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마치 땅에 떨어뜨린 고려청자처럼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죄인이 아닌 인간이 없고, 불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없게 되었습니다.
(시 1:1) 어리석은 자는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은 없다”라고 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더럽고 썩었으며,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시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땅의 사람들을 굽어보시니,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하심입니다. (시 14:3)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잘못된 길로 갔습니다. 그들 모두가 썩은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인간들이 모인 곳은 교회나 사회나 문제가 없는 곳이 없다면 교회와 사회의 차이는 없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교회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 교회는 자정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 많은 인간들이 모였지만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입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를 손꼽는다면 온갖 신화와 무신론 철학과 갖가지 우상과 음란한 쾌락주의가 판을 치고 있던 고린도지역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교회라고 하지만 세상에 있는 죄악들이 교회 안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고린도라는 죄악된 세상에 세워졌고 교회 안에 하나님만이 계신 곳이 아니라 문제의 인간들이 함께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와 같은 고린도 교회를 저주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와 거룩한 무리를 뜻하는 성도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는 모든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기 위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회개와 용서’ 라는 자정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모델 중에 하나가 우리가 매주 살펴보고 있는 빌립보 교회입니다.
1. 빌립보 교회의 문제
교회만이 아니라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외부적인 문제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내부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자중지란으로 인해 불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외부적인 시험과 도전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이 되는 사랑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면역결핍으로 인해 몸 안에 면역 기능을 상실하게 될 때 작은 감기조차 이기지 못해서 폐렴이 되어 생명이 위독하게 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서로 불화하게 되면 외부적인 하찮은 시험도 이겨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요즘도 신천지가 교회 안에 은밀하게 침투하여 불평불만을 많이 하는 중직자나 직분자를 제일 첫 번째 포섭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신천지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교회들의 공통점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빌립보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개척한 빌립보 교회가 왜 외부적인 시험에 쉽게 흔들리게 되었을까?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교회가 내부적으로 불화하기 때문인데 그 장본인들이 바로 누구보다 충성을 많이 한 유오디아와 순두게 였습니다.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우리는 유오디아가 누군인지? 순두게가 누구인지? 생소하지만 바울 사도가 이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한 것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 지도적인 위치에서 누구보다 충성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두 사람을 지적하여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빌립보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사회법에서는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논하고 누가 더 문제가 많고 적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 이유는 그래서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정죄하는 것이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교회는 어떠해야 할까요? 교회도 무슨 문제를 해결할 때 결과를 가지고 우열과 책임소재를 따지고 잘잘못을 가려내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고 법정신에 맞는 정의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어떤 식으로 빌립보 교회 안에서 주도적인 책임을 맡고 누구보다 많이 충성을 한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교회 안에서 갈등하고 반목하는 것을 보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판단하였습니까?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여기서 ‘권하노니’라는 말(parakalevw)은 ‘곁에’라는 말과 ‘부르다’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사람을 불러서 간청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현재 능동태입니다.
바울 사도는 결코 강압적이거나 어느 한 편을 두둔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에게 간곡하게 권하는 것은 일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일의 근본인 마음을 고쳐먹어야 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재판장이 되어서 두 사람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할 때 두 사람의 잘잘못을 기록했다면 그 중에 잘못했다는 판단을 받은 사람의 이름은 영원토록 돌이킬 수 없는 불명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의 갈등은 두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자연이 교인들을 두 줄로 세우게 되기 때문에 교회는 분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무엇보다 먼저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잘하고 잘못하고가 없는 것입니다. 잘한 사람은 자기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고 겸손해야 하고, 부족했던 사람은 좀더 노력을 하여 앞으로 더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큰 문제는 다 주를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서로 갈등하고, 반목함으로 교회를 분쟁하고 분열하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겸손해야 하고 인내하며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무엇보다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2. 빌립보 교회 문제 해결책
교회 공동체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아무리 잘한다고 할지라도 혼자서는 할 수 없고, 또 혼자서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두 세 사람 이상이 더불어 주의 일을 하다 보면 상호간에 지식이나 경험이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의견이 불일치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같은 경험을 교회에서는 물론 가정에서 사랑하는 부부나 가족 간에, 교회 안에서 절친한 성도들 간에 자주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뼈아프게 경험한 장본인 다른 사람이 아닌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1) 바울과 바나바
복음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바나바의 역할이 매우 컸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심을 하였지만 워낙 악명 높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처음에는 잘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치 왕따를 당한 사람처럼 고향 다소에 가서 칩거하고 있었을 때 바나바가 일부러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려다가 안디옥 교회를 동사 목회하다가 한날한시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사이로 선교에 있어서 좋은 동역자 관계였습니다.
