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57:1-7)

미션(cmc) 2011. 10. 10. 06:49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 57:1-7)

(시 57:1)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 57:3)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시 57:4)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시 57: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 57:6)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시 57: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가을맞이 심령 대부흥회의 주제는 주여 내 인생에 은혜를 주옵소서입니다.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면 우리의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인생살이가 행복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메마르게 되면 마치 윤활유를 칠하지 않고 오랜 동안 돌아가는 기계처럼 신앙도 인생도 힘이 들게 됩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마음을 시작했던 한 해도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동안 겪은 실패와 좌절과 고통과 상처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공허해져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기쁨이 넘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함에도 마음에는 기쁨이 메말랐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경제적인 불황이나 정국의 불안해서 만이 아니라 내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메말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그 은혜의 샘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다윗이 받은 은혜
본래 ‘은혜’라는 사전적인 의미는 나의 수고 없이 누군가가 내게 대가 없이 베풀어주는 신세나 고마운 혜택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가고 오는 세상에서 아마도 다윗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많이 받은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를 돌이켜 보게 되면 그러한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윗이 본래 사울 왕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개 목동으로서 사울을 뒤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 째 왕으로 등극한 것만이 아닙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면 하나님은 다윗이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시절에 사자나 곰이 나타나서 그가 치는 짐승을 물어가려고 할 때 어린 다윗이 그 짐승들의 발톱에서 가축을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생생한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사울 왕과 그의 군대가 블레셋의 골리앗을 앞에 벌벌 떨고 있을 때, 다윗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그 때 그 하나님이 여전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삼상 17: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자녀에게 무엇이 힘입니까? 무엇이 은혜입니까? 사울처럼 왕이 되는 것입니까? 사울왕의 부하처럼 출세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지만 그 보다 더 좋은 은혜,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은혜는 나의 삶 전반에 걸쳐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이 간섭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다니고 난 후에 임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할 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태양은 낮에만 아니라 어두운 밤에도 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전 생애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은혜요, 가장 큰 복입니다. 그와 하나님의 은혜를 시편 기자는 모태에서 어린 시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하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시 22: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시 22: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 71:6)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139: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심지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는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셨기 때문에 지혜와 건강을 겸비하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여기서 ‘있더라(eijmi)’는 말은 한두 번이 아니라 미완료 동사로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셨고 그 은혜로 자라나셨다면, 오늘 죄인이 우리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우리 모두 어린 아기로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물론 나와 관계된 가족과 이웃과 교회와 사업과 직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부터 열 가지, 백 가지, 천 가지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2. 다윗이 구한 은혜
다윗이 받은 은혜가 하나님이 모태에서 지으시고 택하시고, 어린 목동시절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건지셨다고 하였습니다.
낮고 비천한 목동 다윗을 하나님이 높여 존귀한 왕의 자리로 이르게 하셨으니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하게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호를 받는다고 해서, 전에 없이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착각하기 쉽기 때문에 가난하고 어렵고 비천할 때는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으로 인해 부요하고 존귀하게 된 후에는 마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된 것처럼,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신분이 상승되고 일이 많아지고 많은 사람을 알게 되고 일이 잘되어지면 질수록 경쟁자와 시기 모함하는 자가 생기면서 송사와 구설수에 말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고 헤쳐 나가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연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사노라면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느 때도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필요함을 깨닫고 그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되기까지 사울 왕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고 난 후에는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로 부터의 부단한 도전을 극복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융성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전쟁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그 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은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친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피눈물을 흘리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고 누구보다 탁월한 리더십과 신앙심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었으나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부단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그 중에 하나임을 표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이 언제 어디서 하나님께 이 기도를 하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나요?
(시 57:1)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여기서 '알다스헷'이라는 말은 '멸하지 말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표제가 붙었을까요?
