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그칠 줄 모르는 고통 중에 위로(욥 6: 8-10)

미션(cmc) 2010. 11. 9. 18:29

그칠 줄 모르는 고통 중에 위로

(욥 6: 8-10)
(욥 6: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욥 6: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욥 6: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자기가 지고 가야 할 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악의 짐은 벗게 되지만, 반면에 맡겨주신 사명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짐을 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짐이 너무나 무거워서 쓰러지고 넘어질 때가 있고 그로 인해 낙심하고 좌절을 할 때가 있으며, 그 때마다 하나님의 위로와 더불어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의 위로가 힘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르치기를 (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백과사전에는 셀파가 "충실한 고산족 등산 보조자"로 나와 있습니다. 19세기에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백인들을 따라 고봉에 도전하면서부터 "셀파"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길고 제일 높은 히말라야 산맥에는 셀파들이 살고 있습니다. 등산 철이면 그들은 각국 등산가들과 함께 줄을 매고 극한의 고도를 오르기 위해 때로는 깎아지른 얼음 벼랑과 크레파스라는 검게 입 벌린 바닥 모를 빙하의 틈바구니를 지나 정상으로 을 등산가들을 안내합니다. 한국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 고상돈의 영광의 그늘에는 펨바 노르부라는 셀파가 있었다. 1977년 가을 한국원정대가 에베레스트에 올랐을 때의 원정대를 환호하기 위해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광장까지 카퍼레이드를 할 때 고상돈과 함께 제일 앞 무개차(無蓋車)에 탄 펨바 노르부도 개선장군처럼 고상도씨와 더불어 연도(沿道)의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고상돈씨는 그 이듬해 데날리(매킨리 6194m)에서 실족사를 하였고 그 후 30 여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많은 한국인들이 고상돈씨는 기억하지만 고상돈씨를 에베레스트로 끌고 올라간 살아있는 전설 '펨바 노르부 셀파'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까닭은 우리의 죄악의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정상에 오르신 우리의 영적인 셀파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떻게 해야 영적인 셀파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욥의 괴로움
(욥 6: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오늘 성경 본문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 온 친구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비난하고 정죄하는 충고를 묵묵히 듣던 욥이 마침내 입을 열어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 오늘 성경 본문입니다.

1) 고통의 무게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사람마다 다르고 환경마다 다르지만 어떤 것은 자신의 힘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는 평범한 고난이 있습니다. 또 어떤 고난은 백번 죽었다가 깨어난다고 해도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고난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욥이 처한 고난은 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욥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무게를 바다의 모래보다 무겁다고 비유하였습니다.
(욥 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 6: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욥 6: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여기서 ‘나의 괴로움’이라는 말은 ‘속상하고 분하고 원통하고 노엽고 화내고 슬퍼하는 것’을 뜻의 미완료 동사로 마치 부글거리는 용암처럼 끌어 넘치는 고통을 뜻합니다.
욥은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저울에 놓고 달아 볼 수만 있다면 그 무게는 무수한 바다의 모래를 다 끌어 모은 것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건축 공사장에 필수적인 모래는 1 입방미터를 1 루베라고 하는데, 마른 모래 1루베의 무게는 1,600 - 17,00kg이고, 습기가 많은 모래는 1 루베가 1,800-1,900 kg 으로 대략 2 톤 가까이가 된다고 합니다.
만일 한도 끝도 없는 바다의 모래를 모두 한곳에 끌어 모아 무게를 잴 경우 과연 그 무게는 몇 톤이나 될까요? 욥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은 마치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우며, 따라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욥의 말과 행동이 경솔하였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겪는 무거운 고난에 비추어 볼 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2) 고통의 원인
그렇다면 정말 욥을 바다의 모래무게처럼 짓누르는 고통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욥이 물질적으로 가정적으로 건강상에 당한 재난으로 인해 마음과 육체가 망가질 대로 망가짐으로 인한 고통일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결코 자기에게 그러한 고통을 주실 분이 아니신데 왜 그와 같은 고통들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답답함이 욥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무게였습니다.
