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
(빌 2:12-18)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지 우리들처럼 무슨 소원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처럼 소원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들을 통해서 그 소원을 이루시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소원을 가지고 계시며, 왜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그 소원을 이루기를 원하시는지, 오늘 성경 말씀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 그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낮추시고 사람의 모양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신 이유는 오로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을 얻는다고 성경에 약속하셨습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시인하며’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말에 ‘동의하고, 인정하거나, 고백하다, 선포하다’는 법정적인 뜻으로 ‘마음에 믿으면’이라는 말로 어떤 행위가 전제됨이 없이 오로지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기만 하면 단번에 구원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행위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선행을 부인하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종교입니까?
만일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도덕과 윤리성이 배제된 종교는 진정한 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해서 도덕이나 윤리나 선행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어야만 비로소 선행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 역사를 돌이켜 보면 가장 도덕적 수준이 높은 시대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기를 힘쓰던 청교도 시대였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부패한 세상에서 과연 누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그 증거를 드러내 보여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여기서 ‘복종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듣다, 따르다’ 라는 뜻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말은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심히 놀라고 떠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앞뒤 문맥을 상관하지 않고 단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만 보면 마치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오해할 수 도 있기 때문에 알미니안 주의라는 신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기도 합니다.
만일 오늘 성경이 그러한 뜻이라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쉽게 번역된 성경을 소개하면 오늘 본문이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뜻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빌 2:12)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항상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곁에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늘 힘쓰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이미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 구원은 마치 씨앗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구원의 씨앗을 싹만 트게 하고, 어떤 사람은 줄기와 가지를 만들어 보기 좋게 하고, 어떤 사람은 꽃을 피워 보는 이를 기쁘게 하고, 어떤 사람은 열매를 맺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이미 값없이 받은 구원의 씨앗을 열심히 노력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늘 힘써서 잘 키워, 아름답게 꽃피워,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겨우 구원만 받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이는 성도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긴장을 풀지 말고 방종하고 타락할까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힘써 선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2. 소원을 두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날마다 성경을 읽고, 자주 듣는 설교를 통해서 과연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가를 잘 압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깨달아 아는 것만 다 실천에 옮긴다면 나의 가정도 교회도 세상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교회를 다닌 지도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을 때와 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자신에게 더 이상 희망과 기대를 걸지 않고 그럭저럭 교회를 다니는지도 모릅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여기서 ‘허탄한 사람’ 이라는 말은 ‘공허한, 허무맹랑한, 성과 없는, 유익이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1)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여기서 ‘행하시는’이라는 말은 '역사하다, 일하고 있다'는 뜻의 현재 진행형 동사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보내셔서 나의 마음, 나의 생각을 흔들어 변화시키심으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해 소원을 품어 기도하게 하시고 생각하게 하시고 고민하게 하시는 변화의 주체가 바로 내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빌 2:13)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여러분에게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나, 또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내면적인 변화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웅심이나 책임감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일은 차라리 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성도가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는 일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은 무엇보다 원망 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여기서 ‘모든 일’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크고 작은 일을 총망라하는 것’입니다.
1) ‘원망’이라는 말은 ‘불평, 불만, 수군수군’ 대는 것을 의미입니다.
2) ‘시비’라는 말은 서로 ‘구별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을 뜻합니다.
3) ‘없이 하라’는 말은 ‘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는 현재 진행형 동사입니다.
성도들 간에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는 것은 순전히 교만과 사랑으로 행하지 않고 거짓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무엇보다 먼저 이기심을 버리고 자아를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모든 일에 있어서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해야 합니다.