그것은 삼상 24장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다윗은 사울에게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블레셋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그의 목을 베어다 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울은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인기가 백성들에게 점점 높아가자 사울은 이를 시기하고 다윗을 여러 차례 죽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울의 손에 삼천 명의 군대를 주신 목적은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안전하게 지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 싸움을 하던 사울은 후방이 불안해서 회군을 하는 중 누가 그에게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제보를 듣고 엔게디로 달려갔습니다.
(삼상 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은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 즉시 삼천명의 군대를 풀어 엔게디 광야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마침 동굴을 발견하고 그의 부하들과 더불어 동굴에 은신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엔게디 광야에 있는 ‘들염소 바위’라는 곳이었습니다.
(삼상 24: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당시 목동들이 양을 치다가 양 무리들을 강한 햇빛이나 비바람이나 맹수나 밤 추위로 보호하기 위해 굴을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엔게디 광야를 수색하던 사울은 갑자기 용변을 보기 위해 마침 길가에 있는 굴에 들어갔는데 바로 그 굴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는 굴이었습니다.
다윗은 굴 깊숙이 숨어 있을 때 사울이 굴에 들어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다윗의 일행은 독안에 든 쥐처럼 꼼짝없이 잡혀 죽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그 같은 상황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다윗의 처지였다면 무엇이라고 기도하였을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그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시 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호의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 은혜를 받다, 은총을 구하다’라는 뜻입니다.
‘주께 피하되’라는 말은 완료형으로 이미 피한 상태이고,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라는 말은 미완료상태로 이미 피했고 또 계속 피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도피처가 동굴이 아니라 ‘주의 날 그늘 아래’라고 하였습니다. 그 날개가 바로 새중의 왕 독수리가 80-90cm 나 되는 긴 날개로 자기 새끼를 안전하게 품는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하나님의 날개 품에 피할 수 있도록 내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 때 사울 왕이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에 들어 온 것은 다윗을 잡으려고가 아니라 단지 용변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호위병도 무장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오로지 맨 몸으로 스스로 동굴에 들어 온 것입니다.
(삼상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따라서 동굴 내부에 숨어 있는 다윗 일행은 사울의 행동을 샅샅이 관찰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숨어있는 다윗의 일행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도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울의 인생을 끝내버리도록 섭리하시는 것으로 인식하고 다윗에게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대신 옷자락만 살짝 베었습니다.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사울은 긴장을 풀고 용변을 보기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행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습니다. 사울은 용변을 마치고 난 후 굴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사울의 옷자락을 베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을까요? 행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헛되이 차버린 어리석음은 일을 한 것은 아닐까요? 이럴 때 과연 어느 것이 하나님의 응답인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어리석게 보이는 길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실수나 어리석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마음이 찔렸기 때문에 사울에게 칼을 꽂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신앙 양심에 민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여기서 '마음이 찔려‘라는 말(hk;n:)은 ’때리다, 죽이다‘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로 다윗의 양심을 계속해서 찌르는 것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사울이 죽고 사는 것은 다윗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다윗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무장 상태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 사울을 죽인다는 것은 비겁하고도 불신앙적인 일이기 때문에 옷자락을 베는 것조차 양심에 가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손이 아니라 부하를 시켜서라도 얼마든지 사울을 처단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오로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포기한 것입니다.
(삼상 24: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만일 그 때 다윗이 그 상황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잘못 판단하고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사울을 죽였다면
1)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죽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2) 사울과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죽인 것이 아니라, 용변을 보고 있는 사울의 등에다 칼을 꽂는 것은 마치 시체에 칼을 꽂은 것과 다름이 없는 비겁한 일이고,
3) 설령 사울을 죽였다고 할지라도 굴 밖을 에워싸고 있는 삼천 명의 군대와 맞서 싸워야 하며
4) 사울을 추종하던 민심을 돌이킨다고 하는 일은 후일에 친자식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한 것을 보면 사울을 지지하던 민심이 반드시 다윗을 지지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 사울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오늘 성경 본문처럼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 57: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 57:3)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3. 다윗의 승리
사울이 용변을 마치고 굴 밖으로 나가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 다윗은 사울의 등 뒤에 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는 뒤돌아보는 사울을 향해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자신이 결코 사울 왕을 해하려고 한다는 간신들의 말을 듣지 말 것을 권하면서 자기가 벤 사울의 옷자락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사울 왕을 죽일 기회를 동굴 안에서 주셨고 부하들도 그렇게 하라고 재촉하였지만, 자기는 사울 왕을 아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죽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만 옷자락만 베었고, 자신은 왕에게 아무런 잘못을 범한 일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삼상 24: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사울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윗이 자기보다 월등하다고 자기 부하들 앞에서 솔직하게 패배를 인정하였습니다.
