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9:1-3)
(욥 9: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욥 9: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사람이 주고받는 말은 상대방을 칭찬하든지 아니면 상대방을 책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만일 칭찬도 아니고 책망도 아닌 애매모호한 말은 오히려 상대방을 의혹스럽게 하고 아무런 감동도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냥꾼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두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고 욕심을 부리다가는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을 막론하고 한 가지에 집중을 해야만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 빌닷은 욥에게 8장 말미에서 서로 상반된 두 가지 말을 함으로 욥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였습니다.
1) 십남매의 자녀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욥에게 위로가 아니라 (욥 8: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라고 정죄를 하였습니다.
욥은 그처럼 가슴 아픈 말을 들었을 때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길길이 날뛰면서 대들었을 것인데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 후반부에서는 마치 위를로 하듯이 (욥 8: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욥 8: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라고 애매모호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빌닷의 저의가 욥을 정죄하려고 한 말일까요? 아니면 위로하려고 한 말일까요? 그처럼 애매모호한 빌닷의 말에 대해 욥은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1)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함하여 완전한 의인이 없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욥 9: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은 공평무사하시고 만인의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칭찬을 거듭 거듭하실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생은 의롭지 못함을 인정하였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고 인정하였다면 우리 가운데 과연 누가 자신은 죄 없는 의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전 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그렇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죄와 무관하였던 사람, 무관한 사람, 무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마치 자신이 의인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체 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더욱 난감한 것은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해야 하지만 일평생 건강에 자신이 있다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로운 사람도 없지만 더 큰 문제는 이미 지은 죄에 대한 해결책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자기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예화
제가 필리핀에서 요양을 하는 중에 주인 없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평소 동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중에 가장 약해 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에게 먹이를 주자 저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제 주위를 맴돌며 제 몸을 슬쩍 슬쩍 비비면서 스쳐 지나갑니다. 배가 부르면 제 곁에서 태평스럽게 누웠습니다. 그리고는 혀로 발을 핥아 씻고 발에 침을 발라 열심히 얼굴을 비비며 세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고양이는 깨끗해진 것입니까? 제 침을 발라 자기 발고 얼굴을 핥아서 씻는다고 목욕이 된 것입니까? 위생상 문제가 없이 깨끗해진 것일까요?
그 고양이가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양심에 가책이 되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요일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어떤 사람은 독서와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고통스러운 수행을 통해서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고양이 세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씻어 속죄함을 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깨끗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아가 회개하기만하면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무시로 주께 나아가 회개하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요, 우리의 영혼이 눈과 같이 깨끗하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와 상관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고, 자신이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죄인인지 아닌지는 다른 사람이 아닌 각자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러한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정죄하시기 전에 죄와 전혀 상관이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위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2)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다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강한 사람은 돈이나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흔히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 힘이 센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사회일수록 부정한 금권과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죄를 범하게 됩니다.
법관의 말 한마디에 죄인이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사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서 나와 자유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힘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무슨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일까요? 욥은 하나님의 힘이 말 즉 말씀의 권세에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욥 9: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욥 9:19)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하나님이 무슨 연장으로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몇 사람의 인부를 채용하여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는데 며칠이나 걸렸을까요?
욥 9: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욥 9: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욥 9: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성경은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어떤 도구나 재료도 없이 오직 말씀만으로 창조하셨습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창 1: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오늘 성경에서 욥이 말한 (욥 9: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라고 한 각종 별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오직 말씀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는 입으로 하는 말고 몸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하나님이 하신 일과 성령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보게 되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고, 유능하신 분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 9:4)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므로 세상에서 아무리 변론하기를 좋아하는 논객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천 마디의 질문 가운데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욥 9: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욥은 설령 자기가 의로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감히 한 마디도 대답을 할 수 없다고 겸손히 고백을 하였습니다.
(욥 9: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욥 9: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인간의 성품은 선척으로 교만합니다.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가 높아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교만하기 쉽고 자만하다가 평생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욥처럼 하나님이 누구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군인가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겸손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약하고 하나님은 강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하심은 그 말씀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강한 자가 되고 존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3) 욥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이 더욱 더 연약한 자임을 깨닫게 되면서,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까닭 없는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가) 욥의 의로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만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도 점차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젊어서 누구 못지않게 고집스럽던 사람도 나이가 들거나, 죽을병에 걸리거나, 대형 사고를 경험하고 나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전에 엘리바스라는 친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런 죄가 없다고 강하게 반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욥 6: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욥 6: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빌닷에게는 그같은 욥의 교만히 한 풀 꺾인 듯 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은 설령 자신이 의로울 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정죄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천히 여기시고, 가혹한 고통을 내리실지라도 자신은 묵묵히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욥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그것은 마치 거지가 걸쳤던 누더기를 아무리 깨끗이 세탁할지라도 공장에서 금방 만들어 낸 새 옷보다 더 깨끗할 수는 없는 것처럼, 피조물인 욥 자신의 의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더 의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설 때만이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되며, 비로소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에게 폭풍으로 치시고, 상처를 깊게 하시고(17절), 숨 쉬지 못하게 하시고, 괴로움으로 채우시고(18절), 정죄하시며(20),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시고(23절), 악인의 손에 넘기시고(24절), 더러운 개천에 빠지게 하실지라도(31절) 아무런 대답 할 말이 없고, 다만 하나님의 막대기가 자기에게서 떠나기만을 위해 기도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욥 9: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사람이 어려서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것을 배우고, 장성하여 군대에 가면 상급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배우고, 사회와 국가에서는 법질서를 지켜야 할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절대 순종해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며,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질그릇을 빚을 수 있는 토기장이라면 인간은 토기장이의 손에서 만들어진 질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하나님이 인간보다 못한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협을 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창조주요 나의 전 생애를 주관하시는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심을 깨닫고 묵묵히 순종하는 것이 최선의 삶인 것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2) 욥의 기도
욥은 고난을 당하면서 마음에 풀지 못한 몇가지 오해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는 순전한 자도 멸망시키신다는 오해입니다.
(욥 9: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 하나님께서는 무죄자의 고난을 비웃으신다는 오해입니다.
(욥 9:23)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3)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여졌다는 오해입니다.
(욥 9:24)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욥처럼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억울하고 불공평하게 생각될 때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서 그처럼 온전한 신앙의 사람 욥도 어려움에 부닥칠 때 때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오해를 하였다면 오늘 우리는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욥은 오늘 성경에서 (욥 9: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 9:34)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간청한 것처럼 중보자가 필요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사람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히 2:18) “주님은 시험받는 자들도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고난당하고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것이 없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자신의 의나 완전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무조건 신뢰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령 요나처럼 일시적으로 거역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항복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1) 인간적인 슬픔과 고통 가운데서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욥의 친구들과 같은 다른 사람의 권면이나 위로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 뿐 임을 알아야 합니다.
2)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죄인이요, 멸망자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의롭다 일컬음을 받는 성도로 신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4) 본래 원수 되었던 자리에서 이제는 화목의 자리로 나갈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축복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 빛 되신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므로 말미암아 내 마음을 짓눌렀던 어둠이 물러가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유자의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6) 그 결과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되찾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평화는 죄로부터의 해방, 불안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7) 그것만이 아닙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 성령을 보내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 중심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헌신 봉사하고 순종하므로 영광 돌리는 삶보다 더 복된 것이 세상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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