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신 8:1-3)
(신 8: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생을 살다가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알고 친하게 지내고 때로는 사랑하기도 하지만 믿지 못하고,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기도 하는 것은 신뢰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함께 산 부부간에도,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간에도 때로는 상대방의 진심을 몰라주고, 오해하고, 갈등하고, 심지어 미워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속마음을 훤히 다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깨달은 시편 기자 다윗은 시 139편을 통해서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시 139:2) “주는 내가 언제 앉고, 언제 일어서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는 멀리서도 나의 생각들을 아십니다.”(시 139:3) “주는 내가 나가고 눕는 것을 아십니다. 주는 나의 모든 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시 139:4)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호와여, 주는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시 139:5) “주는 앞뒤로 나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주는 주의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시 139:6) “이것을 안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 지식은 내가 알기에는 너무도 깊고 오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은 다 아실 거야!’ 라고 위로를 받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내 마음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물론 오래 동안 함께 살아온 부모형제, 부부지간에도 오해를 밥 먹듯이 하는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 하나님은 그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화
(마 16: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7)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 아 네가 복되다. 네 혈육이 이것을 네게 알려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생들을 깨우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어떻게 구원하시고, 어떻게 통치하시는가를 통해서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시는 샘플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과 상관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신 이스라엘의 역사인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1. 하나님의 약속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이후에 전 인류에 대한 홍수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노아의 가족 8식구만 겨우 구원을 얻었으나 죄악의 쓴 뿌리는 마침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불신앙의 죄가 얼마나 악독한지 지구상에는 단 한 사람도 의로운 믿음의 사람이 없이 모두 다 부패하고 타락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시고 부르시고 크게 두 가지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는 아브람의 자손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가 태어나실 것과, 또 하나는 가나안 땅을 아브람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와 같은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만 아니라 그의 자손 이삭과 야곱과 그 후손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출 6: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출 13:11)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우리가 평소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친구가 되기도 하지만 그 숫자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약속을 하든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겉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지만 내심으로는 신뢰하지 못하고 점점 관계를 멀리하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약속하신 것은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반드시 시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께서 그처럼 신실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영원한 불변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현실이 그와 동떨어진 것처럼 생각될 때 믿음이 좋다는 사람도 의심이 들고 흔들리고 낙심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난감한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손들은 가나안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애굽 땅에서 바로 왕에게 혹독한 학대를 받으면서 사백 삼십년간을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출 1:13)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욱더 고된 일을 시키고” (출 1:14)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힘든 노동,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힘겨운 밭일을 시켰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은 더욱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사백년간 노예생활을 하며 애굽 사람들이 숭배하는 수많은 우상들을 목격하면서 사는 동안 조상들이 믿어온 여호와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의 압제를 받고 있는 약소민족이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처럼 내 버려두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칠하게 하시고 순종한 가정은 다 구원을 받았지만 바로 왕과 애굽 백성들은 장자는 물론 짐승의 첫 새끼까지 몰살하게 되었습니다.
(출 11:5)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그러한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계시고, 바로 왕과, 애굽의 신들보다 위대하신 영광과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출 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이를 자손 대대로 기념하기 위해 정해주신 명절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것을 자손 대대로 기념하며 지키는 명절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출 12: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당한 고난은 크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어린양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함을 받는 예표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진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난은 우연도 아니며 무의미한 것도 아니며 억울한 것도 아니라 나름대로 그의 후손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편으로 쓰시기 위해 미리 계획해 놓으신 섭리를 세월이 오래 흐른 후에도 변함없이 그대로 시행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2. 두 가지 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너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고대로부터 남북 교역로로 만들어 놓은 평탄한 길이요, 또 하나는 광야를 통과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친 광야 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년 여정입니다.
