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 (빌 3:1-9)

미션(cmc) 2011. 8. 1. 13:07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
(빌 3:1-9)

(빌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에게는 명품일 것입니다.
럭셔리 잡지 창간 10주년을 맞아 한국인이 명품 소비를 하는 주된 이유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가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한국인이 명품 소비를 하는 주된 이유는 과시와 남들로부터 인정을 이번 연구 조사 결과 한국인이 명품 소비를 하는 주된 이유는 과시와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질문하기를 ‘예수를 믿는 당신이 자랑할 명품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과연 오늘 내가 자랑할 수 있는 명품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을 통해 이천 여 년 전 바울 당시 사람들이 자랑꺼리로 삼았던 것이 무엇인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사람들에게 바울이 자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명품을 자랑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를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진정한 할례자
바울이 그동안 반복하여 전한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 에베소 교회 안에 아무리 예수를 믿을지라도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빌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물론 여기서 ‘삼가고’라는 말은 ‘조사하다, 관찰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명령사 현재 능동형으로 지속적으로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옛 논리이기 때문에 마치 토하여 버린 것을 다시 먹는 개들처럼 옛날로 되돌아가는 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개들을 삼가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에 있는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예수를 믿기로 개종한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더 성경적이고 열심있는 사람들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바른 믿음의 사람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고, 온전한 구원을 얻은 사람인가를 나타내 보여주는 외적인 증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바른 믿음의 사람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고, 온전한 구원을 얻은 사람인가를 나타내 보여주는 외적인 증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진정한 예배자가 되라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여기서 ‘봉사하며’라는 말은 ‘섬기며’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 10: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여기서 ‘여호와를 섬기고’라는 말이 곧 예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가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내면적인 마음의 자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예배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가 더해갈 수 록 형식과 위선에만 치우쳤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만 섬긴 것이 아니라 우상까지 섬겼습니다. 결국 그같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마음에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옛날 형식에 치우쳐 손할례를 주장하는 자들과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되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께 봉사하되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것도 잘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예배에 소홀히 하지 말아야합니다. 예배를 훼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에 보다 더 진실하고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형식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두루두루 찾고 계십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자리를 채우고 시간을 때우는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예배 자리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경험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도덕적 수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만을 높이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잊고 형식적인 예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라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로’ 라는 말은 우리가 자주 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이고, ‘자랑하고’라는 말은 동분사 현재형으로 항상 자랑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자랑하고 뽐낼 것이 있다면 나를 자랑하지 말고 나에게 그러한 은혜, 그러한 축복, 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뒤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어느 사도보다 더 많은 일을 하였고, 더 큰 일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베드로 사도보다는 바울 사도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바울은 우쭐거리거나, 잘난 체 하거나, 교만하거나, 다른 사도들을 무시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바울에게 집중될수록 더 낮아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약한 것을 자랑하고, 오로지 예수님을 자랑하였습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자신의 돈이나 명예, 권력, 지식, 도덕적 수양이 아니라,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여기서 ‘약한 것’이라는 말은 ‘질병, 겁, 소심, 마음 약함’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남에게 부끄러워 말 못하는 것들을 바울은 자랑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주셨는지를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3)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여기서 ‘신뢰’라는 말은 ‘믿다, 확신하다’라는 뜻의 완료형으로 ‘맡긴다 말이며, 맡긴다는 말은 믿음의 대상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많은 현금이 생겼을 때 그것을 지갑이나 가방에 가지고 다닐 수도 있고, 책갈피나 장롱에 보관할 수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맡길 수도 있지만, 가장 안전한 것은 은행에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말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은행이라는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손 할례당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면의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율법을 따라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믿음이 완전한 것처럼, 자기가 의롭게 된 것처럼 자기가 거룩해진 것처럼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따라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고 받지 않는 것이 영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전 7: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방인들과 달리 혈통을 거룩하게 구별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와 같은 혈통적인 구별이 세례를 받음으로 다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은 것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육체를 신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젊음입니까? 건강입니까? 재산입니까? 명예와 지위입니까? 학벌입니까? 그 무엇으로도 우리의 속죄함을 받을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고 때가 되면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것들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가치관의 변화
세상에서 바울만큼 혈통, 가문, 학벌, 사회적인 지위, 종교적인 열정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도 육체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이 누구보다 많은 사람이었다고 손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고 신뢰하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과거에 육체를 신뢰하였던 다섯 가지를 간증하였습니다.
