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빌 1:6)

미션(cmc) 2011. 3. 1. 11:56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빌 1:6)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세상만사는 반드시 근본 원리가 있기 때문에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적당히 하게 되면 그것이 쉬운 것 같고, 때로는 잘되는 것 같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발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시작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체력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그동안의 실패는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되어 더 발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기초가 중요하고 기본이 중요하고 근본 원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나와의 바른 관계 정립이 최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지만 신앙생활을 오래하게되면 늘 즐겁고 만사형통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점에 가면 어려움에 직면하거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신앙의 근간조차 흔들리는 경우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원인은 당면한 시험이나 어려움 탓이 아니라 신앙의 근본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신앙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시합을 마친 후에는 헬스장이나 연습장으로 돌아가서 기초 체력과 기본기를 반복하여 훈련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연조가 오래 될수록 신앙의 본질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정직하게 자문해 보아야 하고,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살아계신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찬찬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그와 같은 신앙의 본질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해답을 주는 말씀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 창조의 목적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천지와 만물과 더불어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세계를 만드신 창조주이심을 제일 첫 번째 성경인 창세기 1장 1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태초’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Gn 1: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라고 번역한 말씀처럼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시작하게 하신 분입니다.
뜰에 심은 석류나무가 아무리 여러 해를 기다려도 제대로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나무를 더 이상 키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까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그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인간이 동물처럼 먹고 먹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마치 급발진으로 인해 자동차가 이기가 아니라 도리어 흉기가 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인간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을 근심되게 하는 타락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어느 누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나는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도 그 중에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선한 생각과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선천적인 성품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에겐가 선한 영향력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시고, 나의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라는 말이며,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는 삶입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께서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내안에 내주하여 계시면서 나의 생각과 입술과 행동을 주장하실 때 비로소 내가 선한 생각을 하게 되고, 선한 말을 하게 되고,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여기서 ‘행하시는 이는’ 일차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고, ‘행하는 이는’ 이차 원인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순종하는 우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둘 다 능동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성령을 내 마음에 모시게 되면 그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변화시키시고 선한 것들을 생각들을 심어 주십니다.
사람이 볼 때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차 원인이신 하나님의 성령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이차 원인인 인간만 보이기 때문에 마치 내가 선을 행하는 것처럼, 내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미쳐 그것을 깨닫지 못했거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도 힘이 들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핑계하며 미루거나 지례 겁을 먹고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늦은 후회를 한 적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천재일우(千載一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다시 오기 어려운 ‘절호의 찬스’라는 뜻입니다. 그 절호의 기회는 타락한 인간의 의지로는 할 수 있는 선행의 기회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때 미루거나,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게 하나님이 주신 선행의 기회가 무엇일까요? 물론 각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하나님이 내게 자주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내게 도전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1) 우리가 그와 같은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나에게 그와 같은 생각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2) 우리가 어떤 선한 생각이 들 때마다 그것을 묵살하지 말고 그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3) 그리고 그 생각들을 입술로 하나님께 아뢰어 기도하고, 사람들에게 증거하여 내가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으며, 보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4) 선한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먼저 시작해야 하는지를 살피고 그 일에 필요한 사람과 물질과 도구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5) 그리고는 자꾸만 재고, 미루고, 핑계하지 말고 그것을 즉각 행동에 옮기는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미쳐 그것을 깨닫지 못했거나, 아니면 필요성을 공감하면서도 힘이 들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핑계하며, 미루거나, 지례 겁을 먹고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늦은 후회를 한 적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2. 선행의 고난
신 불신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 한번 뿐인 인생을 할 수 있으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는 다 공감을 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거나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비일 비제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선한 일에는 반드시 수고와 희생과 헌신의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고, 그것이 반드시 잘된다는 보증이 없고, 시작했다가 중도에서 그만 두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웃음꺼리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겉으로는 용기 있는 체 하지만 누구나 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실패로 끝내지 않고 성공의 과정으로 도전 할 수 있는 방법은 내면적인 믿음의 전환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이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라, 관념적이고,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믿음이 문제입니다.

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결재를 받아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과 지식을 근거로 독단적인 생각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 결과 실패하게 되면 마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처럼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하기 때문에 믿음의 뿌리까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부모도 사랑하는 자식을 일부러 괴롭히지 않는다면, 하물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시겠습니까?
