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언제나 기뻐하려면(2)/(빌 4:10-13)

미션(cmc) 2011. 9. 10. 07:10

언제나 기뻐하려면(2)
(빌 4:10-13)

(빌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다양한 관계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관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요 또 하나는 이웃과의 관계요 마지막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그와 같은 관계는 이론적으로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마치 몸 안에 혈관처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몸의 어느 한 부분의 혈관이 막히게 되면 그 부위만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온 몸이 자리에 눕게 되고 병원 신세를 지고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일 언제 어디서나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려면 항상 주안에서 그 세 가지 관계를 잘 유지해야만 합니다.

첫 번째로 다른 사람과 인간관계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과 원수지지 말고,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되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의 관용함을 알고, 느끼도록 할 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들을 내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무리수를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기되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걱정하고 염려하기 쉬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자기 자신과의 바른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빌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쉽게 번역된 성경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빌 4:8) “형제 여러분, 선함을 추구하며, 가치가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기 바랍니다. 참되고, 고상하고, 옳고, 순결하며,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이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바른 것을 추구하며. 가치있는 것에 마음을 쏟고, 보다 더 참된 것들을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이 아무리 돈이 많고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마음에 기쁨과 평화는 깃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기쁨이 없을 때 과연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에 마음을 쏟고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잘못된 것을 추구하고 잘못된 것에 마음과 생각을 쏟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은 외부적인 환경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내면적인 마음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성경 말씀처럼 무엇을 하든지 먼저 경건하고, 바르고, 정결하게 살고자 힘쓰고, 무슨 일이든지 사랑받을 만한 말과 행동을 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존경과 찬사가 따르고 마음에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빌 4:8) “형제들이여, 이제 이 편지를 끝맺기 전에 한 가지 더 일러둘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참된 것과 선한 것과 옳은 일에 단단히 매어 두십시오.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생각하고 남의 아름답고 좋은 점을 보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 찬양과 기쁨을 드리는 일만을 생각하십시오.”

1. 바람직한 세 가지 교육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후 사도 바울의 한 평생은 크게 두 가지 면에 전력투구를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는 영적으로 잘못된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삶입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예수를 믿어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미성숙한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교육적 삶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내적인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졌고, 외부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후 사도 바울의 한 평생은 크게 두 가지 면에 전력투구를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는 영적으로 잘못된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삶입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예수를 믿어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미성숙한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교육적 삶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내적인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졌고, 외부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울 서신들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학교 교육울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읽게 되면 쉽게 이해가 되고 조금만 더 노력을 하게 되면 성경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실상 그렇지 못함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처럼 성경이 결코 만만히 볼 책이 아님을 깨닫게 될 때 더더욱 바울 당시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수준이 오늘 우리들보다 상당히 높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것을 위해 오늘 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만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성경 말씀을 배워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 여기서 ‘배우고’라는 말(manqavnw)은 기본적 의미가 ‘마음을 어떤 것에로 향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그로 말미암아 어떤 것에 ‘익숙해지고, 경험되어지고, 알게 되어지고, 이해하게 되어진다’는 뜻입니다.
성경 공부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공부를, 육신을 위해 세상에서 배우는 일반 교육보다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학문은 유한한 것이지만 성경 공부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우되 무엇보다 마음이 그리로 향해야 하고, 대충 대충이 아니라 익숙해지고 경험되어질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받았을 뿐인데 오늘 성경에 보면 ‘내게 받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도 바울이 무엇을 주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받고’라는 말(paralambavnw)은 여러 학생들을 한 자리에 놓고 가르치는 집단 교육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제자에게 자신이 알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전수하는 것과 같은 도제(徒弟)교육처럼 ‘인계하다, 이어 받다, 상속하다, 전수하다’는 뜻일 뿐 아니라 헬라어 어원에 있어서는 신비 종교에서 특별한 의식이나 비밀을 전수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서 전해 받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였으며, 바울은 그 계시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고’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성경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계시하신 것을 전해 받는 것입니다.

