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빌 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컴퓨터의 발달로 모든 자료들이 데이터베이스로 저장되고, 언제 어디서든지 자료를 열람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 사회가 투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인간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는 말씀처럼 떨어서 티끌이 떨어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옛날에는 그렇게 위인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표할만 한 위인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옛날보다 오늘 날이 좋은 책, 좋은 학교, 좋은 선생이 더 많고 법이 강화되었는데 왜 세상은 더욱 무질서해지고 인간은 더욱 사악해지기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독생자 예수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는데 우리는 자신도 죄인이며 언제든지 또 다른 죄를 지을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추호도 용납하려고 하지 않는 몰인정함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과 선악간의 모든 행위를 속속들이 다 아시면서 우리를 정죄하시기 보다는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선을 행하였을지라도 그것을 칭찬하시고 상급까지 준비해 주시지만 인간은 다른 사람의 티끌은 잘 보면서 자신의 들보는 보지 않고 칭찬에 대해서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사람은 많으나 존경 받는 사람이 없고 서로 남을 비난하고 헐뜯기를 좋아하고 갈수록 불신과 분쟁과 갈등이 날로 더 해져 가는 삭막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변사람들에게 존경 받아오던 인물이 한 순간에 감춰졌던 허물이 드러나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실망을 주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우리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만이라도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나, 교회 안에서 서로 존경하고, 칭찬하고, 세워주며 살아간다면 비록 현실 경제가 어려워도 좀더 살맛나는 세상이 되어갈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언제 출옥을 하게 될지 아니면 순교를 당하게 될지 기약이 없는 답답함 중에서도 자신보다 두고 온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걱정과 염려의 기도를 중요한 일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옥중에서 신앙의 편지를 보내는 가운데 오늘 성경 빌립보 2장에서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는 삶’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격려해 줄 마음가짐이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나를 도울 마음이 우러날 만큼 나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가 함께 성령을 받았고 주님 안에서 형제가 되어 있다는 참다운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애정이 있고 동정심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마음을 열어 화합하십시오. 한마음과 한생각과 한 목적을 가지고 함께 일하여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십시오.”
자기 본위가 되거나 남에게 과장된 행동을 하지 말고 겸손하게 남을 존중해 주십시오.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지 말고 남에게도 눈을 돌려 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십시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또한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가 그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여러분은 늘 내가 가르치는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따라 주었습니다.
그러니 비록 내가 떠나 있더라도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에 더욱더 힘써 주기 바랍니다. 지극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에는 손을 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계시면서 순종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을 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비난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마음이 비뚤어지고 완고한 사람들이 가득하여 어두운 세상에서 여러분은 흠 없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들 사이에 생명의 말씀을 높이 들고 등불처럼 빛을 발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나는 여러분을 위해 일한 내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고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바울에게서 본 받아야 할 것은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때 내 피를 그 위에 쏟아 부으라 할지라도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골고루 이 기쁨을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기뻐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죽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이 말씀을 읽을 때 마다 한없는 부끄러움과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만일 오늘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처럼 바울을 사랑한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도 못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옳고 좋은 줄 알면서도 서로 사랑하지 않고, 동정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고, 매사를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남의 입장이나 생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삶을 살기 때문에 가정이나 직장은 물론 교회 안에서도 평화와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직분 없는 새신자만이 아니라 직분을 가지고 충성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은 비단 빌립보 교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 자기 허물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을 볼 때 내가 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내 자신이 달라질 뿐 아니라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옳은 말이고 듣기 좋은 말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현실감이 없는 이상론처럼 생각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만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 바울 제자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독불장군이 없다는 말처럼 바울 사도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주변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중도에 주님을 버린 배신자들과 더불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른 충성스런 제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의 주변에도 좋은 제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기간이 길수록 배신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만 갔습니다.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바울 곁을 떠나지 않고 바울을 섬긴 신실한 동역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성경에 디모데와 에바브로 디도입니다.
1) 디모데
(빌 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빌 2: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 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좋은 의미입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요, 어머니는 신실한 유대인으로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디모데가 루스드라 더베에 살고 있을 대 바울 사도가 제 1차 전도여행 코스로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디모데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습니다.
디모데를 눈여겨 두었던 제 2차 전도여행 중에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고 제자로 삼았습니다.
(행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겪으면 겪을수록 나이에 비해 진실한 인격과 성실한 신앙에 매료되어 그를 믿음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애정과 신뢰는 곧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고전 4: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 사도는 옥중에서 디모데를 속히 빌립보로 보내어 교인들에게 바울의 근황을 알려서 위로가 되고, 디모데가 다시 바울에게 돌아와 빌립보교회 소식을 전해주어 자신도 위로 받기를 기대하였습니다.
