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욥 14:1-3)

미션(cmc) 2010. 11. 17. 18:39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욥 14:1-3)

(욥 14: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욥 14: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욥 14:3)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는 가운데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존재로 가장 아름답게 지으셨고, 또한 제일 기뻐하셨습니다.
(창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사람도 자기가 심은 꽃이나 키우는 애완동물을 사랑하고 아끼며 그것이 병들면 마음 아파하며 어떻게 하든지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처럼 사랑하시는 인간을 일부러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어려움을 당할 때 외면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약해지면 때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 원인과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거나 자기의 고통을 외면하신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내가 그와 같은 시험에 빠지지 않았는지 돌이켜 보면서 우리가 때로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것인지 그 이유와 해답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자 합니다.

1. 희망이 없는 삶
오늘 성경 말씀은 욥이 친구 소발의 논쟁에 대해서 답변 대신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는 욥의 기도문입니다.
(욥 14: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욥 14: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욥 14:3)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욥은 모든 인간을 통 털어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모든 인간의 한 평생은 짧을 뿐 아니라 그 어간 동안에 걱정이 가득한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1) 단명한 인생

여기서 '생애가 짧고‘라는 말은 ’명이 길지 못하다는 말일 뿐 아니라, 마음에 원하는 것을 다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오늘이 벌써 11월 둘째 주일입니다. 2010 년도도 저물어 가고 있으며 얼마 남지 않았구나 생각이 들 것입니다. 금년이 지나면 또 나이 한 삶을 먹게 되고 그 만큼 죽을 날이 가까워진다는 말입니다.
정말 오늘 성경에서 욥이 고백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라는 말씀이 더욱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2) 수고뿐 인 인생

욥은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한 평생은 짧을 뿐 아니라 ‘걱정이 가득하며’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걱정’은 ‘소란, 불안, 괴로움, 격노’라는 누구나 원치 않는 부정적인 상황을 의미하며, ‘가득하며’라는 말은 ‘배부른, 많은’이란 말로 쉽게 이야기 하면 너무 많이 먹어서 질릴 정도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일평생을 살아간다면 일생 동안에 겪게 되는 소란함과 불안함과 괴로움과 분노 때문에 우리도 질려 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 같은 고백은 욥만이 아니라 시편 기자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는 동일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는 짧은 인생 가운데 그래도 장수를 했을지라도 그 자랑은 단명한 사람보다 더 많은 수고와 고통과 슬픔을 겪은 것이 자랑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3) 한시적인 영화