(욥 6: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여기서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욥에게 고난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마치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타리에서 인디오 원주민들이 사냥을 할 때 화살촉에다 독을 묻혀 짐승에게 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를 겨냥하셔서 고난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 7:13)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욥은 자신의 생활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염증이 나서 어떤 음식을 먹어도 싱겁고 맛이 없어서 마치 간을 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처럼 무미건조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욥 6: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욥 6: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욥 6: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몸이 아파 본 사람은 욥의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구미를 잃어서 마치 입덫하는 임산부처럼 음식이 냄새조차 역겹고 맛이 먹어도 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재미중에 하나가 먹는 재미라면 그처럼 식욕을 잃은 욥의 삶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2. 욥의 오해
(욥 6: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욥이 오래 도록 고통을 겪으면서 정말 원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요 친구들의 위로였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나 같으면 하나님을 찾겠다’다고 하면서 어서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기만 용서하여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욥 5: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욥 5: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욥 5: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얼마나 지당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욥은 지금 그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욥은 고난 전에도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 고난 중에서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엘리바스가 말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성경 여러 곳에 기도의 필요성과 더불어 부르짖어 구하면 반드시 들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기도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겔 36: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2)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만 들어 주시고 기도를 해야만 들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때로는 구하지 아니고 생각만 해도 필요한 것을 아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그런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위기를 극복할 수 있고 전화위복이 되어질 수 있다지만 극심한 고난이 언제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는 동안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치셔서 곧 죽음에 이르게 될 것만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욥 6: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욥은 그와 같이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오히려 위로를 받으며, 기뻐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 6: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도 자신의 전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잃을 때마다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고 있는 까닭은 욥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고통당하고 있는 욥을 보시는 하나님은 더욱 마음 아파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사단에게 욥의 신앙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시고 자기를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기도해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욥 6: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욥 6: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욥이 자력갱생을 해야만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총동원하여 자리를 떨고 일어서야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그칠 줄 모르는 오랜 동안의 고난을 겪으면서 그와 같은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영적인 무력 상태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욥 6: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여기서 나의 능력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뜻하는 말로( hY:viWT)로 ‘어떤 문제나 위기를 만나게 될 때 그것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건전하고 효과적인 지혜와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욥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가 아닌지요? 어렵고 힘들 때 더욱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기도가 되지 않고 기도해도 응답을 체험하지 못함으로 기도의 열정이나 의욕을 상실해 버리지 않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3. 욥의 친구들
사람은 나름대로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부부나 친구간에 기대가 있습니다. 물론 그 기대는 항상 크기 때문에 현실에서 잘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대가 큰 것만큼 실망도 큰 법입니다.
욥이 고통 중에서 기도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 때문이고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마지막으로 친구들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욥 6: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여기서 ‘낙심한 자’라는 말은 절망적인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욥 자신을 가리키며, ‘저버릴지라도’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며, ‘동정을 받느니라’는 친구들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친절과 자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기대했던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마치 욥을 죄인시하고 비난과 정죄의 독화살을 쏘아 대었습니다.
욥은 그와 같은 친구들을 반박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에 욥에게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입니다.
(욥 6: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욥은 엘리바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형제의 불쌍한 형편을 동정하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사막 지방의 시냇물과 개울로 비유하였습니다. 이것은 '와디'를 가리키는데, 와디는 농부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와디(wadi)의 특성을 들어 욥은 친구의 변덕스러움과 불성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개울을 뜻하는 와디는 것은 비가 오면 금방 물이 불어나다가도 비가 그치고 조금만 지나면 그 강바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메말라 버리는 현상은 지층(地層)이 물을 오래 가두어 둘 수 없는 모래와 자갈들로 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막지대라도 간혹 폭우가 쏟아져서 급류가 흐를 때가 있지만 물이 고이지 못하고 땅 속으로 다 스며 들어 버리기 때문에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낙타를 타고 여행을 하며 장사를 하는 대상들이 개울을 따라 물을 찾다가 결국은 물을 구하지 못해서 길을 잃고 목말라 죽는 것처럼 욥이 친구들에게 걸었던 기대에 실망감을 비유로 들어내 보이고 있습니다.
(욥 6:18)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재물과 자녀들과 건강을 잃어버리고 고통 하고 있는 욥을 더욱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욥을 위로하고 동정해야 할 친구들의 적절치 못한 말이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고통 하는 욥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입으로 조차도 동정을 하지 못할지언정 비난만 일삼는 일에 대해서 자신의 무죄함을 변명하며 되받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욥 6: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욥 6: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욥 6: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욥은 마치 잘못을 지적하면 잔소리 좀 하지 말라고 반항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친구들에게 자신에게 충고하는 친구들을 행악자라고 비난하고 자신을 의인시하는 교만한 모습까지 나타내 보였습니다.