(행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그 후에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데리고 선교 여행을 떠나려고 하였을 때 바울 사도는 성실하지 못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게 되었고 결국 서로 헤어져서 각기 다른 선교여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행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 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행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 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만일 그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가 끝까지 원수가 되었다면 우리는 바울을 사도로 존경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일에 서로 화해를 하고 바울이 그토록 싫어했던 마가 요한을 나중에는 곁에 심복으로 두고 싶어 했고,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마가를 영접하라고 했고, 마가를 동역자라고 불렀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는 마가가 자기 일에 유익하다고 추천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2) 바울의 칭찬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이유는 교회 앞에 드러내어 망신을 주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정반대로 두 사람을 칭찬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이 무슨 문제로 왜 그렇게까지 되었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두 사람이 갈등한다고 하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남의 말만 듣고서 무조건 두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 과거에 자기와 함께 더불어 수고했던 경험이 있는 빌립보 교회 안에 유력한 지도자에게 빌립보서를 보내면서 먼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어떤 사람인지를 자세하게 소개하였습니다.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라고 한 사람이 빌립보교회의 유력한 지도자로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라는 저 여인들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로 비난 받을 여인들이 아니라 과거에 바울과 함께 복음 전도에 힘쓰던 여인들이었으니 이제 도와주라는 간곡히 요청은 물질적인 도움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붙잡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3.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한 교회 안에서 서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등을 함으로 인해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서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드, 그 외에 동역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자랑하기를 ‘예수님 예수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하였습니다’ 신이 나서 말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늘에 기록된 것’이라는 말은 제자들이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뜻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이 보장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느 누구든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갈등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거명한 것은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각기 제 고집을 부리며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그 때문에 교회 안에 분파가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게 만드는 사람도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니라 두 사람을 칭찬하여 서로 화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생명책에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는 이름만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따라 기록된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를 믿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사도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하는 모습을 공공연하게 성경에 기록한 것은 두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까지 두 사람이 바울 사도를 협력하여 복음 전파에 힘썼던 것도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라면, 이제라도 그에 부끄럽지 않도록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고,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을 깨우치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비난하기 보다는 과거 저들이 복음을 위한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며 서로 화해하여 공동체 내에서 한 일원으로 지낼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때가 되면 반드시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가 되면 나의 몸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야 하고, 정든 교회를 떠나야하고,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내 몸은 떠날 지라도 나의 이름은 가족과 교우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둘 중에 하나의 사람으로 기억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임종을 앞두고 교회 안에 부정적인 인물과 긍정적인 인물 두 사람을 대조적으로 요한삼서에 기록하였습니다.
1) 부정적인 인물
(요삼 1: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요삼 1: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2) 긍정적인 인물
(요삼 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요삼 1: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오늘 우리도 두 사람 중에 하나를 닮은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또 머지않아 때가 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 처럼 뭇사람과 주님 앞에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과연 어느 사람과 같은 평가를 받아야 할까요?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은 1) 믿음으로 충성한 사람으로, 2) 욕심으로 인해 신앙 양심을 판 사람으로, 3) 교회를 분쟁시키는 일에 앞장 선 사람으로 제각각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름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아무리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충성하였다고 할지라도 나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하고, 나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된 것만이 다가 아니라 이 땅위에서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아무리 바울을 도와 충성하였다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권면을 한 것을 기억하고 각자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만일 오늘 내가 어느 누구와 반목하고 갈등하는 것이 있다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루 빨리 그것을 풀어야 하늘나라 생명록에 그러한 부정적인 삶의 모습이 지워지게 될 것입니다.
(마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우리가 세상에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풍요로운 물질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이름이 창대하게 되는 복입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서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위대한 이름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름을 잘 지어야 그러한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이가 태어나면 유명하다는 작명소에 가서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름이 좋아야 그 사람이 유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과 삶이 아름다워야 그 사람의 이름도 유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남의 말을 좋게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정하신 하나님이 나의 이름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언젠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평가를 받기를 원하면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 자세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세상을 떠나야 할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고, 누구를 대하든지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협력하고, 칭찬하고 세워주고, 사랑하는 삶을 살기로 주님 앞에서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골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설 교 > 이규왕목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제나 기뻐하려면(2)/(빌 4:10-13) (0) | 2011.09.10 |
---|---|
언제나 기뻐하려면/(빌 4:4-7) (0) | 2011.09.10 |
하늘 시민권자/(빌 3:17-21) (0) | 2011.08.22 |
‘아니요’의 신앙/(빌 3:12-14) (0) | 2011.08.22 |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 (빌 3:1-9) (0) | 2011.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