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욥 11:13-20)

미션(cmc) 2010. 11. 9. 18:36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
(욥 11:13-20)

 

(욥 11: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욥 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욥 11:15)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욥 11:16)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욥 11: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욥 11:18)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욥 11:19)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욥 11:20)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주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막상 현실이 어렵고 힘들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본질적인 관계를 망각하고 믿음 없는 자처럼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사람들은 나를 설교자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기 때문에 오늘 설교가 나와 무관한 것처럼 생각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할 때 사람들은 나를 마치 설교하는 목사처럼 생각을 할 것이고, 교회 안에서 소그룹이나 구역이나 기관에서 설교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저의 설교를 듣기 때문에 제가 건강한 설교자가 되어야 하는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통해서 설교를 듣게 되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건강한 설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각자 나름대로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에 대해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해석에 미숙한 설교자이거나 아니면 설교를 하지만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졸게 만드는 설교자가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설교자의 사명을 가진 자들로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와 건강한 설교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아 이왕이면 건강한 설교자가 되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1. 소발의 비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욥이 자신의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하나님께 살기를 포기하는 긴 기도를 드린 것을 보았습니다.
(욥 10) “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욥이 고난이 극심하여 하나님께 장탄식의 기도를 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 욥에 대한 친구 소발의 비난입니다.
욥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이 같은 기도를 하였을까요? 만일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옆에 사람이 욥과 같은 기도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과 같이 죽음을 자청하는 기도를 하였다면, 그것은 인생살이가 그 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한 사람에게 맨 먼저 해야 할 말은 무엇입니까?
사실을 기도는 인간 간에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대화이기 때문에 그 중간에 내가 끼어들어 왈가왈부 할 수 없는 성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고 그것이 너무나 오래 지속되면 할 수 없이 현실 도피주의자처럼 고통이 끝나는 죽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욥의 친구 소발은 욥의 기도에 끼어들어 욥에게 단 한마디의 위로 대신 비난과 정죄의 말을 퍼붓기 시작하였습니다.
(욥 11: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 11: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소발은 고통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말이 많다’, ‘입이 부풀어 있다’, ‘자랑이 심하다’, ‘비웃지 말라’는 등의 몹시 거친 말들을 퍼붓기 시작하였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이해와 위로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솔직하게 심정을 그대로 털어 놓았는데 소발은 그것을 악담으로만 들었습니다.
소발은 욥을 향해 (욥 11:4)‘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고 공격하였습니다.
욥은 심각한 고통 중에 (욥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자기가 절대 완전한 자라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소발은 욥이 친구들 앞에 자신의 솔직한 심정으로 그대로 다 털어 놓았는데 소발은 그것을 이해하고 도우려는 의도가 전혀 없이 눈에 불을 키고 욥의 약점과 허물을 찾아내어 악담을 하는데 급급하였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 소발은 욥의 말을 자세히 듣지도 않고 자기 귀에 거슬리는 한 두마디 때문에 욥의 말을 통째로 왜곡시키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말이든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자기가 한 말이 다르게 전해지면 그 사람에게는 큰 위험과 피해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말을 왜곡하여 전달하는 것은 사단의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그는 ‘거짓의 아비’라는 이름이 시사 하듯이(요 8:44) 사단은 말을 왜곡하는 귀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하거나 곡해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하게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엉뚱한 말들이 화살처럼 멋대로 날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올리는 공격적이고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악플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심지어 자살을 유발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시 34: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잠 17:4)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그것은 비단 불신의 세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독교계 게시판에 들어 가보면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무슨 손해를 끼친 사람이 아닌데도 소발과 같이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들이 이성보다 감정, 사실보다 선입견을 앞세운 증오심이 팽배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디 십자가 사랑을 아이콘으로 삼고 있는 교회 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없어야 합니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2. 소발의 신학
우리는 그 동안 욥기를 살펴보면서 그 시대는 오늘날과 같은 교회도 없었고 오늘 날처럼 성경책이 흔하지도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신학교도 없었을 것이고 성경학교도 없었을 것인데 욥을 비롯하여 친구들이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욥은 물론 욥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욥 못지않게 해박한 신학적이 지식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동물의 세계에만 약육강식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계에서도 힘이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상대방을 이기려면 당연히 상대방보다 지식이나 재능이나 권력이나 재력이 더 우월해야만 이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더 배우려고, 더 많이 벌려고, 더 강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소발이 만일 욥보다 신학적인 지식이 부족하였다면 욥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할 것이고, 설령 무슨 말을 할지라도 욥의 논리를 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에 대해서
(욥 11:5)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욥 11:6)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여기서 ‘지혜의 오묘’함이란? 하나님께서 감추신 비밀을 뜻하는 말로 인간의 지혜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소발은 욥이 자신은 무고하다고 주장하며 도무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욥의 항변에 대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알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기에 절대 그릇 행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 그 비밀을 욥에게 알려 주신다면 욥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될 것이고, 욥의 범한 죄대로 다 벌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잊어버리고 계신다는 것을 욥이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소발의 말 그 자체로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발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비밀을 다 통달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같은 소발의 말은 다 옳은 말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영원무궁하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비밀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지혜가 쪽박과 같다면 하나님의 지혜는 소양강 댐을 다 열어 방류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아는 체 하고, 잘난 체 하여도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9)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소발은 그렇게 전제를 해 놓고서도 마치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통달한 사람처럼 욥을 무시하는 하는 듯이 말을 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지는 논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오묘하고 광대하다면 소발도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욥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 자가 모순에 빠지는 논리인 것입니다.
