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기쁨이 충만한 성도
(살전 1:4-6)
(살전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기쁨이 넘치는 교회와 성도’라는 표어로 시작한 2011년 둘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예배의 기쁨이 넘치는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성령의 기쁨이 충만한 성도’라는 주제에 대해서 말씀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기쁨으로 일생을 살아가고 싶은데 과연 무엇이 예수를 믿는 우리를 기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요?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가난과 질병과 사고와 실패 그리고 신앙에 대한 박해와 위협 같은 것들일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것들이 없는 곳을 찾아 나선다면 세상 어디를 갈지라도 고난이나 위험이나 도전이 없는 곳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한다면 어떤 마음의 자세가 필요할까요?
어떤 사람은 그것이 무서워서 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비겁하게 그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드물게 맞싸워 이기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다 세 번째를 원하겠지만 막상 현실에 직면하면 약해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염려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 중에 2011년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표어에 걸 맞는 성령의 기쁨이 충만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1) 두아디라 교회처럼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이 창대하게 되었던 교회,
2) 에베소교회처럼 시작은 좋았으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미약해지는 교회,
3) 사데 교회처럼 겉보기에는 그럴듯하나 실상 내부적으로는 생명력을 잃은 교회,
4) 서머나 교회처럼 겉으로는 죽을 고비를 겪는 것 같으나 실상은 건강한 교회라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1. 데살로니가 교회의 설립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빌립보에서 있었던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강가에 있는 기도처로 가다가 악령에 사로잡힌 나이 어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여종은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이 매일 같이 따라다니며 바울에게 `하나님의 종이신 이분들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을 길을 알려 주러 오셨다!' 고 큰소리로 외쳐 댔습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매일소리 지르자 바울은 더 참지 못하고 그 여자에게 붙어 있는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령한다. 이 여자에게서 나가라!' 호통을 치자 그 순간에 귀신이 즉시 나가 버렸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귀신들린 여종을 고용했던 주인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까지 여종이 귀신에 사로잡혀서 점을 쳐서 돈을 벌었으나 이제는 귀신이 쫓겨났기 때문에 더 이상 점을 쳐서 돈벌이 할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에 있는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발을 하였습니다.
당국자들은 바울과 실라를 무자비하게 채찍질하고 손과 발을 묶고 감옥에 가두었으나 그 날 밤에 묶였던 손과 발의 쇠사슬이 풀리고 감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같은 기적을 목격한 간수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와 그의 온 가족들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더 큰 기적이었습니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만일 빌립보에서 그 같은 핍박이 없었다면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빌립보를 떠나지 않고 안주하게 되었다면, 데살로니가 전도는 이루어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 설립도 불투명하였을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등 떠밀린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거기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펴놓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이심을 증명하는 설교였습니다.
바울을 설교를 들을 데살로니가 사람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경건한 헬라 사람들과 그 도시의 귀부인들도 예수를 믿기로 하였습니다.
(행 17:4) “청중 가운데 여러 사람이 감동을 받고 신도가 되었다. 많은 경건한 헬라 사람과 그 도시의 귀부인들도 신도가 되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바울의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는 빌립보에서처럼 귀신을 쫓아내거나 무슨 특별한 기적을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고 오로지 순수한 복음을 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폭도들은 바울과 실라를 끌어내어 시의회에서 처벌받게 하려고 바울의 일행을 찾기 위해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습니다.
폭도들은 거기서 두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자 그 대신에 야손과 신자 몇 사람을 끌고 의회로 가서 아우성을 쳤습니다.
(행 17: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행 17: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행 17: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이 말을 들은 시민과 치안관들은 이 일을 처리하는 일로 한때 떠들썩하였으나 보석금을 받고 야손과 신자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그날 밤으로 신자들은 서둘러 바울과 실라를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게 된 짤막한 배경으로 더도 덜도 아닙니다.
2. 건강한 데살로니가 교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마도 바울 사도가 전해 준 복음을 들었던 소수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신앙을 포기했거나 아니면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성경은 별로 찾아볼 수 없고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데살로니가서가 유일한 자료입니다.
사도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가지고 일이삼차에 걸쳐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동일한 바울이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지만 우리가 바울 서신이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교회들이 제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자라 갑니다.
동일한 사도, 동일한 복음을 씨 뿌렸지만 어떤 교회는 건강하고, 어떤 교회는 나약하기만 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 성경 말씀을 보니 놀랍게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짤막한 기간 동안에 씨 뿌린 복음은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에 싹이 나고, 자라서, 가지에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서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서신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데살로니가 서신입니다.
(살전 1: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삼대 요소가 의식주(衣食住)라고 하면 아름다운 신앙 건강한 믿음의 삼대 요소는 신망애(信望愛)일 것입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여기서 ‘항상 있을 것인데’라는 말은 떠나는 것의 반대말로 ‘어떤 장소에 머무르다, 체재하다, 살다, 존재하다‘는 계속해서 현재적으로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이는 결코 신앙은 유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도 영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땅에 심은 곡식이 다 싹이 나는 것이 아니고, 싹이 났다고 해서 다 자라는 것이 아니고, 자랐다고 해서 다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열매를 맺었다고 해서 다 알곡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바울 서신을 보게 되면 다 바울이 세운 교회이지만 교회들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겨우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처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균형 잡힌 신앙의 열매를 맺어가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한 것입니다.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렇게 성장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물론 두 가지 일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셨기 때문에 그 같은 시련들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데살로니가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변함없이 보호하심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기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기지 못합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똑같은 하나님, 똑같은 성경이지만 그것을 어떤 자세로 받아드리는가의 여부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들을 때 어떤 자세로 받아 드렸기에 그렇게 좋은 열매를 맺었을까요?