(욥 6: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욥 6:28)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욥 6:29)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욥 6: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욥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친구들이 위로는커녕 자기를 죄인시하면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소리를 듣는 일이었습니다.
욥이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혼란한 상황에 대해 변론을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의, 즉 자신의 의를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처럼 이제 욥은 자기 방어의 차원을 넘어 친구들을 공격하는 쪽으로 변하여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너무 강조해 주장하다 보면 상대를 멸시하는 태도를 갖기 쉬울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의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마땅히 사랑해야 할 부부나 서로 이해해야 할 교우 간에, 때로 오해와 논쟁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워어즈워드가 “사상이 구체화 된 것이 곧 언어이다”라고 말했듯이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정리하게 하며 가다듬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명확하고, 간결하고, 우아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욥의 친구들의 조언이 욥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욥을 격분하게 하고, 민감하고 과격한 반응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1) 옳은 말은 악인을 깨우쳐 구원할 수 있고(겔 3:18), 연약한 자를 붙들어 주며, 즐거움을 줍니다(잠 16:24).
(잠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2) 그릇된 말은 암과 같이 남만이 아니라 자신도 파멸로 이끌게 됩니다. 그래서 악인은 거짓과 아첨과 비난과 음모의 말을 즐겨합니다.
(잠 12:6)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배고픈 친구에게는 그 이유를 캐는 것보다는 우선 밥상을 채려주는 것이 최선의 호의인 것처럼 욥의 친구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는 동정과 위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본분인 것입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결 론
욥은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 혹독한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만은 자기를 알아주실 줄 알았고, 친구들만은 자기를 이해할 줄 알았으나, 하나님은 자기에게 독화살을 쏘시는 것 같았고, 친구들은 자기를 정죄함으로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그칠 줄 모르는 고통 중에서도 자기 자신을 위로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비결을 공개하였습니다.
(욥 6: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여기서 ‘위로’는 하나님이나 친구들을 통해서 받은 위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는 위로이며,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은 재산도, 자녀도, 건강도 다 잃어버리고서도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몸부림치는 고통과 고뇌와 고민을 뜻하는 것입니다.
욥이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고통 속에 있지만 한편에는 그의 마음속에 메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위로는 욥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칭찬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른 봄 매우 건조할 때 보면 자주 산불이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산불이 났을 때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은 공중에서 비가 오는 것이 가장 강력한 진화방법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헬기로 물을 뿌리기도 하지만 맞불을 놓아 불을 불로 막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 밀려올지라도 욥처럼 그칠줄 모르는 위로와 기쁨을 누리는 비결은 욥처럼 건강할 때 여유가 있을 때 욥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 영적인 항체를 만들고, 영적인 면역력을 미리 미리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1)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2)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3)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신앙과 삶의 본분으로 삼고,
4) 그 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적용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거듭나 새사람이 되고,
5)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 어떤 고통이 밀려와도, 그칠 줄 모르는 고통 중에서도 결코 메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위로와 기쁨을 누리는 비결임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시 19:11) “주의 종들이 그것으로 훈계를 받고, 그것을 지킴으로 후한 상을 받습니다.” [시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비단 욥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욥처럼 기복이 있는 것입니다. 잘 살때가 있는가 하면 실패하여 끼니를 거를 때도 있고, 건강할 때가 있는가 하면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죽음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설령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 몰려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능히 이길 수 있게 하는 위로는 오로지 주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순종하는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임을 잊지 말고 욥처럼 실천해야 합니다.
(시 19:7) “여호와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사람에게 새 힘을 줍니다. 여호와의 법은 믿을 만하여,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시 19:8) “여호와의 율법은 올바르며,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줍니다. 여호와의 명령은 맑고 깨끗하여, 사람의 눈을 밝혀 줍니다.”(시 19:9) “여호와를 높이는 일은 순수한 일이며, 그 마음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법령은 참되고 언제나 바릅니다.”(시 19:10) “이러한 것들은 금보다 귀하고, 순금보다 값진 것입니다. 꿀보다 달고, 송이 꿀보다 더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