2) 세상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내며
오늘 성경에 보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다 더 큰 기대와 소원을 갖고 계심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 여기서 ‘흠이 없고’ 라는 말은 ‘비난이나, 질책이나, 잘못이나, 결점이 없다’는 뜻이고,
2) ‘순전하여’라는 말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결한 상태, 파괴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를 뜻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치가 얼마나 높은 것인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그렇게 역사하시는 이유는 갈수록 어둠이 짙어져 가는 세상에서 어둠을 밝히는 등대처럼 우리를 세상의 빛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여기서 ‘어그러지고’라는 말은 ‘구부러지고 비뚤어지고 부정직한’이라는 뜻이고 거스리는 세대‘ 역시 ’옳은 길에서 벗어나 빗나가고, 비틀어지고, 혼란하게 된 세상‘을 뜻하는 말로 하나님을 등진 세상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권세를 가지고 오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자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사단의 권세가 예수님의 권세를 두려워한 이유는 예수님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이후도 세상은 여전히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로 어둠이기 때문에 그 어둠을 밝히기 위해 구원받은 성도들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생명의 빛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이기는 것은 폭력이나 전쟁이 아니라 오직 빛 뿐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어둠에 함몰되지 않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세상을 도전하고 세상을 구원하게 하게 하기 위해 빛으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하신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발하여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삶을 통해서 어두움에 속해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엡 5: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3. 헛되지 않은 삶, 복된 죽음
사도 바울이 그와 같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메섹도상에 변화를 경험한 이후 순교의 제물이 되기 전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음질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복음 전하기를 포기하기 않고 이처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구원이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식이 착하게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신앙생활도 잘할 때 흐믓하고,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워 뒷바라지를 위해 수고하는 것조차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그와 같은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육신의 부모 사랑으로 비유하여 성경 여러 곳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여기서 자식을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깊이 ‘사랑하다, 자비롭다’는 뜻이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라는 말은 마음으로 ‘구상하고, 의도하고, 목적하고, 결심하는 것까지 다 인지하고, 경험하고, 관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시 103:13) “마치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을 깊이 사랑하듯이 주는 그를 존경하는 자들을 깊이 사랑하십니다.” (시 103:14) “주는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시며, 우리가 한낱 먼지임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그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겨우 구원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빛의 자녀가 되고, 빛의 열매를 맺는 다면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주님 앞에 서는 날 기쁨과 자랑과 면류관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머지않아 자신이 복음을 위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을 내어다 보면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구약에서 제사를 드릴 때 맨 마지막 순서가 제단에 포도주를 쏟아 부어 제사를 마감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를 원했습니다.
(민 15:10) “전제로 포도주 반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화제를 삼을지니라”는 말씀처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생명의 말씀에 사로잡혀 온전히 구원을 이루고,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드러낼 때, 그를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한 것이 헛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날' 즉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자랑이요, 기쁨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빌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교회를 섬기기 위해 자기의 피를 흘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면 오늘 우리가 전도와 선교를 위해 약간의 수고를 하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넘치는 기쁨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수고하는 사역자들과 더불어 누려야 할 기쁨인 것입니다.
만일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 뿐인 생명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일을 찾았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죽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으로, 불의 사고로, 지진과 쓰나 미로, 전쟁터에서 갈가리 찢겨 죽음을 당합니다.
일본 발 방사능 비를 설령 맞는다 해도 지극히 소량이기 때문에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불신감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과연 내가 하는 일 중에 내 생명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일입니까?
물론 부유하게 잘 사는 것도 축복이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축복이지만,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된다면 잘 죽는 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으로 복음 전파와 선교를 위해, 교회의 변화와 부흥을 위해,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제물처럼 드려지는 죽음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복된 죽음입니다.
기왕 죽을 바에야 복음 전도와 선교를 위해, 교회의 부흥을 위해,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살다가 죽는다면 그 죽음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죽음인가를 깨닫는 사람은 오늘 성경의 바울 사도처럼 죽음 앞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비단 사도 바울이나, 목회자만이 아니라, 비록 평신도 일지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태신자를 삼고,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고, 친히 찾아가서 사랑을 베풀고, 사랑의 주님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고, 제자를 삼아 양육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역자들이 맛볼 수 있는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오늘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역사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내일 새벽부터 시작되는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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