물론 그 길은 광야를 통과해야만 하는 길이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을 따라서 이미 만들어 놓은 평탄한 대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은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치 않는 길이요 원망 불평이 많을 것을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잘 아시면서 구태여 광야 길로 인도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길은 평탄하고 가까운 길이지만 그 길이 당장은 쉬워 보여도 전쟁에 능한 블레셋 사람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만일 그들과 싸우게 된다면 출애굽을 후회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출 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여기서 ‘마음을 돌이켜’라는 말(!j'n:)은 ‘후회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 깊이 한숨을 쉬다’는 뜻이고, ‘애굽으로 돌아갈까’라는 말(bWv)은 ‘되돌아가’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으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평탄대로가 아니라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군왕들도 백성에게 묻지 않고 주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한다면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얼마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으며, 미련한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묵묵히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기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한 길로 인도하시려는 배려 깊은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평탄하고 가까운 길로 인도하실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해가 되기 때문에, 거친 광야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속마음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감사하며 따라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며,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 생각이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좁은 문, 좁은 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로 그 길을 가야만 할까요?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능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평탄하고 가까운 길로 인도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멀고 험한 광야 길로 인도하신 이유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배려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묵묵히 따라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가나안 땅에 이전의 세상 나라와는 차별화된 새 나라를 건설하여 그 나라를 통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새 나라를 건설하게 될 백성들은 세상 나라 사람들과 차별화된 성품, 차별화된 사고, 차별화된 언어, 차별화된 삶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가치 기준의 뿌리가 바로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이며, 그 각론이 모세 오경에 기록된 갖가지 율법과 규례와 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면 그 땅에서 번성하며 복을 받게 될 것을 오늘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 8: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새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소양과 성품을 교육받고 훈련받아 새롭게 변화를 받는 일이 무엇보다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훈련장을 광야로 삼으시고, 그 훈련 기간을 사십년으로 잡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광야는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과는 상반된 곳으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머물 집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달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고 확신하게 하는 교육과 훈련이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서 새 나라를 건설하게 될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은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이 섬기는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우상 신이 내려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서 새 나라를 건설하게 될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은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이 섬기는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우상 신이 내려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게 하시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게 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의 더위와 추위를 이기게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셔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사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광야에서 사십년간 혹독한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자고 깨면 아침마다 들판에 하얀 만나가 서리처럼 내렸습니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나라는 말(aWh @m;)의 뜻은 ‘그게 무엇이냐?’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가나안 백성들과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자자손손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십계명과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지성소의 법궤에 담아 보관하게 하시고, 매년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백성이 되게 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비록 우리의 인생길이 광야 길과 같이 험난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해, 원망,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는 행복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여기서 ‘긍휼히 여김같이’라는 말(!j'r)은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롭다’라는 뜻의 완료형으로 만고불변한 상태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송구영신 예배를 들인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1년의 절반이 어느 사이에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마치 누구에겐가 세월을 도적맞은 느낌입니다. 