잘못된 문제에 대한 상당 부분의 책임이 나의 욕심, 판단 착오, 부 주의, 죄악 때문이 아닌지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실 때 겉으로 드러내 보이시지 않고 천사를 통해서 혹은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을 통해서 선한 일을 도모하십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우리는 선한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업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에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이 실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 상식으로는 하나님에게는 실패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아무리 하나님이 주도하신 선한 일일지라도 그 일을 이루기까지는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과정 중에 하나가 실패처럼 보이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고난 과정들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 겸손해 지기를 원하시며, 그 때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 원리를 바로 깨닫지 못할 때 믿는다는 사람도 막상 어려움을 당하면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낙심하고, 좌절하고, 회의하고, 갈등하고, 심지어 신앙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가 때로 실패처럼 보이는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 낙심하기 전에 그 일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시작이시며, 주인이시며 최종 목적이시라는 확고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사람은 일을 저질러 놓고 문제가 생기면 서로 책임전가하기에 급급한 비겁한 존재이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작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종결자’이심을 성경 맨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I am Alpha and Omega, the beginning and the end, the first and the last.”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확실한 증거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첫 번째가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들려고 하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반드시 재료가 있어야 하고 사람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지아 만물을 창조하실 때의 세상은 어느 것 한 가지도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전무한 상황이었습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상태에서 창조를 시작하셔서 단 엿새 만에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한 천지와 만물을 단 엿새 만에 창조를 마무리 하신 후 그것을 보시고 좋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창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고 우리가 사는 시대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시고 자라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It is finished.
그 결과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단순하게 믿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심으로 오늘 성경 말씀대로 능히 다 이루셨기 때문에 빈부귀천, 신분고하, 유 무식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다 구원함을 받도록 완벽하게 처리하여 주셨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를 통해서 또 다른 선한 일을 시작하고, 이루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만일 하나님이 나를 손에 잡으시고, 나를 통해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면 나는 비록 연약하나,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3. 선행의 결과
하나님께서 연약한 나를 통해서 선한 일을 시작하게 하신 것은 그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요,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가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선한 일을 시작하여 좋은 결과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우리에게 본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 15: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우리가 이 비밀을 깨닫게 되면 믿음 안에서 선한 일을 하다가 어려움이 닥치게 될지라도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그 좋은 결과를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교만은 무슨 선한 일을 하고나서 마치 내가 선해서, 내가 최선을 다해서, 내 지혜와 힘과 수단으로 한 것처럼 나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하고 헌신을 하고 희생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수고조차도 내 힘이 아니었음을 깨닫기 때문에 나를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작은 선일지라도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같은 생각과 말과 실천을 할 수 있는 지혜와 힘과 능력과 환경을 예비해 주셨기 때문임을 깨달을 때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4: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성경에서 그러한 사람을 찾는 다면 누구보다 다윗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한 평생은 자나 깨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었음을 시편 여러 곳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 22: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시편에 같은 맥락의 기도가 무수히 있지만 그 중에 또 하나를 소개한다면 시편 기자가 얼마나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원했는지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다윗이나 사울이나 인간적인 연약함에 있어서는 동일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앞에서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다가 버림을 받았지만 다윗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한 예를 소개하면 성전 건축을 위한 다윗의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의 평생소원은 성전 건축이었지만 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를 준비하였음을 역대상 29장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유 재산에서 성전 건축을 위해 금, 은, 놋, 철, 목재, 호마노와 같은 여러 가지 보석과 대리석, 순금 100톤과 순은 240톤을 여호와께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쳤습니다.
그러자 족장들과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과 군 지휘관들과 왕의 행정 장관들이 다윗을 본받아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께 금 170톤과 8.4그램의 금화 10,000개, 은 340톤, 동 610톤, 그리고 철 3,400톤을 기쁜 마음으로 바쳤습니다. 그 때 다윗은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대상 29:1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물론 다윗이나 백성들이 누가 명령을 한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생색을 내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윗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대상 29: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 29: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와 더불어 일하시기 때문에 성경 여러 곳에 겸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시 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그 때문이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내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가장 존귀하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속에 성령을 부어 주셔서 선한 일을 생각하게 하시고, 선한 일을 해야 하겠다는 결단하도록 지속적으로 역사를 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민감한 사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 있게 증거한 확신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빌 1:6) “여러분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계속 그 일을 은혜로이 성장시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완성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빌립보 교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수원제일교회 성도들도 선한 일을 시작하기를 끊임없이 권고하신다는 사실을 기도하는 사람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선한 일이 개별적으로는 각기 다를 수 있지만 교회적으로는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와 선교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민족이 잘살게 되면서 점점 하나님과 멀어져 가고 있고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점점 더 왕성해져가고 있고, 반면에 교회와 성도들은 약화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머지않아 마음 놓고 전도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이 더욱 전도를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거두는 시기가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선교 역사를 보게 되면 부흥과 성장의 시기도 일정한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기회가 지나가면 마치 촛대를 옮기는 것처럼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선교를 통해서 다른 나라와 지역으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작과 마침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선한 일을 시작하기를 원하시고, 또한 나를 통해 그 일을 완결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라고 하였으나 우리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다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선한 일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은 모든 일을 겸손한 마음으로, 정의롭게 사는 것이며, 남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이요, 더 나아가서 남을 돕고 구원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시작해야 하는 일입니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나에게 착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지체하지 말고 즉각 순종하며, 선을 행하다가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끝까지 도전하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