를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현세에서는 반드시 의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악인이 형벌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현세에서는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번성할 수도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인과응보를 말씀하면서도 그것이 현세에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원리가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원리임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이 오히려 잘먹고 잘 살며 아무런 징계의 심판이나 고난을 겪지 않는 특권층 자녀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때로는 회의가 들고 낙심이 들 때도 있지만 속단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믹서기가 아니라 맷돌과 같이 천천히 돌기 때문에 언젠가는 반드시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대로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모든 고난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죄 곧 원죄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씀하면서도 그것이 반드시 인간 개개인의 죄 곧 자범죄에서 비롯된 것으로는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힘써 알아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아 하나님을 힘써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크고 깊고 영원한 것인가를 힘써 아는 것입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회개하는 죄인을 반드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균형된 이해입니다. 그같은 하나님의 정의와 그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균형과 조화를 이룸으로, 죄인인 우리가 멸망당하지 않고 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양면성입니다.
이 같은 영적원리를 깨달은 사람은 엘리바스처럼 남을 함부로 정죄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 욥처럼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경성하게 되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하는 데도 욥과 같이 까닭 모를 고난을 당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고 묵묵히 순종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데도 여전히 가난하고 곤고함이 떠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거나 잊어버리고 계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이율이 매우 높은 축복과 상금이라는 적금을 대신 들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기가 되면 반드시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고 비로소 그 때 가서야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성경은 오히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할 수도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욥처럼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고난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든지 일평생동안 고난없이 평안한 삶을 살게 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욥처럼 잘 믿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마치 엘리바스가 욥을 오해한 것처럼 무슨 잘못을 범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사람처럼 고난을 당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다 더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가신 길을 뒤따르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징계나 형벌이 아니라 축복임을 깨닫고 원망 불평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인내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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