3.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외부적으로 핍박만 강하게 받은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들을 때 영적으로도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 사람의 말로 기록된 성경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이는 복음의 양면성을 가리키는데 복음의 한 쪽 면은 인간이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약은 선지자와 신약은 사도들을 통해서 사람이 읽고 듣고 알 수 있는 말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서 전하게 하셨고 또한 그 말씀을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한 단면 만 보게 되면 사람의 말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사람의 말로 사람이 기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성경의 또 다른 면은 그 성경을 선지자나 사도들이 전하고 기록하게 된 것은 자기들의 생각이나 의지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기록하게 하셨다고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 사도 바울의 고백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여기서 ‘감동’이라는 말(qeovpneusto")은 ‘하나님’이라는 말과 ‘영 또는 불다, 숨쉬다’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호흡 또는 하나님의 영을 받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성경에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성경이 인간들의 어떠한 기록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 사도 베드로의 고백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여기서 ‘감동’이라는 말(fevrw) 은 앞서 호흡이라는 뜻과 달리 ‘가져오다, 인도하다, 보이다, 옮기다’는 뜻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성경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보여주시고, 가져다주신 것을 기록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3) 말씀을 받아드리는 자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는 성경 말씀을 읽고 들을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부정적인 자세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각색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 내주셨습니다. 그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마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라고 한 것처럼 여기서 놀란다는 말 ejkplhvssw 는 '경악하게 하다. 놀라서 충격을 받다‘는 뜻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가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붙들어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였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귀신들이 그에게 복종하겠지' 라고 떠들어댔습니다.
2) 긍정적인 자세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었을까요?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은 인간이지만 그의 입술에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사단은 그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로 훼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 말씀을 깨닫게 하고 믿어지게 하시는 성령의 기쁨으로 그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여기서 ‘많은 환난’이라는 말은 많은 억압과 압박과 고통과 괴로움의 한 중심에 있었음을 뜻합니다.
또 ‘말씀을 받아’라는 말은 '환영하다, 환대하다'라는 의미로 바울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마치 하나님을 영접하듯이 대환영하는 자세로 받아드렸을 때 성령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속에 기쁨의 은사를 부어주셨습니다.
3) 긍정적인 자세로 받은 결과
데살로니가 교회는 외부적인 환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바로 그와 같은 성령의 기쁨이 넘쳤기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라는 건강한 믿음의 교회가 되어 지상 교회의 모델 교회가 되었습니다.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본이 되었다’는 말은 마치 도장을 찍게 되면 도장과 똑같은 이름이 찍히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잘 믿는 교회, 잘 믿는 성도가 어떤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인지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라는 말씀처럼 많은 환난 가운데서 말입니다.
또한 여기서 ‘기쁨’은 성령이 충만해서 무슨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핍박을 당하는 현실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복음의 말씀만을 기뻐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성령의 기쁨'은 성령께서 그 내주하는 자에게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열매입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의 내주를 체험하였고, 그분이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영적 기쁨으로 인해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2011년도에 우리가 소원하는 ‘성령의 기쁨이 충만한 성도’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체험한 그 기쁨입니다.
성령의 기쁨이 충만한 성도는 먹고 입고 마시고 즐기는데서 기쁨을 찾지 않고 말씀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도 주 안에 맛보는 기쁨이며, 믿음의 기쁨인 것입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러한 기쁨은 외부에서 밀려오는 환난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기쁨으로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다 깊은 옥에 갇혔을 때 맛본 기쁨과 동일한 기쁨입니다(행 16:22-25).
(히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
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성경은 인간이 쓴 소설과 달리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성경을 읽고 들을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과 변화를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하나님의 성경은 성경의 기자들을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령은 간절한 마음의 기도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감동시키며, 초자연적 능력으로 말씀의 이해를 도와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리의 학습에 유익하며, 무식한 자에게 훈계가 되고, 오류와 죄에 빠진 자들에게 견책과 확신의 말씀이 된다. 또한 어떠한 잘못에도 교정의 지침이 되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로 교육하는데 더없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쁨의 열매는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되는 어떤 슬픔이나 근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항구적인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였을 때 그 사람이 나와 더불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 얻어지는 전도의 기쁨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과 바나바는 힘을 얻어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므로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반면에 누구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 드려야 할 유대인들은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져서 나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나야만 하였습니다.
(행 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허탈했을까?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결코 그런 모습으로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행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여기서 ‘충만하니라’는 말씀은 ‘가득차다, 채우다, 충만하다’ 라는 뜻으로 미완료 동사로 ‘기쁨’ 만이 아니라 ‘성령’이 아울러 충만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예화
공사장의 모닥불과 노점상의 화덕의 위력은 국부적인 것 같지만 그 열이 온몸으로 순환이 되어집니다. 나의 주변 환경이 한 겨울 같이 냉냉할지라도 나는 성령의 화덕인 말씀과 기도와 찬송을 가까이 하여 성령의 불을 쪼이기만 하면 성령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모닥불이 활활 타오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한 겨울 추위처럼 냉랭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들을 성령의 모닥불로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기쁨이 구제역처럼 확산되어 이 수원도성을 좀 더 따뜻하게 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쁨이 충만한 성도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 복을 받고, 내가 기쁨이 충만하고,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믿지 않는 내 가족이 보고 친구가 보고 본을 받아 기쁨이 구제역처럼 이웃에게 확산되어지는 것입니다.
2011년 우리들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시간마다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그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는 성령의 기쁨이 충만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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