물론 소발의 말처럼 인간의 지혜로는 오묘하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세상 지혜는 날로 발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지혜는 더욱 우둔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이 오묘하신 비밀을 깨달으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피조물을 통해서 계시하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셨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셨으며 또한 하시려고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으며,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비밀을 가르치신 것이며, 그것이 바로 성경으로 우리는 그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골 2: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2)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소발은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은 욥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며, 그것조차도 욥이 범한 죄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일부분에 대해서만 징벌하신다고 단정하였습니다.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세상에서 누가 허망한 죄인인지를 다 아시기 때문에 만일 지명 수배자를 찾아다니는 형사처럼 범죄한 사람을 잡아 드려 재판을 하신다면 그것을 피하거나 막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욥 11:10)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고 계시기 때문에 욥처럼 죄를 범한 허망한 자들이 멋대로 설치고 있지만 실상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다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욥 11: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욥 11: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여기서 소발이 ‘허망한 사람’이라는 말은 ‘공허하다, 거짓되다, 헛되다, 아무것도 아닌’ 이라는 뜻으로 욥을 지칭하는 말이며, ‘다 보시느니라’는 말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조사하다’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소발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욥을 마치 우둔하고 완고한 들나귀 새끼로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발이 이처럼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주장하고 있으나 그 이유는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죄를 주장하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근거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하는 설교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월권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그렇게 말하는 소발과 욥을 비교하신다면 누가 더 들 나귀 새끼와 같이 우둔하고, 완고한 사람일까요? 소발의 문제점은 자신은 아니라고 착각하고 욥을 무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소발은 누구를 통해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마치 하나님에 대해서 통달한 것처럼 자만하며 욥을 정죄하고 비난한다는 그 자체가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3. 소발의 권고
좋은 설교는 무엇보다 논리성이 있어야 하고.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하고, 성령이 역사하는 역동적인 설교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설교를 듣는 사람이 먼저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어야만 마음에 감동을 받을 수 있고, 성령이 역사하셔야만 실생활에 적용하여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소발은 명 설교가요, 신학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들은 것처럼 매우 논리성이 있고 짜임새가 있고 설득력이 있고 다 옳은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랜 당시 어떻게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는지 저절로 감탄사가 나올 정도입니다.
이제 소발의 설교는 종반으로 접어들어 그렇다면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을 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가 남았습니다. 소발을 그 적용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회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1)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슈브'라고 하는데 구약에 약 1000번 이상 신약에선느 약 120회 정도 나올 정도로 성경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슈브’의 어원은 ‘뒤돌아 보다, 되돌아오다, 회복하다'는 뜻으로 이 말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로의 돌아감을 뜻하는 ’행동의 변화‘입니다.
(욥 11: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가) 행동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을 바로 정하고'란 말은 회개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옷을 찢는 것이 다가 아니라, 먼저 마음을 확고하게 먹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의 기본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무력하고 죄악 된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분은 우리의 연약한 손을 잡아 주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원하십니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마음을 바로 정하며, 몸과 뜻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 또한 본문 후반절의 `손을 들 때에'란 말은 과거의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항복하는 자세로 도움을 간청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애 2: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손을 드는 것은 항복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 손을 든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표현이며, 경건한 신앙심으로 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2) 회개의 방법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육체를 조정하는 핸들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게 되면 반드시 생활에 변화가 동반되어야만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발은 욥에게 그같은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욥 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가) 여기서 ‘손에 죄악’이라는 말은 사람이 손은 지금 저지르고 있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공허한 우상 숭배, 속임과 부정으로 약한 자를 등치는 죄악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한 죄악을 ‘멀리 버리라’고 한 것은 함께 있게 하지 않도록 옮겨 버리고 제거해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으로 죄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고 죄를 시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이나 시인이나 고백만으로는 사람을 죄에서 돌이킬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회개는 죄악을 멀리 버리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즉 진정한 회개는 입술로 고백하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또한 죄악 된 요소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살아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죄악 된 행실을 버리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경외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잠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고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리며, 다시는 죄의 종노릇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욥이 재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죽임을 당한 근본 원인이 불의한 죄가 욥의 가정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니 그것들이 다시는 집에 거하지 못하도록 제거하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소발의 말한 회개는 다 옳은 말이지만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사실을 욥에게 죄가 있고 욥의 가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소발이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선입견으로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의사라고 할지라도 오진을 하여 약을 처방한다면 그것은 환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생사람을 환자로 만드는 일이 되는 것처럼 소발이 자기의 선입견을 욥에게 적용하여 설교한다는 것은 잘못된 설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그 설교를 듣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3) 회개자의 축복
물론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의 위선이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고 인격적으로 손상을 입게 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설령 죄를 범하였다고 할지라도 사람들 앞에서 잘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악과 불의를 철저히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용서하여 주시며, 또한 많은 축복으로 함께 하십니다.
