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리노니”(빌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독일 정부는 과거 히틀러의 나치 치하 때에 학살된 유태인 학살 추모공원을 베를린 시내 한 복판 요지에 축구장 두 배 정도의 규모로 건설하고 그 곳에 수백 개의 기념 조형물을 세워 독일 국민들로 하여금 지난 날 그릇된 역사를 반성하는 기회를 갖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예루살렘의 야드바셈을 비롯하여 뉴욕과 워싱턴, 로스앤젤레스에 홀로고스트라는 나치 시절 대학살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해마다 방학이면 부모들이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홀로고스트 박물관을 관람시키는 것을 아주 중요한 자녀 교육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물론 어린이들이 보기에 끔찍한 자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자손손 대대로 1) 자신들의 잘못된 죄를 각성하게 하고, 2) 자신들을 도와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고, 3) 유비무환의 교육을 하게하고, 4) 처절한 고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하는 것을 통해서 절망 속에서 희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 민족에게도 유태인들 못지않은 아픈 상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제 삽십육년 간의 압제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그와 같은 압제에서 우리 민족이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을 기념하는 8.15 광복 66주년을 기념하는 해방 감사 주일입니다.
일제 삼십 육년의 식민지 치하에서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을 되새긴다면 아마도 정신대일 것입니다. 12살에서 40세까지 수 십 만 명의 조선인 여성들이 정신대로 끌려가서 몸과 마음을 처참하게 짓밟혔을 뿐 아니라, 일본군 점령 구역의 군사기밀을 막는 다는 구실로 수십만 명이 이역만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수많은 남자들이 강제로 징집을 당하고 징용으로 끌려가서 전쟁터에서, 탄광에서 모진 고난을 겪다가 비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보다 더 야비한 것은 일본의 식민정책입니다. 일제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으로 조선 민족의 시민권을 빼앗아 일본과 합방하기 위한 황국신민화 정책이었습니다.
1)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모두 폐지하고 일어를 상용케 하며,
2)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일본 사람의 성과 이름을 만들고
3) 일본인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신주를 각 가정에서 숭배하게 하고 그 외에도 일장기 게양, 황궁요배, 신사참배, 정오묵도 등을 강요했습니다.
만일 8.15 해방이 없었다면 우리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고 대한민국이 없었다면 대한 민국의 시민권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는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서도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게양했던 것처럼 우리는 한국인이면서도 일본을 위해 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도 지금은 어떻습니까? 후손들에게 역사를 왜곡하여 거짓을 가르치고, 심지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세계 속에서 자국민의 시민권이 없거나 약소민족으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시민권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로마 시민권자 바울
바울 당시 최고의 시민권은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로마 본토민이 아닐지라도 세계 어디든지 로마 시민권자는 함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은 당대 최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로마 사람이 아니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로마 제국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우든지 아니면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 엄청난 재물을 투자해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행 22:28).
그러므로 극소수의 사람만이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에 따른 특권도 많았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소수 귀족층에 해당되었으며, '백색 장옷'(Toga)을 입음으로써 일반 백성들과 자신을 구별하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었으며, 여간한 죄로는 체벌을 받지 않을 권리와 항소권, 재판 기피 신청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 22:25). 따라서 로마 시민권자는 일반 사람들과 외형적으로 뚜렷이 구분되었습니다.
바울도 그와 같은 로마 시민권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일이삼차 선교 여행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기 위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눈물로 이별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순절 전에 도착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당도하기 위해 서둘러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울을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바울의 죄목은 유대 민족을 배반하고 유대교의 율법을 거역하라고 가르쳤으며, 이방인들을 신성한 성전에까지 끌어들여 성전을 더럽힌 죄로 고발하여 마침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행 21:27).
바울은 법정에서 뭇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자기가 왜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는가를 간증하였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던 유대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런 놈은 없애 버려라! 죽여 버려라! 살려 둘 수 없는 놈이다' 라고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옷을 벗어 공중에 내던지며 흙먼지를 움켜서 던졌습니다.
이 광경을 본 로마의 파견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고 들어가 채찍으로 때려서 그의 죄를 밝혀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군인들이 채찍으로 바울을 치려고 결박하자 바울이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오?' 라고 한 장교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장교가 파견대장에게 달려가서 `어떻게 할까요? 저 사람이 로마 시민이랍니다.'라고 하자, 파견대장이 와서 바울에게 `정말 당신이 로마 시민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바울이 `예, 그렇소.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파견대장은 `나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돈이 꽤 많이 들었소!'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듣고 있던 바울은 `나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바울을 채찍으로 치려고 서 있던 군인들이 그 말을 듣고 곧 물러갔습니다.