물론 우리 중에는 자신이 생활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욥의 고백이 염세적이고 비관론처럼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도 한 때는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부귀와 영화조차도 한순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 14: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여기서 ‘시들며’ 라는 말은 저절로 시드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자르고 베어버리는’ 것을 뜻하며, ‘지나가며’라는 말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잡을 수 없는 그림자나 바람과 같이 ‘재빠르게 도망쳐 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평소에 건강해 보이고, 젊게 보이는 것을 자랑하며 부러움을 사던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떠나든가요?
물론 아프지 않으니까 영생을 하든가요? 아닙니다. 때가 되면 그처럼 건강과 젊게 보이는 것을 자랑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베어 버리시면 꼼짝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조화가 아닌 다음에 일년 내내 시들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하였으며, 인생의 부귀와 영화가 마치 그처럼 한시적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 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기의 소유와 지위를 자랑하는 사람이 오만방자하게 굴지만 성경은 그 사람의 일생을 가리켜 풀과 같이 한시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92:7] 악인은 풀 같이 생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할찌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이것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생각할 때 한 편으로는 허무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설령 소유가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풀의 꽃과 같고 그림자와 같이 신속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고개 들고, 눈을 들어 헛되지 않고, 허무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들에게도 크고 작은 고난을 통해서 인생의 허무함을 깨우쳐 주시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2. 절대절망인 죽음
어떤 사람은 한 평생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부자이고, 어떤 사람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왜 그것을 내버려두시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결코 불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니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세상을 사는 기간은 길고 짧을 수 있고 부요하고 가난할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마치 하루가 길어야 24시간으로 정해진 것처럼 하나님이 각자에게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욥 14:5)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자기는 죽음과 무관한 사람처럼 마치 백년이라도 남은 사람처럼 시간을 허비하고 임박해 오는 죽음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각자의 죽음의 날이 언제인지 모르게 하셨을 뿐 하나님이 정하신 각자의 수명은 누구도 초과할 수 없으며 때가 되면 누구든지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병의 고통이 심해지면서 죽음이 목전에 오게 되자 인생의 생명의 소멸과 달리 나무에게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욥 14:7)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욥 14:8)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욥 14:9)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욥 14: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그러나 인간은 풀의 꽃과 같이 짧은 한 평생 동안 수고와 슬픔과 걱정과 근심으로 보내고 결국 죽음이 맞게 되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인생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비관하였습니다.
(욥 14: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욥 14:12)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장정’은 힘이 절정에 이르고 가장 유능하고 능력이 있는 수준의 남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또한 ‘죽으면 소멸되나니’라는 말은 아무 쓸모없게 된다는 뜻을 가진 와 계속법 미완료 동사입니다.
과연 욥의 고백처럼 인간에게 죽음은 요지부동한 것으로 누구도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절망적이고 숙명적인 것일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을까요?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결국 죽음으로 소멸되어진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인간을 만드셨으며, 더구나 짧은 한 평생을 수고와 슬픔으로 보내도록 버려두시는 것일까요?
3. 절망 중에 소망
욥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절대 절망인 죽음 앞에서 막연하나마 소망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욥 14:13)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여기서 ‘스올’은 구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이 가는 사후의 세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감추어’ 달라는 말씀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 라는 미완료 동사로 계속 감추어 달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욥이 과거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고 은혜로 풍요와 평안을 주시고 권고로 지켜 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께 죽은 후에 새 생명을 주시기를 소망하고 소원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원하였습니다.
욥은 참혹한 절망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아니했습니다. 막연하나마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노가 쉴 때까지 자신을 음부에 감추시고 자신을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즉 자신을 음부에라도 숨겨 주시어 진노를 피하게 해 달라는 탄원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믿음 가운데서 어떠한 시련이 닥쳐도 소망을 가지겠다는 결단이 내포된 말입니다.
(욥 14: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여기서 ‘어찌 살리이까’라는 생명을 유지 할 수 없고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그러나 욥은 장정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만약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자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무리 어려워도 자기는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는 얼른 하나님께서 이러한 고통의 자리에서 그를 건져 주실 것을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욥 14:14) “사람이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다시 살아날 때까지 아무리 어려워도 기다리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욥 14:17)'내 허물은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암에 걸렸을 때 살기를 포기하고 금방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을 고치기 위해 병원을 찾고 음식을 가리고 열심히 운동을 하여 몸의 면역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중에 암이 물러가고 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과 같이 죽음 너머에 더 큰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는 자만이 죽음에서 구원받기를 원하고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자만이 속죄의 길을 찾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상도 못할 시련이 우리를 뒤덮을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보다 깊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시키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닥쳐올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를 주시려는 의도인 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고난과 죽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부활 신앙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자들은 오히려 환난 날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고 더욱 즐거워합니다. 