(빌 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물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은 양편 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말에 자신의 해석과 감정을 가미하여 왜곡을 시키기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하고, 관계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와 빌립보 교회를 중계하는 일을 왜 디모데에게 맡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주변에는 그 같은 사명을 맡길 수 있는 제자가 안타깝게도 디모데 뿐 이었기 때문이라고 오늘 성경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 2: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여기서 '뜻을 같이 하여'에 해당하는 말은 '친밀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다' 또는 '같은 심령을 가지다'라는 의미로 바울 주위에 디모데를 제외하면 친밀하게 돌보는 자가 없음을 뜻하고, 바울의 생각과 뜻을 같이 하는 자는 디모데 뿐 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지만 그 목적이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이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고난과 희생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경우에는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여기서 ‘버리고’라는 말(ejgkataleivpw)은 ‘포기하다, 뒤에 남겨두다’라는 뜻으로 바울이 제자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상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 바울을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데마는 한 때 (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고 한 말씀처럼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러한 데마가 바울을 배신하고 이탈자로 변절하게 된 이유는 바울을 따른 이유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에서가 아니라 어떤 이득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데마도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이적을 경험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교인들로부터 받는 사랑과 존경 등을 기대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사도 바울을 따라 전도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기가 기대하지 못했던 핍박, 고통 등이 따르자 크게 실망하고 도리어 세상의 물질적 생활이 그리워져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디모데가 데마와 달리 어떻게 바울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제자가 되었을까요?
혹시 디모데도 인간인지라 바울이 보는 앞에서는 충성하는 체 하고 보지 않는 데서는 없는 말과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말하는 이중인격자가 아니었을까요?
물론 디모데가 그와 같은 가면을 쓰고 바울을 속일 수 도 있지만 바울이 디모데를 그처럼 신뢰한 것은 그의 검증 프로그램에 합격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빌 2: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여기서 ‘연단’은 시험한다는 뜻이고, ‘수고하였느니라’는 말은 ‘종이 되다, 예속되다, 섬기다, 복종하다, 봉사하다'라는 뜻으로,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얼마나 수고를 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에바브로 디도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두 번째로 추천한 사람은 ‘에바브로 디도’로 그 이름은 '잘생긴, 매력적인'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얼굴이 잘 생겼기에 그러한 이름이 붙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실상은 얼굴보다 그의 마음과 인격과 신앙이 참으로 매력적인 사람이었음을 오늘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렀으나 에바브로 디도는 ‘믿음이 형제’로 불렀습니다. 이는 바울과 함께 신앙을 공유하며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서 깊은 애정을 나누는 관계를 뜻합니다.
또한 '함께 군사 된 자‘라는 말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겪으면서 대적자들과 계속해서 함께 싸운 일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너희 사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옥중에서 고난 당하고 있는 바울의 필요를 돕기 위해 위로의 사절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본래 빌립보 교회의 일꾼이었음을 뜻합니다.
에바브로 디도가 그와 같은 사명을 띠고 바울을 돕는 동안 고향 빌립보에 대한 향수와 정성을 다해 바울을 섬기는 과정에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에바브로 디도는 그 사실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전해 듣고 에바브로 디도를 많이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져 병세가 더 중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빌 2: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여기서 ‘심히 근심한지라’는 말(ajdhmonevw)은 ‘괴로워 하다, 고민하다’라는 뜻으로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는 에바브로 디도가 자기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때문에 바울을 도울 수 없고, 자기를 염려하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착한 마음의 소유자입니까?
바울 사도는 그와 같은 에바브로 디도를 보면서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에바브로 디도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에바브로 디도를 고쳐주셨기 때문에 에바브로 디도를 빌립보로 무사히 되돌려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빌 2: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에바브로 디도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해서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사도 바울을 위해서 고향을 버리고 머나먼 로마까지 와서 바울을 섬겼는데 왜 병에 걸리고, 그것도 바울이 염려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이런 경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갈등과 회의를 갖게 됩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원망하고 주의 종들을 원망하기 쉽지 않습니까? 그러나 에바브로 디도 자신도, 그를 보낸 빌립보교회도, 바울 사도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참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만 하였을 뿐입니다.
이런 경우 바울 사도는 금식하며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의 기도의 힘으로 에바브로 디도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착한 마음을 가진 에바브로 디도와 바울과 에바브로 디도를 염려하는 빌립보 교회와 기도하는 바울 자신을 하나님이 모두 모두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셨다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의 긍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병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가진 바울 사도의 기도는 에바브로 디도가 병에 걸렸을 때 얼마든지 초기에 고칠 수 있었는데 왜 하나님은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에바브로 디도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에바브로 디도의 믿음이 마치 용광로를 거친 정금처럼 진짜라는 것이 입증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3. 바울의 간곡한 부탁
사도 바울은 오늘 성경 말씀에 빌립보 교회에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대신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전해 듣고 싶어서 여러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믿을 만한 디모데를 보내고, 또한 빌립보 교회의 사절로 바울에게 죽도록 충성한 에바브로 디도를 되돌려 보내면서 두 가지를 간곡하게 부탁하였습니다.
