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갈 4:4-7)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농부가 씨 뿌리는 봄철을 놓쳐 버리고 뒤늦게 한 여름에 열심히 씨를 뿌리고 가꾼다고 해서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파종이 늦어 일조량의 부족으로 흉작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열심히만 하면 만사가 오케이가 아니라 만일 때를 놓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수고한 보람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구약 시대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그 당시 오시지 않고 왜 수천 년, 수백 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을까요?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고통당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예언하셨으나, 당장 보내시지 않고 미루셨다가 지금으로부터 이천여 년 전에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치 농부가 가을걷이를 곡식이 무르익었을 때를 놓치지 않고 하는 것처럼,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때가 무르익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1.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때
1)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때는 정치적으로는 여러 제국들이 명멸(明滅)을 거듭하면서 로마 제국이 번성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약소국들을 침략하여 무자비한 살상과 착취를 통해서 많은 약자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 있을 때였습니다.
2)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때는 수많은 사상들이 번성하는 가운데 헬라 철학이 극치를 이루었으나, 그것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거나 진정한 위로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신화와 무신론에 빠지도록 만들었을 때였습니다.
3)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때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는 가운데 구약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가 있었으나, 그 것이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압제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구원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이라는 굴레를 씌워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을 때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태어나신 팔레스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종교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구세주가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4)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때는 어지러운 세상을 보면서 오로지 메시아가 오셔야만 근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나이가 많았지만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약속하신 메시아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라는 말은 (사 40: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라는 말씀과 같이 세상에 어떤 권세도 능히 이기실 강한 메시아의 임재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때가 바로 그 ‘때가 찼을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렀을 때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관찰하게 되면, 예수님도 때를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때 결정적인 요인 몇 가지는 얼마나 내게 유리한가를 생각하여 그 때를 맞춥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이 쉽고 어렵고, 유리하고 불리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고 몰라주고를 떠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맞추시기를 항상 힘쓰셨음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마 26: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요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2.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
말세에는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이단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독생자라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물론 아담과 하와를 제외하고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여자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남편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똑똑 할지라도 남자가 없이 아이를 태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의 성을 붙이는 것입니다. 물론 극히 예외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누구나 다 낳은 이는 어머니인데 성은 아버지의 성을 붙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에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라는 말씀의 여자는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어머니인 여자와 같은 의미의 여자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말은 남자와 아무런 관계없이 순수하게 여자를 통해서 태어나는 아이가 바로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지구상에 어느 누구도 남자와 무관하게 여자의 힘만으로 태어난 아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의학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며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인류를 죄와 고통과 죽음에서 구원하실 메시아는 무엇보다 죄와 무관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조건을 충족시키시기 위해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 나사렛에 사는 순결한 마리아를 택하신 것입니다.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물론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였기 때문에 사내아이를 낳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임하시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여기서 ‘너를 덮으시리니’ 라는 말씀 ejpiskiavzw는 ‘그늘 지게 하다, 덮다’ 라는 뜻으로 마치 천막으로 덮으면 그 아래가 다 그늘이 되는 것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를 덮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성령이 그렇게 수면을 덮으시므로 천지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러므로 동정녀 마리아가 어떻게 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하였을까? 하는 문제를 이성적으로 납득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만이 이해가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신 메시아의 탄생 방법으로 이용하셨을까요? 그것은 메시아의 무흠한 혈통을 위해서였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신장이 병들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꿈은 다른 사람의 콩팥은 이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가 콩팥만 제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병들지 않은 건강한 사람의 콩밭을 이식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범죄한 인간을 죄와 고통과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시는 독생자는 죄가 없는 몸으로 오셔야만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 대안이 바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처녀 마리아를 거룩하신 성령께서 능력으로 덮으시는 창조적인 역사를 통해서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정말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라는 증거는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뒤늦게 안 약혼자인 요셉이 고민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자초지종을 들려 준 메시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 탄생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고 예수님이 유일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신대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3. 율법아래 나게 하시고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이라는 말은 상반된 말이지만 과연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 기준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선입견이나 경험의 잣대가 된다면 세상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현대 사회는 절대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특히 청소년들 세계에서 그같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치 척도의 기준인 법이 필요하고 그 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고 공평하게 적용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가 민주주의 법치국가라고 하지만 적용할 법조문이나 죄를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면 아무리 죄인이라는 심증이 있어도 구속하거나 형벌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죄를 놓고 동일한 법을 가지고 재판을 하지만 어떤 것은 지방 법원에서는 유죄였는데, 고등법원에서는 무죄가 되기도 하고 정반대로 무죄가 유죄가 되기도 하는 이유는 재판관이 법적용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상반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인간에게 영원불변하며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선악의 절대 기준이 되는 법을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그 법이 바로 율법입니다. 성경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사회에서 범법한 전과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면 자존심 상하게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왜 사회법으로는 무죄인데 교회에 나오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에 비추어 보면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밝혀 주기위해 율법이라는 법을 주셨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거나 만들거나 예배하고 절하는 종교 행위가 살인이나 도적질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큰 죄인 것입니다.