또한 죽음 앞에서도 항상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그의 행사를 잊지 않고 그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랍니다. 영생에 대한 모든 소망은 하나님을 좇아 나기 때문입니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욥은 위대한 신앙인이지만 당시 부활과 영생에 관한 완전한 계시를 받지 못했으나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과 달리 사망 권세를 깨뜨시고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실한 소망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욥의 시대에는 부활의 소망이 희미하고 불확실했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같은 주님의 부활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부활 생명이 현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언행이 욥보다 더 의롭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부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특권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고전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같은 고난을 통해서 믿음과 소망을 갖게 하심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우리가 경험한 우리가 믿는 유일한 희망이신 복음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려 함입니다.
예 화 1
수년 전 아일랜드 여객선(The Express of Ireland)이 침몰하여 129명의 사상자를 낸 적이 있다. 생존자들에 의하면 '배가 가라앉고 있다'라는 급보가 전해졌을 때 준비된 구명대가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배 안에 있던 구세군들은 침착하게 자기의 구명대를 벗었다. 그리고는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자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구명대를 입혀 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들은 큰 파도가 갑판 위를 삼켜버릴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구세주를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화 2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CCM을 제일 좋아한다는 예은이 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발벗고 나서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예은이를 위해 뭉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양아빠 유장주씨는 1987년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입고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지금의 아내 박정순집사와는 교회에서 만나 2001년 결홍늘했으나 임신 할 수 없었고 예은이를 양육하는데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하였다. 예은이의 부모님은 20살 때 교통사고로 경추를 다치고 전신마비 1급 판정을 받은 유장주 씨와 장애인사역자인 박정순 씨다. 이들 부부는 집안의 반대로 어렵고 힘든 결혼을 한 뒤에 갓 태어난 예은이가 안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입양해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명이 넘는 장애인들을 보살피며 ‘둘이하나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박정순 집사님은 장애인사역을 하면서 어려운 것과 힘든 것도 많지만 살아있기에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고백한다. 여기에 앞을 볼 수 없는 예은의 피아노 레슨을 모두 거부했을 당시, 예은이의 가능성을 보고 선뜻 예은이의 피아노 공부를 도와준 피아노 선생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예은이를 위한 특별한 수업 방법으로 피아노 실력을 키워주고 있는 피아노 선생님. 오늘도 예은이의 실력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고마운 사람이지요. 예은이의 피아노 수업하면 고마운 사람이 또 있지요. 장애인 공동체 두리 한마음을 운영하느라고 바쁜 엄마와 교통 사고로 목 아래가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하고있는 아빠 대신 피아노 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차로 30분이 넘는 거리를 예은이와 동행하며 힘이 되어 주고 있는 목사님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예 화 3
희망으로 세상을 밝힌 시각장애 천재 피아니스트 유예은이가 안방극장을 감동으로 물들였다. 13일 방송된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한 9세 예은이는 3년 전보다 성숙한 연주 실력과 밝은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최소 7년간 연습해야 소화할 수 있다는 '월광 제3악장'을 완벽히 연주해 천재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예은이는 '스타킹' 출연 이후 해외에서 공연도 많이 하고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이루마와 함께 환상적인 합주를 보여줬다. 예은이는 이 뿐만 아니라 닉쿤을 처음 만난 느낌을 표현한 아름다운 곡을 들려주기도 했다. 닉쿤을 만나 '솜사탕' 같은 느낌을 가졌다는 것이다. 반대로 강호동을 만난 느낌은 마치 태풍을 만난 것처럼 강렬한 곡을 선사해 웃음을 자아냈다. 예은이는 여러 출연자들은 함께 '아름다운 세상' 이라는 곡을 연주함으로 눈이 없어 세상을 보지 못하는 줄 알았으나 오히려 우리가 보지 못한 아름세상을 보는 눈이 열려져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이루마 역시 예은 양의 연주에 대해 "인간적이고 따뜻하고 노력이 묻어나는 연주라 좋았다"며 "그냥 듣기만 해도 좋다"고 예은의 실력을 칭찬했다. 물론 "다만 지금 선생님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작곡가의 입장으로 봤을 때 예은이가 좀 더 자신만의 곡을 써보고, 손이 작다. 무리한 곡을 치려하지 말고 연주하고 싶은 곡을 찾아 듣고 계속 연습하는 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애정 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이루마는 예은이에게 "자신이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찾아 꾸준히 연습을 했으면 좋겠고, 나에게 연락을 하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중간중간 점검을 해주고 곡을 쓰면 고쳐주고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혀 다시 한번 훈훈함을 안겼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시간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당대나 특정 기간만 보면 불공평하게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시기 때문에, 좀 더 길게 개인이나 가문이나 국가의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게 되면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욥은 위대한 신앙인이지만 당시 부활과 영생에 관한 완전한 계시를 받지 못했으나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과 달리 사망 권세를 깨뜨시고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실한 소망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욥의 시대에는 부활의 소망이 희미하고 불확실했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같은 주님의 부활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부활 생명이 현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언행이 욥보다 더 의롭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부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특권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고전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시냇물이 한 번 흐르면 다시 역류하여 흐를 수 없듯이 한 번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또 과거의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 적이 있느냐면서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원한 세계로의 첫출발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부활'은 이러한 사상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 주어진 생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삶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절망이 아니요 소망입니다. 슬픔이 아니요 기쁨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활만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현재의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소망의 크기와 인내의 크기가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없어질 육체나 위로받지 못할 마음의 상처 때문에 탄식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불멸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