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기뻐하려면
(빌 4:4-7)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람은 누구나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항상 기뻐하며, 늘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예수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입니다.
문제는 실생활에서는 그것이 마음먹은 것처럼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근심 걱정이 많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예수를 믿지만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하고,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과 걱정이 먹구름처럼 마음을 뒤덮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근심과 걱정이 많으며, 또한 어떻게 해야 언제나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읽고 듣고 묵상하는 성경 말씀은 비록 여러 명의 기자들이 기록하였지만 일반 역사서나 문학 작품과 분명히 다른 것은 그것을 기록하게 하신 이가 삼위일체되시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딤후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신비한 천상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1) 우리가 무엇을 잘못 믿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잘못 말하고, 잘못 행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깨우쳐 줄 뿐 아니라
2) 무엇이 바른 믿음이며, 무엇이 바른 삶인지를 깨우쳐 그대로 실천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단순히 교훈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약속하신 은혜를 받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오늘 성경 말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누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여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지금도 함께 하시는 은혜 주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잘할지라도,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얼마나 잘 순종하는가? 하는 것이 최대의 관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까?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지를 통해서 오늘 우리도 언제나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 고난을 통한 승리
바울은 빌립보서에 이곳만이 아니라 빌립보서 전권에 ‘기뻐’라는 말을 빌 1:18에서 시작하여 ‘기쁨’이라는 단어까지 합하면 17번이나 기쁨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인 것입니다.
(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도 기뻐할 것이 없는 로마 감옥에서 자유롭게 예수를 믿고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은 마치 입장이 되 바뀐 것 같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적인 고백이요, 또한 현재의 심정으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자기와 같은 기쁨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는 유럽대륙에서 그리스도교 복음을 받은 첫 번째 도시였습니다. 빌립보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여성으로써 유럽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행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당시 빌립보 성에는 "점하는 귀신"들린 젊은 여자를 이용해서 돈을 벌던 사람들이있었습니다.
바울이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인은 바울에게 귀신을 쫓아내어 정상인이 되게 해주었기 때문에 바울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여인의 주인들은 여인의 생명보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나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여인이 더 이상 귀신을 힘입어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을 선동하고 바울을 핍박하고 법정에 고발하므로 바울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손과 발에 수갑과 같은 차꼬를 채워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바울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때를 회상하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그것은 단순한 종교 박해가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게 훼방하는 사단과의 영적 전쟁이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살전 2: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그것이 바로 바울의 일행이 많은 매를 맞고 차꼬에 묶여 감옥에 갇혔으나 절망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다고 고난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며 한 밤 중에 소리 높여 기도하고 찬송하였을 때 감옥 문이 열려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행 16:22-2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렇다면 그 싸움에서 누가 이긴 것입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귀신들린 여인의 주인들이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기 때문에 바울이 패배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예수를 믿고, 그 가족들까지 바울에게 다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감옥이 바울을 가두지 못했습니다. 감옥이 복음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전화위복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고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그와 같은 은혜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 오늘 성경에서‘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축복받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마귀가 바울을 낙심하게 하고,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악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매로 치고 감옥에 가두고 법정에 세우기도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전화위복케 하시고, 역전의 승리를 맛보게 하시고, 오히려 그로 인해 복음이 왕성하게 확장되어지도록 역사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빌립보를 떠난 후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을 가리켜 동일하게 영적인 전투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빌 1: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바울은 그와 같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투에서 백전백승한 거장답게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영적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밀 병기를 가 무엇인지를 오늘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2. 주님이 주시는 평강
바울이 비록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는 전쟁터와 다름이 없는 영적 전투에서도 굴복하거나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기뻐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 자신이 지금 주안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성경을 살펴보면 ‘주 안에서’라는 말은 계 14:13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신 말씀 외에는 복음서에서도, 다른 사도들의 서신에서도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바울 서신에만 40 여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 안에서’라는 말은 마치 우리가 방안에 있다고 했을 때 그 방은 커다란 아파트 건물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밖에 비바람이 불어도 방안은 안전하지만, 만일 산사태가 나서 건물이 무너진다면 방안에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 그러한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어디에 머물러 있든지 영적으로 ‘주 안에, 주 곁에, 주와 함께, 주의 면전에’있기 때문에 안전하고, 기쁘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압송되어 로마로 가기 위해 지중해를 통과하는 무역선을 타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장이 말을 듣지 않고 무리하게 항해를 하다가 유라굴로라는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파도가 더욱 높아지자 선원들은 배에 실은 짐과 배의 장비마저도 내던질 만한 것은 다 내던졌습니다.