3)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듣고’라는 말(ajkouvw)은 '경청하다, 들어서 깨닫다‘라는 뜻이고 ’본 바‘라는 말은 ’보다, 경험하다, 알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이 단순히 청각 작용을 통해 들려진 내용을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가르침 속에 담겨진 영적인 진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결과 성경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목격한 영적인 경험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듣는 중에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국을 나도 본 것처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또 ‘행하라’라는 말(pravssw-pravssete)은 성경 ‘행하라, 성취하라’는 뜻의 동명령 현재 능동태로 성경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말씀을 실천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기뻐하며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직한 성경 교육의 세 가지 방법은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내가 읽고, 듣고, 배운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거든 한번 그대로 삶으로 실천해보십시오. 무엇보다 그 순간 마음이 기쁠 것입니다.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화
동물의 세계를 보면 미물이라고 하는 짐승들조차 생존을 위해 먹이를 사냥해야만 하는데 어미는 새끼에게 사냥만 해다 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공중을 나는 법과 더불어 먹이를 사냥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면 매정하게 새끼를 버리고 떠나 독립된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무지하고 불신앙적인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부단한 신앙 교육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성경을 읽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성경을 배우지 않고 성경을 깨달을 수 없고, 성경을 깨닫지 않고 바람직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신 후 그 제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이 교회를 세워 주님이 제자들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교회는 위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더불어 성도들에게 성경 교육을 시키는 일을 교회의 양 날개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 다음 주간부터 계획하고 있는 성경연구원 프로그램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부족하고 불완전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육신의 교육을 위해 인생의 1/4을 투자하였다면 영원히 사는 영적인 교육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3. 능력주시는 하나님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도 냉장고와 지갑과 통장이 텅 비게 되면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처량하고 서글픈 삶을 살 것 같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주안에서’ 있었기 때문에 ‘크게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사도 바울의 현실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티끌만큼도 기뻐할 것이 없는 로마 감옥이지만 바울의 마음에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렇다면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 비결이 자족하는 삶을 배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기서 ‘배웠노니(11절)’ ‘배웠노라(12절)’ 는 말(manqavnw)은 9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내게 배우고’ 라고 한 말씀과 같은 단어로 어떤 것에 익숙해지다,
경험하다, 알게 되다, 어떤 신으로부터 신탁에 의해 지도를 받다‘라는 의미의 배운다는 말입니다.
또한 ‘비천’이라는 말(tapeinovw)은 낮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천해지는 것을 뜻하며, ‘풍부’라는 말(perisseuvw)은 많은 정도가 아니라 과도하게 차고 넘치는 것을 뜻하고, 또한 ‘궁핍’이라는 말은 계속되는 굶주림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상반된 두 가지를 다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하였는데 ‘자족’이라는 말은 ‘충분하다’라는 말에서 유래된 ‘만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누구에게서 그것을 배웠을까요? 아무리 성경을 찾아 보아도 바울을 가르친 사람이 없는데 바울이 배웠다고 하면 누구에게서 배웠을까요? 그 답은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족하는 삶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고 따르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동양 종교의 많은 구도자들이 자족하는 삶을 살기 원하여 청빈과 겸손의 덕을 쌓았습니다.
오직 자연과 벗하며 도를 닦고 채식을 즐기며 명상에 젖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이 참 생명의 영생을 거두지 못한 것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족하는 생활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 성숙한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어떤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잠 15: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딤전 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오늘 우리도 이 시간 바울 사도처럼 주님으로부터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 것은 무엇보다 먼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주신 형편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한 여인이 암탉을 한 마리 기르고 있었다. 그 암탉은 매일 한 개씩 알을 낳아 주고 있었다. 그 알은 매우 굵어서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하루는 여인이 시장에 가서 알을 팔고 오다가 '모두가 내 알을 사고 싶어 하거든. 우리 닭이 더욱 많은 알을 낳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했다. 여인은 하루에 단 한 개씩의 알을 낳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보다 사료를 두 배로 준다면 알도 두 배로 낳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며 모이를 늘려 주며 날마다 둥우리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암탉은 매우 살이 찌고 광택이 좋아졌으나 반면에 전혀 알을 낳지 못하는 닭이 되고 말았다. 욕심이 더 큰 손해를 보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