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생각, 같은 사랑, 한 뜻, 한 마음
(빌 2:1-8)
(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보장되어집니다.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일지라도 내 마음대로 공장을 짓고, 내 마음대로 사업을 하고, 내 마음대로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하고, 세금을 내야만 합니다.
만일 그와 같은 법을 어기게 되면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일지라도 자유는 박탈을 당하게 되고 오히려 부자유하고 고통스러운 형법을 받게 됩니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만 그 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자유가 보장되는 반면 그 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주어진 자유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구약 시대는 율법을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라 정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율법도 선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인간이 그 율법을 다 지킬 수 만 있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율법을 어기게 되었고 인간은 오히려 그 선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였던 사람들입니다. 흔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율법에 대해 무지하였기 때문에 죄를 범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즐기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면서 선하게 사는 것 같은데도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이 죄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오히려 믿지 않을 때보다 더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설령 율법을 행위로 지킨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볼 때는 계명을 다 지키고 있는 것 같으나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형제를 미워하고, 남의 물건을 탐하는 것을 예수님은 행위로 범한 죄와 똑같이 간음하는 것이요, 살인하는 것이요,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셨습니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기독교는 행위로 만족하는 종교가 아니라 마음이 달라져야 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보기에는 얼마든지 선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무엇보다 내 마음이 정결해져야 하고 거룩해 져야 하고 선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행위가 달라지기 전에 마음이 변해야 하는 심령의 종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이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1. 빌립보 교회의 긍정적인 면
오늘 성경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바울을 기쁘게 하는 긍정적인 소식도 있었고 , 정반대로 바울을 염려하고 근심하게 하는 부정적인 소식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도 그 같은 빌립보 교회의 형편을 마치 영화장면처럼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감사하게도 빌립보 교회가 바울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모여서 서로 격려과 위로와 교제와 동정심과 자비를 실천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소식입니다.
(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이는 마치 가정에서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 간에 화목하게 지내면서 어린 아이가 점점 자라 어른이 되어 또 하나의 가정을 분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도 예배만 드리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간에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
여기서 ‘권면’이라는 말(paravklhsi")은 ‘격려, 권면, 호소, 간청, 위안, 위로’라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2) 사랑의 무슨 위로
여기서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고, ‘위로’라는 말(paramuvqion)은 ‘설득, 격려, 위로’라는 의미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3) 성령의 무슨 교제
여기서 ‘교제’라는 말(koinwniva)은 ‘참여하고, 나누어주고, 친교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나눔은 예나 지금이나 친교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4) 긍휼
여기서 ‘긍휼’이라는 말(splavgcnon)은 ‘내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헬라인들은 창자를 분노와 사랑과 같은 감정의 자리라고 여겼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이와 비슷하게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5) 자비
여기서 ‘자비’라는 말(oijktirmov")은 ‘동정, 연민, 불쌍히 여기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불행이나 죽음을 애도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의미하다가 점차 ‘동정과 연민’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에 나누어야 하는 고상한 신앙윤리로 연약한 형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게 되면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여러 부서와 기관과 구역 조직에 속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성경 말씀처럼 성도들 간에 이상과 같은 권면과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를 실천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테면 우리도 빌립보 교회처럼 믿음이 연약한 성도를 권면하고,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성령의 교제와 동정심과 자비를 실천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지상에서 수많은 박해를 받아왔지만 굴복하지 않고 굳건하게 자라오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도들 간에 사랑의 실천은 교회가 외부적으로 혹독한 핍박을 능히 극복해나갈 수 있게 한 저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현대 교회가 점차 이 같은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실천이 메말라가고 개인주의에 치우쳐서 교회를 단지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 가운데 ‘거룩한 공회와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을 내가 믿사오며’ 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수직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거룩한 공회를 이루어가야 하고, 수평적으로는 성도들 간의 다양한 교제를 통해서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강력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교제하며 동정심과 자비가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할 수 있을까요?