며칠이나 계속하여,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사나운 폭풍만 휘몰아쳐서 마지막 희망까지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배안에 사람들은 여러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기진맥진해 있을 때 바울이 선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내 말을 듣고 그 `아름다운 항구'에서 떠나지 않았어야 하였소. 그랬더라면 여러분이 이렇게 상처입고 고통 겪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기운을 내십시오. 배는 가라앉더라도 아무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어젯밤에 나를 이끄시며 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소. “무서워하지 말아라. 바울아, 너는 틀림없이 가이사 앞에서 재판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네 소원을 들으시고 너와 함께 배를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해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 이제 용기를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믿소.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에건 닿게 될 것이오.' 여러분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지가 열나흘이나 됩니다. 이제 음식을 드십시오. 여러분은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 말하고 바울은 떡을 들어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떼어서 먹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도 용기를 내어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276명이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A 급 계절풍을 만나 배가 산산이 깨어지고 사람들이 살기를 포기하고 절망 중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사도 바울이 그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보 때는 그 배가 풍랑 중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그 풍랑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그 같은 기적을 여러 번 체험한 사도 바울은 아무리 큰 환난을 당할지라도 낙망하지 않고 오히려 소망 가운데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롬 5:3-5)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비참한 죽임을 당하셨으나 죽음의 권세는 예수님을 무덤에 머물게 할 수 없었습니다. 무죄하신 예수님은 무덤에서 안식일을 보내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장사된 후 깊은 절망과 슬픔과 두려움에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나타나셔서 선포하신 첫 마디 말씀은 평강이었습니다.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 평안은 세상에서 돈과 물질과 향락과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얻어지는 평강과 질적으로 다른 성령이 주시는 평강이었습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동일하게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3.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를 값없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고 성경에 약속하셨고 그것을 막을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갈 5: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갈 5: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그와 같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1) 잘못된 인간 관계
항상 기뻐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성령의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인간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기쁨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관용’하지 못한 삶입니다.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관용’이라는 말(ejpieikhv")은‘온순한, 온화한, 순한, 온유한, 친절한, 참을성 있는, 관용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 말을 풀이하기를 ‘넓은 마음으로 남을 품는 것으로, 남의 잘못에 대해서 너그럽고, 그들의 결점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인자한 태도를 뜻하는 말이다’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물론 우리가 평소에 그러한 마음을 먹는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몰인정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관용하는 마음만 품으라고 하지 않고 상대방이 나의 관용을 느끼도록 알게 하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처음에 오셔서 우리에게 관용을 알게 해 주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얼마나 관대하시며, 오래 참으시며, 더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신 분입니다.
그 은혜로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값은 계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은혜입니다. 그 주님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도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용서하고 관용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내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없게 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장차 주님이 오실 때 주님께 내가 용서함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2) 마음에 염려와 근심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라는 말은 그 약속에 있어서, 그 능력에 있어서, 사랑이나, 거룩함이나, 선이나, 성실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의 차별이 없이 그와 같은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과 슬픔과 불안이 밀려오게 됩니다.
그럴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잊어보려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진정제 약을 먹어 잊어보려고 합니다. 설령 그것에 취해 잊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세상에서 인생의 무거운 죄악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은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1)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라는 말은 어느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해당된다는 말입니다.‘염려하지 말라’는 말(merimnavw)은 동명령 현재 능동태로 늘 마치 꽃이나 강아지나 어린 아기를 키우듯이 늘 돌본다는 뜻입니다.
아기 엄마는 항상 아기를 놓치지 않고 살아갑니다. 엄마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아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아니한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2)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라고 하였습니다.
역시 ‘모든 일에’라는 말도 어느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기도와 간구는 마음에 걱정하는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서 마음에 소원을 하나님께 간청하고 탄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사람에게 가지고 가서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눅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3)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도우심을 요청할 때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면서 불안해하거나, 근심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해결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알리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진정한 믿음과 신뢰하는 마음에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그에 모든 것을 다 거두게 하셨지만 어리석은 자처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으니 인간관계에서 관용하라고 하였으니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하였으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건널목을 건널 때 붉은 신호등일 때는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시민들이 다 알고 있고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 차가 지나가지 않을 때는 그냥 건너가도 되지 않느냐? 따지거나 묻지 않고 그 신호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성경의 신호등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안전한 것처럼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면 다른 사람이 응답을 받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을 받고 응답을 받는다고 오늘 성경에 약속하셨습니다.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서 ‘지키시리라’는 말(frourevw)은 ‘망보다, 감금하다, 보존하다’라는 뜻으로 군인들이 보초를 서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을 대인 관계에서 관용하고, 모든 염려꺼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철통같이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설령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 항상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많은 설교, 간증, 성경공부, 제자훈련, 세미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배웠고, 받았고, 들었고, 깨달은 것들을 실행함으로서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왜 그와 같은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처럼 자유를 누리고 있으면서 그것을 감사할 줄 모르고 더 많은 것과 더 좋은 것을 욕심 부리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 닥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도리어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만이 승리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선 전투에서 승리는 아군이든지 적군이든지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라면 영적 전투에서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 마음에 기쁨대신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건강이 아닙니다. 권세가 아닙니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를 고갈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화; 중국의 꽃매미
사람이 늙어가면서 결국 남는 것은 가족 밖에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답답하거나 슬플 때, 그래도 아내와 자식이 있어서 서로 주고받고 위로하는 가운데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울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형편을 살펴보면 바울에겐 처자도, 혈육 한 점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육신적으로 하나도 기뻐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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