2) 아무리 하나님을 잘 예배할지라도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내고,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설령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하거나 피해를 입히지 않았을지라도, 돕고 사랑해야 함을 잘 알면서 그것을 묵살해 버리고 선을 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을 범한 죄라고 하셨습니다.
(약 4: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와 같은 죄는 마치 외상값처럼 반드시 그 갚아야 하는데 죄의 외상값은 죽음으로 평생 죄인인 인간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와 같은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을 받아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죄의 삯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세상에 어떤 종교도 어떤 철학도 어떤 법도 율법아래 정죄 받고 있는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속에 빠뜨렸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와 같은 인간을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 율법을 범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때 율법아래 태어나게 하셨으며,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삼십 삼년을 사시는 동안 단 한 번도 율법을 범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한 사람들이 바로 눈에 불을 키고 예수님의 약점과 허물을 찾던 종교 지도자들이 바리새파, 사두개파, 기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율법을 범하지 않으신 지극히 거룩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흉악한 죄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율법 아래 나게 하시고 율법을 다 지키신 것입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4. 양자가 되는 권세의 축복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수박 겉핥기와 같은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라는 것입니다. 보다 더 깊은 뜻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나게 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가 범한 율법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속량을 받음으로 우리가 사죄함을 받은 것도 큰 은혜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후에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기 위한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아들의 명분’이라는 말은 양자삼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양자는 혈육이 아닙니다. 혈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삼아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후 그 피 값으로 죄인인 우리를 값 주고 사서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본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믿게 하시려고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가리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기도할 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한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값없이 재산을 다 물려 주시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것만이 아니라, 감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 자녀된 우리에게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으니 어찌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습니까?
(갈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날이 성탄절이라면, 성탄절은 단지 산타크로스처럼 일용품을 선물로 주신 날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과 걸맞는 영생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보내신 뜻 깊은 날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이 일을 계획하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말미암아 그 일을 시작하셨고, 수천 년 동안 준비하셨다가 마침내 때가 차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 달려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의 최대의 거사인 인류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 화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에 걸쳐 건축되고 있는 건물 중에 하나가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 있는 가우디의 파밀리에성당 건축일 것입니다. 100년째 짓고 있습니다 .
과거 말썽장이 낙제생에서 현재의 파밀리에 성당을 설계하고 건축한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는 까탈루냐 남쪽 지방에서 태어났지만 건축학교를 졸업하고 독신으로 활동하다 전차에 치어 비명횡사할 때 까지 평생 바르셀로나를 떠나지 않았다.
보통 예술가들, 특히 화가들은 살아있을 땐 힘겹게 예술 활동을 하다가 죽고 나서야 명성을 얻는 경우가 많은데, 가우디는 살아 있을 때도 인정받아 마음껏 자기의 작품을 설계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행복한 삶이 아니었나 싶다. 죽은 가우디가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가우디의 파밀리에 성당은 1882년부터 지어서 100년이 넘게 짓고 있는 성당으로 2022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와 같이 위대한 건축물로 오랜 세월을 걸쳐 수많은 인부와 천문학적인 건축비용이 들어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일을 수천 년 동안 준비하시고 이일에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셨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성탄은 결코 선물을 주고받는 산타크로스의 날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래동안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최대의 투자를 하심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이요, 소중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뜻 깊은 날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어느 때입니까? 과연 지금 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사람들이 저마다 말세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말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때입니까?
1) 영적으로 자다가 깰 때입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2) 더욱 큰 은혜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적그리스도인 이단을 조심 할 때입니다.
(요일 2: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4)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5) 재림을 약속하신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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