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고난을 위한 예루살렘 입성/(마 21:1-9)

미션(cmc) 2011. 4. 19. 09:33

고난을 위한 예루살렘 입성
(마 21:1-9)

(마 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 2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마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 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마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마 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사람은 누구나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일도 하는 것이지 더 어렵고 고통스럽기 위해 수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내일이 오늘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나 그것을 피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강구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예수께서 그 복음의 절정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미리 다 아시면서도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로 고난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기록한 복음서 중에서 마태는 1/3을, 마가는 5/3을, 누가는 1/4을 예수님의 고난에다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1. 지체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공생애기간 중에 주로 활동하신 지역은 갈릴리지역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에 대해서 무관심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와 가버나움 지역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퍼져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가운데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모일 정도였습니다.
(마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세와 성공을 위해 도시를 찾는 법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성공한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서울에서 인기가 있으면 일본으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심지어 미국에 진출하는 것이 마지막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자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이 세상에서 구세주이심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 "이 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당신이 행하시는 그 훌륭한 일들을 제자들에게 보이십시오. 널리 알려지려면 숨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훌륭한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권하였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시면서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7: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하지만 갓 태어나셔서 모세의 법대로 정결함을 받기 위해 아기 예수때 예루살렘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눅 2: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그 후에 열두 살 먹던 해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시기 위해 부모와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사흘을 헤매던 중 성전에서 서기관들과 담론하시는 예수님을 찾으셨을 때 성전을 가리켜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예루살렘 성전을 사랑하신 적이 있습니다.
(눅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예루살렘 밖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의 꿈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이라고 어찌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주변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라고 권하였을지라도 미루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만이 아니라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를 기대한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부패한 정권을 뒤엎고 권세 있는 왕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는 출세와 성공이 아니라 정반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랜 동안 그 사실을 침묵하셨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공개하신 때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에 대해 수제자 베드로가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께서 매우 기뻐하시면서 비로소 십자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면서 때를 준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느끼고 생각나는 대로 ‘안 됩니다’라고 항변을 하였습니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 이유는 베드로를 비롯하여 여러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출세와 성공의 보증서로 생각을 하고 기다렸는데, 예수님은 뜻밖에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는 이유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과연 어떤 목적으로 예수를 교회를 다니는가? 여하에 따라 제자들처럼 얼마든지 비본질적이고, 비 복음적일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2. 결심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비록 갈릴리와 가버나움 주변에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각종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신다는 소문이 널리 예루살렘에까지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마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하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는 긍정적인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서 허물과 약점을 찾아내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물고 늘어지기 위한 불순한 목적으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은밀히 파송한 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마 15: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마 15: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전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절기 때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시시각각으로 첩자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보고가 되었습니다. 점차 예수님의 인기가 점점 더 올라갈수록 종교지도자들은 긴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요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 이유는 그것은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위를 유지하는 것에 위협이라는 피해 의식 때문에 정치적인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예수님을 제거해야 하겠다는 불순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들은 뒤로 빠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적 행위를 반로마적인 정치적 행위로 매도하여 로마 정부의 힘을 빌려 예수님을 죽이려는 각본을 짜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 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들은 마치 야생동물을 밀렵하는 사냥꾼들처럼 예수님이 다니는 길목에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습니다.
(요 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 기회는 예수님이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정보를 알고 유월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 누구든지 예수가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으라고 지명 수배령까지 내렸습니다.
(요 11: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여기서 대제사장들은 유대교의 최고지도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은 정통유대인들의 다수 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정적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는 무자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아무런 권력도, 배경도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조차 비천한 어부들이요, 평범한 서민들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걸만한 제자가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숫자적으로 적었고 비무장상태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처지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그들이 파놓은 함정을 피해가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아무리 명절이라고 할지라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미루는 것이 상책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그 때가 바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때라고 여기시고 제자들에게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어떻게 될 것을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마 