(빌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물론 바울도 한 때는 그러한 것들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는 유익이 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여기서 ‘유익하던’이라는 말은 '얻음, 이익, 유익, 이득'을 의미하는 말로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러한 것들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해로 여기다’ 라는 말은 ‘손실, 불이익, 손해’라는 말로 유익이라는 말과는 정 반대의 뜻입니다.
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가치관이 전폭적으로 뒤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를 경험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조상 대대로 우상을 숭배하며 75년 동안 살아온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열방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으로 변화되었고, 탐욕스럽기만 했던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고 난 다음 이스라엘로 변화되었고, 갈릴리 어부 시몬이 예수님을 만난 후 베드로로 변화되었고,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라는 말은 과거에 자기가 영적으로 무지해서 핍박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시며,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지식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탁월한 지식이었다는 말입니다.
또 ‘잃어버리고’라는 말은 ‘물질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손해나 상해나 파멸이나 불유쾌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배설물’이라는 말은 ‘폐기물, 오물, 찌꺼기, 쓰레기, 부도덕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 백해무익하게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얻고’라는 말은 ‘이익을 얻는다, 비축하다’라는 뜻으로 마치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집으로 가서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가지고 그 밭을 샀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바울도 과거에 자신이 유익되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새롭게 알고 난 후에는 배설물처럼 다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바울은 천해졌을까요? 비천하게 되었나요? 망했나요? 그의 지식은 성경을 기록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고 그의 열정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우게 하였고 그의 이름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뭇교회와 성도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는 유명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과 같은 축복과 하늘에 보화를 얻기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1) 율법의 무익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율법의 요구에 충실히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짐만 지워줄 뿐 자유는 주지 못합니다.
율법의 끝은 더 큰 고독과 절망과 좌절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의의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율법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2) 선행의 공로가 무익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선행은 우리를 훌륭한 인격자로 만들 수는 있어도 의인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의인됨을 위해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스스로 쌓아올리는 선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자신은 선한다고 착각하는 교만과 위선을 벗어던져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 가장 귀한 것일지라도 그 보다 더 그리스도를 가장 귀하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자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듯, 때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수록 각박해지기만 하는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참된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바울이 평생 동안 추구하였던 율법의 모든 요구를 준행하고, 선행을 쌓았어도 결코 만족이 없고 오히려 더 큰 불만과 불안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바울의 심정을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육신의 가문이나 학벌이나 지위를 신뢰하고 잘못된 종교 열정에 사로 잡혔을 때는 마음에 기쁨대신 까닭 없이 남을 미워하며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가장 고상한 지식을 깨달은 후에는 때로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언제 죽게 될지 모르는 위기 속에도 그의 마음에는 과거에 육신의 것을 신뢰했던 때에 맛보지 못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넘쳐 다른 사람에게 그 기쁨을 나누는 행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빌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그 결과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 끼친 긍정적인 영향, 겸손히 하나님께만 영광돌림, 만인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음, 기록한 믿음의 편지들은 성경이 되어 오늘 우리들에게 까지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보약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의해 무가 유로, 흑암이 빛으로 변화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물이 포도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한 것처럼, 성령에 의해 불신자가 열심자로 죄인이 회개하여 의롭게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과거에 최고로 여겼던 것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사랑했던 것을 미워하고,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고, 하찮게 여겼던 것을 존귀하게 여기고, 움켜쥐고 있었던 것을 놓고,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앉고, 나만 잘살고자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날마다 죽고자 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는 결코 내게 육신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없고, 자랑하고 뽐낼만한 것이 없어서 가 아니라 누구보다 많지만,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 탁월하고 고상한 최고의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자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변화와 축복이 여러분들에게도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것을 신뢰하지 말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며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하게 되어지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주님만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