(빌 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여기서 ‘모든 기쁨으로’라는 말은 '진심으로, 악의가 없이‘라는 뜻입니다. 또 ’이와 같은 자들을‘은 단지 디모데나 에바브로 디도만이 아니라 그와 같이 충성하는 사람들을 우리도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 주안에서 기쁨으로 영접하라
에바브로 디도가 오래 동안 빌립보 교회를 떠나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 사도를 수발하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였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에 당연히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가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고 한 것은 그 정도의 환영이 아니라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환영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환영과 ‘주안에서 환영은’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특별히 바울 서신 여러 곳에 ‘주안에서’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 주 안에서 자랑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어떤 말 앞에 ‘주안에서’라는 붙기만 하면 마치 겉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는 제품이지만 명품 상표가 붙게 되면 가격 차이가 현저한 것처럼 ‘주안에서’라는 말은 영적 가치를 최고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에바브로 디도를 만나거든 보통으로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주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에바브로 디도를 기쁨으로 영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에바브로 디도를 단순히 오랜만에 만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환영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주안에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였다고 하면 결코 그 사람이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오늘도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주의 사역자들을 돕고, 협력하는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하는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2) 존귀히 여기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에바브로 디도만이 아니라 에바브로 디도처럼 충성스러운 일꾼들을 ‘존귀히 여기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여기서 ‘존귀히’라는 말은 역시 주안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존경받는, 영예로운, 귀중한, 소중한, 가치 있는’이라는 말로 ‘여기라’는 말도 역시 동명령 현재 능동태로 한 두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귀하게 여겨야 함을 뜻합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도 타락한 정치인처럼 실력도 능력도 없는 사람을 단지 측근이요,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당하지도 못할 직책을 부여하는 것처럼 디모데나 에바브로 디도를 ‘존귀히 여기라’고 명령하는 것일까요?
만일 그런 이유라면 우리는 바울에게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사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시작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참으로 이상한 것은 바울이 그렇게 살면 살수록 그가 비천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도 주님과 더불어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존귀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버리고 떠났던 사람들은 결국 비천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에바브로 디도와 같은 충성스런 일꾼들을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환영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 사도를 위해서 하는 것 같으나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록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와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빌 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라는 말씀은 에바브로 디도가 바울을 돕다가 병에 걸려 죽을 뻔한 것을 가리키는데 바울은 그것이 자기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므로 ‘주안에서 환영하고,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구약에 위대한 모세는 평생을 애굽에서 고난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을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가는 일에 앞장을 서서 충성하고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상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애국적인 일을 위해 고난을 많이 겪었을 뿐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와 같은 모세의 충성을 가리켜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남을 비판하고 무시하는 사람은 많지만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서로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시며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인간이 보기에도 부족한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왁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눈으로 보지만 그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성경 말씀과 같은 영적원리를 깨닫지 못하면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고 무엇이 사람의 일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일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신분이나 재산으로 사람을 존경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보고 사람을 존경해야만 한다. 그 일이 유익한 일이면 그럴수록 그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 반대이다. 즉 놀고만 있는 부자를 존경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 반대이다. 즉 놀고만 있는 부자를 존경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극히 유익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존경하지 않는다. -톨스토이
첫 번째는 내가 주안에서 존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안에서 존귀한 사람은 오래 믿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직분을 가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나도 디모데나 에바브로 디도처럼 변함없이 끝까지 충성하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주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임을 믿는 다면 주를 위해 일을 하다가 고난을 겪고, 병에 걸리고, 죽게 될지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영광으로 알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을 위한 일이거나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예수님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그러한 사람을 존귀한 사람이라고 일컬어 주십니다.
두 번째는 남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령 내가 그렇게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지 못한다면 내 주변에서 주를 위해서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인지 누구인지를 살펴서 그 사람을 돕고, 그 사람을 인정해주고, 그 사람을 환영하고, 그 사람을 존귀히 여겨서 사기를 진작시켜 더 열심히 충성하도록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살전 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살전 5: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대적하고 훼방하고 비판하고 불순종하고 근심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내게 백해무익일 뿐입니다.
(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 모두 존귀한 사람이 되거나 주를 위해 수고하고 충성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험담하여 사기를 꺾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 한마디라도 용기와 희망과 격려를 주고 존귀히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롬 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롬 16: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그렇게 할 때 교회 안에는 이미 있는 일꾼들은 더욱 열심히 충성을 할 것이고, 그를 본 받아 더 많은 사람들이 충성하는 존귀한 일꾼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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