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마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이는 마치 기름을 지고 불가마로 다가서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유리할 때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은 미루시고 오히려 위험할 때는 그것을 미리 다 아시면서 굳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에게는 미래를 알 수 있는 지혜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의 미래에 대해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고통을 피해 편한 길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당하게 될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으며,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능욕, 군병들의 압제, 그리고 십자가형의 살을 에는 고통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시면 언제라도 하늘의 천군과 천사를 불러낼 수 있으셨지만 그러한 방법으로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향하신 뜻임을 아셨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입성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오늘 성경 본문이 바로 그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닷새 전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사건인지 사복음서 기자가 다 성경에 기록해 놓을 정도입니다.
(마 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으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않으시고 근처에 있는 베다니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발을 씻긴 사건과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더불어 나누시는 일들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많은 여행을 하셨으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대부분 걸어서 여행하셨습니다. 물론 피곤한 일이었으나 예루살렘을 오르내리시면서 사람을 만나실 때마다 선한 일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평소와 달리 제자들에게 건너 마을로 가서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요즘으로 이야기 하면 남의 집에 가서 자가용을 끌고 오라는 것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마 2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물론 돈을 주시면서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의 집에 가서 주인에게 이야기하여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는 미션을 주셨습니다.
(마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같이 생각됩니다. 생전 처음 보는 제자들이 가서 낯모르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우리 주님이 필요하시다고 하니 나귀새끼를 거저 달라고 했을 때 선뜻 내어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전통적인 명절을 당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순례객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는 나귀를 타지 않고 걸어서 들어가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같은 전례와 관례를 깨뜨리시고 구태여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려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나귀의 주인과 선약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찍이 성경에 계획해 놓으신 일을 그대로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그 선지자가 바로 스가랴입니다. 주전 520 여 년 전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슥 9:9 에 예언하신 말씀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입증시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 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놀랍게도 나귀의 주인이 순순히 나귀 새끼를 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짐으로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약속하신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우연히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심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아기 예수이심을 입증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나사렛 사람이지만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기로 예언이 되어 있는대로 로마 황제의 갑작스런 호적령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 호적을 하러 갔다가 아기 예수를 출산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아기 예수가 메시아 이심을 입증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심으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사람의 힘이나 지혜로는 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것은 주인과 이미 선약을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찍이 성경에 계획해 놓으신 일을 이루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나 헤롯 왕과 달리 백마 흑마가 아니라 작은 겸손히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신 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한 입성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평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따르던 수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대로 오신 메시아라는 증거로 예언 세 가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첫째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둘째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셋째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라고 한 백성들의 환호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따르는 무리들의 흥분이 고조되면서 사람들은 종려 나뭇가지를 행로에 던지며 겉옷을 길에 피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앞에 가는 무리나 뒤따르는 무리들은 시편을 영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호산나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
여기서 “호산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시대”를 열어 주실 것을 위한 호소해오던 백성들이 예수님에 대한 호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서 빨리 자기들을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고통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열망하며 환호하였습니다.
그 같은 백성들의 환호는 당국자들은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나중에는 없는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로마 총독에게 반로마시위주동자로 고소를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새벽부터 음모를 꾸미기까지 하였습니다.
(요 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마 26: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막 14: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마 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마 27: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에게 생소하거나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이미 다 예견하셨던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일을 포기하거나 지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굳게 결심하시고 그것을 이행하신 것이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눅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백성들이 환호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왕으로의 입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대로 한 사람의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눅 18: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이 영광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러분이 지금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마땅히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달게 지고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1)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실 때 양 옆에 함께 달린 강도들은 자기들의 죄 값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2) 구레네 시몬은 지기도 싫은 십자가를 억지로 졌습니다.
3) 제자들은 십자가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줄 잘 아시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그 주님을 본받고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자원함으로 져야 할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 전도와 선교와 부흥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십자가를 잘 지고 가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을 본받아 나에게 가정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지겠다고 결단하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십자가 넘어 부활의 영광이 있고, 하늘나라에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