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의 신앙
(빌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게 하시려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죽기 전 까지 기나긴 세월을 천국과 같은 삶을 살게 하려 함입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같은 삶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처럼 살기 위함이며, 그것이 바로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서 본받고 배워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낮아지시고, 비우시는 겸손한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과 평화와 존귀함이 있음을 본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말씀하신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고, 또 나름대로 주를 위해서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평소에 자만하고 자기를 자랑하기 좋아하고 남을 무시하기 잘하는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은 물론 교인들조차 존경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예수님을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누구보다 많은 충성을 하면 할수록 자기를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은 누구나 자 좋아하고 존경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의 극치라면, 부활은 무덤에까지 낮아지신 겸손하신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심을 뜻하는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확실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부인하는 제자의 도를 걷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이 자기를 부인하며 ‘아니요’라고 고백한 겸손한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아니요’라고 바울처럼 고백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바울의 소원
(빌 3:10)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바울은 누구보다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이유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전하지 못하도록 잡아가두고, 매로 때리고, 돌로 쳐서 죽게 하는 일을 앞장서서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친히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만나주시고 불러 주시고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후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확신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애를 번제물처럼 전부 바쳐 드리는 사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증거가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와 로마에까지 가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일과 바울 서신이라고 일컫는 여러 권의 성경을 기록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마치 기독교라는 도를 통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서 그러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마치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좀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 있음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서 ‘참여함을 알고 하여’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십자가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그 부활의 능력이 경험되어지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좀더 행복해지고 편해지고 부해지고 건강해지는 행복한 삶이 아니요,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겪게되는 고난 앞에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부활의 권능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 바울의 열망이었습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바울이 친히 기록한 바울 서신 여러 곳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며, 그 부활을 믿는 자마다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역사 속에 일어난 사실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고전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을 보면 마치 바울 자신은 부활의 확신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바울 사도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일까요? 자신은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일까요?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숨기고 마치 자신은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자신의 약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마치 부활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사람처럼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바로 바울의 겸손과 영적인 긴장에서 나온 고백임을 그 다음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 자기를 부인하는 바울
바울은 분명히 반 기독교적인 삶에서 180도 돌아서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사도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언제 죽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또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자기도 부활 것이라는 보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믿음으로 얻은 복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의 삶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에는 너무나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서 자만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아니요’의 신앙 고백입니다.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은 구원이 확고하게 보증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왜?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였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시간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이미 이루신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음을 이겨 놓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현재 이루어져 가는 구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을지라도 사람들이 저절로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지금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구원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 째는 미래의 구원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알기는 하지만 아직도 마음에 결정을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을 지체 하시는 것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구원의 최종 완성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 구원이 확정된 사람과 앞으로 계속 믿어 구원을 받을 사람들까지 합쳐서 구원의 총합을 이루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지만 아직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래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이 올 때까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깊이 알고 십자가와 부활을 삶에서 경험하는 삶을 살고자 긴장을 늦추지 않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 “10”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 나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고 삶을 본받아 살다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그리스도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하고 싶다는 신행일치의 고백이 바로 ‘아니요’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교만하거나 자만하거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입만 살아 있고 삶은 다른 이율배반의 삶을 살지 않으려고 영적인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겸손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지 나부터, 나먼저 바울처럼 겸손히 자신을 부정하며 ‘아니요’라는 신앙 고백으로 살아간다면, 교회를 다닌다면, 성경 말씀을 지킨다면 교회가 얼마나 달라질까요?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가정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아마도 율법을 지키고 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게 될 것입니다.
설령 주를 위해 충성하고 주님의 말씀에 충성하고 내 몸을 불살라 드렸다고 할지라도 결코 교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3. 달려 가는 바울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서 ‘달려가노라’라는 말이 거듭 나오는데 그 뜻은 ‘뒤 좇다, 추구하다, 박해하’라는 의미로 신속하게 그리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현재 능동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었고, 많은 업적들을 이루었고, 예수님이 그를 꽉 잡고 계시며, 하늘에 상급을 예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들을 ‘아니요’라고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좀더 깊이 알면 알수록 자신의 부족함과 추악함과 연약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을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 주님 앞에 좀 더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 강한 열망 때문에 바울은 더욱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운동선수의 모습을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성적을 남긴 운동 선수라고 할지라도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아주 대조적인 두 종류의 선수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자기가 남긴 최고의 성적에 도취되어 자만하고 연습을 하지 않고 그것을 자랑하고 즐기는 일에만 시간을 쏟는 어리석은 선수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골프의 황제라고 일컬음을 얻은 타이거 우즈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스캔들과 무릎 수술 후에 예전과 같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새로운 선수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새로운 골프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와 대조적인 박태환선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어린 박태환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로마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노메달이라는 부진한 성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번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주종목인 400미터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말았습니다.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꼬리를 내리고 온 국민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쓰라린 경험을 한 박태환 선수의 각오는 다름에 열리게 될 런던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하였습니다.
