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빌 1:20-26)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모두 자신의 지난 세월을 잠시 돌이켜 보면, 어떤 사람은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돌이키고 싶지 않은 악몽이 과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한번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미래가 현재보다 더 희망적일 것이라고 생각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미래가 답답하고 암담하게 생각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설령 지난 과거나 당면한 현실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다가오는 미래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이 있는 사람은 잘 참아낼 수 있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현실은 더욱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예화
온 세계인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일본의 지친 참사 현장의 생생한 중계 가운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엄청난 자연의 위력만이 아니라 그 같은 재난 속에서도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잘 훈련된 일본 사람들의 침착함과 남을 배려하는 모습은 온 세계인들을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아직도 제 뇌리에 떠나지 않는 한 장면은 전기 통신 수도가 모두 끊겨 가족의 생사를 알길 없던 중에 뒤늦게 잃었던 가족과 통화를 하는 중에 스쳐 지나가듯 ‘무사해서 다행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라면서 가족을 위로하는 장면이 화면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바로 저것이 일본의 저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평소에 자주 사용하던 말이지만, 막상 내가 그 처지였다면 나도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동일한 상황일지라도 그것을 어떤 마음의 자세로 받아드리는가에 따라 희망이 될 수도 있고 절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자력 발전소의 연이은 폭발사고로 방사선이 대량 방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떠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보기에는 지진 피해가 방사선보다 더 처참해 보이지만 그것은 차츰 복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나 방사선은 사람들을 암에 걸리게 만들기 때문에 미래의 희망을 싹 쓰러가 버리는 지진이나 쓰나보다 더 큰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세상에서 부정적이거나 절망적이지 않고, 항상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자세로 살아가려면 과연 어떤 믿음이 필요한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1. 바울의 기대와 소망
로마 옥중에서 바울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주일에 살펴본 것처럼 그러한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은 낙심하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는 고백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우리와 다른 초인이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오늘 성경이 그 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남다른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여기서 ‘간절한 기대’라는 말(ajpokaradokiva)은 ‘목을 앞으로 길게 내민다’는 말에서 온 것으로 무엇보다 절실한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말로 E. Hoffmann 은 이를 가리켜 ‘어떤 것을 간절하게 그러면서도 염려스러워하며 기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소망’이라는 말도 역시 내일에 대한 희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 이 세 가지는 항상 간직해야 할 세 가지 필수요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옥중에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이었습니까? 로마 황제의 생일이 오면 특별 사면을 받는 것을 기대하였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무엇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쏟는 삶을 살아가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맨 처음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부터, 지금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순간까지 그이 기대와 소원은 오직 땅 끝까지 복음이 확산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때문에 감옥에 갇혀있을지라도 복음 전파가 중단되지 않고 더욱 확산되고 있음을 깨닫고 원망이나 불평이 아니라 감사하였습니다.
설령 그 일이 자기를 미워하는 다른 사람에 의해 확장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것은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하나님이 나라가 온 세상에 확산되어지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바울이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울의 죽음으로 끝나는 나라가 아니라, 죽음이 오게 되면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와 잇대어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기대와 소망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끝나버리는 세상 나라의 부귀권세가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영원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영원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과연 오늘 나에게도 바울과 같은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소망이 있을 때 예수님이 예고하신대로 말세에 처처에 전쟁과 지진과 쓰나미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신 말씀이 현실로 나타날 때 절망하지 않고 바울사도처럼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본과 달리 지진이나 해일의 안전지대에 살고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소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할지라도 우리 각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죄와 고통과 죽음이라는 쓰나미에 의해 차례로 세상을 떠나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영원한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이 그와 같은 믿음으로 고난의 현실을 이겼습니다. 죽음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 땅에서 자그만 치 사백년 동안 종살이를 하였지만 애굽화되지 않고 출애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나안 땅은 천국을 예표하는 그림자였습니다.
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제국 치하에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아무런 소망이 없이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인류의 기대와 희망이신 메시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메시아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기대와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해 주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총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고, 세상 나라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회개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천국의 삶을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까닭은 고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 소극적인 삶과 적극적인 삶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눈에 보이는 육체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더불어 하나가 되도록 지으셨습니다.
예화
겉으로 보기에 몸이 마르고, 얼굴에 혈색이 없고, 자주 피곤을 느껴서 혹시 어디가 병이 났나 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에 가서 건강 진단을 받았으나 다 정상입니다. 그럴 때 의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신경성입니다. 마음의 병입니다. 될 수 있는대로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라고 말합니다. 이는 영혼이 건강해야, 육체가 건강해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과 마음이 하나이며, 육체와 영혼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면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어 연합의 관계가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여기서 ‘연합’이라는 말(suvmfuto")은 ‘무엇, 무엇아래 함께 자라다’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플라톤의 말처럼 ‘인간은 단순히 현재를 수용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만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간에 미래에 대한 기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가 어떠하든지 내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보다 더 고상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도 바울의 삶의 양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으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1) 소극적인 삶
예수님은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도 거룩한 삶을 살고, 예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나도 사랑의 삶을 살고, 예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나도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께서 내게 그러한 마음과 지혜와 능력을 주심으로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들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룩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악한 삶을 살 때 사람들은 나 때문에 내가 믿는 예수님을 오해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부끄럽지’라는 말(aijscuvnw)로 수치를 당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기대와 소망을 둔 성도는 혹시 나의 잘못된 삶으로 말미암아 내가 벌을 받고 고통스럽게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까봐 더 조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2) 적극적인 삶
운동 경기를 할 때 두 가지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격이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수비라는 말입니다. 상대방이 자살골을 넣지 않는 한 소극적인 수비만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공격을 해야만 합니다. 비단 운동 경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임을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사는 얼마나 잘 살고, 얼마나 오래 사느냐? 하는 삶의 양에 초점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소극적인 삶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여기서 ‘존귀하게’라는 말은 ‘크게 하다, 찬양하다, 위대하다, 높이다’는 의미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 그의 기대와 소망이었습니다.