십니다.
(사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1) 회복의 축복
(욥 11:15)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여기서 ‘얼굴을 들게 되고’는 욥이 죄 때문에 고난과 징벌을 받는다는 가정 하에 회개하면 이전에 가졌던 사회적 지위나 명성 등을 회복되어지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두려움이 없으리니’ 라는 말은 욥이 현재 고난과 질병으로 시달리며 두려워하는 것을 제거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회개로 인해 용서함 받은 자는 죄로 인해 두렵고 떨리며, 부끄럽고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라 흠 없는 얼굴을 들고 굳게 서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죄라는 속성은 달콤한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고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사람을 고통과 두려움이 빠뜨리고 맙니다. 설령 어떤 죄로 인해 그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들이 제거되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회개로 인해 용서함 받은 자는 죄로 인해 두렵고 떨리며, 부끄럽고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라 흠 없는 얼굴을 들고 굳게 서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일에 의로우며 매사에 담대합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합니다(잠 28:1).
이제 우리도 죄악과 불의에서 떠나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담대함을 얻어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며, 또한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주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2) 과거를 망각하는 축복
(욥 11:16)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여기서 ‘환난’이라는 말은 수고와 노동과 고생과 해악과 재해를 총칭하는 말로 소발은 욥이 회개할 경우 현재 당하고 있는 그 같은 고난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새롭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물이 흘러감 같다’는 말은 한 번 흘러 가버린 물은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회개하는 사람에는 한번 겪은 재난이 되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환난을 기억조차 하지 않게 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은 이처럼 깊은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부여함으로 과거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완전히 잊도록 합니다.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므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를 띄우심으로( 시 30:11)’ 과거의 고난을 기억도 안 나게 하실 것입니다.

3) 미래에 희망이 부푼 축복
얼마 전에 행복 전도사라고 일컫던 여류 명사가 자살을 택한 이유는 갈수록 고통이 더해지기 때문에 내일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지나간 과거가 있는가 하면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래가 있습니다. 물론 과거의 성공이나 행복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과거가 아름다웠다고 할지라도 현실이 비참하거나 미래에 희망이 없다면 마음은 더욱 참담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과거가 아무리 비참하였다고 할지라도 현재가 아름답다면 그것이 축복이며, 설령 현재가 비참하다고 할지라도 미래에 희망이 있다면 현재의 고난을 얼마든지 감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과거가 고통스러웠다고 할지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밝고 희망찬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 11: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욥 11:18)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이 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 잠 4:1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빛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의인에게 약속하신 '대낮보다 밝은 빛'이 우리의 생명의 날 동안 계속 비취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욥이 회개하기만 하면 미래에는 현재 당하는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될 뿐만 아니라 왕성하고 풍요로운 장래를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잠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는 말씀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욥 11:20)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 는 말씀처럼 비참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소발이 욥에게 설교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 나를 막론하고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매일 매일을 떡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죄를 일상화하고 있는 인간이 살길은 오직 회개뿐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옷을 찢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마음과 생각과 삶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전인적인 방향 전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소발이 왜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일까요? 소발의 설교가 옳은 말이라면 과연 소발의 문제점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소발은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가 아니라 건강한 설교자일 것입니다.
소발은 친구인 욥을 대할 때 친구가 처한 사실에 대한 이해나 겪는 고통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랑이 실종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보다는 자기가 친구에 대해서 느끼는 심증과 선입견을 더 우선하여 정죄하고 비판하는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라는 말씀과 같은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소발처럼 건강하지 못한 설교자는 자신은 마치 티끌만큼도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는 의인처럼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입장이 되겠다는 월권과 경거망동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동일하게 연약한 형제들이요 심판주는 오직 한 분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롬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나는 하나님처럼 남을 심판하거나 사탄처럼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고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언제든지 넘어질 가능성이 많은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건강한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마치 연금이나 노후보험처럼 나중에는 내게 유익을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남에게 설교를 하려고 할 때는 남을 위로는 은혜스러운 말을 하는 건강한 설교자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골 2: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