이제 메달 색깔이 아닌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기록을 세운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는 박태환 선수는 한 달간 한국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호주로 떠나 런던올림픽 세계신기록을 향한 도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자기가 현재 어떤 경지에 이르렀든지 그것으로 자만하지 않고 겸손히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계속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좇아올 수 없을 정도로 세계에서 최고의 기록을 가진 사람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의 기록을 깨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강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구보다 성경을 잘알고 기도를 많이 하고 열심히 충성을 한다고 자타가 인정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정죄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신기록의 보유자라고 자만하지 않고 자기 기록을 경신하겠다고 더욱 열심히 자기와의 싸움에 최선을 다하는 금메달리스트처럼 바울의 마음 자세는 그 은혜가 더욱 감사해서 마치 받지 못한 사람처럼 더욱 열심을 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회 예술 종교 등 여러 분야에 성공했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부러움을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 그 명성과 성공이 오래 갈 수 있는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빈손으로 태어나 예수님을 모르고 태어난 인간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거나, 설령 다른 사람에 비해 신앙에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알고 보면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자들의 공통점은 자기를 영웅시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과소평가하기에 급급합니다.
세상에서 사도 바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깊이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야러번 매를 맞고 감옥에 갖히고 죽을 뻔 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만일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지 못한다면 세상에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살펴보면 자만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마치 열심히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율법 주의자나 자신의 행위로 완벽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완벽주의자들보다 더 열심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그같은 열심은 결코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러한 자기를 버리지 않으시고, 붙잡고 계시며,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고 계시며, 부르고 계심을 전제한 열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서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실제적으로 이미 잡고 있음을 전제하며, ‘부으신 부름의 상’이라는 말도 이미 상급이 예비되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니요’의 신앙은 기존 사고방식과 달리 거꾸로 생각을 하고, 거꾸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일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이 똑같이 밭에 가서 풀을 뽑을 때
1)어떤 사람은 낫으로 풀을 베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기에는 깨끗하지만 시간이 지나게 되면 다시 풀이 돋아나게 됩니다.
2) 어떤 사람은 꼼꼼하게 풀뿌리까지 뽑아냅니다. 시간이 지나도 다시 풀이 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풀을 뽑았기 때문입니다.
3) 어떤 사람은 낫으로 베거나 손을 뽑는 대신 제초제라는 약을 뿌려댑니다. 다시는 풀이 나지 않지만 땅이 오염됩니다. 쉬운 것 같으나 부작용이 큽니다.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이상적인 잡초제거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동일한 성경을 읽고 동일한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게 되면 각기 다른 신앙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완벽주의를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적당주의를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신앙이 들쭉날쭉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몇 번째입니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그것 때문에 자족하며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얻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아직까지 영적으로 부족한 자신을 깨닫고 좀 더 높은 차원으로 영적 성장을 원했던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세상 운동 경기처럼 다른 사람과의 경쟁의 대상에서 내가 일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데에 있습니다.
3) 아니요의 신앙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썩어질 유산이나 업적에 좌우되거나 관심을 두지 말고 오직 미래의 푯대인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미래 지향적인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1) 내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아니요 나는 아직도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겸손입니다.
사람이 교만하기 시작하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하는 것입니다. 마치 홍수 때 가장 물이 많지만 실상 마실 물은 가장 부족한 때인 것처럼 말입니다.
2) 내가 그리스도를 붙잡은 것이 아니요, 내가 교회를 선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교회를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먼저 붙잡고 인도하신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들고 계심을 믿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3)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고 생각될 때는 ‘아니요’라고 나는 아직도 더 큰 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요’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소망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자에겐 더욱 풍성한 영적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후 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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