파견대장 또한 바울을 결박하여 매질하라고 명령한 것 때문에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 이튿날 파견대장은 바울을 묶었던 사슬을 풀고 대제사장들에게 유대인 의회를 소집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바울 당시 로마 시민권은 그 만큼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자인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로마 시민권보다 더 권위가 있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리노니”
그렇다면 왜 하늘나라의 시민권이 로마 시민권보다 더 권위가 있고 우월한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비록 미국 시민권이 없을지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더 나아가서 세상에 가장 권위 있는 하늘 시민권자라는 자긍심을 회복해야만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예사로 무시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 자신부터 먼저 나는 하늘 시민권자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회복하고, 그와 같은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두 종류의 신자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곳이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천국을 양과 염소가 공존하고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으로 비유하신 것처럼 지상 교회는 항상 두 종류의 신자가 공존하는데 바울 당시도 빌립보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 땅의 시민권자들
첫째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땅에서 잘되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빌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여기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말은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예수는 믿는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자기희생이나 자기 부인을 하지 않고,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오로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도구와 방편이 되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당시 빌립보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거저 주신 영적인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해석하여 고귀한 자유를 마치 천박한 방종으로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구원을 얻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상관이 없이 오직 율법대로 할례를 받고 율법이 명한 것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대조적으로 영혼은 거룩하고 육신은 추악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은 영혼이기 때문에 설령 육신적으로 어떤 죄를 범하든지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괴변을 늘어놓으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쾌락주의와 반도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그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들은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수치스러운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이 세상일에만 마음을 씁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상황에서 무엇보다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은 영적인 자만이 아니라 자신이 그와 같은 율법주의에서 돌아섰고, 반도덕주의 자들과 상반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자만이 아님은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만 하지 않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이라고 말함으로 독선이 아니라 각자 주변에서 디모데와 에바브로 디도처럼 주를 본받아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하고 따르라고 눈물로 간곡히 당부하였습니다.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여기서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라는 말은 ‘슬퍼하다, 애곡하다’라는 말로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답답해서 복받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고 애곡한다는 의미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그 이유는 이단자들의 말에 미혹을 받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바울이 여러 번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이단자들을 가리켜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까지 심하게 정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누구보다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하면서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바울을 본받고 바울의 일행을 본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떻습니까? 세상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를 돌아보아도 남의 허물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러한 사람을 칭찬하고 세우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지 나만이라도, 나부터라도 그리스도를 본받고 나의 주변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살펴서 세워주고 칭찬하고 또한 본받으려고 하는 겸허한 노력이 무엇보다 시급한 현실입니다.
2) 하늘의 시민권자들
두 번 째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물론 당시 로마 시민권자들이 생각할 때 하늘 시민권이라는 말이 지극히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말처럼 생각되던 시대입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설령 하늘 시민권을 가진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람에게 무슨 특권은 고사하고, 로마 황제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는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숨기고 살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실 예를 든다면 네로 황제가 저지른 로마시의 대 화재를 기독교인들의 방화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모진 박해를 받아야만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평판이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 시민들이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라고 규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믿는다고 아무도 부러워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것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과 차별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기서 ‘기다리노니’ 라는 말(ajpekdevcomai)은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것을 열망하는 땅의 시민권자들과 달리 다시 오시마 약속하신 예수님이 오시기를 ‘열망하며, 행복한 기대감과, 간절한 마음으로 꾸준히 기다리는 차별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이 보기에 현세에서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시민권자와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과의 가장 큰 차이는 인생의 마지막이 판연하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령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보다 더 많고 좋은 것을 소유하고 즐기고 누린다고 할지라도 결국 죽음과 더불어 영원한 멸망에 이르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서 아무리 부귀권세를 누릴지라도, 건강을 위해서 아무리 운동을 하고, 정기 검진을 받고, 보약을 먹고, 명의에게 정기적인 건강관리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는 보지 못할 날이 옵니다. 때가 오면 평생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고 모두 다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늘 시민권자는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지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곳에서 다시 만날 소망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부활승천하신 주님이 우리의 처소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가 계신 하늘나라입니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은 가정법 현재 능동태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늘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이 오지만 그와 같은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과 그와 같은 소망이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결코 똑같을 수 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소망이 없는 사람에게 죽음은 멸망이고, 절망이고, 두려움이고, 허무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하늘 시민권자는 부활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고 살기 때문에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스럽게 변화를 받는 영원한 삶이기 때문에 영원한 소망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빌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여기서 ‘우리의 낮은 몸’이란 죄로 인하여 깨어진, 연약함과 고난 부패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몸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실 때 입으신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우리의 연약하고 썩어질 몸이 그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고전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고전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물론 현실에서는 그와 같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인생의 목적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때로는 왕따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와 같은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늘 시민권자인 영적 나그네의 삶은 땅에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과 달리 두려움으로 지내야 하고,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 시민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궁극적인 소망을 하늘이 아닌 땅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의 기독교의 실상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무력해진 근본적인 원인은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을 주님의 재림과 내세에 대해 무관심하게 하고 오로지 현세 중심의 삶을 살도록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와 권세를 누리는 것에 목적을 둔 사람처럼 살아가게 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감격과 재림에 대한 소망이 없는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월급을 받아 착실하게 저축하여 새 집을 마련하려는 계획이나 준비를 전혀 없이 한탕주의에 빠져 투기를 일삼고, 마치 재벌의 자녀처럼 흥청망청 산다면 일시적으로 즐거울 수는 있겠지만 결국 신용 불량자가 되고 가정도 붕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신용불량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축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인생은 세상을 떠나야 하고 재림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는 현세 중심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한시적인 현세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에 소망을 두고 그곳에 보물을 쌓아두는 내세 지향형의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살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회인 시간과 물질과 삶을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악한 마귀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세상에 취하게 하여 하늘나라의 시민권에 무관심한 삶을 살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가 오로지 땅에 것을 추구하는데 만 목적으로 두고 살게 하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의 공통점이 지상천국입니다. 이단의 포섭대상이 교회안에서 불평과 불만이 많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등을 긁어주는 전략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게 하고 신앙의 목적을 오로지 세상에서 축복을 받아 행복하게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세상은 그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지상 천국은 없습니다. 다 문제가 있고 범죄가 있고 실업자가 있고 노숙자가 있습니다.
어떤 종교를 믿든지 간에 탐욕스런 인간들이 모인 곳은 백 프로 만족과 감사와 행복이 있을 수 없고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갈등과 반목과 시기와 다툼과 이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회 안에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세에 소망을 두고 사는 하늘 시민권자가 될 때 마음에 평안과 위로와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영원히 진동치 않는 하늘나라 뿐 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시민권은 미국 시민권보다 최우선적으로 취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은 비록 땅에서 살았지만 항상 그 마음속에는 늘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음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 11: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현세에서 나그네처럼 정처가 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 마음속에는 항상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때로 우리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고통스러울 때도 낙심하지 않았으며, 늘 자기를 부인하고,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하늘나라의 소망하며 살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기쁨과 행복이 항상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히 11: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죽음을 전제로 하고 살아가는 인생임을 직시한다면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것은 건강도, 돈도, 명예도, 권세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권입니다. 천국 비자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에서 얼마를 살든지 마음을 비울 수 있게 되고, 마음을 비워야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천국 시민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시민권자는 하늘나라만 소망하며 살면 다 되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일찍 죽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최선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신앙의 선진들을 세상에서 그렇게 오래 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천국을 땅에다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에게 전파하여 땅에서 사는 동안만이라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고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 이웃 사랑의 근본이 나라 사랑입니다.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 시민권자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을 가졌다고 해서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불신자나 이단자들보다 비도덕적인 삶을 살거나, 비난 받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 시민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 시민권자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를 사랑하는 것처럼, 육신의 나라인 대한민국을 불신자들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본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예루살렘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후일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어다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셨습니다.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눅 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눅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시며’라는 말(klaivw)은 자동사로 '크게 울(부짖)다, 울다'를 뜻하고, 타동사로 '애통하다, 몹시 슬퍼하다'를 의미하며,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말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며 슬퍼하신 모습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늘 시민권자가 된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시민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난 대한민국 시민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파가 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김정일을 옹호하는 종북 세력이 되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좌파가 될 수 있습니까? 결코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8. 15 광복이 없다면, 6. 25 사변으로 적화통일이 되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한국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8.15 해방과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일제 삼십 육년의 압제와 전 국토가 초토화 되는 6. 25 사변을 겪은 대한민국이 전후 반세기만에 갈수록 세계 속에서 갖가지 한류 바람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여주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늘 시민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대한민국을 하늘나라만큼 아끼고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땅 끝까지 복음 전파하라‘는 종말론적인 선교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하늘 시민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그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일에 우리의 남은 생을 드리겠노라고 다짐하는 영적인 광복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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