2. 빌립보 교회의 부정적인 면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격려와 위로와 교제와 동정과 자비를 실천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없었던 부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그 과정에서 서로 갈등하고, 분열한다는 소문은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바울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외적인 행위 이전에 내적으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라고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빌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여기서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의미는 단순히 지적인 이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감정', '태도', '의지'를 같이함을 뜻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보고 성공과 실패와 유능과 무능을 논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하게 된 동기와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자세를 더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같은 생각, 같은 사랑, 한 뜻, 한 마음”이라고 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같은 생각, 같은 사랑, 한 뜻,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갈등하고 분쟁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면서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자신을 드러내려고 겸손하지 못한 마음으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여기서 ‘다툼’은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인이라는 품위를 떨어뜨리는 이기주의를 뜻하며, ‘허영’이라는 말은 망상이나 착각으로 인해 자만하거나 허영심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겸손’은 마음을 낮추되 다른 사람의 가치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자세이며, 남을 ‘낫게’ 라는 말은 자기 자신이 잘 낫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우월하게, 탁월하게 여긴다는 현재 진행형의 동분사입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를 막론하고 갈등과 다툼과 분쟁이 있는 곳에는 항상 자기 자신을 높이고,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처럼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매사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넓은 마음으로 한다면 얼마든지 평화로울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겸손을 본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대표적인 사건 중에 하나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입니다.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당시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노예근성에서 비롯된 '굴욕, 비굴함'을 의미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의 본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겸손'은 기독교 최대의 미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섬김의 본을 보이신 후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겸손히 발을 씻겨야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그렇습니다. 흔히 교회 일과 세상 일, 하나님을 위한 일과 사람을 위한 일의 공통점의 공통점은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 주관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근본 동기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위한 일은 자기를 비워야만 하기 때문에 겸손해야 될 수밖에 없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은 이해관계가 따르기 때문에 겸손 하려야 고 해야 겸손해질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굳게 다짐한다고 해서 저절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평생 예수를 믿고 있지만 아직도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주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내 마음의 교만을 보지 못하고 나의 가시적인 행위만을 보고 교만하기 그지없는 나를 오히려 겸손하다고 말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때때로 시기하고, 갈등하고, 분쟁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다른 성도들을 근심하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오늘 성경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는 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반드시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게 되고, 남을 깎아내리고 비판하고 시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마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바로 오늘 나의 모습이라면 내가 싸워야 할 적은 바로 나 자신이고, 부름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하겠고, 외적인 성과로 자만하지 말아야 하겠고, 예배 참석으로 만족하지 말고 좀 더 고뇌하는 기도가 필요함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겸손하게 될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난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많으나 재물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적고,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선택받은 사람은 많지 않고,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은 많으나 고뇌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러한 노력들조차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없음을 자주 자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도 “나를 쳐 복종하게 하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을까요?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인간의 마음은 마치 고장 난 자동차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의 바디가 쭈그러들고, 헤드라이트가 나가고,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엔진이 늘어 붙어버리면 교체하든지 폐차를 시키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 타락했는가 하면 바로 엔진과도 같은 마음이 죄로 인해 늘어 붙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엔진을 교체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선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처럼 윤리 도덕을 강조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인 마음을 바꾸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는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배우라고 하지 않고, 겸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품으라’는 말(fronevw)은 ‘생각하다, 판단하다, 전념하다, ~에 마음을 두다, ~하고 싶다’ 는 뜻으로 항상 품고 있어야 하는 동명사 현재 능동태(fronei'te)로 영어로 현재 진행형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모든 생각과 노력이 단지 세상의 덧없는 일에만 집중하지 말고, 자나 깨나 겸손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내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나도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겸손히 살고 싶어 하라는 것입니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1) 그리스도 예수는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지 부귀와 영화를 누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신을 낮추시되 로마제국의 속국이 유대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3) 예수님은 결코 사람인척 하신 것이 아니라 진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먹고 입고 마셔야만 하셨고, 슬픔과 아픔을 우리와 똑같이 느끼셨습니다.
4)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실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하여 형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들을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스스로 낮추시고, 비우시고, 취하시고, 되시고,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낮아지신 것이 바로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을 때 그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과 ‘같은 생각, 같은 사랑, 한 뜻, 한 마음’이 되어야만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주를 위해 일을 하는 모든 성도들이 품어야 할 마음이고, 바꾸어야 할 마음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고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그 같은 기도가 여전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많지만,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쏟아 복음을 전도와 선교를 위해 헌신하려고 하는 일꾼이 별로 많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설령 주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성도들 간에 허영과 다툼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험을 피하고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각자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예수님처럼 자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낮추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사랑으로 겸손히 행할 때 교회는 보다 성숙한 신앙의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몸소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다스리시는 통치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자들의 주가 되게 하시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도록 높여 주셨습니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만일 오늘 우리도 그 같은 축복을 원한다면 1) 비록 유능할지라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2)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3) 서로 하나가 되어 ‘같은 생각, 같은 사랑, 한 뜻,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들을 주님과 더불어 보좌에 앉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존귀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주님의 마음을 품고 겸손히 충성하는 일꾼이 되어 그같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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