지난 반년을 돌이켜 보면 만사가 다 감사할 뿐이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2011년 우리에 대한 기대가 바로 ‘기쁨이 넘치는 교회와 성도’라는 표어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다면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걱정하고 염려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고민한 시간들이 더 많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넓고 가까운 대로가 아니라 원치 않는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구약 성경에서 누구보다 바르게 선지자 노릇을 하고 누구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였지만 누구보다 오해와 시련을 많이 겪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 3:14) “내가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며 나를 놀려 댄다.”(애 3:15) “주께서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고통으로 채우셨다.”(애 3:16) “주께서 자갈로 내 이를 부수시고 나를 재 속에 밀어 넣으셨다.”(애 3:17) “이제는 내게 평안이 없다. 행복이 무엇인지도 잊어 버렸다.”(애 3:18) “나는 “이제는 힘이 다 빠졌다. 여호와께서 도와 주시리라는 희망도 사라졌다”고 말한다.”(애 3:19) “주님, 제 고난과 제 괴로움을 기억해 주십시오. 쓰라림과 고통을 기억해 주십시오.”(애 3:20) “제가 모든 것을 기억하므로 제 마음이 몹시 슬픕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내 감춰진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잃었던 마음에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찾았습니다. 원망 불평이 아니라 감사의 노래를 하였습니다. 겸손과 인내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애 3:21) “그러나 이런 것을 생각하면 저에게 희망이 있습니다.”(애 3:22) “여호와의 사랑은 한결같고, 여호와의 자비는 끝이 없다.”(애 3:23) “주의 사랑과 자비가 아침마다 새롭고 주의 진실과 참되심이 크도다.”(애 3:24)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가 받을 수 있는 유산의 전부이시니 내게 희망이 있다”고 하였다.”(애 3:25) “여호와께서는 주께 희망을 두는 사람과 주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선하시다.”(애 3:26) “조용히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애 3:27) “사람이 젊을 때에 자기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애 3:28) “주께서 힘든 일을 맡기셨으므로 홀로 앉아서 조용히 있어야 한다.”(애 3:29) “겸손하게 입을 땅에 대야 한다. 혹시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애 3:30)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대 주고, 사람들이 더러운 말을 할지라도 묵묵히 참고 들어야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의 마음에 회의와 갈등과 눈물을 거두어가고 겸손과 인내의 믿음을 갖게 한 깨달음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답이 바로 다음과 같은 예레미야의 고백입니다.
(애 3: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애 3: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여기서 ‘근심’이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괴로워하고 몹시 슬퍼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본심’이라는 말(ble) 은 내부 인간, 마음, 정신이라는 뜻으로 인간내부의 총체 혹은 영적인 본질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풍부한 인자하심과 긍휼’이 본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야 할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자주 많이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기뻐할 일을 도리어 슬퍼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불행을 자초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1) 땅에 살아도 깨달으면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살아도 못 깨달으면 땅의 사람입니다.
2) 움막에 살아도 깨달으면 천국이 됩니다. 그러나 최고급맨션에 산다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움막에 사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3) 힘겨운 직장 속에서도 깨달으면 선교지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직장을 다녀도 못 깨달으면 일평생을 가두는 감옥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화
금년은 6.25 사변이 일어난지 61주년이 되는 해이다. 61년이면 사람으로 치면 환갑(還甲)이다. 생이 한 바퀴 돌아 다시 제 위치에 오는 해이다.
6.25 사변이 나던 1950년 남한은 일제 강점 35년으로부터 해방된 지 겨우 5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지 불과 2년 밖에 안 된, 그래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변란을 당했다.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됐고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체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 북한과는 비교가 안 되는 군사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히 미국을 위시한 UN군의 은덕이다.
미국이 6.25에 참전하게 된 동기 중, 일반이 거의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당시 주미 대사로 있었던 장면 박사가 미국 조야에, 특히 미국 교회에 부르짖었던 내용이다. “남한에는 100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다. 남한이 공산화되면 100만 명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이 남한에 많은 군대를 보내고, UN군까지 동원한 것은 물론 정치적, 경제적 동기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 수호’ 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국교회는 전화(戰禍)에 초토화되고, 아사(餓死) 직전의 한국민들, 특히 교인들을 위해 먹거리와, 입을 옷, 기타 생필품을 모아 대량으로 보내 주었다. 필자도 피난 생활 중 이들이 보내 준 구호 양식을 먹었고 구제품 옷을 입고 살았다. 이런 미국과 미국 교회의 후원으로 우리 민족이 살 수 있었고, 전쟁고아, 과부, 장애인 등이 이들의 도움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6.25 사변으로 한국교회는 이북에서 공산당을 피해 남하한 많은 목사들과 교인들에 힘입어 각처에 교회가 세워졌고, 전도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성장을 거듭한 교회는 해외 선교에도 힘을 기울려 세계 도처에 수 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위업을 달성했고, 지금도 세계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수많은 신학교에는 세계 유수의 신학교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고 돌아온 교수들이 알찬 교육을 하고 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신학교에 지원하여 후세대 목회자로 또는 세계 선교의 주역으로 훈련 받고 있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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