(삼상 24: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삼상 24: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울은 자기가 다윗의 입장이었다면 자기는 벌써 죽은 목숨이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살려준 다윗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면서 후일에 다윗이 왕이 되거든 자기 가족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삼상 24: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삼상 24: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삼상 24: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본래 전쟁이라는 것이 밀고 밀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이겼다고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패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사랑하는 부하를 하나도 잃지 않고 완벽하게 승리를 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회복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시 57: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복수해주시되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발 앞에 그물을 쳐놓고 함정을 파놓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그 함정에 빠져 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습니다.
(시 57:6)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이것이 매사 자기만 유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소인배의 기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큰 믿음의 사람의 기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내게 항상 유익이 되는 것이 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때로는 내게 손해가 되는 것 같아도 그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고 영광이 돌려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간절히 구하고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수 없이 들어왔고, 수 없이 말해왔던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평소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 사실상 수박 겉핥기처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과연 어떤 것일까? 라는 화두를 가지고 고민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은혜란? 쉽게 한 마디로 표현되어질 수 있을 만큼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의 은혜는 그 우주를 싸안고도 남을 만큼 원대하시기 때문에 그 우주 속에 한 개의 티끌과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하찮은 존재로 여기지 않으시고 존귀하게 여기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나를 지키신다고 하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구원 받은 것은 물론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 질병에 걸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 아직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우리를 넘어뜨려 지옥 자식이 되게 하려는 악한 마귀는 눈에 불을 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그것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다윗처럼 어떤 경우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울처럼 이기심에 노예가 되어 배은망덕한 삶을 살지 말게 하시고, 무엇보다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지 말게 하시고, 이성이 신앙보다 앞서지 말게 하셔서, 다윗처럼 우리도 원수를 선대하여 완전한 승리, 사랑의 승리,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을 비유할 수 있느냐? 고 누군가 저에게 질문을 한다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젖먹이의 엄마 품과 같다고 말입니다. 어린 아기에게 엄마 품은 젖을 빨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엄마와 눈을 마주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하고, 무엇이 피곤한지 하는 일도 없이 새근새근 잠을 잘 때도 엄마 품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영혼의 엄마 품입니다.
젖을 떼고 동생이 태어나면 그 엄마 품을 물려주게 되는데 그것이 싫어서 동생을 꼬집기도 하고, 동생을 품고 잠든 엄마 등 뒤에서 도적질 하는 것처럼 가슴 두근거리며 엄마 품에 가만히 손을 넣기도 할 정도로 엄마 품은 좋기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초신자 때만이 아니라 믿음이 성숙한 후에도 아니 죽음이 올 때까지 일평생 절실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아니라 고 하나님의 은혜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삽니다. 회복되어집니다. 치료되어 집니다. 변화를 받습니다. 행복해 집니다.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골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앞서 간 종교 개혁가들이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은혜”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직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색했었다면 이제 부터라도 시편 기자 다윗이나 사도 바울처럼 우리 모두 주님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사는 아름다운 믿음의 백성이 될 때 진정한 승리, 진정한 행복,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금번 부흥회가 시간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인정하고 사모하는 시간이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맺으며, 신앙이 보다 더 성숙해지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은혜를 풍성히 받는 부흥회가 되시기 바랍니다.