1) 만일 로마 감옥에서 사면을 받는다면 남은 생애를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 것이고,
2) 정반대로 로마 황제가 자기를 불가마나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질지라도 그 죽음 조차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면 그 죽음조차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잘살고 못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잘살든지 못살든지 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얼마나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인생관에 대 전환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인생관
동일한 환경에서 더불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사람마다 삶의 목적과 이유는 제 각기 다른 것이 인생의 현실입니다.
1) 어떤 사람은 인생이라는 본질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돈이 있으면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고 돈이 없으면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최대의 꿈과 소망은 로또 복권이라도 당첨이 되어 벼락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다 해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2) 어떤 사람은 나름대로 삶의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학생이라면 좋은 상급학교에 입학을 하는 것이 삶의 이유요, 목적입니다. 사업가라면 년 매출 달성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이 삶의 이유요, 목적입니다. 직장인이라면 진급을 목표로 정해 놓고 나름대로 성실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삶의 이유요 목적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전에는 아프지도 말고 사고도 나지 말고 죽지도 말아야 하고 건강한 몸으로 최선을 다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삶의 이유요 목적이 됩니다.
만일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병에 걸렸거나, 죽게 되는 경우에는 마치 인생 실패자가 된 것처럼 슬퍼하고 낙담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 목표를 이루는 사람들이 많지 못한 것이 인생입니다. 그 이유는 기대치가 너무 높거나 세상에 대해서 무지하였기 때문입니다.
3) 바울 사도는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를 존귀하게 하는 것을 삶의 최대 목표를 삼았습니다. 설령 자신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풍요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지 못하는 삶이라면 그것을 성공이나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화
요즘은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되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진을 찍을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을 잘 모른채 무턱대고 셔터를 눌러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항상 주제에다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치가 좋은 곳에 가게 되면 한 장 찍어달라고 하면서 주고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경치가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었는데도 만족한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사진을 받아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경치가 아니라 그 경치를 배경으로 한 자신의 얼굴이 잘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치가 아니라 경치를 배경으로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경치에다 초점을 맞추게 되면 인물은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앙인들의 삶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배경이 되고 자기가 주제가 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가 잘되기를 바라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과연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또 하나는 그리스도가 주제가 되고 자신의 부끄럽지 않은 거룩한 삶이 배경이 되어 지는 바울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때문에 나도 잘되어지는 복을 받게 됩니다. 만약에 그리스도 때문에 죽게 된다면 그 사람의 죽음은 영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영원한 미래의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도 바울도 때로 너무나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들처럼 바울도 차라리 세상을 떠나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 하늘나라에는 앞서 가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그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여기서 ‘훨씬 더’ 라는 말은 ‘최고’ 라는 뜻이고, ‘좋은 일’이라는 말은 ‘더 잘하는, 더 유익한, 더 좋은‘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울은 죽지 않고 여전히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는 감옥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누리는 것이 유익이지만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는 좀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빌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여기서 ‘더 유익하리라’는 말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가 당장 순교를 하지 않고 감옥 생활을 하기 때문에 거기서 전도를 하고 거기서 성경을 기록하여 교회들에게 보냄으로 가고 오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유익이 된 것입니다.
한번 가정을 해 볼까요? 만일 우리들에게 바울 서신이 없고 사복음서만 있다면 우리의 신앙이 보다 더 성숙해질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살아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인 바울 서신은 예수님의 복음을 좀 더 깊이 해석해주고,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려 견고하게 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가고 오는 모든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었는가를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깨닫게 된 기대와 소망이 무엇입니까?
불과 백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지만 설령 죽음이 올지라도 끝나지 않고 오히려 구체화되어지는 영원한 소망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현실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나에게 그와 같은 기대와 소망이 있다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해서 자문자답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1) 나에게 삶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나 다 죽지만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살다가, 죽는 것이 가치 있고 복된 죽음일까?
2) 나의 삶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있는가? 내가 교회를 출석함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고 있는가?
3) 나 때문에 얼마나 교회가 부흥되고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되고, 땅 끝까지 선교되고 있는가?
물론 지금까지는 이에 대해 자신 있게 답변을 할 수 없을지라도, 이제부터라도 바울사도와 같이 사나 죽은 그리스도 예수를 부끄럽게 하지 않고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다가
그 때문에 설령 비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사람들 앞에서 소극적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고, 사랑을 실천하고, 적극적으로는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고, 성도를 섬기는 가치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산다면 살든지 죽든지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라면 모두가 다 주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나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부흥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늘나라에 상급을 쌓아 놓는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누구보다 나 자신이 기쁘게 되고, 영광스럽게 되고,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축복이 믿음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여러 분들의 것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빌 1:23)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여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빌 1:24)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빌 1:25) “이런 확신이 섰기 때문에 나는 살아남아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 주고 기쁨을 더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빌 1:26) “그리고 내가 여러분을 다시 찾아가게 되면 여러분은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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